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드리아노폴리스 戰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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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리아노폴리스 戰鬪
고트 戰爭 의 一部
날짜 379年 8月 9日
場所
結果 고트族-알란族 同盟의 勝
交戰國
東로마 帝國 고트族
알란族
指揮官
발렌스   프리티게른
알라테우스
사파렉스
兵力
1萬 5000名 ~ 3萬 名 1萬 ~ 2萬 名
被害 規模
1萬 ~ 2萬 名 알려지지 않음

아드리아노폴리스 戰鬪 는 378年 8月 9日 東로마 帝國 의 皇帝 발렌스 고트族 聯合軍 사이에서 벌어진 戰鬪로 皇帝 발렌스는 이 戰鬪에서 戰死했고 고트족은 로마군을 이겼다. 歷史上 이 戰鬪의 敗北로 5世紀 後半 서로마 帝國 의 崩壞가 始作됐다.

背景 [ 編輯 ]

376年 훈族 의 侵入으로 威脅받은 고트族 銀 東로마 帝國의 皇帝 발렌스 에게 로마 帝國의 領土로의 移住를 許可해 달라고 請願하였다. 발렌스는 그들의 請願을 받아들여 트라키아 로 移住를 許可하고 地方 政府에 그들의 定着을 도우라고 命令했다. 그들은 로마의 同盟 不足 이 되어 定着해 安定을 維持하면서 살 수 있었으나 트라키아의 總督 루키피누스는 皇帝가 命令했는데도 도나우江 을 건너온 고트족의 財産을 빼앗고 居處를 마련해 주지 않아 이들은 거의 飢餓 狀態에 빠졌다.

377年 여름, 살아남고자 죽을 힘을 다해 抵抗하기 始作한 고트族 難民들은 마리아노폴리스로 몰려가서 루키피누스와의 面談을 要請했으나 總督 루키피누스는 拒絶하고 오히려 軍隊를 이끌고 이들을 解散하려고 試圖했으나 루키피누스는 오히려 고트족에게 敗走했고 발렌스는 서로마 皇帝 그라티아누스 에게 增援軍을 要請했다.

東西 로마 帝國의 大規模 增援軍에도 고트족과 로마軍 어느 쪽도 分明히 勝利하지 못한 채 2年이 經過하였다. 378年 봄, 그라티亞누스에게 約束받고 軍隊를 直接 이끌고 발칸半島 로 마침내 向한 발렌스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를 出發해 5月 末 콘스탄티노폴리스 에 到着했다.

그라티亞누스도 增援軍을 더 보냈으나 알레摩尼族 라인江 을 넘어 쳐들어오자 兵力을 다시 불러들였고 갈리아에서 알레摩尼族 擊退에 成功한 一邊, 발렌스는 아드리아노폴리스 까지 進軍하여 相當한 規模의 고트족을 擊退하고 西方의 增援軍을 기다리고 있었다.

戰鬪의 經過 [ 編輯 ]

그라티아누스가 보낸 增援軍의 司令官 리코메레스는 발렌스에게 自身의 增援軍이 刀擦할 때까지 大規模 戰鬪를 自制하라고 要請했으나 발렌스는 讀者 情報網으로 敵軍이 고작 1萬 名밖에 되지 않는다고 判斷하고서 麾下 將軍 세바스티아누스가 卽刻 攻擊을 主張하자 그 意見에 同意하여 攻擊에 나섰다.

8月 8日 발렌스는 고트족의 族長 프리티게른 이 로마軍의 情況을 把握하고서 提案한 協商을, 我軍의 數를 基準으로 하는 優勢를 믿고서 拒絶하는 生涯 最大의 失手를 저질렀다.

다음날 戰鬪가 開始되었다. 하드리아盧폴리스의 城門을 나선 로마軍은 敵을 發見하자마자 急하게 攻擊하기 始作했다. 戰列이 갖추어지기도 前에 攻擊을 始作한 탓에 로마軍은 처음부터 밀릴 수밖에 없었다. 로마軍은 戰鬪 單位와 命令 體系가 분명한데 不足 單位라서 個別로 戰鬪한 고트족軍은 짐수레를 둥글게 둘러싸고 防禦陣을 取하는 渦中에 함께 온 家族과 財産을 保護하려고 로마軍을 죽을 힘을 다해 攻擊하였다. 로마軍은 戰鬪 單位마다 機能에 따라 有效하게 應對하는 戰略을 取하지 못하고 고트족軍에게 격퇴당했으며 相對를 野蠻族이라고 얕보던 발렌스는 戰鬪 經驗이 없었다.

고트族 騎兵에 밀린 로마軍은 大隊長 35名과 軍團 全體의 3分의 2에 該當하는 莫大한 損失을 입고 敗했다. 로마군 總司令官 세바스티나누스와 副司令官 트라야누스는 戰死했다. 발렌스度 그 戰鬪에서 戰死했는데 그 正確한 事情은 모른다. 화살에 맞아 죽었다고도 하고 扈衛隊에서 떨어져 들판의 農家의 오두幕에 숨어들었다가 고트족軍에게 불에 태워져 죽었다고도 傳한다. [1]

結果 [ 編輯 ]

고트족은 로마 兵士들이 값나가는 物件을 놓고 왔으리라 推定되는 하드리아盧폴리스를 공략하러 갔지만, 全體의 3分의 1에 該當하는 敗殘兵이 아드리아노폴리스로 逃亡해 防衛에 앞장서고 있었다. 結局 攻略을 斷念한 고트족은 그대로 로마 街道를 따라 콘스탄티노폴리스 를 目標海 南東으로 向했지만, 이곳은 로마 帝國 東邦의 首都 인 데다가 防衛 面에서는 滿點인 地理上 條件을 갖추고 있다. 고트족은 이 大都市 攻略도 일찌감치 斷念했다. [2]

影響 [ 編輯 ]

이 戰鬪의 敗北는 로마인에게 아주 深刻하게 收容됐다. 로마軍은 더는 天下無敵人 不敗의 軍隊가 아니며 野蠻族은 로마軍을 壓倒하게 되었다. 皇帝 戰士가 이番이 처음이 아니고 로마軍이 게르만족에게 慘敗도 이番이 처음은 아니었으나 예전의 敗北는 곧 로마軍은 일어나서 復讐했지만 이 戰鬪의 敗北는 絶對로 雪辱되지 않았다. 로마의 게르만化는 마침내 더는 時代를 거스를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발렌스를 繼承해 東로마 皇帝가 된 테오도시우스 1歲 는 繼續해서 밀려오는 고트족을 로마 領土 內로 마침내 受容할 수밖에 없었다.

各州 [ 編輯 ]

  1. 시오노 나나미 는 발렌스 皇帝가 불에 타 죽었다고 咀嚼《 로마인 이야기 14卷: 그리스도의 勝利》에 記錄하였다.
  2. 시오노 나나미 . 《 로마인 이야기 14卷: 그리스도의 勝利》. 31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