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웅禹 王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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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웅禹 王朝 ( 1531年 ~ 1752年 )는 버마 王朝 이다. 버間 王朝 가 滅亡한 다음 버마 地域에는 샨족 잉와 , 버마族 의 따웅禹, 몬族 버고 (紅絲워디) 等 3王朝가 竝立했는데 따웅禹 王朝가 强力해져서 버마를 再統一했다. 16世紀 後半 바인나웅 王 때 現在의 미얀마 以外에 타이 , 라오스 地域까지 進出해 란나 를 服屬시키고 一時的으로 란雙 王國 , 아유타야 王國 까지 占領했으나, 後代 王들의 타이 를 겨냥한 擴大 政策이 버마, 타이 兩國의 國力을 疲弊하게 만드는 結果를 낳게 되었다. 수도 는 海岸 地域의 高度(古都) 버고 에 두었으며, 포르투갈 이나 에스파냐 의 商人이 來往하였다. 後에 首都는 잉와로 옮겨졌고 海岸 地域 몬族의 叛亂으로 滅亡했다.

따웅禹 王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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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1年 ~ 1752年
수도 따웅禹
政治
政治體制 君主制
立法府 흘루따우
人文
公用語 버마語
民族 버마人
經濟
通話 간자 짯 銀貨 짯
宗敎
國校 上座部 佛敎
기타
現在 國家 미얀마의 기 미얀마

始初 [ 編輯 ]

1280年 두 名의 버마族 兄弟가 따웅禹 山脈 사이에 防壁을 치고 마을을 만든 것이 따웅禹 王國의 首都 따웅禹 의 始初이다. 當時 따웅禹 山脈은 버間 王朝 의 影響圈 안에 있었는데, 버間의 王權을 認定하지 않는 많은 버마族들이 移住하여 大都市 따웅愚를 形成하였다. 이곳은 險峻한 버고 山脈 의 한가운데에 있어 東北部의 샨족과 中央 平原地로부터의 攻擊을 最少化할 수 있는 天惠의 要旨였다. 그러나 잉와 王國 의 統一 政策에 휩쓸려 따웅우는 結局 얼마間 잉와의 支配 아래 놓였다가 16世紀 들어 잉와가 弱해지자 獨立하게 되었다.

기틀을 다진 君主 민찌뇨 [ 編輯 ]

16世紀 初 따웅友誼 指導者 민찌뇨 는 勇猛한 武士로, 衰落한 잉와의 王 슈웨난쪼신 과 協商하여 그의 딸을 아내로 맞고 中部 버마 關係數의 供給地 짜욱세 를 얻어 王國의 기틀을 다졌다. 민찌뇨는 이에 滿足하지 않고 周邊의 잉와 王國 管轄知人 야메띤 , 따웅뇨 , 뺘가웅 , 슈웨墓 , 낀따 等을 손에 넣음으로써 버마 統一의 기틀을 다졌다. 또한 그는 都城인 따웅禹 城 안에 巨大한 人工 湖水를 造成하여 食水 問題를 解決하고, 農土와 果樹園 開墾 事業에 熱意를 보이기도 했다. 이에 버고와 란나 王國은 민찌뇨를 한 王國의 支配者로서 認定하게 되었다.

떠빈슈웨티와 버마의 統一 [ 編輯 ]

바인나웅과 膨脹 政策 [ 編輯 ]

난다버인과 아유타야 戰爭 [ 編輯 ]

强力한 法을 통해 占領地를 統合하려 했던 바인나웅의 政策은 그 自身의 軍事的 手腕에 依해 그나마 維持되고 있을 뿐이었기 때문에, 바인나웅 事後 征服地에서 大大的인 叛亂이 發生하였다. 뒤를 이은 난다버인 (在位 1581~1599)은 先王의 名으로 라카인 攻擊에 나섰던 軍隊를 불러들여 一旦 이를 진정시키고 난다버인의 三寸이 榮州로 있으면서 王位 簒奪을 노리던 잉와 地域을 안정시켰으나, 以後에도 잉와 地域의 叛亂은 멈추지 않았다. 이때 잉와 征伐에 同參한 아유타야의 나렛 王子는 아유타야의 獨立을 爭取할 속셈으로 機會를 엿보고 있다가 난다버인의 軍隊를 攻擊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를 알아차린 난다버인은 故意로 敗北한 것처럼 所聞을 퍼뜨렸고, 이에 나렛 王子는 버고 地域으로 들어갔으나 곧 난다버인의 追擊이 있자 이를 따돌리고 아유타야로 돌아갔다.

아유타야가 이렇게 反旗를 들자 난다버인은 1584年 大規模 아유타야 攻擊을 敢行했다. 初期에는 따웅友軍이 밀고 들어왔으나, 나렛 王子는 치앙마이 아유타야 를 비우고 退却하는 請야 戰術 을 使用하여 傳貰를 逆轉시켰고, 戰爭을 勝利로 이끌었다. 그러나 버마에 友好的이었던 屬國 캄보디아 의 後方 攻擊으로 因해 아유타야軍이 退却하는 따웅友軍을 國境 밖으로 追擊하지는 못하였다. 以後 1585年과 1586年 난다버인은 아유타야에 다시 戰爭을 걸었으나, 두 番 모두 敗北하였다. 연이은 戰爭 敗北로 버마의 民心은 洶洶해졌으나, 난다버인은 反對者를 無慈悲하게 肅淸하며 또 한 番의 아유타야 攻擊을 準備하였다. 그러나 1590年의 4次 侵攻과 1592年의 5次 侵攻에서도 王位에 오른 나렛 王子, 나레수안 大王 의 手腕에 말려 連이어 大敗하였다. 오히려 나레수안 王은 캄보디아를 攻擊해 服屬시켰고, 下部 버마를 攻擊하는 等 氣勢를 올렸다.

한 番도 이기지 못하면서 연이은 戰爭만을 繼續하는 난다버인에 對한 不滿은 이제 臨界點에 達하여, 삐의 領主였던 난다버인의 아들이 삐 地域의 獨立을 宣布하고 이어 따웅禹, 치앙마이, 잉와의 영주도 獨立을 宣布하였다. 또 이를 틈타 아유타야의 나레수안은 치앙마이를 服屬시켰다. 이런 狀況에서 王位 簒奪을 노리는 따웅友誼 영주는 라카인을 끌어들여 首都 버고를 占領하고 난다버인을 生捕하였으며, 따웅禹 榮州君이 돌아간 後 라카인軍은 버고를 掠奪했다. 이들이 돌아간 後 아유타야의 나레遂安이 버고에 攻擊해 들어왔으나 廢墟가 된 버고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여 붙잡힌 난다버인의 降伏을 받기 위해 다시 따웅禹-라카인君을 攻擊하였지만 勝利하지 못했다.

냐웅얀의 卽位와 냐웅얀 王朝 [ 編輯 ]

아유타야 戰爭의 影響으로 國力을 엄청나게 消盡한 버마 地域에서는 여러 軍閥들이 亂立하고 있었다. 이 時期에 포르투갈 드 브리투 (De Brito, 버마式으로 응아진까)가 下部 버마에서 勢力을 擴張하고 있었고, 삐, 따웅禹, 잉와 等이 各各 獨立的인 勢力을 構築하여 버고 中心의 正統 政權에 맞섰다. 난다버인의 뒤를 이어 王位에 오른 난다버인의 동생 냐웅얀 (在位 1599~1605)은 냐웅얀 地域을 中心으로 影響力을 擴張하여 잉와를 接受하였고, 以後 버고와 삐의 殘存勢力을 吸收하여 잉와에서 戴冠式을 올렸다. 그러고 나서 냐웅얀은 다시 버마의 統一을 위해 征服戰爭을 벌였으나 病에 걸려 얼마 못 가 숨졌다. 以後의 이 냐웅얀의 血統을 中心으로 하는 따웅禹 王朝를 냐웅얀 王朝 라고도 하는데, 이제부터는 따웅禹 地域이 獨立的인 役割을 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또 廢墟가 된 버고 亦是 政治的 機能을 제대로 遂行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王國의 政治的 中心은 잉와 地域으로 移動하였다.

亞나욱펫룬과 포르투갈人의 政治的 消滅 [ 編輯 ]

냐웅얀의 아들 亞나욱펫룬 (在位 1605~1628)은 다시 統一 戰爭을 벌여 1610年까지 삐와 따웅愚를 再編入하고 드 브리套의 勢力을 攻擊하여 平定하였다. 나아가 포르투갈系 殘餘 勢力을 라카인의 王이 殲滅하여, 버마에 勢力圈을 構築하려던 포르투갈의 試圖는 完全히 挫折되었다. 以後 亞나욱펫룬은 치앙마이를 재복속하여 조금 더 勢力을 擴張하고, 버고에 王城을 다시 지어 버고를 부흥시키려 努力하였으나, 아들 民藝데益바와의 癡情 事件에 휘말려 殺害되었다.

따룬의 安定期 [ 編輯 ]

따룬 (在位 1629~1648)은 前 王들과는 다르게 統一을 目標로 한 膨脹 政策보다는 現狀維持만을 目標로 하였다. 라카인과는 同盟을 맺었고, 타이의 아유타야 王國과도 友好를 增進시키는 한便, 아유타야가 샨족의 叛亂을 刺戟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暫時의 安定 後 다시 1634年 몬族의 叛亂이 發生하여 이를 鎭壓한 따룬은 다시 首都를 不安定한 下部의 버고에서 上部의 잉와로 옮기게 된다. 以後 따룬은 新進 勢力으로 登場한 네덜란드 와도 友好를 敦篤히 하여 마침내 完全히 國內外의 政治狀況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따룬은 內治에 注力하여, 짜욱세의 灌漑施設을 改修하여 農土를 넓히고 全國的인 人口調査 를 施行하였으며, 이에 따라 稅法 을 明確히 하고 地域의 單位 人口 數와 農土의 크기에 따른 稅金 徵收 體系를 確立하였다. 또한 慣習法 을 손질하여 整理하고 새로운 法典을 編纂하였는데, 이 法典은 以前처럼 팔리어 로만 作成하지 않고 一般 民衆도 읽을 수 있도록 버마語 로 作成한 것이었다. 따룬은 信實한 佛敎 信者로서 佛敎 建築物 造成에도 힘썼으며, 佛敎의 淨化를 위해 努力하여 僧侶들이 戒律을 보다 嚴格히 지키도록 하였다.

衰退期 [ 編輯 ]

따룬 以後 따웅禹 王朝의 버마는 徐徐히 沒落의 길을 걷게 되었다. 따룬 時期에 내치는 安定되었으나 거꾸로 긴 平和 때문에 神經쓰지 않은 軍事力이 弱해졌고, 그의 뒤를 이은 삔들레 (在位 1648~1661)의 時期에는 南冥 의 마지막 皇帝를 求心點으로 하는 敗殘兵으로 構成된 流入 勢力이 北東部에서 마음껏 掠奪을 벌이며 활개를 치는 것조차 제대로 統制하지 못하였다. 이들은 다음 王인 (在位 1661~1672) 왕 時期에 으로 引渡되었으나, 王의 權威는 이미 相當히 弱化되어 있었다. 이를 挽回하기 위해 민예쪼틴 (在位 1673~1698) 王은 아유타야 征伐을 試圖해 보지만 無慘히 失敗하여 王權은 더욱 弱化되어 버렸다. 유럽의 英國 과 네덜란드, 프랑스 勢力에 對해서도 外交的 主導權을 잡지 못하고 끌려다니기만 하는 狀況이 持續되었다.

나중에는 란나 王國도 獨立을 宣言하고, 바인나웅 時代에 服屬시켰던 印度 東部의 마니푸르 와의 戰鬪에서도 敗北하여 國王 뜨닌가누웨 (在位 1714~1733)가 戰死하는 等 周邊 勢力의 持續的인 領土 蠶食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結局 따웅禹 王朝는 몬族과 프랑스 聯合軍에 依해 王宮이 점령당하고 王이 捕虜로 잡히는 受侮를 겪으며 滅亡하기에 이르렀다.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 文獻 [ 編輯 ]

  • 金成願, 《미얀마 王朝史》, 부산외국어대학교 出版部, 2001, 157-1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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