普天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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普天敎 (普天敎)는 강증산(姜甑山, 本名: 강일순 , 1871~1909)의 高弟(오랜 옛 弟子)였던 차경석 (車京石, 本名: 차윤홍, 1880∼1936)李, 1909年 增産 ( 강일순 )이 病으로 죽은 後, 1921年 最初로 形成한 敎團이다.

歷史 [ 編輯 ]

강증산(本名 강일순 )의 計杯 妻戚 異種妻男 차경석 (車京石, 1880年 陰曆 6月 1日~1936年 潤 3月 10日)은 甑山의 1909年 事後 1周忌, 1910年 처음에는 차경석 自身의 姨從四寸 누나이자 甑山의 第2夫人인 高氏 (高氏)를 敎主로 받들었으나, 漸次 勢力을 擴張하고 分立하여 스스로 後天開闢의 門路가 自己에 依하여 열린다고 自負하고 敎團을 세워 1921年에는 보화교(普化敎)라는 校名과 '時局(時國)'이라는 國號를 宣布했으며 1922年에는 校名을 普天敎로 바꾸었다. 또한 普天敎는 敎化 方式에 60方舟(方主)라는 强力한 組織을 갖추어 한때 全國(當時의 人口 數 約 2000萬餘名)에 걸쳐, 이른바 時局(時國)의 國交(國敎)인 普天敎(普天敎)의 信徒數가 600萬에 이른 때도 있었다.

當時 그는 全羅北道 井邑 (井邑)에서 大韓帝國 ( 朝鮮 )을 宗主國으로 하고 精巧 兩面에서 世界統一(世界統一)의 新政府(新政府)가 세워질 것이라 善戰하고 이를 合理化하기 위해 鄭鑑錄 을 動員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스스로 天子의 자리에 登極하여(등극설), 그 權威를 示現하기도 했으나 日帝의 强力한 彈壓과 自體 內의 分裂 等으로 衰退하였다.

차경석이 죽은 後 普天敎에서는 신파·舊派의 分裂이 일어났다. 차경석의 敎義를 信奉하고 그를 普天敎의 敎祖로 받드는 新派와 增産을 敎祖로 하고 차경석을 敎主로 보는 舊派는 차경석 生存時부터 勢力이 나뉘어 있다가 1954年 에 城西刊行(聖書刊行)과 敎主의 營爲本案(靈位奉安)을 둘러싸고 衝突하여 信徒는 흩어져 派閥로 瓦解되었다.

批判 [ 編輯 ]

全羅北道 고부 出身의 강일순 (姜一淳, 1871年 陰曆 9月 19日~1909年 陰曆 6月 24日)으로부터 생겨난 繒山橋 강일순 은 特別히 宗派를 만들지 않았고, 오로지 卑怯에 빠진 人間과 신명을 널리 건져 地上仙境(地上仙境)을 열기 위한다는 '天地공사'에만 邁進한 人物로 알려져 있다. 1909年 姜一淳의 事後, 그의 夫人인 수부 고판례가 仙道敎를 만든 것이 甑山敎의 始初이다. 以後 甑山 姜一淳의 弟子이며 高夫人側의 側近이었던 차경석이 고판례의 仙道敎로부터 分離되어서 普天敎라는 繒山橋 系列의 最大 宗派를 만들었으며 信者間에 內部的 葛藤을 겪으면서 여러 細部 宗派로 갈라지게 되었다.

한便 弟子로 있던 人物들이 '天地공사'가르침을 自體的으로 硏究하여 여러 宗派를 세웠다. 日帝强占期 에는 民族宗敎로 彈壓을 받으며 解體一路에 있다가 光復 以後, 수많은 繒山橋團들이 다시 復活하여 亂脈을 이루는데, 이 中에서 普天敎의 信者로서 推定되는 안운산이라는 人物이 剛增産의 敎理를 硏究하여 새로운 宗派를 세운 것이 증산도의 前身이다.

한便 1909年 강증산 이 39歲의 나이에 죽으면서 마지막 遺言을 남겼는데 單純한 內容이었다. “나는 간다. 내가 없다고 조금도 落心하지 말라. 行하여 오던 대로 잘 行해 나가라.” 平素에도 늘 惑世誣民하지 말라 가르쳤고 병든 것을 낫게 하려고 애쓰던 길지 않은 生涯였지만 바램과는 달리 甑山敎는 여러 派로 갈라져 仙道敎  · 普天敎(普天敎)  · 彌勒佛敎(彌勒佛敎)  · 第華僑(濟化敎)  · 太乙敎(太乙敎) 等 數十 個의 獨立敎壇이 亂脈相을 이루며 創設되었다. 實際로 一部 信者들의 祈福的이고 呪術的 思考方式으로 인해 種種 社會 問題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리고 現在까지 그런 指彈을 받는 모습도 一部 남아 있다. [1]

各州 [ 編輯 ]

  1. 宗敎學大辭典(1998年 韓國事前硏究士 出版) 參照

같이 보기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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