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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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충원 (朴忠元, 1507年 尹1月 16日 [1] ~ 1581年 2月 ) 朝鮮 中期의 文臣으로, 字는 중초(仲初), 號는 낙촌(駱村)·정관재(靜觀齋) [1] , 本貫은 密陽 (密陽)이다. 박광영 (朴光榮)의 孫子이자 박계현 (朴啓賢)의 아버지이다.

生涯 [ 編輯 ]

일찍이 外叔父 基準 (奇遵)의 門下에서 修學했다.

1528年 (中宗 23) 生員試(生員試)에 壯元으로, 進士試(進士試)에 部長원으로 合格했으며, 1531年 (中宗 26) 文科에 及第했다. [1]

1533年 (中宗 28) 州서(注書)로서 武科 實施 方法에 對해 아뢰었으며 [2] , 이듬해 奉敎(奉敎), 全的(典籍), 정언(正言), 또 그 이듬해 吏曹佐郞(吏曹佐郞)을 거쳤다. [1]

1536年 (中宗 31) 4月 다시 正言으로 任命되었다가 11月 弘文館敎理(弘文館校理)로 옮겼으며, 12月 病이 있던 임억령 (林億齡) 代身 遠接使(遠接使)의 從事官(從事官)으로 任命되었다. [2]

이듬해 兵曹正郞(兵曹正郞), 吏曹正郞(吏曹正郞)을 거쳤으며, 祖父 박광영 (朴光榮)의 喪을 當하자 故人인 아버지 박조(朴藻)를 代身해 喪服을 입었다.

喪을 마친 後 承文院校檢(承文院校檢)을 거쳤다가 1541年 (中宗 36) 寧越郡수(寧越郡守)로 나갔다.

當時 3名의 郡守가 連이어 죽어서 民心이 洶洶했는데, 박충원이 祭文을 지어 斷種 (端宗)의 墓에 祭祀를 지낸 後 사람을 시켜 지키니, 5年 동안 在職하면서 頉이 없었다고 한다.

1545年 (明宗 卽位年) 任期를 마치기 前에 召喚되어 遠接使 정사룡 (鄭士龍)의 從事官으로 任命되었으며, 直講(直講), 奉常寺僉正(奉常寺僉正), 軍資監僉正(軍資監僉正), 軍資監否定(軍資監副正), 四星(司成)을 거쳤다.

이듬해 外職人 成川府使(成川府使)로 任命되었으나 辭職했으며, 重視(重試)에 뽑혀 禮賓寺情(禮賓寺正)으로 昇進했다가 右通禮(右通禮)·校書館板橋(校書館判校)로 옮겼다. [1]

1548年 (明宗 3) 2月 左通禮(左通禮)로서 慶尙右道(慶尙右道)에 派遣되어 百姓을 救恤했으며, 9月 領議政(領議政) 홍언필 (洪彦弼)에게 几杖(?杖)을 하사하는 敎書(敎書)를 지었다.

1550年 (明宗 5) 1月 同副承旨(同副承旨), 4月 右副承旨(右副承旨), 尹6月 大司成(大司成)을 거쳤다가 7月 다시 右副承旨로 任命되었다. [3]

같은 해 어머니의 喪을 當해 廬墓(廬墓)살이를 했으며, 喪을 마친 後인 1553年 (明宗 8) 大司成, 黃海道道觀察使(黃海道都觀察使), 이듬해 刑曹參議(刑曹參議)를 거쳤다. [1]

1556年 (明宗 11) 세 番째로 右副承旨로 任命되었으며, 1558年 (明宗 13) 4月 左承旨(左承旨)로서 의주목(義州牧)의 飢饉이 甚함을 아뢰었다.

5月 都承旨(都承旨), 8月 5日 右尹(右尹), 8月 15日 兵曹參判(兵曹參判)를 거쳤으며 [3] , 以後 밀援軍(密原君)으로 封해졌다. [1]

1560年 (明宗 15) 7月 禮曹參判(禮曹參判), 8月 大司憲(大司憲)을 거쳤다가 이듬해 全羅道道觀察使(全羅道都觀察使)로 나갔는데, 1562年 (明宗 17) 4月 옥구현(沃溝縣)의 貢物을 蠲減(?減)해 줄 것을 請해 3分의 2를 減免받게 했다.

8月 左尹(左尹), 10月 右尹, 이듬해 淸洪道道觀察使(淸洪道都觀察), 또 그 이듬해 2月 弘文館提學(弘文館提學), 3月 兵曹參判, 9月 大司憲을 거쳤다가 10月 特旨(特旨)로 刑曹判書(刑曹判書)로 任命되었다.

1565年 (明宗 20) 1月 王命으로 洪暹 (洪暹)· 윤춘년 (尹春年)과 함께 成均館 (成均館)에서 製述 試驗을 主管했으며, 12月 戶曹判書(戶曹判書), 이듬해 1月 兵曹判書(兵曹判書)를 거쳤다.

4月 閔箕 (閔箕)와 함께 새 大提學(大提學) 候補로 定해졌는데, 박충원이 洋館(兩館) [4] 의 大提學으로 揀擇되었다.

1567年 (明宗 22) 1月 4日 禮曹判書(禮曹判書), 1月 18日 知中樞府事(知中樞府事)를 거쳤으며, 5月 遠接使로서 明의 使臣을 接待했다. [3]

10月 禮曹判書를 거쳐 1569年 (宣祖 2) 尹6月 吏曹判書(吏曹判書)로 옮겼으나 [5] , 7月 大司憲 백인걸 (白仁傑)이 自身을 彈劾하려 하자 病을 핑계로 辭職했다. [6]

이듬해 禮曹判書, 또 그 이듬해 1月 吏曹判書, 6月 右贊成(右贊成), 12月 右參贊(右參贊), 1572年 (宣祖 5) 11月 刑曹判書, 12月 工曹判書(工曹判書)를 거쳤다. [5]

1576年 (宣祖 9) 7月 다시 吏曹判書로 任命되었으나, 弘文館과 臺諫(臺諫)의 彈劾을 받았다. 이때 王이 彈劾을 允許하지 않았지만 病을 핑계로 辭職했다. [6]

이듬해 9月 왕이 文廟(文廟)를 拜謁할 때 號가(扈駕)했는데, 病으로 집에 돌아갔으며, 以後 餘生을 杜門不出하며 지냈다.

1581年 (宣祖 14) 享年 75歲로 拙했으며 [1] , 1758年 (英祖 34) 聞慶(文景)이라는 諡號가 내려졌다. [7]

事後 [ 編輯 ]

박충원 墓 》는 京畿道 高陽市 德陽區 에 있다. 1989年 10月 23日 고양시의 鄕土遺跡 第26號로 指定되었다.

家族 關係 [ 編輯 ]

  • 曾祖 - 朴瀰 (朴楣, 1433年 ~ 1491年 ) : 禮曹參議(禮曹參議)
    • 祖父 - 박광영 (朴光榮, 1463年 ~ 1537年 ) : 慶州府尹(慶州府尹), 밀성군(密城君)
      • 아버지 - 박조(朴藻, 1482年 ~ 1521年 ) [8]  : 歸厚署別除(歸厚署別提), 增(贈) 吏曹判書(吏曹判書)
      • 어머니 - 副應敎(副應敎), 增 吏曹參判(吏曹參判) 기찬(奇?, 1424年 ~ ?)의 딸 [8]
        • 동생 - 박효원(朴孝元, 1511年 ~ ?) [8]  : 義禁府經歷(義禁府經歷)
        • 夫人 - 添丁(僉正) 이인수(李麟壽)의 딸 [8]
          • 長男 - 박계현 (朴啓賢, 1524年 ~ 1580年 ) : 知中樞府事(知中樞府事)
          • 次男 - 박응현(朴應賢) [1]  : 典艦司別除(典艦司別提)
          • 3男 - 박용현(朴用賢) [1]  : 漢城府參軍(漢城府參軍)
          • 4男 - 박호현(朴好賢, 1550年 ~ ?) [1]  : 生員(生員), 박안행 (朴安行, 1578年 ~ 1656年 )의 아버지
          • 첫째 사위 - 李源性(李元成) [1]  : 水軍節度使(水軍節度使), 이정규 (李廷圭, 1587年 ~ 1643年 )의 祖父
          • 둘째 사위 - 윤의로(尹毅老) [1]
          • 셋째 사위 - 新事情(申士楨) [1]  : 主婦(主簿)

各州 [ 編輯 ]

  1. 『박충원 信徒悲鳴』
  2. 『中宗實錄』
  3. 『明宗實錄』
  4. 弘文館 (弘文館)· 藝文館 (藝文館)을 함께 指稱하는 말
  5. 『宣祖實錄』
  6. 『先祖修正實錄』
  7. 『承政院日記』
  8. 『박광영 墓碣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