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성용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송성용 (宋成鏞 1913∼1999 2.8)은 韓國書藝의 獨自的 境地를 이룬 湖南 을 代表하는 書藝家이자 儒學者이다. 本貫은 여산 (礪山)이다. [1] 號는 剛庵으로 奸才 戰友의 弟子인 留在 송기면의 3男 1女中 셋째로 1913年 7月9日 全羅北道 김제시 백산면 상정리 撩跤 마을에서 태어났다. 일찍히 前, 예, 해, 行, 初 5體는 勿論이고 대나무, 蘭草, 梅花, 國花, 소나무, 芭蕉, 怪石 等 다양한 素材의 文人畫에 一家를 이루었으나, 1956年 韓國戰爭 이 끝나고 外部의 勸告에 못 이겨 大韓民國書藝大展 에 出品해 行書와 火粥 2點을 出品해 入選하면서 有名해졌다.

書藝 뿐만 아니라 民族意識 이 强한 儒學者 로 日帝時代 創氏 誡命을 하지 않고 죽기 直前까지 步撥과 韓服을 지키며 살았는데, 사람들이 "時代가 달라졌는데 왜 不便하게 사느냐”고 하는 質問에 늘 "나를 平生 지켜준 게 갓과 상투요”라고 對答하며 限平生 선비로서의 剛直함을 지키면서 보냈다고 한다.

강암 先生의 作品은 湖南을 비롯한 全國 各地에 鼻紋 懸板 等 數千餘點이 散在해 있다. 그 中에서도 湖南第一門, 內藏山내장사, 吐含山石窟庵, 頭輪山大芚寺, 佛國寺紫霞門, 佛國寺佛國船員, 원覺醒존소태산大宗師悲鳴, 年指紋, 금산사報祭루, 白羊寺華嚴前, 화엄사寂滅當, 金烏山향일암, 동춘송先生遺墟碑, 神道碑 等이 代表作으로 꼽힌다.

강암 先生은 書藝에 大寒無限 愛情으로 平生 모았던 作品들과 함께 6億원을 寄附하며, 書藝를 體系的으로 振興 保存하고 後進을 養成하기 위한 剛庵서예館과 '강암書藝學術財團'을 設立했다.

家族關係 [ 編輯 ]

  • 1男 송하철 : 全州市長 (官選)
  • 2男 송하경 : 성균관대 遊學大學長
  • 3男 송하춘 : 고려대 文科大學長
  • 4男 송하진  : 全州市長, 全羅北道知事 (民選)
  • 2女 송현숙 : 書藝家

各州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