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노노 다카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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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노 다카무라 ( 日本語 : 小野篁 , 802年 ~ 853年 )는 日本 헤이안 時代 의 官僚, 學者, 詩人이다.

朝廷의 官職을 歷任하였으며, 때로는 遣唐使 에도 다녀왔다. 詩 여러 篇을 남겼다.

略歷 [ 編輯 ]

엔랴쿠(延?) 21年(802年)에 태어났다. 고닌(弘仁) 6年( 815年 )에 무쓰老카미(陸?守)가 된 아버지 美네謀利(岑守)를 따라 무쓰國 (陸??)으로 내려갔다. 武藝에 뛰어났지만 首都로 돌아온 뒤에도 學問에는 別로 힘쓰지 않았는데, 「 限時 (漢詩)에 뛰어나 侍讀(侍讀)까지 지낸 美네모리의 아들이 어찌하여 弓馬(弓馬)의 社(士)가 되었단 말인가?」라는 社가 天皇 (嵯峨天皇)의 歎息을 듣고부터 學問에 뜻을 두어 고닌 13年( 822年 )에 문장생視(文章生試)에 及第하였다.

덴初(天長) 元年( 824年 )에 巡察呑停(巡察彈正)에 任命되고, 呑停小蟲(彈正少忠)?對內機(大?記)?句欄道(?人)를 거쳐 덴初 9年(832年)에는 種5爲하?다자이노쇼니(大宰少?)가 된다. 이 사이에 아버지 美네모리가 덴初 7年( 830年 )에 死亡했는데, 哀悼하고 謹愼하는 生活이 지나쳐 몸을 傷할 程度였다고 한다. 덴初 10年( 833年 )에 닌墓 天皇 (仁明天皇)이 卽位하자 皇太子 쓰네사다 親王(恒貞親王)의 東宮學士(東宮學士)로 任命되어 彈程小筆(彈正少弼)을 겸하게 되었다. 또한 같은 해에 完成된 法令 解釋書 《 英依해 》(令義解)의 編纂에도 參與하여 그 序文(序文)을 짓기도 했다.

條와(承和) 元年( 834年 )에 遣唐府使(遣唐副使)로 任命되고, 條와 2年(835年)에 種5位相, 條와 3年( 836年 )에 情5威嚇가 되는 等 官等 昇進을 거듭했다. 그러나 조와 3年과 4年( 837年 ) 두 次例에 걸친 都堂(渡唐) 試圖가 모두 失敗하고, 條와 5年( 838年 )에 세 番째 航海에서 遣唐大使(遣唐大使) 후지와라노 쓰네쓰구(藤原常嗣)가 自身이 탔던 第1線이 損傷되어 물이 새는 現象이 일어난다고 上疏하여 代身 다카무라가 타기로 되어 있던 제2선을 第1線으로 쓰네쓰구가 타게 되었다. 다카무라는 이것을 두고 「自身의 利得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損害를 强要하는 道理에 어긋난 짓을 하는 者가 무슨 廉恥로 部下를 이끌 수 있단 말인가」라며 抗議, 及其也는 自身의 病과 늙은 어머니의 奉養을 핑계로 乘船 自體를 拒否하기에 이른다(견당사는 다카무라를 남기고 6月에 바다를 건넜다). 遣唐使를 諷刺하고 調整을 誹謗하는 內容의 限時 『서도요』(西道?)를 짓는데, 이것이 社가 狀況(上皇)의 노여움을 사서 12月에 棺위를 박탈당하고 오키 (?岐)로 유배당한다. 流配 途中에 지은 7언 10運의 限時 『적行吟』(謫行吟)은 文章이 아름답고 멋이 優雅하며 뜻이 깊다 하여 當時 한時에 通達한 사람으로서 이를 읊지 않는 者가 없었다고 한다.

조와 7年( 840年 )에 赦免되어 首都로 돌아왔다. 이듬해에는 글재주를 인정받아 特別히 本來의 情5爲하 官位도 復舊되었으며, 兄夫소보(刑部少輔)에 任命된다. 조와 9年( 842年 )에 일어난 條와의 便으로 미치야스 親王(道康親王, 後날의 몬토쿠 天皇 )이 皇太子로 세워지자 다시 東宮學事로 任命되었으며 이어 植付소보(式部少輔)도 겸하게 되었다. 조와 12年( 845年 )에 種4爲하 句欄逃奴카미(?人頭), 13年( 846年 )에 곤노些少벤(?左中弁)을 거쳐 些少벤(左中弁)이라는 要職을 歷任한다. 곤勞使小벤으로 있던 當時 審議中이던 蘚蓋訴訟事件(善愷訴訟事件)에서 告發된 邊關들이 不正을 저지른 것은 아니지만 邊關으로서의 權限 밖의 裁判을 맡은 以上 公務가 아닌 사사로이 罪를 犯한 것이라는 告訴벤(右少弁) 度모노 요시오(伴善男)의 主張을 支持해, 告發된 邊關들이 彈劾되게 했다. 그러나 다카무라 自身은 後에 自身이 이때 했던 判斷을 後悔했다고 한다.

조와 14年( 847年 )에 酸基로 任命되어 舊敎(公卿) 班列에 올랐다. 後날 議定官(議政官)으로서 彈정대필(?正大弼)?社다이벤(左大弁)?半産성전사長官(班山城田使長官)?가게諭示(勘解由使) 長官 等을 겸했으며, 佳兆(嘉祥) 2年( 849年 )에 種4威嚇가 되지만, 그 해 5月에 病으로 官職을 辭任했다.

佳兆 3年( 850年 )에 몬토쿠 天皇이 卽位하면서 鄭4爲하 棺위를 받는다. 닌쥬(仁壽) 2年( 852年 )에 병든 몸으로 사다이벤에 復職하지만, 入闕이 어려울 程度로 病이 깊어진다. 天皇이 몇 番이나 使者를 보내 病의 原因을 把握하게 하면서 治療에 보태라며 돈과 食糧을 支給했고, 12月에는 臥病 中에 邸宅에서 種3位 西魏를 받았으나, 얼마 안 가서 死亡하였다. 12月 22日(陽曆 2月 3日), 享年 51歲. 最終 官位는 産氣 社다이벤 種3位였다.

교토시 (京都市) 기타區 (北?)의 무라사키노니시고쇼다 情(紫野西御所田町)의 시마즈 製作所(島津製作所) 무라사키노 工場(紫野工場) 한모퉁이에 그 墓所가 있으며, 隣接한 곳에 무라사키 시키부 (紫式部)의 墓所도 자리하고 있다.

人物 [ 編輯 ]

律令 解釋書인 『英依해(令義解)』 編纂에도 깊이 關與할 程度로 名法度(明法道) 卽 法律에 밝았고 政務 能力도 뛰어났다. 또한 한詩文(漢詩文)에서는 黨의 文人 白居易 (白居易)와 對比되는데, 헤이안 初期의 3代 勅撰(勅撰) 한시집의 時代의 屈指의 詩人으로, 『傾國집(??集)』, 『浮上집(扶桑集)』, 『本條문취(本朝文?)』, 『華翰朗詠집(和漢朗詠集)』에 그 作品이 실려 傳한다. 또한 와카(和歌)에도 뛰어나서 『高킨와카슈(古今和歌集)』에 여덟 數의 와카가 실린 것을 始作으로 以後의 天皇의 命으로 編纂된 와카집에도 14首의 와카가 收錄되었다. 文集으로 『노상공집(野相公集)』(5卷)이 있는데, 가마쿠라 時代 (鎌倉時代)까지 傳해졌지만 現在는 흩어져 알 수 없다.

와카 [ 編輯 ]

넓은 바다의 80個 圖書를 다녀와서 그 사람에게 傳해주오. 낚시하는 배.

わたの原 八十島かけて こぎいでぬと 人にはつげよ あまのつり舟

일화 [ 編輯 ]

  • 다카무라는 밤마다 우물을 통해 地獄을 오가며 閻羅大王 의 裁判을 補佐하였다고 한다. 이 우물은 교토 史家의 훗쇼社(福生寺)와 교토 히가시의 로쿠都塵枯死(六道珍皇寺)에 있었다고 하며, 두 절은 各其 삶과 죽음의 六道(六道)를 象徵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훗쇼사는 메이지 時代에 斃死되었으며, 로쿠都塵考査의 閻羅大王當에는 다카무라의 作品이라 傳하는 閻羅大王賞과 다카무라의 木商이 나란히 安置되어 있다.
  • 교토시 其他 區에 있는 다카무라의 것으로 傳하는 무덤 옆에 무라사키 시키부의 것이라 傳하는 무덤은, 人間의 愛慾을 小說로 그려냈다는 罪目으로 地獄 에 떨어진 시키부를 다카무라가 閻羅大王에게 소개시켜 주었다는 傳說에 따른 것이다.
  • 곤자쿠 이야기집 》(今昔物語集)의 「오노노 다카무라가 鄭(情)에 기대어 니시散調 代身(西三?大臣)을 도운 이야기」에는, 兵士하여 閻羅廳(閻魔廳) 앞에 불려간 후지와라노 요시미(藤原良相)가 다카무라의 周旋 德分에 蘇生했다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 우지슈이 이야기 》(宇治拾遺物語) 等에는 社가 天皇 때에 皇宮에 누군가가 써둔 「舞樂選」(無?善)이라는 落書를 본 社가 天皇은 다카무라를 불러 이를 읽어보게 하였는데, 다카무라는 망설이다가 「사가(?) 나쿠바(無くば) 要켄(善けん)」으로 읽었다. 舞樂船은 日本語로 「賜暇나카라바요카란」(?なからば善からん) 等으로도 읽을 수 있는데, 日本語로 무악(無惡)은 '賜暇나시'로 읽어서 '性質이 나쁜', '堪當할 수 없는'이라는 뜻이며, 똑같이 「사가 天皇이 없었으면 좋겠네」라는 天皇으로서는 相當히 不快한 內容이었다. 社가 天皇은 다카무라에게 어떤 漢字라도 읽을 수 있느냐고 묻고 「코(子)라는 글字를 열두 番만 써서 읽으라」는 수수께끼를 냈다. 이에 다카무라는 「고양이 새끼의 새끼고양이, 獅子 새끼의 새끼 獅子(猫の子の子猫、獅子の子の子獅子)」라고 읽어보여서 無事히 넘어갔다고 한다(한자 子는 日本語로 '코' 또는 '詩'로 읽으며, 當時 伽陀가나 發音 '네'를 標示할 때도 漢字 子를 使用하였다).
  • 아직 日本에 《白氏文集》(白氏文集)李 한 卷밖에 傳해지지 않았을 무렵, 天皇이 일부러 白居易 (白居易)의 詩에서 한 글字만 바꾸어 다카무라에게 보여줬더니, 다카무라는 社가 天皇이 고친 그 한 글字만 빼고 答辯했다고 한다(백거이 또한 다카무라가 遣唐使로 任命되었다는 消息에 그를 만나기를 期待하고 있었다고 한다).
  • 다카무라를 主人公으로 하는 이야기로는 이福 女同生과의 사랑을 그린 《다카무라 이야기》(篁物語)가 있지만, 完璧한 虛構이다.
  • 무쓰老카미로 在任 中이던 條와 9年( 842年 )에 다케코마 神社(竹駒神社)를 지었다. 앞서 紹介한 로쿠都塵告祀를 지은 것이 다카무라라는 說도 있다.

같이 보기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