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테오스 餓死니스 칸다쿠지노스
(
그리스어
:
Ματθα?ο? ?σ?νη? Καντακουζην??
, 1325年頃 - 1383年 또는 1391年)는 1357年부터 1353年까지
東로마 帝國의 皇帝
였고, 1380年부터 1383年까지
모레아
의
데스包테스
였다.
生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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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테오스 餓死니스 칸다쿠지노스는
腰眼니스 칸타쿠지노스
와
이리니 餓死니나
의 長男이었다.
腰眼니스 5歲
와의
싸움
에서 아버지에게 支援을 베푼의 代價로 그는 1347年 腰眼니스 6世에게
트라키아
의 一部를 領地로서 讓渡받았고, 1353年 腰眼니스 5世와 全面的인
內戰
이 勃發하자 共同 皇帝로 宣布되었다.
그라티네
를 中心으로 한 트라키아 領土에서 마테오스는
세르비아 帝國
에 對한 여러 戰爭을 主導했다. 그가 1350年에 準備한 攻擊은 그의
오스만 帝國
支援軍들의 脫走路 挫折되었다. 그러나, 5000名의
튀르크人
들와 함께 그는 세르비아 - 東로마 國境을 따라 그의 옛 領土을 다시 再建하기 위해 試圖했지만
세레스
를 占領하는 데 失敗했고, 곧 1356年 말이나 1357年 秒에 隣近의 主要 要塞인
드라마
의 主人
보이흐나
가 이끄는 세르비아 軍隊에게 敗北했다. 세르비아人들은 마테오스를 몸값을 받고 釋放할 意圖로 붙잡지만, 요안니스 5世는 마테오스의 領地를 차지하기 위해서 빠르게 움직였다. 腰眼니스 5世는 보이흐나에게 마테오스를 넘겨주는 條件으로 훨씬 더 많은 金額을 提案했다.
테네도스
에 마테오스를 投獄한 後,
프란체스코 1歲 街틸루시오
의 監視 아래
레스보스
에 가둔 後 腰眼니스 5世는 그를 强制로 皇帝의 稱號를 抛棄하도록 풀어주고, 1361年
모레아
로 보내져, 그곳에서 統治하고 있던 그의 兄弟
마누日 칸타쿠지노스
와 合流하였다. 1380年 그의 兄弟 마누엘이 죽은 以後, 마테오스는 1381年 새로운 總督으로
테오도로스 1歲 팔레올로고스
가 任命되고 1382年 到着할 때까지 모레아를 統治했다.
칸타쿠지노스 家門
에서
팔라이올로고스 家門
으로 모레아에서 權力이 完全히 넘어가기 前에 마테오스는 모레아에서 그의 아들인
디미트리오스 1歲 칸타쿠지노스
에게 權力을 辭任했다.
家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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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41年 秒에
테살로니카
에서 結婚한 아내
이리니 팔레올로器나
와의 膝下에 알려져있는 5名의 子女가 있다.
[1]
- 腰眼니스 칸타쿠지노스
,
데스포티스
- 디미트리오스 칸타쿠지노스
,
세바스토크라토르
- 테오도라 칸타쿠지니
- 살로나 伯爵
루이스 파드리케
와 結婚한
엘레니 餓死니나 칸타쿠지니
- 腰眼니스 라스카리스 칼로페로스와 結婚한 마리아 칸타쿠지니
- (아마도)
테오도로스 칸타쿠지노스
,
駐프랑스
베니스
의 大使
[2]
出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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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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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Donald M. Nicol,
The Byzantine Family of Kantakouzenos (Cantacuzenus) ca. 1100-1460: a Genealogical and Prosopographical Study
(Washington, DC: Dumbarton Oaks, 1968), pp. 121f, 156-164
- ↑
Donald M. Nicol,
The Byzantine Family of Kantakouzenos: Some Addenda and Corrigenda, Dumbarton Oaks Papers, Vol. 27
(1973), p. 3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