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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生 (基督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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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生 (Eternal life)은 傳統的으로 基督敎 終末論에서 說明하는 것처럼 죽음 以後에도 繼續되는 삶을 意味한다. 使徒信經은 이렇게 告白한다: "나는... 몸의 復活과 永生을 믿사오며." 이 見解에 따르면 永生은 예수의 再臨과 죽은 者의 復活 以後에 始作되지만, 新藥의 요한 文獻에는 信者의 地上 生活에서 始作되는 永生에 對한 言及이 있으며, 이는 아마도 이미 始作된 終末論 을 나타내는 것일 수 있다.

酒類 基督敎 神學에 따르면, 죽음 以後 再臨 以前에는 救援받은 者들이 中間 狀態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지만 再臨 以後에는 죽은 者의 肉體的 復活과 새 땅의 肉體的 再創造를 經驗하게 된다. 가톨릭 敎會 敎理書에는 "죽음으로 靈魂은 肉體와 分離되지만, 復活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靈魂과의 再結合으로 變化된 우리 肉體에 썩지 않는 生命을 주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復活하셔서 永遠히 사신 것처럼 우리 모두도 마지막 날에 復活할 것이다."라이트는 "하나님의 計劃은 이 世上을 버리는 것이 아니다..."라고 主張한다. 오히려 그는 그것을 다시 만들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실 때 모든 사람을 새로운 肉體의 生命으로 일으켜 그 안에서 살게 하실 것이다. 이것이 基督敎 福音의 約束이다." 共觀福音書와 바울서신에서 永生은 一般的으로 未來의 經驗으로 看做되지만, 요한福音은 永生을 "現在 所有"로 强調한다는 點에서 이들과 다르다. 레이몬드 E. 브라운은 共觀福音書에서 永生은 最後의 審判, 卽 未來 時代에 받는 것이지만(막 10:30, 마 18:8-9) 요한福音은 요한福音 5:24에서처럼 永生을 現在의 可能性으로 자리매김한다고 指摘한다.

따라서 共觀福音과 달리 요한福音에서 永生은 未來的인 것일 뿐만 아니라 現在와도 關聯이 있다. 요한福音에서 그리스도를 迎接하는 사람들은 "只今 여기"에서뿐만 아니라 永遠에서도 生命을 所有할 수 있는데, 이는 요한福音 5:24에서처럼 "死亡에서 生命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者는 永生을 얻었고 審判에 이르지 아니하고 死亡에서 生命으로 옮겼다." 요한福音은 永生을 '只今 여기'에서 所有하는 것이 아니라 '永遠히' 所有할 수 있는 것이라고 說明한다." 요한福音에서 말씀의 成肉身, 죽음, 復活 및 榮光의 目的은 人類에게 永生을 提供하기 위한 것이었다.

新約 聖經 [ 編輯 ]

다음과 같은 學者 존 H. 리스 信者들이 永生乙받을 것이라는 確信이 提供되지만 新藥에는 영생이 仔細히 說明되어 있지 않다고 主張한다. D. A. 카슨과 같은 다른 學者들은 영생이 요한 福音 17:3에서 예수님이 大祭司長祈禱에서"이제 이것이 永生이니 곧 唯一하신 참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곳에서 明示 敵으로 定義되어 있다고 提案한다. 카슨은 이 句節에 對해 "永生은 참 하나님에 對한 知識 그 以上도 以下도 아니다"라고 말하며 "永生은 永遠하신 분에 對한 個人的인 知識만큼이나 永生이 아니다." 反面에 에드먼즈 聖經 辭典은 "永生의 本質은 新約 聖經에서 그 必須 要素에 對해서만 스케치되어 있다"고 主張한다.

존 W. 리튼保佑(John W. Ritenbaugh)는 永生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예수님은 時間이 지남에 따라 成熟해지는 하나님과의 親密한 關係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오스트로미르 요한福音, 1056年

共觀福音書는 하나님 나라의 宣布에 焦點을 맞춘 것으로 보이지만, 一部 學者들은 永生을 요한福音에서 예수의 說敎의 中心 主題로 보고 永生을 얻는 것은 王國에 들어가는 것과 同義語로 看做된다. 基督敎의 가르침에서 永生은 人間 存在의 固有한 部分이 아니며, 죽음이 "單番에" 征服되어 基督敎人이 永生을 經驗할 수 있는 獨特한 事件으로 看做되는 예수 復活의 모델을 基盤으로 한 하나님의 獨特한 膳物이다. 이 永生은 一般的으로 죽은 者의 復活 時 信者들에게 提供되는 것으로 看做된다.

新約 神學에서는 "生命"(組에, 그리스어로 ζω?) 外에도 때때로 永遠한 形容詞 (아이오니오스, 그리스어로 α??νιο?)로 描寫되는 約束 된 靈的 삶이 있지만 다른 境遇에는 單純히 "生命"이라고도한다. 요한과 바울 모두 永生을 얻고 하나님의 震怒를 避할 수있는 可能性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는 데 달려 있다. 요한이 그리스도 안에 居하는 것은 요한福音 15:9-17과 요한福音 5:24에서와 같이 서로에 對한 사랑을 包含한다. 信者들 안에 神聖한 사랑이 存在하면 福音이 世上에 影響을 미치고 廣範圍한 救援으로 이어진다. 그런 다음 요한일서 3:14은 永生의 獲得을 單 한 番의 事件(에派팍스)으로 言及함으로써 "이미 있으나 아직 없는" 永生의 獲得과 永生을 얻는 데 있어서 사랑의 役割을 表現한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죽음에서 生命으로 넘어갔다는 것을 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如前히 死亡에 머물러 있다."라는 요한福音 5張 24節의 예수님 말씀을 聯想시킨다.

바울 便紙 [ 編輯 ]

에서 바울 書信, 新約에서 가장 오래된 텍스트, 永生은 하나님의 恩惠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人間이 永生의 膳物乙받을 수있는 그리스도의 人格 안에서 可能해진다. 바울에게 (갈라디아서 6:8에서와 같이) 未來의 永生은 現生 동안 聖靈의 來週의 結果로 到着한다. 바울은 罪를 永生을 얻는 데 障礙物로 본다. 로마書 6:23에서와 같이. 바울에게 永生은 未來의 所有이며 "信者들이 努力하는 終末論的 目標이다." 바울은 로마書 6:23에서와 같이 永生은 單純히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膳物이라고 强調한다: "罪의 삯은 死亡이요 하나님의 값없는 膳物은 그리스도 예수 우리 週 안에 있는 永生이니라." 따라서 로마書 6:23은 또한 罪와 永生을 대치시킨다: 罪는 死亡에 이르게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者들은 永生을 거두게 될 것이다."

바울은 또한 永生과 聖靈의 關係를 論議하면서 聖靈과 함께 있고 聖靈과 함께 생각하는 것이 永生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예: 갈라디아서 6張 8節: "聖靈으로 심는 者는 聖靈으로 永生을 거두리라." 바울에게 未來의 永生은 現生 동안 聖靈의 來週河心의 結果로 주어지며 現生, 聖靈 및 未來의 生命에 對한 相互 關聯된 陳述은 갈라디아서 主題에 關한 가르침의 核心 要素를 形成한다.

디모데 戰서 1:16은 永生에 對한 言及으로 그리스도人을 特徵 짓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부른다: "그 後에 그를 믿어 永生에 이르는 者들의 本보기"이며, 6:12에서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永生을 잡으라"고 助言한다.

共觀 福音書 [ 編輯 ]

新藥에는 生命이라는 單語가 15 番 登場하며 그中 8 番은 形容詞 永遠한.

아래 表에서와 같이 共觀 福音書가 "救援 받기"를 言及하고 요한이 永生을 言及하는 方式에는 類似點이 있다 :

마태복음 16:25 마가복음 8:35 누가복음 9:24 요한福音 12:25 ...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 누구든지 나와 福音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救援하리라 ...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救援하리라 ... 이 世上에서 제 목숨을 미워하는 者는 永生에 이르도록 지키리라. 누가복음에서 善한 사마리아人의 比喩는 10:25에서 한 律法司가 예수님께 "永生을 상속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는 永生에 關한 質問으로 始作된다.

마태복음에는 19:16, 19:29, 25:46에 永生에 對한 言及이 包含되어 있다. 마태복음 19:16의 言及은 마가복음 10:17-31과 누가복음 18:18-30에도 登場하는 예수님과 富者 靑年의 比喩 안에 있다. 이 比喩는 "永生"이라는 用語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聯關시킨다. 이 比喩는 靑年이 예수님께 던진 質問으로 始作된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永生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는 그에게 誡命을 지키라고 助言하신 다음 같은 脈絡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言及하신다.

요한 文學 하나님이 世上을 이처럼 사랑 下士 獨生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者마다 滅亡하지 않고 永生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요한福音 3:16 永生에 對한 요한의 槪念은 共觀福音書의 觀點과 다르다. 요한의 글들은 永生에 對한 觀點을 單純히 未來的인 것이 아니라 現在와 關聯된 것으로 具體的으로 提示하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야웨를 信賴하는 사람들은 요한福音 5:24에서처럼 "죽음에서 生命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永遠뿐만 아니라 "只今 여기"에서도 生命을 所有할 수 있다. 全般的으로 新約 聖經은 永生과 關聯하여 現在와 未來의 均衡을 맞추고 있다. 卽, 信者는 죽음에서 永生으로 넘어갔지만 이는 未來에 完全히 實現되어야 한다.


코덱스 알렉산드리누스, 5 世紀에 요한 書信의 첫 番째 書信 요한 福音에는 生命이라는 單語가 約 37 番 使用되었으며 그中 約 折半이 永生을 나타낸다. 요한 一書에는 6 番 登場한다. 이 槪念은 요한의 글에 너무 스며 들어 많은 境遇에 生命을 永生으로 읽을 수 있다.

改革主義 福音主義 神學者 D. A. 카슨은 요한 福音 5:24이 "社福音書에서 就任 한 終末論을 가장 强力하게 肯定하는 것"으로 본다 : 信者는 "부활 生命의 무언가를 經驗하기 위해 마지막 날까지 기다릴 必要가 없다." 조지 엘든 래드는 하나님의 나라와 마찬가지로 永生은 "다가올 時代에 屬한 終末論的 膳物일 뿐만 아니라 옛 時代에도 받을 수 있는 膳物"이라고 指摘한다. 이러한 脈絡에서 罪와 죽음이 如前히 存在하는 옛 時代의 永生 膳物은 信者들이 屬하게 될 生命과 意義 새 時代인 다가올 世上의 永生과 對照된다. 그러나 요한福音 3章 16節에서와 같이 하나님께서 믿는 者에게 永生의 膳物을 주셨지만, 예수님을 拒否하면 滅亡(απ?ληται)할 可能性은 如前히 남아 있다. 요한福音 3張 36節에 따르면, "아들을 믿는 者는 永生을 가졌고 아들에게 順從하지 않는 者는 生命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震怒가 그 위에 머물러 있다"고 말씀한다.

요한福音 末尾(20:31)에는 第4福音書의 記錄 目的이 다음과 같이 明示되어 있다: "이는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生命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것은 요한一書 5張 13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永生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니라."와 자주 聯關된다.

요한 福音은 永生을 예수의 人格 인 그리스도를 中心으로 配置한다. 요한의 見解에서 그리스도는 自身이 生命이기 때문에 人間에게 生命을 드러 낼 수 있다. 요한 一書 1 : 2 : "아버지와 함께 계시고 우리에게 나타난 永生을 너희에게 宣布 하노라"는 그리스도의 存在를 言及하는 요한 1 : 1 :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와 比較된다.

이 用語는 요한 福音에서 生命水의 脈絡에서 使用되며 요한 福音 4:14에 다음과 같이 明示되어 있다: "내가 그에게 줄 물은 그 속에서 永生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한福音 6:51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者는 永生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살리리니". 이것은 基督敎 神學과 共通的으로 예수님과의 關係뿐만 아니라 永生을 얻는 要素로서 聖體 聖事로 옮겨졌다. 가톨릭 敎會 敎理 問答 (1212 項目)은 그리스도人이 洗禮 成事를 통해 태어나고 聖體 聖事에서 "永生의 樣式"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요한 福音 10 : 27-28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量은 내 音聲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나니 내가 그들에게 永生을 주노니 永遠히 滅亡하지 아니하리라." 이는 그리스도人이 예수님과 맺어야 할 人格的이고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關係를 의미한다.

또 다른 用途는 요한福音 17張 3節에 있다: "永生은 아버지께서 보내신 唯一하신 참 하나님과 또 아버지가 보내신 者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이 用法은 요한계시록의 "生命의 主題"와 關聯되어 있다.

같이 보기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