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른스트 크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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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年의 에른스트 크리크

에른스트 크리크 ( 獨逸語 : Ernst Krieck , 1882年 7月 6日 ~ 1947年 3月 19日)는 獨逸 現象學的 敎育思想家 ·實務家이다.

生涯 [ 編輯 ]

獨逸 페겔스하임 胎生이다. 실과 學校를 卒業한 後, 師範學校에 進學하였다. 師範學校 卒業 後에는 初等學校의 敎師가 되어 約 20年間 初等學校 敎師로 勤務하면서, 當時 敎育을 機械的이고 官僚的이라면서 批判하였다. 이 時期에 그는 自身만의 獨自的인 敎育觀을 形成해 간다.

1910年 그는 最初의 著述인 《人格과 敎育》을 出刊하였다. 1917年 에는 《獨逸의 國家 以上》, 1920年 에는 《科學의 革命》(Revolution der Wissenschaft), 그리고 1922年 에 이르러서는 크리크가 스스로의 主要 著書라고 하는 《敎育의 哲學》(Philosophie der Erziehung)을 出刊하였다. 이 冊으로 그는 하이델베르크 大學 에서 名譽 博士 學位를 取得했다.

그 後로 4年동안 著述에만 專念하다가, 1928年 프랑크푸르트 癌 마인의 敎育 養成 大學(Padagogische Akademie)에 招聘된다. 그러나, 1931年 에 하지 祝祭에서 '第三 帝國 萬歲'를 외친 일로 懲戒를 받아, 도르트문트의 敎員 養成 大學에 轉任되었다. 그後로 그는 룰 地方에서도 政治的인 發言을 자주 하였다.

1932年 크리크는 獨逸 國家 社會主義 敎員 同盟의 一員이 됨과 同時에 나치스 黨員이 된다. 그의 思想이 나치스의 李箱과 合致된다 하여 當時 敎育界에서 높은 地位에 있게 되었다. 그는 프랑크푸르트 大學 의 學長이 되었고, 哲學과의 敎育學 敎授職도 擔當했다. 그는 第2次 世界大戰 이 끝날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史上 [ 編輯 ]

그는 敎育을 다만 學校 敎育에 한하지 않고 人間社會에 언제, 어디서나 이루어져야 할 社會의 根本機能으로 보았고, 社會는 모든 個人活動을 떠받치며 個人에 앞서 存在하는 全體자라야 한다고 했다. 또 敎育은 社會의 成員이 스스로가 屬해 있는 社會에 順應하는 것에 不過하다고 본다. 그 例를 다음과 같이 들었다.

  1. 人間 相互間의 無意識的 影響
  2. 意識은 하고 있으나 뚜렷한 敎育的 意圖를 갖지 않는 境遇
  3. 敎育的 意圖 下에서 行하여지는 境遇

또 敎育의 主體·客體라는 面에서 다음과 같이 區分했다.

  1. 社會가 個人을 敎育하고, 社會가 他社會를 敎育하며, 社會가 社會 自身을 敎育한다.
  2. 個人이 다른 個人을 敎育하고, 個人이 社會를 敎育하며, 個人이 自己自身을 敎育하는 것

이와 같이 敎育을 社會的 機能으로 본다면 敎育學 은 目的論·方法論이어서는 안 되며, 있는 그대로의 敎育事實에서 敎育의 本質·過程·法則 等을 求해야 한다는 것이다.

著書 [ 編輯 ]

  • 1910年, 人格과 敎育(Personlichkeit und Kultur)
  • 1917年, 獨逸의 國家 以上(Die deutsche Staatsidee)
  • 1920年, 科學의 革命(Revolution der Wissenschaft)
  • 1922年, 敎育의 哲學(Philosophie der Erziehung)
  • 1927年, 文化民族의 敎育組織
  • 1930年, 敎育哲學

같이 보기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