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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환 (軍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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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환
吳榮煥
出生日 1924年 6月 18日 ( 1924-06-18 )
出生地 日帝强占期 黃海道 僻姓
死亡日 2007年 10月 4日 ( 2007-10-04 ) (83歲)
死亡地 大韓民國 京畿道 義王
學歷 大韓民國 國防大學校
本館 海州 (海州)
配偶者 김숙자(金淑子)
親戚 兄 오평환(吳平煥)
누이同生 오필환(吳弼煥)
妹弟 박영석(朴英錫)
査頓 박경석 (朴慶錫)
宗敎 改新敎
服務 대한민국 大韓民國 陸軍
服務期間 1950年 9月 12日 ~ 1963年 9月 30日
勤務 大韓民國 陸軍本部
最終階級 豫備役 陸軍 中領
指揮 民事軍政差減
主要 參戰 韓國 戰爭
기타 履歷 신한국당 黨務委員 兼 行政委員
自由民主聯合 常任顧問 兼 最高委員
徐薰 을지武功勳章
忠武武功勳章

오영환 (吳榮煥, 1924年 6月 18日 ~ 2007年 10月 4日 )은 大韓民國의 軍人 이다.

1950年 陸軍 所謂 로 任官하였으며, 13年 後 1963年 陸軍 中領 으로 豫編하였는데, 그의 韓國 戰爭 時節의 功績은 後날 大韓民國 戰爭記念館 에 獻額되었다.

夫人은 金叔滋 女史이며, 女同生 오필환 女史는 豫備役 陸軍 准將 박영석 將軍의 夫人인데 바로 妹弟 박영석 將軍의 親아우가 豫備役 陸軍 准將 出身의 詩人 兼 軍事評論家 박경석 이다. 바로 이 豫備役 陸軍 准將 박경석 將軍이 豫備役 陸軍 中領 오영환 先生에게 陸軍綜合學校 後輩이자 親姻戚 査頓間이기도 하다.

1924年 6月 18日 黃海道 碧城郡 월록면 상림리에서 出生한 오영환(吳榮煥) 先生은 1943年 黃海道 海州동공립中學校를 卒業하고 海州稅務署와 日本 요코스카의 가봉株式會社에서 暫時 勤務하였다.

1945年 祖國의 光復으로 인하여 日本에서 永久 歸國한 그는 6·25戰爭 勃發 直後인 1950年 9月 12日 陸軍에 入隊하여 陸軍綜合學校 出身 陸軍 少尉(軍番 201637)로 任官하였다. 第1師團 15聯隊에 配屬된 그는 1952年 8月 19日 第10中隊 選任將校 兼 小隊長으로 補任되어 服務하던 中 1953年 4月 京畿道 漣川의 박고지戰鬪에 參與해 빛나는 專攻을 樹立하였다. 그는 戰爭期間 동안의 功勞로 1952年 11月 18日 花郞武功勳章을 授與받은 데 이어 1953年 9月 25日 을지武功勳章을 授與받았다.

1953年 7.27 休戰이 締結된 後 陸軍本部 民事軍政감실 徵發將校로 服務하던 그는 1963年 3月 1日 陸軍 中領으로 進級과 同時에 陸軍本部 民事軍政差減 職責에 補任되었으며, 1963年 9月 30日을 期하여 豫編하였다.

1952年 六二五 韓國 戰爭 2年次 時節 그의 功績 [ 編輯 ]

陸軍 准將 김동빈(金東斌) 將軍이 指揮한 陸軍 第1師團은 1952年 10月에 美 第3師團으로부터 臨津江의 兩岸에 걸친 美 第1軍團의 中央右翼戰線을 引受한 뒤로, 當面의 中共 第39軍 및 第47군과 더불어 臨津江 西安의 니키와 테視, 그리고 노리와 베티 等의 高地에서 血戰을 치르고 膠着狀態에서 겨울을 넘기게 되었다.

1953年에 들어서도 이와 같은 對峙狀態가 繼續되었는데, 6月에 이르러 休戰을 겨냥한 敵의 執拗한 攻擊으로 因해 爭奪의 불씨가 臨津江 동안의 퀸告知(Gueen高地)와 박고지(朴高地)로 옮겨가게 됨으로써 다시 한番 激戰을 벌이게 되었다.

1952年 10月 1日 第1師團은 제임스타운(Jamestown)선 相議 主陣地를 擔當하고 있던 美 第3師團의 作戰任務를 引受하였다. 이에 따라 小隊長 오영환(吳榮煥) 中尉가 所屬되어 있는 金眞僞(金振暐) 大領의 第15聯隊는 師團 座一線에 配置되었고, 小隊長 오영환 中尉가 指揮하는 第3大隊 10中隊는 大隊 中央 第1線에 配置되었다. 다시 말해 제3대대는 臨津江 南岸의 209高地 北쪽 稜線에서 199高地, 그리고 서울 신촌을 連하는 이 一帶에 主陣地를 占領한 것이다. 特히 大隊正面에는 고양대(高陽垈)의 東北으로 뻗은 稜線上의 標高 150m 內外의 니키(Nickie)와 테視(Tessie)高地가 자리잡고 있었으며, 이 前進陣地에는 連帶 搜索中隊의 2個 小隊가 各各 確保하고 있었다.

第15聯隊 正面에는 中共軍 第39軍 隸下 第116師團이 配置되어 있었으며, 이들은 315高地人 馬良山(馬糧山)에다 州據點(主據點)을 形成하고 我軍을 監製하는 한便, 我軍의 橋頭堡 役割을 하고 있는 露里(Nori)高地와 니키 그리고 테視高地를 奪取할 目的에서 虎視眈眈 侵攻의 機會만 엿보고 있었다.

10月 6日 板門店에서의 休戰會談이 捕虜 交換 關聯 等의 問題로 아직도 膠着狀態를 벗어나지 못하고 決裂段階에 이르자, 적은 常套的인 手法으로 이날 日沒時期를 利用해 全 戰線에서 一齊히 攻勢를 取해 왔는데, 이것이 바로 共産軍의 推計攻勢였다. 卽, 首都師團 正面의 首都高地와 地形稜線, 第6師團 正面의 各 高地, 그리고 제9사단 正面의 白馬高地 等에 對한 攻勢에 뒤이어서 그들은 제15연대 主陣地에도 砲擊을 集中하기 始作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連帶 前 正面에 걸쳐서 砲擊을 繼續하고 있던 敵은 我軍의 制壓射擊에도 不拘하고 列島를 더하다가 19時頃부터는 第3大隊의 主陣地와 니키와 테視고지로 砲火를 集中하기 始作하였다. 고양대에서 東北으로 뻗은 稜線上의 조그마한 봉우리인 니키와 테시고지는 霎時間에 交通壕와 散兵壕가 무너지고 火焰과 初演에 휩싸이고 말았다. 重大觀測所와 第3大隊 觀測所 사이에 架設되었던 有線網度 散散이 끊어져 通信마저 完全히 杜絶되고 말았다. 이토록 集中砲擊을 加하고 난 敵軍들은 그 날 19時 55分 頃에 中共 第116師團 隸下 第348聯隊의 1個 大隊兵力을 投入시켜 왔다. 그리고 적은 니키와 테視高地를 3面에서 包圍하고 急襲해왔다. 그러자 이곳에 配置되어 있던 連帶 搜索中隊의 第1小隊와 第3小隊 將兵들은 敵의 侵攻을 擊退하기 위해 決死的인 血戰을 展開했으나 數的으로 優勢한 敵은 끝내 니키와 테視高地를 手中에 넣고 말았다. 이에 聯隊長 金眞僞 陸軍 大領은 連帶에 配屬되어 있던 師團 搜索中隊와 連帶 搜索中隊의 1個 小隊兵力으로서 卽刻 니키와 테視高地에 對한 逆襲을 敢行시켰다. 師團 搜索中隊長 정석엽(張錫燁) 大尉 指揮下에 逆襲에 나선 中隊는 여러 次例에 걸쳐 突擊戰을 敢行했었지만, 敵의 頑强한 抵抗과 無差別한 陣內 射擊을 아무런 進展을 보지 못한 채 물러서고 말았다. 그러자 聯隊長은 師團長의 指示에 따라 增員된 第11聯隊 10中隊를 第13大隊에 配屬시키는 同時에 第3大隊를 中央 第1線에 配置하고, 이곳에 配置되어 있던 小隊長 오영환 中尉 指揮下의 第10重大에게 니키와 테視高地에 對한 逆襲을 敢行할 것을 命令하였다. 第11聯隊 10中隊 2小隊에 陣地를 引繼한 第1小隊長 오영환 中尉는 10月 7日 14時 30分에 209高地 東北쪽 臨津江邊으로 進出하였다. 그리고 第1小隊를 無名高地의 師團 搜索中隊로, 第2小隊와 第3小隊를 105高地의 連帶 搜索中隊로 各各 增員하고 난 吳 中尉는 卽時 니키와 太始고지에 對한 逆襲을 敢行하였으나, 敵의 執拗한 抵抗으로 進展을 보지 못하였다. 이날 밤, 師團 搜索中隊와 連帶 搜索中隊로부터 逆襲任務를 完全히 引受받은 吳 中尉는 다음날에 敢行할 攻擊準備에 着手하였다. 오영환 中尉는 攻擊을 앞두고 隊員들을 一一이 激勵하였다. 10月 8日 02時 30分, 中隊는 吳 中尉를 先頭로 니키高地를 攻擊하기 위해 攻擊開始線을 出發하였다. 初가을의 새벽 空氣는 아직도 冷冷했지만 突擊에 나선 隊員들은 찬이슬에 젖은 前震(戰塵)을 밟으며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이때 桐側方으로 迂廻하고 있던 第3小隊가 敵의 潛伏組와 衝突, 彼我間의 銃聲이 갑자기 고요했던 새벽 空氣를 뒤흔들어 놓기 始作하였다. 이렇게 敵에게 發見된 中隊는 卽刻 吳 中位이 指揮下에 躍進을 거듭하여 6部 稜線上의 敵의 警戒陣地를 一擊에 擊破하고 繼續 니키高地 頂上으로 突進하였다. 그러나 8部 稜線에 形成된 敵의 火力據點에서는 모든 自動火器가 불을 뿜어댔고, 散兵壕에 配置되어 있던 敵兵들은 방망이手榴彈을 繼續 던지면서 中臺의 攻擊을 必死的으로 沮止하였다. 그러자 中隊長 오영환 中尉는 突擊을 命令하고 代의 先頭에서 前職으로 突進하였으며, 뒤를 따르던 兵士들도 手榴彈을 投擲하면서 敵陣으로 突進하였다. 陰曆 8月 20日 밤의 陰散한 달빛 속의 니키高地 一帶는 瞬息間에 屠戮의 血戰場으로 바뀌고 말았다. 이 瞬間, 東南쪽 稜線 배사면(背斜面)으로부터 2個 小隊規模의 敵兵이 攻擊을 加해왔다. 이에 배면(背面)을 威脅받게 된 中隊는 吳 中尉의 命令에 따라 6部 稜線上의 車閉店까지 後退하여 射擊前으로 敵의 反擊을 沮止하였다. 이때 中隊長 손명진(孫明珍) 陸軍 大尉가 이끄는 第17砲兵大隊와 第1迫擊砲中臺의 突擊支援射擊이 始作되었고, 이를 契機로 吳 中尉는 卽時 突擊을 再開하였다. 그러나 我軍의 砲擊 못지 않게 赤道 熾烈한 彈幕射擊(彈幕射擊)을 加害와 血戰을 繼續하던 中隊는 또다시 進展을 보지 못한 채, 6部 稜線으로 後退하고 말았다. 하지만 小隊長 吳 中尉는 니키高地 頂上을 奪還할 때까지 끊임없이 突擊戰을 繼續하겠다는 信念을 部下將兵들에게 보였다. 한便 第3大隊 觀測所에서 作戰指揮를 하고 있던 聯隊長은 第10中隊가 다시 後退하는 것을 보자 敵의 火力을 完全 制壓한 後 니키高地를 奪取할 것을 決心하고 砲兵의 制壓射擊과 空中支援을 要請하는 한便, 電車의 效率的인 近接支援을 師團長에게 建議하였다. 이에 따라 前·砲·空(戰砲空)의 制壓射擊이 니키告知로 集中되었다. 地軸이 뒤흔들리는 轟音과 함께 니키高地는 火焰과 初演에 휩싸였다. 6部 稜線에서 攻擊準備를 갖추고 있던 吳 中尉는 이 機會에 頂上을 奪取하기로 決心하고 中臺에 突擊命令을 내렸다. 中隊는 一齊히 躍進하여 8部 稜線을 一擊에 突進, 敵陣으로 뛰어들어 白兵戰을 展開하기 始作하였다. 그러나 敵의 無差別한 陣內 射擊으로 뜻하지 않게 많은 死傷者가 續出하자 中隊는 다시 6部 稜線으로 물러났다. 이에 오영환 中尉는 主力의 正面攻擊은 많은 損失만 加重된다는 것을 認識하고 主力攻擊 代身 特攻隊를 編成하여 敵의 火力據點을 擊破하기로 決心하였다. 12名의 兵士들이 特攻隊를 自願하고 나섰다. 吳 中尉는 特攻隊를 級便한 뒤 自身이 直接 代의 先頭에 서서 敵陣으로 突進하였다. 特攻隊는 煙幕으로 가려진 狀況下에서 散兵線으로 肉薄하여 一齊히 手榴彈을 投擲하며 敵이 抵抗할 틈을 주지 않은 채, 1個 小隊規模의 敵을 擊破하고 다시 火力據點으로 突進하였다. 이러한 特攻隊의 急襲에 唐慌한 敵은 미친 듯이 機關銃 射擊을 加했으나, 이미 生死를 超越한 吳 中尉와 特攻隊員들은 庇護처럼 遮蔽點으로 躍進하여 據點 附近의 捨覺點(死角點)으로 突入하였다. 吳 中尉는 卽時 敵의 火力據點 銃眼(銃眼)으로 3個의 手榴彈을 집어넣었다. 地軸을 흔드는 爆音과 함께 敵의 機關銃 射擊도 멈추고 말았다. 그에 士氣가 오른 特攻隊員들은 나머지 火力까지 一擧에 擊破하고 正常으로 突進해 올라갔다. 怒濤처럼 敵陣으로 突入한 隊員들은 手榴彈으로 敵을 制壓하면서 悽絶한 血戰을 展開하였다. 高地 頂上에서는 白兵戰이 繼續되었다. 生死를 超越한 오영환 中尉와 特攻隊員들의 勇敢한 鬪志 앞에 完全히 壓倒된 敵은 高地를 抛棄하고 테視告知 方面으로 逃走하기 始作하였고, 마침내 特攻隊는 高地 頂上의 主人公이 되었다. 以後에도 니키高地에 對한 敵의 反擊은 繼續되어 10月 9日까지 여러 次例의 血栓이 反復되었다. 그러나 오영환 中尉를 비롯한 第10中隊員들은 끝까지 不屈의 鬪志를 發揮하여 高地를 死守하는 專攻을 세웠으며, 小隊長인 오영환 中尉는 이러한 專攻으로 忠武武功勳章을 授與받을 수 있었으며 같은 해 1952年 當時 29歲의 나이로 陸軍 大尉 進級 및 選任將校 兼 中隊長 職責 補任된 前歷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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