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韓獨立軍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對한 獨立軍
大韓 獨立軍
韓國의 獨立運動 , 삼鈍者 戰鬪 , 봉오동 戰鬪 , 靑山裏 戰鬪 에 參戰
대한독립군의 사령관 홍범도
大韓獨立軍의 司令官 洪範圖
活動期間 1919年 ~ 1921年 6月
理念 韓國 民族主義
指導者 司令官 洪範圖

副司令官 주건 參謀長 박경철

活動地域 滿洲
兵力 約 600 - 1400名
上位團體 大韓國民會
同盟團體 大韓國民會

大寒群舞都督府
國民回軍
大韓臣民團

敵對國家 일본 제국 日本 帝國
參與한 戰鬪 韓國의 獨立運動
삼鈍者 戰鬪
봉오동 戰鬪
靑山裏 戰鬪

大韓獨立軍 (大韓獨立軍, Korean Independence Army)은 1919年 洪範圖(洪範圖)가 義兵 出身을 中心으로 創設한 抗日 獨立軍 部隊로 間島국민회와 聯合하여 活潑한 國內眞空作戰을 펼쳤으며, 봉오동戰鬪와 靑山裏戰鬪의 勝利에 크게 寄與하였다.

創設 [ 編輯 ]

3·1 運動 以後 洪範圖(洪範圖)를 司令官으로 하여 副司令官 주건(朱建), 參謀長 박경철(朴景哲)로 創設되었다. [1]

洪範圖 將軍은 乙未事變 以後 京畿, 講院地方 等에서 日本軍 10名을 射殺하거나 義兵部隊를 組織하는 等의 活動을 했다. 以後 1897年까지 義兵活動을 이어나가다 1907年 北靑郡 安山社 노은리에 居住하며 生計를 이어나갔다. 間間이 獨立運動을 하다가 1919年 3·1 運動 이 일어나자 當時 參與하여 活動하고 있던 露領 大韓國民議會의 군무부와 相議하여 그 해 8月 間島에서 獨立軍 兵士들을 追加 募集하여 部隊를 設立했다.

‘大韓 獨立軍’이란 名稱은 正式名稱은 아니나 1919年 8月 初 沿海州 地域을 出發할 때부터 使用된 것으로 보인다. 以後 大韓 獨立軍은 1919年 8月 末 동간도 地域으로 移動하면서 兵士와 武器·財源을 繼續 補强하였고, 1919年 9月 初에는 구춘선 이 이끄는 間島大韓國民會 의 財政的·人的 支援을 받아 大韓獨立軍을 編成한 뒤, 本格的으로 抗日武裝鬪爭에 나섰다. 初期 大韓獨立軍은 3個 中隊에 約 300餘 名의 兵力, 小銃 200餘 情과 拳銃 約 30梃의 火力으로 始作했으나 以後 兵士들을 繼續 徵集·募集하고 他 獨立軍部隊들과 聯合하며 部隊 規模가 커지고 體制와 裝備도 相當한 水準으로 整備되었다. [2] [3]

主要 活動 [ 編輯 ]

삼鈍者 戰鬪 [ 編輯 ]

1920年 6月 4日 박승길(朴承吉)李 指揮한 大韓臣民團 所屬의 獨立軍 部隊가 咸鏡北道 鐘城郡(鐘城郡) 강양동(江陽洞)에 進入해 日本軍 巡察小隊를 奇襲하고 誘引하자, 日本軍 南陽守備隊가 出動하였다. 獨立軍은 삼鈍者 西南쪽 野山 要地에 潛伏하였다가 이들을 攻擊하여 殲滅시켜 버렸다. 크게 봉오동 戰鬪와 하나로 보기도 한다.

봉오동 戰鬪 [ 編輯 ]

1920年 6月 6日 부터 6月 7日까지 벌어진 大韓獨立軍과 최진동 , 按舞 等이 이끄는 獨立軍 部隊의 聯合軍과 日本軍 사이의 大規模 戰鬪였다. 日本軍은 아스카와 少佐가 이끄는 月講追擊臺를 編成하여 當時 獨立軍의 根據地였던 봉오동으로 進擊했다. 對한 獨立軍을 中心으로韓 獨立軍 聯合 部隊는鳳梧洞 골짜기에서 待機하고 있다가 奇襲을 통해 勝利를 거두었다. 日本軍側 被害는 戰死 157名, 浮上 300名이고, 獨立軍側 被害는 戰死 4名, 負傷 2名이었다. 이는 臨政 군무부가 이 戰鬪를 '獨立戰爭의 第1回戰'이라고 宣言할 程度로 壓倒的인 勝利였다. [4] 日本軍은 그동안 獨立軍을 언제든 鎭壓할 수 있는 民兵 程度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慘敗를 契機로 獨立軍이 植民統治에 큰 걸림돌이 될 것이라 判斷, 獨立軍에 對한 根本的인 對策을 講究하게 하는 契機가 되었다. [5] 이 戰鬪에서 敗北한 後 大規模 兵力을 動員해 獨立軍 攻擊에 나섰다. 이에 對한 獨立軍은 靑山裏로 옮겨 北路군정서와 聯合하게된다.

7月 11日 小規模 部隊를 이끌고 노두구에서 間島 日本 領事館을 襲擊하여 日本 領事館 警察隊와 交戰하여 多數의 負傷者를 내고 勝利하였다. 이는 大大的으로 報道되었고, 이에 日帝는 中國 에 壓力을 넣어 一方的으로 約2個月 동안 駐屯하겠다고 通告하고는 1萬 5千餘 名 規模의 日本軍隊를 豆滿江 너머에 配置했다. 羅南駐屯軍, 龍山駐屯軍, 시베리아駐屯軍을 묶어 編成한 部隊였다. [6]

靑山裏 大捷 [ 編輯 ]

靑山裏 大捷 直後 記念寫眞

靑山裏 附近으로 根據地를 옮긴 김좌진 이 이끄는 北路군정서 軍과 對한 獨立軍이 聯合을 하여 日本軍을 相對로 勝利한 戰鬪이다. 北路군정서는 本來 吉林省 왕청현 서대派區(西大波溝) 山間地帶에 있었는데, 日帝의 壓力에 못 이긴 中國 官廳에서 떠나라고 强要하자 靑山裏로 移動하게 되었다. [7] 1920年 10月 21日부터 26日까지 約 1週日間 日本軍과 백운평 戰鬪, 頑陋區 戰鬪, 甲山村 戰鬪 等 10餘 次例의 接戰 끝에 日本軍을 擊破하였다. 獨立軍 聯合의 前歷은 約 1,950名이고, [8] 日本軍의 前歷은 2萬 9千에서 4萬 名 程度 안팎이라고 알려져 있다. 10月 16日 經에 洪範圖, 按舞 聯合部隊는 다시 北上하여 어랑촌으로 行軍, 그 곳에서 日本軍과의 回轉을 準備하면서 每日 軍事訓鍊을 强化하고 있었다. [8] 10月 18日 警 多數의 獨立軍 部隊가 集結하였다. 김좌진 部隊는 繼續 日本軍의 動態를 把握하면서 뒤로 물러서기를 躊躇했으며, 물러선다 하더라도 日本軍의 追跡을 따돌릴 수 없다고 보고, 日本軍과 一戰을 敢行하기로 決定하였다. 1920年 10月 21日 午後, 日本軍 이 이도구에 있는 洪範圖 部隊를 包圍해 들어왔다. 이에 獨立軍은 10月 22日 새벽까지 頑强한 抗戰을 벌였다. 洪範圖部隊는 한때 南北으로 挾攻하는 日本軍의 包圍 속에 빠졌으나 재빨리 빠져나왔다. 日本軍 들은 앞뒤를 分揀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自己네들끼리 銃을 쏘아대기도 하면서 허둥댔다. 끝내 洪範圖 部隊는 日本軍 4百餘 名을 射殺하고 또 한 次例 勝利를 거두었다. 그리고 中央으로 進擊한 日本軍의 한 負袋를 集中 攻擊, 結果的으로 日本軍 의 다른 部隊와 함께 中央의 日本軍을 挾攻하는 데 成功하였다. [9] 日本軍側 被害는 戰死 500名, 負傷 3,300名이고, 獨立軍側 被害는 戰死 60名, 負傷 90名이었다.


靑山里戰鬪에서 크게 敗하면서 日本軍은 그 報復으로 韓國人 社會·抗日團體·學校·敎會 等을 焦土化하였는데 이를 間島慘變 (間島慘變), 또는 庚申慘變이라 한다. 以後, 700餘 名의 獨立軍 統合部隊는 日本軍 間島討伐隊와 激戰을 치르면서 1921年 1月 下旬 우수리강 을 건너 러시아領 二萬을 거쳐 自由詩 (스보보드니, 러시아語 : Свобо?дный)로 들어갔다. 이 時期 沿海州 各地의 韓人 武裝部隊와 間島 獨立軍은 自由詩 일대로 集結하고 있었다. 各地에 흩어져 있던 韓人 部隊를 統合하고 볼셰비키 政府의 支援을 받음으로써 抗日戰을 效果的으로 遂行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集結한 韓人 部隊의 統率權을 둘러싸고 指導部間에 熾烈한 角逐戰이 벌어졌다.


6月 28日 軍政議會 指導部는 頑剛한 對峙狀態에 있던 大韓義勇軍의 武裝解除를 決定하였다. 裝甲車 等 重火器까지 動員한 高麗革命軍은 大韓義勇軍이 駐屯한 自由詩 附近의 水剌세프카 一帶를 包圍한 채 大規模 攻擊을 加하여 雙方間의 大衝突이 發生하였다. 自由詩 慘變 , 또는 自由視 事變으로 불린 이 같은 韓人 武裝勢力 間의 紛爭으로 死傷者가 續出하고, 大韓義勇軍 部隊는 四方으로 흩어짐에 따라 獨立軍의 鬪爭力量이 크게 毁損되었다. 自由市事變 以後 韓人武裝勢力은 러시아 共産黨의 强力한 統制로 인하여 活動에 많은 制約이 加해졌고, 洪範圖 將軍이 1937年 9月 스탈린에 依한 韓人 强制 移住政策에 따라 카자흐스탄으로 移住하는 等 首腦部가 大擧 떠나게 되며 事實上 對한 獨立軍은 解體되게 되었다. [3]

評價 [ 編輯 ]

大韓獨立軍은 數的, 電力 劣勢에도 不拘하고 日本軍을 相對로 두次例나 큰 戰鬪에서 勝利하여 抗日武裝鬪爭에 큰 原動力을 불어넣는 契機가 되었다. 봉오동 戰鬪 勝利를 契機로 滿洲 各地에서 獨立軍 部隊가 일어났고, 獨立軍에 對한 金錢的, 物質的인 支援도 大擧 늘어났다.

大韓獨立軍이 日本軍을 相對로 勝利를 거둔 主要한 理由가 몇가지 있다. 첫째로 洪範圖 將軍의 山砲手代의 經驗에서 찾아 볼 수 있다. 山砲手는 잘 갖춘 組織을 통해 사냥을 한다. 大韓獨立軍이 빠르게 軍組織의 形態를 維持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山砲手代의 經驗이 가장 큰 資産이었다. 特히 山을 舞臺로 活動했던 山砲手이기 때문에 咸鏡道 山岳地帶의 特性을 熟知하고 있어 日本軍보다 地形을 利用한 戰鬪에 能熟했다. 둘째, 地域民과의 疏通이 可能한 部隊였다. 大韓獨立軍은 民衆들의 絶對的인 支援을 받는 義兵部隊였다. 大韓獨立軍 部隊가 日本 軍을 相對로 連戰連勝을 할 수 있었던 背景에는 民衆의 支持와 聲援이 있었기 때문이다. [10]

武裝 [ 編輯 ]

大韓獨立軍은 自體的인 銃器 製造 施設이 없었기 때문에 체코 等 外國에서 銃器를 輸入하거나 [11] 日本軍의 銃器를 鹵獲해 쓸 수밖에 없었다. 銃器 1梃 黨 現在 價値로 大略 210萬원에서 650萬원 程度였다고 한다. [12] 大韓獨立軍은 1919年 겨울 間島의 大韓國民會 傘下로 들어가 財政的 支援을 받았다. 兵士들을 增員해 兵力이 600名이 되었으며, 1920年 初 當時 兵力 約 3百 名에 軍摠 約 2百 情, 拳銃 約 40梃, 彈藥은 總 1政黨 2百 發議 裝備를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8]

對한 獨立軍이 使用한 武器
分類 이름 製造 國家
小銃 38式 步兵銃 日本
小銃 게베어 98 獨逸
小銃 母神羅强 러시아 帝國
小銃 스프링필드 小銃 美國
拳銃 南部 14年式 拳銃 日本
拳銃 마우저 리볼버 獨逸
拳銃 마우저 自動拳銃 獨逸
拳銃 엔필드 리볼버 英國
機關銃 맥심 機關銃 英國
機關銃 루이스 機關銃 英國
機關銃 96/99式 輕機關銃 日本

主要 人物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大韓獨立軍(大韓獨立軍)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2022年 12月 8日에 確認함 .  
  2. “世界韓民族文化大展” . 2022年 12月 8日에 確認함 .  
  3. “이달의 獨立運動家” . 2022年 12月 25日에 確認함 .  
  4. 한국교원대학교 歷史敎育科 (2004年 9月 20日). 《아틀라스 韓國史》. 四季節. 170쪽.  
  5. 박민영 (2010). 《獨立軍과 韓國光復軍의 抗日武裝鬪爭》. 단국대학교 東洋學硏究원. 233-258쪽.  
  6. 이이화, 《韓國史 이야기 21:解放 그날이 오면》 (한길사, 2004) 56페이지
  7. 박은봉, 《韓國史 100 場面》 (嘉藍企劃, 1993) 312페이지
  8. 윤병석, 《間島歷史의 硏究》(국학자료원, 2006) 72페이지
  9. 이이화, 《이이화 先生님이 들려주는 이야기 韓國史 2》 (波瀾하늘, 2008) 143페이지
  10. 신용하, 「洪範圖 義兵部隊의 抗日武裝鬪爭」, 『韓國民族運動史硏究』, 1986, 39쪽
  11. 조필군. 《獨立軍의 武器를 통해 滿洲地域 抗日武裝獨立戰爭을 새롭게 照明하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17-218쪽.  
  12. Kloslova, Zdenka. 《Czech Arms for Korean Independence Fighters》. 63쪽.  
  13. 强近. 《나의 回想記 一便-군정서 軍隊에 對한 强近 同志 回想記》. 7쪽.  

參考 資料 [ 編輯 ]

  • 愛國同志援護會, 1956, 韓國獨立運動史
  • 이강훈, 1982, 靑山裏獨立戰鬪, 『軍事』
  • 한국교원대학교 歷史敎育科, 2004, 『아틀라스 韓國史』
  • 장세윤, 1997, 『洪範圖-生涯와 獨立戰爭』, 獨立記念館
  • 신용하,1988, 「洪範圖의 大韓獨立軍의 抗日武裝 鬪爭」,(『韓國 近代民族運動史 硏究』, 일조각
  • 김주용, 2014.2., 「洪範圖의 抗日武裝鬪爭과 歷史的 意義」, 『韓國學硏究 第32輯』
  • 신용하, 1986, 「洪範圖의 (洪範圖) 大韓獨立軍의 抗日武裝鬪爭」, 『한국학보 12』
  • 김주용, 2018, 『韓國獨立運動과 滿洲 -移住·抵抗·定着의 漸移地帶-』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