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유소
(魚有沼,
1434年
~
1489年
)는
朝鮮
初期의
무신
,
軍人
,
政治人
으로 字(字)는 自由(子遊)이며,
本館
은
忠州
이다. 邊方
女眞族
의 討伐과
李施愛의 亂
鎭壓 等에 參與하였다.
京畿道
楊州郡
東豆川
出身. 諡號는
正裝
(貞莊)이다.
生涯
[
編輯
]
生涯 初盤
[
編輯
]
어유소는
1434年
京畿道
楊州郡
이담面
지행裡(現 東豆川市 池行動)에서
平安道
病魔水軍 道
節制使
를 지낸
어득해
의 아들로 태어났다. 字는 自由(子遊)이다. 文宗 元年(
1451年
)에 18歲에
淫書
(蔭敍)로 出仕하여
內禁衛
에 任命되었다.
李施愛亂 鎭壓과 功臣 錄券
[
編輯
]
그 뒤
世祖
2年(
1456年
)에 武科에 壯元으로 及第한 後 司僕寺職場(司僕寺直長)과 監察을 歷任하였다. 世祖 6年(
1460年
)에는 野人 征伐에 큰 功을 세워 昇進, 通禮門通贊(通禮文通贊)李 되고, 世祖 9年(1463)에는
회령부사
를 거쳐
李施愛의 亂
의 鎭壓에 參與하였다. 이시애 亦是 회령부史를 지낸 人物로 그의 아버지 이인화는 판英弘大府使를 지냈고, 그의 할아버지는 檢校門下府史를 지낸 兩班家의 子弟였으나, 그는 賞(喪)을 當하여 회령부史를 退任하고 집에 있다가 아우 이시함과 함께 叛亂을 일으켰다.
[1]
世祖 13年(
1467年
)에는 座大將으로
李施愛의 亂
을 平定한 뒤 敵愾功臣 1等이 되어 예성군에 封해지고
工曹判書
에 특진되었다. 그 해
겨울
明나라
가 建州衛를 칠 때 座臺張으로 큰 功을 세웠고 그해
12月
軍功 2等(軍功二等)에 錄勳되었다. 睿宗 卽位 後
睿宗
元年(
1469年
)에는
咸鏡北道
節度使,
成宗
에는 2年 佐理功臣 4等이 되고 두 次例나
平安北道
節度使를 지냈다.
官僚 生活
[
編輯
]
以後
議政府
右參贊으로
五衛都摠府
都摠管을 兼任했고 이듬해
兵曹判書
, 成宗 9年(1478年)
議政府
右贊成
을 지냈다. 成宗 10年(
1479年
)에는 建州衛를 征伐할 때 서정대張으로 出征했으나 作戰上 回軍한 罪目으로 한때 流配되었다 다시 풀려나 都摠管
吏曹判書
同知中樞府事,
平安道
巡察使를 歷任했고,
成宗 12年(1481年) 吏曹判書, 知中樞府事를 거쳐
平安道
觀察使
로 나갔다가 成宗 19年(
1488年
)에는 判中樞府事 兼 都摠管에 이르렀다. 成宗 20年(1489) 10月 王께서 景氣에 閱武할 때
成宗
을 扈從하여
抱川
永平縣에 到着했을 때 院內에서 갑작스럽게 死亡했다. 그의 諡號는 正裝(貞莊)이다.
事後
[
編輯
]
成宗은 그의 갑작스러운 死亡을 크게 슬퍼하여 위를 거두고 部位를 厚하게 내려주었다.
墓는 京畿道 楊州郡 東豆川邑(現
東豆川市
광암동) 산72번지에 位置하고 있으며, 1986年 4月 28日
東豆川市의 鄕土文化財
第4號로 指定되었다.
기타
[
編輯
]
鄭長老와 正裝地下道
[
編輯
]
그의 故鄕인
京畿道
東豆川市
생연동에는 그의 諡號를 따서 지은 '鄭長老'라는 道路가 있고,
1987年
에는 그의 이름을 따서 正裝地下道를 開設하였으나 正裝地下道는
2008年
閉鎖되었다.
於宇同 스캔들
[
編輯
]
於宇同
과 隣接하던 그는 어우동을 불러들여 그와 關係를 맺기도 했다. 그러나 國文을 當할 때 그는
於宇同
과의 關係를 否認하였다.
1480年
스캔들 事件으로
義禁府
에 押送된
於宇同
과
防産수
의 陳述에 依하면 "어유소는 일찍이 어울우동의 이웃집에 被接(避接)하여 살았는데, 隱密히 사람을 보내어 그 집에 맞아들여 祠堂(祠堂)에서 姦通하고, 뒤에 만날 것을 期約(期約)하여 玉가락지[玉環]를 주어 信標(信標)로 삼았다
[2]
"는 것이다.
於宇同
이 防産數의 說得으로 어유소(魚有沼)·노공필(盧公弼)·김세적(金世勣)·金稱(金?)·김휘(金暉)·정숙지(鄭叔?) 等을 言及했으나, 뒤에 모두 證據가 없다는 理由로 釋放되었다.
[2]
史劇에서
[
編輯
]
各州
[
編輯
]
- ↑
李施愛가 亂을 일으킨 것은 端宗廢位에 關聯이 있다는 說도 있다.
- ↑
가
나
成宗實錄 122卷, 成宗 11年(1480 庚子年) 10月 18日(甲子) 5番째記事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 文獻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