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만   중국   일본 
植民史觀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本文으로 移動

植民史觀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植民史觀 (植民史觀)은 日帝强占期 日帝의 韓國 植民 支配를 正當化하고 韓國人 에 對한 統治를 容易하게 하기 위하여 一齊 에 依해 政策的 · 組織的으로 造作된 歷史觀을 말한다. 大體로, 韓民族 을 歷史的으로 다른 나라에 支配되어 왔고 自立 能力이 없는 停滯된 民族으로 浮刻시켜 日本의 韓國 竝呑을 正當化하였다. 種種 民族史觀 과 對比되는 用語로 認識된다.

主要 理論 [ 編輯 ]

植民史觀은 여러 分野로 나눌 수 있으나 크게 日선同調론, 正體性論, 他律性論 의 세 方向으로 確立되었다.

1890年代 初, 靑·日戰爭을 앞두고 大陸 侵略 기운이 높아지면서 日本 도쿄帝國大學의 官邊學者(官邊學者) 들에 依해 朝鮮史 硏究가 始作되어 이른바 滿船史觀 (滿鮮史觀)李 捏造되었고, 이는 以後 韓國史의 獨自的 發展과 主體性을 否定하는 他律性論(他律性論)으로 展開되었다. 滿船史觀 이란 滿洲가 韓半島 歷史의 一部가 아니라 오히려 韓半島 歷史가 滿洲史의 一部라고 하여 滿洲史에 對한 從屬을 强調하는 것이다.

以後에 身貢皇后(神功皇后)의 新羅征伐설, 任那日本府說 等을 主張하고 이를 繼承한 日선同調론 (日鮮同祖論)을 만들어, 植民地 侵略을 正當化했으며, 民族抹殺政策의 論理的 根據로 삼았다. 卽, 古代에 日本이 韓半島를 支配했으므로 朝鮮이 日本에 吸收되는 것은 當然하다는 論理를 편 것이다. 그리고 이른바 韓國社會 正體性論을 主張했는데, 이는 韓國史에는 封建制 社會가 없었으며, 따라서 朝鮮은 自力으로 近代化를 이룰 수 없는 落後되고 停滯된 後進社會이고 이를 近代的 社會로 開發시켜주는 것이 日本의 植民地支配라는 主張이다.

여기서 이른바 他律性論이 登場했다. 正體性論과 他律性論은 植民史觀이 끝까지 堅持한 歪曲된 歷史認識의 本質로서, 日帝는 이러한 歷史認識 아래 合邦 直後부터 醉祖國(取調局)이라는 部署를 두어 資料調査를 始作했고, 1920年代 中盤부터는 本格的인 整理作業에 着手, 朝鮮史編修會 를 만들어 《朝鮮史》 編纂을 始作했다. 여기에는 硏究機關·경성제대 및 日本 各 大學의 日本人 學者들이 參加했으며, 최남선 · 이능화 · 玄采 等 一部 朝鮮人 學者들도 參與했다. 이같은 植民主義 歷史學에 對抗하여 民族的이고 科學的인 近代 歷史學을 確立한 것이 民族主義 歷史學과 마르크스주의 歷史學이다.

日선同調론 [ 編輯 ]

日선同調론 (日鮮同祖論)은 韓民族은 日本人에게서 갈라진 民族이기 때문에 日本이 韓國을 保護하고 도와야 한다는 主張이다. '日韓同調론'(日韓同祖論), '同祖同根論'(同祖同根論)이라고도 한다. 이 主張으로 인해 日帝의 韓日合邦 乙 日本의 韓國을 위한 配慮와 도움인 것으로 꾸몄다.

日선同調론은 1930年代 日帝가 내세운 內鮮一體 思想의 根據가 되었다. 또 日本 帝國에 依한 朝鮮의 植民地 侵奪과 同化政策, 皇國臣民化, 民族抹殺政策 正當化에 利用되었으며, 日선同調론에 滿洲 · 몽골 을 '同族'에 끌어들인 ' 大아시아主義 (大亞細亞主義)'는 日帝의 滿洲, 中國 侵略을 正當化하는 ' 大東亞共榮圈 '의 根據로 利用되었다.

他律性論 [ 編輯 ]

他律性論 (他律性論)은 韓國史 안의 自律的이고 獨立的인 部分은 最大限 줄이고, 他律的이고 從屬的 歷史만을 强調한 것이다. 韓民族은 自律的인 歷史를 이루어내지 못하고 外勢에게 支配와 影響을 받음으로써 發展을 이룩해 왔다는 主張이다. 他律性論은 韓半島 의 地理的 特殊性을 强調함으로써 韓國 中國 大陸에 從屬的인 關係라는 것을 主張한다. 日本은 滿洲를 大陸 侵略에 있어 重要한 地域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韓國을 滿洲에 附屬시켜 韓國人의 主體性을 꺾을 必要가 있었다. 이를 爲해 日本은 韓國의 歷史는 獨自的이지 못하고 外勢의 干涉과 影響에 依해서 進行되었다고 主張하게 된 것이다. 植民史觀은, 朝鮮은 於此彼 他律的이고 從屬的인 歷史發展段階를 거쳤으므로 日帝가 朝鮮을 植民支配해도 不當하지 않다고 함으로써 他律性論으로 뒷받침한다.

正體性論 [ 編輯 ]

正體性論 (停滯性論)은 韓國은 歷史的으로 많은 社會的, 政治的 變動을 겪었음에도 不拘하고 社會秩序나 經濟가 全혀 發展하지 못했으며 近代로의 發展에 必要한 封建社會가 이룩되지 못하여 近代 初期에 이르기까지 古代社會 水準에 머물러 있었다는 主張이다. 社會經濟史學에서 이른바 '普遍的 歷史發展段階'는 原始共産制-古代奴隸制-中世農奴制-近代資本制-社會主義로 說明되는데, 植民史學者들은 19世紀 말 ~ 20世紀 初 韓國의 社會, 經濟體制의 水準이 日本의 古代社會 末期인 10世紀 警 후지와라(藤原) 時代, 곧 古代奴隸制 社會와 比肩된다고 主張하며 朝鮮의 封建制결輿論을 펼친다. 植民學者들은 이를 통해 窮極的으로 日本의 朝鮮 植民支配가 古代奴隸制 水準에 머물러있던 朝鮮의 社會, 經濟體制를 곧바로 近代資本제로 빠르게 발전시켰다는 主張을 폈다.

反論 (社會經濟史學) [ 編輯 ]

그러나 1960年 以後 大韓民國 社會經濟史學者들의 硏究에 따라 위의 '普遍的 歷史發展段階'는 西洋의 歷史에 맞는 틀이고, 韓國은 西洋과는 다른 形態로 社會가 發達했으며, 이 안에서도 繼續되는 社會的 政治的 變動으로 朝鮮 後期에는 資本主義 가 形成되기 始作하였다는 主張이 擡頭되었다. 代表的인 社會經濟史學者 中 하나인 백남운 은 高麗時代의 奴婢 制度가 外國의 封建制度와 類似한 形態이며, 朝鮮 後期를 '商品貨幣 經濟가 胎動하며 資本主義가 發達하는 時期'라고 主張함으로써 正體性論을 批判했다.

黨派性론 [ 編輯 ]

이러한 세 가지의 主張들 外에 黨派性론 (黨派性論)李 追加로 提起되었다. 韓民族의 民族性은 分裂性이 剛하여 恒常 內紛하여 싸웠다는 主張이다. [1] 韓民族의 病的인 血緣, 學緣, 支燃性과 排他性 및 黨罰性이 歷史現實로 反映되어, 서로의 理解만을 두고 祠堂(朋黨)들이 政爭을 일삼은 탓에 政權 爭奪戰에 執着하여 政治的 混亂, 社會的 弊端을 誘發하였기에, 이로 인해 朝鮮 王朝가 滅亡하게 된다는 主張이다. 黨派性論은 1907年 日本 學者 시데하라( 幣原坦 )가 創始하였는데, 그는 理論의 根據로서 宣祖 에서부터 英祖 에 이르기까지의 政治史를 客觀的으로 著述한 李建昌의 《黨議通略》 〈原論〉을 들었으며, 이는 性理學 및 兩班 中心의 政治를 反省한다는 黨議通略의 著述 目的을 忘却한 引用이었다. [2] 3.1運動 以後 오다 쇼고 , 세노 마구마( 瀨野馬熊 ), 아소 優美( 麻生武龜 ) 等을 筆頭로 ‘文化 政治’의 一環으로서 黨派性論은 더욱 具體化되었고, 甚至於 韓國人 學者들마저 그 主張을 批判 없이 受容하기에 이르렀다. [3]

反論 [ 編輯 ]

朝鮮의 朋黨 政治가 後期에 갈수록 變質된 것은 事實이나, 日帝가 主張한 黨派性論은 變質된 朋黨政治에 對해서만 지나치게 擴大 解釋한 것이며, 朝鮮의 朋黨은 오히려 王의 權力濫用을 牽制하는 機能을 가진다. 이것은 오늘날의 政黨과 類似한 機能을 가짐으로써 매우 發展된 政治形態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또 政治集團의 形成은 어느 나라에서나 있었으며, 現在 알려진 事實도 植民史學者에 依해 誇張되고 歪曲된 點이 많다. 또한, 變質된 朋黨政治를 抑制하기 위해 蕩平策 을 實施한 英祖·正祖 時代 以後 勢道 政治 가 登場하고 나서야 오히려 朝鮮 社會는 以前의 朋黨 政治 社會보다 더 腐敗하고 衰退하였다.

半島的 性格論 [ 編輯 ]

半島的 性格論 또는 半島士官 은 韓國史 舞臺의 地政學的 位置가 大陸과 海洋을 連結하는 半島에 있어 韓國史家 部數性과 주변性을 剛하게 띠고 있다는 主張이다. 卽 韓國史는 中國 本土에서부터의 勢力, 滿洲에서부터의 勢力, 海洋의 日本으로부터의 勢力 等 세 勢力의 影響을 크게 받았다는 것이다. 이 理論을 主張한 道理야마( 烏山喜一 ) 等의 學者는 韓半島가 地理的으로 巨大한 大陸 國家인 中國에 붙어 있음으로써 宿命的으로 外勢의 影響을 받게 되어, 結局 他律的日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4]

各州 [ 編輯 ]

  1. 國史 編纂 委員會; 國政 圖書 編纂 委員會 (2004年 3月 1日). 《高等學校 局社》. 서울: (週)두山. 382쪽.  
  2. 이태진 (1987). “黨派性론 批判”. 《韓國史 市民講座》. 1號 (서울: 일조각). 56-59쪽.  
  3. 이태진 (1987). “黨派性론 批判”. 《韓國史 市民講座》. 1號 (서울: 일조각). 61-64쪽.  
  4. 이기백 (1987). “半島的 性格論 批判”. 《韓國史 市民講座》. 1號 (서울: 일조각). 3-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