演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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演劇舞臺의 모습.
公演 中인 俳優들.

演劇 (演劇) 또는 (劇)은 俳優 가 舞臺 裝置  · 照明  · 音樂 等의 도움을 받아 演出者의 指導 아래 脚本에 依해서 演技를 하여 觀客 에게 보이는 綜合 藝術이다. [1]

演技의 內容은 액션 (人物에 依해서 延期되는 事件)으로서 統一되며, 액션은 몇 個의 幕(幕)으로 區分되고, 막은 다시 몇 個의 腸(場)으로 細分되어 하나의 劇을 形成하고 있다. [1] 構成으로서는 發端  · 相勝負  · 頂點  · 下降部  · 終結 (또는 破局)의 5部로 이루는 것이 一般的인데, 옛날에는 아리스토텔레스 삼일치의 설 이 醉해져서 時間  · 場所  · 플롯의 統一이 必須條件으로 되어 있었다. [1]

劇은 悲劇   · 喜劇 으로 大別되고, 이와는 달리 悲喜劇 (悲喜劇)  · 史劇 (史劇)  · 詩劇 (詩劇)으로 區分하기도 한다. [1] 悲劇 은 後에 表現形式은 變했으나 恒常 永遠敵인 것, 卽 生死  · 自由  · 必然  · 罪  · 新 等을 테마로 하고 있다. [1] 喜劇 悲劇 의 永遠敵  · 根源的인 것에 對해서 一時的  · 現世(現世)的인 것, 卽 人間의 性情(性情)이나 行爲의 矛盾  · 弱點 또는 社會의 病弊 等을 테마로 하고, 全體的으로 明朗 輕快한 氣分이 充滿하고 있다. [1] 喜劇 中 單純한 것은 보드빌 (大衆 演劇)이나 消極 (笑劇)이라 불린다. [1]

序說 [ 編輯 ]

演劇은 人類歷史와 더불어 태어나서 人類滅alf과 함께 죽어갈 共同運命을 지니고 있다. 演劇이란 人間이 人間의 行爲를 模倣하는 藝術이기 때문이다. 文化의 發展과 더불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世界演劇의 큰 테두리 안에서 볼 때 演劇은 다른 어떤 文化的 産物에 못지않게 歷史的·地域的·民族的 所産임을 알 수 있다.

人間이 숨쉬고 있는 동안 演劇은 밤낮에 따라 죽음과 復活을 反復할 것이다. '子正에 죽은 演劇은 솟아오르는 太陽과 함께 다시 태어난다' 함은 人類歷史가 繼續되는 동안 演劇도 繼續된다는 뜻 以外에, 一旦 끝난 公演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되 다시 上演된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태어난 演劇은 前날 子正에 죽은 演劇과 同一한 것은 아니며, 다만 內容이 같을 따름이다.

演劇은 肉眼으로 보는 瞬間에만 存在한다고 함은 演劇의 特徵을 端的으로 表現한 말이다. 詩나 小說이 活字化되어 그 原形을 維持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演劇은 公演이 끝나는 同時에 사라져 버리고 오직 上演臺本과 프로그램, 舞臺寫眞, 評論 그리고 그 公演을 본 觀客들의 記憶 속에 살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演劇이 瞬間的인 時間藝術임에도 强烈한 힘을 지니고 있음은 살아 있는 人間, 卽 俳優가 人間의 體驗을 바로 그 瞬間에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模倣하기 때문이다. 演劇은 어떠한 過去의 事件이라 할지라도 '現在'時間에서 進行되게 마련이며, 觀客은 過去를 現在에서 體驗하기 때문에 다른 어떤 藝術보다도 剛한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現在'에서 하나의 生命體가 다른 生命體(들)의 行爲를 模倣하여 말하고 行動하는 것처럼 直接的이고 感動的인 것은 없다.

"……元來 演劇의 目的이란, 예나 이제나 自然을 向해 거울을 들어올려 鄭과 社(邪)를 있는 그대로 보이고 時代의 樣相을 뚜렷이 보여주는 것이니……"

? 햄릿

햄릿 의 이 말은 演劇이 人間의 行爲를 模倣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 以後의 많은 碩學들의 理論을 뒷받침해 준다. 勿論 模倣에 對한 解釋은 사람에 따라, 時代에 따라 다르고, 또 다를 수밖에 없으나, 모든 藝術에 있어서 그렇듯이 古典的 解釋은 妥當한 바탕을 이룬다고 하겠다. 키케로는 이렇게 말한다.

"演劇은 人生의 模寫(模寫)요, 慣習의 거울이요, 眞理의 反映이다(Drama is a copy of life, a mirror of custom, a reflection of truth)."

? 키케로

그의 理論에 따르면 結局 演劇이란 人生을 거울에 비추어 본 것임이 분명하다. 그것은 곧 있는 그대로, 事實대로 模倣한다는 뜻이다. 元來 드라마 希臘語 의 行爲·行動에 該當하는 말로서, 行動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俳優가 人間의 行爲를 그대로 模倣한다는 것이 바로 演劇의 理念이다.

이와 같은 模倣論은 19世紀 寫實主義者들의 藝術觀과 一致된다고 할 수 있다.

"演劇이 있는 그대로를 模倣하는 것이니만큼, 自己도 英雄과 함께 쓸모없는 人間을, 그리고 日常生活에 있어서의 平凡한 茶飯事를 揷入했노라"

?  에밀 졸라 , <테레즈 라캉>의 序文에서

亦是 프랑스 보마르셰 도 졸라와 같은 見解를 가지고 있다. 그들에 依하면 演劇이란 한낱 人生의 縮圖(縮圖)에 不過하다. 이들은 '미러 오브 네이처(Mirror of nature)'를 잘못 理解하고 있다. 무릇 藝術家는 많은 素材 가운데서 어떤 특수한 部分을 選擇한다. 따라서 選擇은 機械的이 아닌, 作家의 藝術的 創造力을 必要로 한다. 選擇은 技巧로서의 '아트(art)'와 藝術家로서의 '아트'가 합쳐진 곳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演劇은 素材의 選擇에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더 重要한 것은 人物臺詞 속에 無限한 意味를 暗示할 수 있는 傳達力을 作家가 지닐 일이다.

劇作家는 아티스트(artist)여야 한다. 한 걸음 나아가 模倣論에 對한 좀더 廣範圍한 解釋이 있어야겠다. 아리스토텔레스의 基本原則은, 藝術은 模倣이라는 데에 根據를 두고 있다. 그러나 앞서 言及했듯이 模倣說에 對한 解釋은 사람에 따라 時代에 따라 다르다. 假令 <크롬웰>의 序文에서 말한 위고 의 見解로는, 거울이 便便한 것이어서는 안 되며, 集中的으로 焦點을 맞출 수가 있는 포커싱 미러(focusing mirror)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만 弱한 빛이 强해지고 불꽃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演劇이란 그럴 때에 비로소 藝術 구실을 하게 된다고 결론짓는다. 사르歲이 (Sarcey)나 에델린 (Hedelin)의 理論 亦是 위고(Hugo)의 理論을 뒷받침하는 發展的인 見解이다. 에델隣誼 "演劇이란 있었던 事件 그대로를 上演하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것을 上演해야 한다"는 理論은 劇作家의 思想과 哲學에까지 言及한 것이 된다.

事實 古典的 理論으로, 過去를 다루는 것이 歷史라면 文學은 當爲의 世界를 그리는 것이어야 한다. 이와 같은 前提는 模倣說에 對한 졸라나 보마르셰의 解釋에 對해서 修正을 加하게 만든다. 當爲의 世界를 그려야 한다는 理論을 敷衍하는 또 하나의 理論을 브륀티에르 의 演劇論에서도 볼 수 있으니, 演劇은 어떤 目標를 向해 애쓰는 人間의 意志를 그려야 된다고 그는 말한다. 그 意志란 當爲의 世界를 이룩하려고 努力하는 意志임을 말한다. 이와 같은 古典的 理論을 바탕으로 하여 世界演劇은 제 나름의 길을 걸어오고, 또 걸어갈 것이지만, 그들의 演劇이 形式이나 內容에 있어서 어떻게 다르건 間에 人類歷史가 變遷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演劇 亦是 많은 變化 속에서 永遠히 存在할 것이라는 眞理를 우리는 疑心하지 않는다. 이 瞬間에 幕이 내려, 죽어버린 演劇이 來日 다시 되살아날 것을 우리는 疑心하지 않는다. 演劇은 人間의 기다림 속에서 永遠히 生命을 이어갈 것이다.

演劇의 構成 要素 [ 編輯 ]

演劇의 3要素는 觀客, 俳優, 戱曲, 그리고 演劇의 4要素라 할 때는 觀客, 俳優, 舞臺, 戱曲이라고 定義한다. 하지만, 演劇의 要素를 이런 式으로 區分짓는 것은 決코 바람직하지 않다. 演劇은 俳優, 觀客, 戱曲 以外에도 수많은 要素들이 相互 有機的으로 結合할 때 비로소 完成되는 綜合 藝術이기 때문이다.

大使 [ 編輯 ]

드라마 에는 補充 說明이 있을 수 없으므로 드라마의 臺詞는 簡潔, 明瞭하면서도 그 大使 中에 時間, 場所, 狀況, 人物 들의 關係에 對한 情報를 다 모아야하는 負擔이 있다. 드라마의 臺詞는 자연스럽게 情報를 提供함과 同時에 登場 人物들의 態度, 見解, 性格을 드러내 보여야 한다. 뿐만 아니라 劇作家는 討論, 論爭, 물음 等의 臺詞 形式을 통해 앞으로 일어날 行動을 推測하고 豫見케하며 그에 對한 伏線을 까는 役割도 해야 한다. 小說 作家는 小說 속의 내레이터를 통해 自身의 목소리를 傳達할 수 있지만 劇作家는 自身의 목소리를 낼 수 없고 다만 서로 맞물려 짜여진 臺詞를 통해 이야기의 결이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行動 [ 編輯 ]

行動이란 登場 人物들이 取하는 액션(上段 參照)들의 그 實體라 할 수 있다. 作家 가 特定 行動을 明示하기도 하나 많은 部分은 演出者와 俳優 에게 擔當되어있다. 戱曲 을 '읽을 때'에는 觀客 (獨自)가 스스로 演出者가 되어 想像의 舞臺 위에서 俳優 를 움직이고 그들에게 臺詞에 맞는 제스처를 附與해야 하지만, 俳優들이 直接 演技를 하는 劇中에서는 臺詞와 行動에 留意하며 눈에 보이는 것을 基盤으로 劇을 올바르게 즐기면 된다.

小說의 技法이 드라마 에 借用되기 以前인 19世紀 前半 以前에 쓰여진 戱曲 의 境遇 戱曲에 舞臺 指示 事項이 最少化되어 있기 때문에 讀者는 臺詞 속에 暗示되어있는 行動에 留念하며 作品을 읽어야 한다.

이야기 [ 編輯 ]

사람들이 演劇을 보러가는 主要한 理由는 즐기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觀衆 의 欲求를 충족시키는데 가장 重要한 要素는 아름다운 臺詞나 高尙한 道德的 敎訓이 아니라 이야기 自體가 주는 '재미'이다. 드라마 에도 間或 回想의 場面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드라마 는 根本的으로 時間的으로 展開되는 이야기를 軸으로 한다.

劇的 行動은 時間的 順序에 따라 展開되지만 그저 發生하는 事件이 아니라 劇作家에 依해 미리 緻密하게 計算된 順序에 따라 進行되는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날까’하는 觀客 의 期待感을 充足시키는 外에 플롯 의 力動的 構成을 위해서는 ‘왜 어떤 일이 일어날까’하는 點이 必須的이다.

人物 [ 編輯 ]

많은 境遇에 우리가 文學에서 느끼는 興味는 그 속에 나오는 人物들에 關한 것이다. 드라마 는 살아있는 俳優 들에 依해 作品 속의 人物들이 表現되는 點에서 人物들은 觀客들의 主要한 關心과 興味의 對象이다. 登場 人物에는 主人公과 主人公과 맞서는 人物이 있다.

主要 人物과 그렇지 않은 人物을 區別하는 손쉬운 方法은 大使의 길이이다. 그러나 보다 重要한 差異는 主人公의 境遇 複雜한 動機와 過去를 지닌, 充分히 個性化된 人物임에 反해 그렇지 않은 人物들은 이렇다할 個性이 附與되지 있지 않다. 그러나 主人公의 性格이 簡單明瞭하게 定義될 수 있을 程度로 單純한 例는 거의 없다. 主人公에게 性格을 附與하는 가장 基本的인 方式은, 비록 믿을 수 없는 境遇가 種種 있지만, 이름과 外貌이다. 예컨대 「 오셀로 」에서 이야고를 부르거나 그에 對해 言及할 때면 ‘正直한’이라는 修飾語가 자주 붙는다. 性格 附與의 또 다른 方法은 한 個人의 行動 樣式이다. 어떤 人物이 自身의 性格과 行動 動機를 方伯이나 獨白을 통하여 밝혀 보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大使 中에 사투리, 語彙의 選擇, 文法 等 모든 것이 合해져서 한 人物의 過去와 知性이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어떤 人物이 다른 人物들에게 보이는 反應이나 다른 人物들이 그 人物에 對해서 하는 이야기에서도 性格이 드러난다.

우리의 經驗이 證明하듯 지나칠 程度로 一貫性 있는 人物은 一般的으로 寫實性이 稀薄해 보인다. 아마도 文學 作品 속에서 훌륭한 性格 設定이라 함은 首肯은 가되 우리를 놀라게 하는 人物들일 것이다. 그들의 動機는 複雜 微妙하고 一見 矛盾되는 듯이 보이기조차 한다.

休克日 [ 編輯 ]

演劇을 쉬는 것을 '休極'이라고 한다. 休克日은 演劇에 따라서 다른 曜日에 休극하는 것도 있지만, 普通 演劇은 뮤지컬과 마찬가지로 月曜日 에 쉰다.

歷史 [ 編輯 ]

  • 人間의 遊戱 本能과 意思疏通의 手段으로써의 몸짓, 손짓 (原始的 言語, 律動)
  • 古代 社會의 宗敎的 意識 ( 그리스 의 演劇, 디오니소스 를 讚美)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參考 文獻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