辯舌號
(卞雪?,
日本式 이름:
星下榮次,
1888年
6月 12日
(
陰曆 5月 3日
) ~
1976年
)는
韓國
의
佛敎
僧侶이다. 法名은 零細(榮世), 號는 초우(草牛)이다.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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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尙南道
陜川郡
出身이다. 48歲 때인
1935年
에
金剛山
楡岾寺
講主로 있다가
京城府
의 楡岾寺 京城布敎堂에 布敎師로 赴任해 오면서 처음 公式 記錄에 모습을 드러낸다.
서울로 올라와 布敎 活動을 하던 中,
1937年
中日 戰爭
이 勃發했다. 戰爭으로 인해
中國
에서 戰死한
日本軍
戰死者가 續出하여 서울로 遺骨이 運搬되어 오기 始作했는데, 辯舌號는 용산의
朝鮮軍司令部
에 가서 讀經과 焚香을 했다. 이런 일은 戰爭이 持續되면서 繼續되었고, 日本軍 勝利를 祈願하는 祭祀를 올리고 國防獻金을 獻納하였으며 出征하는 日本軍을 直接 送迎하는 等 戰爭 支援에 積極 參與하여 功을 認定받았다.
當時 陜川
海印寺
가 選擧를 통해 住持를 選出하고도 두 次例나 總督府의 認可를 받지 못해 住持職이 公席으로 남아 있었다. 總督府는
1938年
警察官을 陪席시켜 海印寺 住持 選擧를 實施하였고, 이 절과는 아무런 緣故가 없는 辯舌號가 出馬하여 當選되었다. 總督府의 庇護로 州支持에 當選된 辯舌號는 國防獻金 募金에 積極 나섰으나, 寺刹의 負債를 整理하고 建物을 修理하여 信徒를 모으는 데 努力도 기울여
1941年
住持 選擧에서 再選되었다.
그러나 두 番째 任期 中인
1943年
에 海印寺에서는 두 가지 불미스러운 事件이 벌어졌다. 첫 番째는 辯舌號 以前에 海印寺 住持 選擧에 當選되었으나 總督府의 認可를 얻지 못했던
이고경
의 獄事 事件이다. 이고경과
임환경
은 海印寺 講院에서 講義하며 學僧들에게 佛敎經典 外에 歷史와 같은 다른 科目을 가르쳤는데, 辯舌號가 이를 抗日 敎育이라며 日帝 警察에 密告한 것이었다. 이는 다음 주지 選擧를 1年 앞두고 海印寺에서 信望이 두터운 두 사람을 競爭者로 여긴 辯舌號의 誣告로 推定된다. 《
壬辰錄
》 等 不穩 書籍을 갖고 있던 이들은 弟子들과 함께 連行되어 甚한 拷問을 받았고, 이 中 이고경은 生命이 危篤해져 풀려난 直後 死亡했다.
두 番째는 海印寺 홍제암에 세워져 있던
四溟大師
瓢蟲費가 日本 刑事들에 依해 破壞된 事件이다. 이들은 四溟大師 瓢蟲費에 새겨진 四溟大師와
가토 기요마사
의 對話 部分 等을 問題 삼아 瓢蟲費를 정과 망치로 깨어뜨리고, 부서진 碑石을 警察駐在所의 디딤돌로 使用했다. 이런 일이 벌어진 데에는 辯舌號의 事前 內諾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두 事件으로 많은 怨恨을 산 辯舌號는
1944年
住持 選擧에서 落選했다. 光復 直後에는 이고경 獄事 事件 때 逮捕되었던 僧侶 한 名에게 칼을 맞는 일도 있었다.
1946年
朝鮮 佛敎界는 四溟大師 瓢蟲費 破壞 事件의 責任을 물어 辯舌號의 勝權을 빼앗고 절에서 내쫓는 重懲戒를 내렸다.
反民族行爲處罰法
이 施行된
1949年
에 辯舌號度 密告者로 起訴되었으나 反民特委가 解體되면서 處罰을 받지 않았다.
1975年
佛敎 宗團인
대한불교總和種
이 出帆하면서 辯舌號를 宗正으로 推戴하여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듬해 89歲의 나이로 死亡했다.
事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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辯舌號가 日本 警察과 公募해 깨뜨린 四溟大師 瓢蟲費는
1947年
에
변영로
가 새로 碑文을 지어 다시 세워졌는데, 辯舌號와 그 무리들을 가리키는 "절 안의 벌레"라는 句節이 書頭에 적혀 있다.
1948年
發行된 《佛敎》에도 "變한(卞漢)과 그 一黨으로 하여금 같은 模樣의 惡刑으로 그 罪를 속케 할지니"라며 辯舌號에 對한 佛敎界의 公憤을 담은 글이 남아 있다.
고은
의 《만인보》 中 〈辯舌號〉라는 詩에도 辯舌號가 親日 僧侶로 登場한다. 고은은
4·19 革命
直後 海印寺에 暫時 머물 때 辯舌號를 만났던 것으로 알려졌다.
[1]
2008年
民族問題硏究所
가 發表한
民族問題硏究所의 친일인명사전 收錄豫定者 名單
中 宗敎 部門에 包含되었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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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考資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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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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