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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老父미치 (1819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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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老父미치

오다 老父미치 ( 日本語 : 織田信? , 1819年 12月 19日 ~ 1891年 2月 3日 )는 日本 에도 時代 다이묘 로, 덴度番 의 2代 번주이다. 招待 번주 오다 老父카즈 의 맏아들이다. 統稱은 野오야( 八百八 ), 孝婦( 兵部 )이며, 官位는 種5爲하, 二世 老카미, 兵部소보( 兵部少輔 ), 座近仗감( 左近?監 )이다.

덴抛 7年( 1836年 ) 10月 13日, 아버지 老父카즈가 死亡함에 따라 家門을 繼承하였다. 11月 1日에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 를 謁見했고, 12月 16日에 종5爲하 이세노카미에 서임되었다. 幕府 末期 動亂期에 들어서서, 番 再定義 惡化 때문에 洪化 의 專賣制와 鳶工의 前納火를 施行했다. 街에이 4年( 1851年 ) 10月 25日, 幕府에서 데와국 오키타마 軍 內의 領地 4640餘 席을 回收하고, 무라야마 軍 內의 領地를 支給하였다. 이에 따라 덴度 番의 影池는 무라야마 軍 內 21個 寸 23153席이 되었다. 分큐 2年( 1862年 ), 할아버지 오다 老父치카 와 아버지 老父카즈의 遺志를 받들어 오바타 番 때와 같은 國主格 待遇로의 復歸를 꾀하는 價格 上昇을 幕府에 歎願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게이오 3年( 1867年 ) 10月, 朝廷으로부터 上洛( 上洛 ) 命令을 받았으나, 가로를 代理人으로 上警시킬 것을 希望하였다. 게이오 4年( 1868年 ) 1月 10日, 燔師 쓰다 가게유 等을 上洛시켰으나, 新政府는 다시 번주 老父미치의 上洛을 命令했다. 이에 老父미치는 2月, 病을 理由로 上洛에 應하지 않고, 代身 赤字 노부토視 를 派遣했다. 3月 2日, 新政府로부터 오우 鎭撫使 先導役에 任命되었고, 燔師 요시다 모리타카 를 代行으로 삼았다. 3月 19日, 隱居하여 노부토詩에게 번주職을 물려주었다. 하지만 노부토市는 나이가 어렸으므로, 實際 番의 運營은 隱居한 老父미치와 重臣들의 合意로 이루어진 것으로 推測된다. 尹4月 4日, 新政府側과 對立하고 있던 쇼나이番 이 덴度를 攻擊하여, 老父미치와 그 家族들은 센다이番 領地로 逃亡갔다. 메이지 3年( 1870年 ) 4月 9日, 도쿄로 옮겨왔고, 5月 7日에 메이지 天皇 을 拜謁하였다. 1891年에 73歲의 나이로 死亡하였다.

前任
오다 老父카즈
第2代 덴度番 번주
1836年 ~ 1868年
後任
오다 노부토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