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톨리 이바노비치 샵新
(
러시아語
:
Анатолий Иванович Шабшин
, 1910年 10月 15日 ~ 1967年 1月 15日)은 소비에트 聯邦의 軍人이자 外交官이다. 8.15 解放 前後 時期에 서울의 蘇聯 領事館 副領事로 勤務하며 大韓民國 內 共産主義者들의 活動에 많은 影響을 끼쳤다.
[1]
生涯
[
編輯
]
MGB 要員으로
日帝强占期
當時 韓半島에서 서울 駐在 蘇聯總領事館의 副領事라는 對外職名을 가지고 活動하였다.
[2]
1939年
京城府
에 開設된 蘇聯總領事館은 日帝가 敗亡한 以後에도 維持되었으며, 解放 當時 서울 駐在 蘇聯 領事는
알렉산드르 폴랸스키
(Alexander Sergeievitch Polianski, Александр Сергеевич Полянский)였다.
[3]
[4]
[5]
샵신은
1940年
蘇聯總領事館으로 赴任 이곳에 勤務하며 朝鮮을 깊이 硏究하였다 한다. 한글을 배워 韓國語 對話에도 能通해 最初의 '러-조 辭典'을 編纂하기도 했다.
[2]
北韓 蘇聯 軍政의 總指揮者
스티코프
는 恒常 샵신만큼 朝鮮을 잘 아는 사람을 只今까지 본일이 없다며 稱讚하기도 했다.
[2]
蘇聯
軍政廳 出帆 以後 샵신은
京城府
와
평양부
를 往來하며 美軍政下에 있는 南韓의 情勢를
니콜라이 레베데프
에게 報告하고 레베데프의 指示에 따라 南韓에서
朝鮮共産黨
을 操縱하는 役割을 遂行하였다.
[2]
日帝 强占期 때부터 地下에서 活動하던
朝鮮共産黨
總帥 兼 責任祕書
박헌영
過度 隨時로 連絡을 주고받았다.
[2]
1945年
8月
日本 帝國
이 敗亡한 直後
박헌영
은 韓半島 政策을 놓고 샵神을 찾아와 對策을 協議하였다. 서울의 蘇聯 領事館은
整版社 僞造紙幣 事件
을 契機로 1946年 7月 2日 閉鎖되고
[6]
[7]
[8]
[9]
, 이때 샵信徒 서울을 떠났다.
[10]
그 後 그는 平壤으로 가서 北韓 駐在 蘇聯軍 司令部 政治委員이 되었다고 한다.
[11]
平壤에서 그의 職責은 美蘇共委 蘇聯代表團의 一員이며 蘇聯軍司令部의 政治顧問인 발라사노프(Gerasim M. Balasanov)의 副官이었다.
[12]
蘇聯 總領事館 圖書室長
파냐 이삭코브나 샵詩나
(Фаня Исааковна Шабшина, Fanya Isaakovna Shabshina, 1906 ~ 1998)
[13]
[14]
는 샵神의 配偶者로 나중에
蘇聯
으로 歸國한 뒤 韓國에 對한 冊들을 出刊하여, 러시아의 '韓國學의 代母'(代母)로 불렸다.
[2]
[15]
[16]
샵신은 믿는 韓國人 親舊에게 自身이 朝鮮共産黨을 統制하고 있으며
박헌영
은 自身의 心腹(henchman)이라는 事實을 밝혔다고 한다.
[17]
샵신은 職級이 높다고 볼 수 없지만 그보다 10살이나 위인 박헌영을 비롯한 南韓의 共産主義者들을 背後에서 操縱하고 있었던 것은 事實이다.
[1]
1945年 8.15 解放 直後 蘇聯이 北韓 指導者 感을 物色할 때 蘇聯의 極東軍 司令部와 NKVD(KGB 前身)는
88國際旅團
의
金日成
을 밀고, 샵神의 推薦을 받은 外務省 쪽은
박헌영
을 밀었다고 한다.
[18]
[19]
스탈린은 推薦이 올라 온 두 사람 中 김일성을 9月初 모스크바로 불러 面談을 한 後 그를 指導者로 決定하였다. 하지만 박헌영 側의 이의 提起로 1946年 7月 初 두 사람을 모두 모스크바로 불러 面接 試驗을 다시 보게되는데,
[20]
[21]
이때 박헌영의 通譯을 샵神의 夫人 샵시나가 맡았다고 한다.
[22]
[23]
스탈린은 指導者를 바꿀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김일성을 그대로 指導者로 임명하였고, 이 面接 試驗은 박헌영의 不滿을 달래기 위한 要式 行爲에 지나지 않았다.
샵新(Anatoli I. Shabshin)의 本名은 쿨리코프(Куликов, Kulikov)였고, 따라서 아내 샵詩나(F. I. Shabshina, Шабшина Фаня Исааковна)의 本名은 쿨리코바(Куликова, Kulikova)였다.
샵視나의 著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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編輯
]
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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編輯
]
- ↑
가
나
김학준, 光復50周年 特輯 解放空間의 主役 〈12〉 蘇(소) 副領事 샤브新 : 朴憲永(박헌영) 操縱 信託支持 이끌어
1995.10.31. 東亞日報 7面
- ↑
가
나
다
라
마
바
(光復 5年史 爭點 再照明)<1部> ⑬蘇聯은 왜 一絲不亂했나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 동아일보 2004-11-14
- ↑
駐韓美軍司 2 > 2部. 4張. 占領 첫 해의 美蘇關係(American-Soviet Relations, The First Year) > 蘇聯領事館(The Soviet Consul)
國史編纂委員會 韓國史데이터베이스
- ↑
Dae-Sook Suh 編輯,
Korean Studies: New Pacific Currents
p.53 : The Fate of the Soviet Consulate in Seoul
- ↑
孫世一의 比較 評傳 (76) 韓國 民族主義의 두 類型-李承晩과 金九 : 朝鮮人民共和國의 主席과 內務部長
월간조선 2010年 7月號
- ↑
駐韓美軍司 2 > 2部. 4張. 占領 첫 해의 美蘇關係(American-Soviet Relations, The First Year) > 連絡의 維持 > 蘇聯 領事館의 閉鎖
國史編纂委員會 韓國史데이터베이스
- ↑
韓民族獨立運動史 11卷 韓民族獨立運動의 基本흐름 > 10. 大韓民國의 樹立 > 4) 第1次 美蘇共同委員會가 決裂된 때로부터 第2次 共同委員會가 열리기 前까지 美軍政의 政策과 우리겨레의 對應
國史編纂委員會 韓國史데이터베이스
- ↑
서울中(中)區貞(正)棟에 남아있는 러시아公使館의 塔部分
1978.05.26. 京鄕新聞 5面 : 蘇聯側은 美·蘇共委 休會(米·小功위 休會) 後인 1946年 6月 24日 解放後 서울에 設置했던 領事館을 閉鎖했다. 蘇聯의 서울 領事館 閉鎖는 美國이 蘇聯 占領 地域인 平壤(平壤)에 美國領事館의 開設(開設)을 要求한데 對한 間接的인 反對(反對)回答이었다.
- ↑
蘇領事?閉?(小領事館閉鎖) 間牒(間諜)니코라이夫妻追放(部處追放)
1949.09.07. 東亞日報 1面 : 領事館 閉鎖 後에도 建物은 蘇聯人들이 쓰고 있었던 것 같음.
- ↑
RG 338, Records of United States Army Force in Korea, Lt. Gen. John R. Hodge Official File, 1944-48, Entry No. 11070, Box 70, 032.1 Congress 1, etc. (5 of 8)
p.113에 副領事 샵신은 6月 30日, 總領事 폴랸스키는 7月 2日에 서울을 떠났다고 나옴.
- ↑
國史館論叢 第103輯> 朝鮮民主愛國靑年同盟의 路線과 第2次 美蘇共同委員會 推進運動(김행선) > Ⅲ. 第2次 美蘇共同委員會 推進 및 救國運動 > 3. 8·15 2周年 記念市民大會 推進과 大檢擧事件
國史編纂委員會 韓國史데이터베이스
- ↑
孫世一의 比較 評傳 (90) 韓國 民族主義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 總罷業과 都市暴動과 슈티코프의 指令
월간조선 2011年 10月號
- ↑
ru: Шабшина, Фаня Исааковна
러시아語 Wikipedia : 구글 領域
Shabshina, Fanya Isaakovna
- ↑
ШАБШИНА (Куликова) Фаня Исааковна
: 구글 領域
Shabshina (Kulikova) Fanya Isaakovna
- ↑
1945年 南韓에서: 어느 러시아 知性이 쓴 歷史現場 記錄 / 파냐 이사악꼬브나 샵詩나 저; 김명호 驛. 서울: 한울, 1996.
植民地 朝鮮에서 : 어느 러시아 知性이 쓴 歷史現場 記錄 / 파냐 이사악꼬브나 샵詩나 지음; 김명호 옮김; 서울 : 한울, 1996.3
- ↑
F. 샤브詩나 꿀리꼬바,
(歷史人物 回顧) 蘇聯의 女流 歷史學者가 만난 박헌영
Archived
2018年 6月 16日 -
웨이백 머신
서울 : 역사비평사, 1994
- ↑
駐韓美軍司 2 > 2部. 1張. 韓國의 政治와 사람들, 첫 6個月 > 2. 共産黨
國史編纂委員會 韓國史데이터베이스
- ↑
小政治將校 / 入北展 金日成 「面接」(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3)
中央日報 1991.08.19 綜合 5面
- ↑
박헌영의 政治路線:上(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37)
中央日報 1992.02.06 綜合 11面
박헌영의 政治路線:下/소의 「饌卓」支持에 겉으로만 따르는 척/南쪽 情勢 不利하자 金日成 支持 旋回“中位勢力손잡고 社會主義로 統一”(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38)
中央日報 1992.02.10 綜合 11面
박헌영 스탈린에 김일성 批判便紙(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80)
中央日報 1992.07.23 綜合 11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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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秘錄) 朝鮮民主主義 人民共和國 上, 下 2卷 (中央日報 特別取材班, 중앙일보사, 1992) - 商圈 pp.326~327. 當時 平壤의 蘇聯軍政은 서울에 있던 박헌영을 祕密裏에 平壤으로 데려갔고, 蘇聯軍政을 總指揮하는 沿海州軍管區 司令官이었던
메레츠코프(Kirill Meretskov, 1897-1968)
怨讐가 보로쉴로프(現
우수리스크
)에서 祕密裏에 飛行機로 平壤으로 날아와 김일성과 박헌영을 태우고 모스크바로 갔다고 한다.
- ↑
박병엽 口述, 유영구, 정창현 엮음,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 前 勞動黨 高位幹部가 본 祕密會同》 (선인, 2010) p.70 : 김일성과 박헌영의 4次 會同이 1946年 6月 27日~ 7月 12日頃까지 平壤과 모스크바에서 이루어졌다고 했다. 이때 박헌영과 김일성에 對한 스탈린의 面接 試驗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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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年 김일성의 蘇聯 첫 訪問/바실리 V 레베데프 고려대 史學科 碩士
서울新聞 2019.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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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敎科書들이 덮어준 '김일성과 北韓의 8代 恥部'
NewDaily 2011.04.05
外部 링크
[
編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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