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만   중국   일본 
다이겐 셋사이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本文으로 移動

다이겐 셋사이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다이겐 셋사이 ( 日本語 : 太原雪? , 1496年 ~ 1555年 陰曆 10月 10日 )는 센고쿠 時代 僧侶 이며, 이마가와 요시모토 (今川義元)의 軍事(軍師)이다.

生涯 [ 編輯 ]

메이오 (明應) 5年( 1496年 ), 스루가 (駿河)의 센고쿠 다이묘 이마가와 우지치카 (今川氏親)의 重臣 이하라 사에몬勞組 마사모리 ( 庵原左衛門尉政盛 )의 아들로 태어났다. 母親은 오키쓰 마사노부 ( 興津正信 )의 딸로, 이하라氏는 스루가 이하라(現在의 시즈오카현 시즈오카視 ) 周邊을 다스리던 一族이었고, 吳키쓰氏는 요코야마 性 ( 橫山城 )을 本據地로 海運(海運)을 掌握한 海賊(水軍)도 이끌고 있었다. 두 家門 모두 이마가와 氏의 中신으로 셋사이는 태어날 때부터 이마가와 氏에 忠節을 다해야 하는 義務를 지닌 셈이었다.

父親 이하라 마사모리는 셋사이를 가까운 곳에 있는 젠토쿠 社( 善得寺 )라는 절에 들여보냈다. 必是 學問을 배우기 위해서 절에 들여 보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었으나, 어째서인지 셋사이는 그대로 禪僧(禪僧)의 길을 걸을 覺悟를 굳혔다. 에이쇼 6年( 1509年 ), 셋사이의 나이 14살때 교토로 올라가 겐닌 社(建仁寺)에 들어간 뒤 그곳에서 스승 조안 流蘇( 常庵龍崇 )의 손에 依해 出家得度(出家得度)하여 규에이 쇼기쿠( 九英承菊 )란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그대로 겐닌 社에서 遂行을 繼續하였다면 나중에는 겐닌 社의 住持에까지 出世할 수 있을 거라 생각되었지만, 셋사이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展開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時節부터 秀才(秀才)로 將來를 屬望받고 있다는 所聞을 들은 이마가와 우지치카 가 돌아와서 이마가와 氏를 섬길 것을 要請하고, 自身의 다섯番째 아들인 호키쿠마루( 方菊丸 )의 敎育者로서 셋사이를 임명한 것이다.

그 當時 셋사이의 氣分은 당혹스러움 그 自體였겠지만, 父親은 이마가와 우지치카 의 重臣 中 1名이었다. 拒絶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스루가로 내려가 젠토쿠 社에 들어갔던 4살의 호키쿠마루를 맡아 養育하게 되었다. 一說에는 이 要請을 2番이나 拒絶하였다고 傳해진다.

그 後 우지치카의 許諾을 얻어 호키쿠마루를 데리고 郊勞쿠 3年( 1530年 ) 다시 겐닌 社에 들어가 遂行을 繼續하였으나, 겐닌 社의 線(禪)에 滿足하지 못하고, 다시 眇身 社(妙心寺)의 門을 두드리게 되었다. 그 時期 號키쿠마루는 스승 조안 流蘇에 依해 出家得度하여 쇼號(承芳)라고 이름을 고쳤다.

또한 쇼號는 도호(道號)가 바이가쿠( 梅岳 )로 정해져 以後 바이가쿠 쇼號라고 불리게 되었다. 우지齒카가 죽은 뒤, 長男 우지테루 (氏輝)가 家門을 繼承瑕疵 5男인 號키쿠마루는 그대로 禪僧이 되었다. 덴分 4年( 1535年 ) 젠토쿠 社의 住持였던 긴케이 쇼슌( 琴溪承舜 )의 7회기法要 때문에 스루가에 내려가 다시 젠토쿠 社에 들어갔다.

그런데 덴分 5年( 1536年 ) 3月에 異變이 일어났다. 우지테루와 동생 히코故로(彦五郞) 두 사람이 突然히, 그것도 같은 날에 急死하고 말았다. 이마가와 家門의 家督은 이미 절에 들어가 있던 3男 겐코 에탄(玄廣惠探), 4男 쇼니 센쇼, 그리고 5男 바이가쿠 쇼號, 이들 3名 中에서 選擇되어야 했던 것이다.

셋사이에게는 다시없는 찬스였다. 4男은 곧 家督爭奪의 레이스에서 스스로 물러났고, 3男 겐코 에탄은 側室의 所生이었다. 셋사이는 바이가쿠 쇼湖의 어머니이자 이마가와 우지치카 의 情實 駐케이니( 壽桂尼 )와 손을 잡게 되었다. 結局 에탄과 쇼湖의 後繼者다툼(하나쿠라(花倉)의 亂)은 셋사이와 駐케이니의 支持를 받은 쇼湖의 勝利로 돌아갔고, 쇼號는 家督相續을 위해 還屬하여 이마가와 요시모토 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普通 여기서 養育者의 任務는 끝나게 된다. 그런데, 요시모토는 셋사이를 놓아주지 않았다. 스루가의 이마가와 管(今川館)의 近處에 死亡한 兄 우지테루의 보리社(菩提寺)로 린자이 社(臨濟寺)란 절을 짓고는 이곳의 住持로 셋사이를 불러들였던 것이다.

덧붙여서 셋사이라는 말도 이 린자이 四 안에 지어진 建物의 이름으로, 그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셋사이란 號가 붙여지게 되었다. 휘(諱)를 타이겐(太原), 者(字)를 스후(崇孚)라고 하였다.

셋사이는 그間의 功績으로 因해 요시모토의 두터운 信賴를 받아 政治, 軍事에 이르러 最高 顧問(顧問)으로 重用되었다. 요시모토는 모든 일을 셋사이와 相談했다. 셋사이는 슨푸 린자이 社의 住持로서 宗敎的인 影響力을 갖고 政治에 參與해 그를 가리켜 '執權(執權)' 或은 '黑衣(黑衣)의 宰相(宰相)'이라고 表現하거나 불렸다. 이 程度면 單純히 相談役에 不過한 位置라고 볼 수 없었고, 셋사이는 이마가와 家門의 軍事로 政治, 軍事, 外交에 뛰어난 手腕으로 요시모토를 補佐하였다.

그의 活躍相을 보면 덴分 6年( 1537年 ) 다케다 氏와 結婚 同盟을 締結하고, 스루가 東쪽의 好調 氏와 折衷하여 東쪽 國境을 安定化시켰다. 以後 軍略을 꾸며, 덴分 15年( 1546年 ) 미카와(三河)에 이마가와 氏가 侵攻할시에 軍事 指揮權을 行使하여 덴分 16年( 1547年 )에 다하라 姓 (田原城)을 攻掠하고, 덴分 17年( 1548年 ) 아즈키자카 戰鬪 (小豆坂の?い)에서도 總大將으로서 오다 氏(織田氏)와 싸워 優位를 차지했다.

덴分 18年( 1549年 ) 11月, 미카와 안쇼 城(安祥城)을 攻擊하여 守備하던 星州 오다 노부히로 (織田信廣;老父히데의 長男)를 生捕한 뒤, 昨年에 빼앗겨서 老父히데의 人質로 있던 마쓰다이라 다케치요(松平竹千代;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 )와 人質 交換을 進行시킨 것도 셋사이였다.

다만 요시모토의 長男 우지자네와 이마가와 氏의 人質이었던 마쓰다이라 모토야스 (松平元康;後에 도쿠가와 이에야스 )의 後見度 맡았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셋사이가 슨푸를 떠난 期間(다케다氏, 후호죠씨와의 交涉과 미카와로의 遠征 等)과도 겹쳐지기 때문에 두 人物에게 큰 影響을 끼친 것에 對해서는 不分明한 部分이 있다.

셋사이는 內政, 外交面에서도 活躍하여 덴分 22年( 1553年 ) 이마가와氏의 分局法人 이마가와 假名目錄 追加 21個組를 制定하고, 덴分 23年( 1554年 ) 이마가와, 好調, 다케다의 3者間의 合意에 依해 이른바 '高소슨(甲相駿) 3國同盟'을 실현시킨 프로듀서는 셋사이였다.

그 밖에 셋사이는 臨濟宗(臨濟宗)을 中心으로 營內에 있던 寺刹과 紳士의 宗敎 統制 및 在來商人을 保護하는 商業政策 等도 進行하여 이마가와氏의 最全盛期를 이룩하는 데 貢獻했다. 또한 豐富한 敎養人으로서 <歷代鉏略(歷代序略)>이란 著書를 남겼다.

셋사이는 스루가의 兆케이 社(長慶寺)에서 告知 元年( 1555年 ) 尹 10月 10日에 入寂하였다. 享年 60歲였다.

요시모토의 오른팔로 手腕을 發揮해 이마가와氏 發展에 큰 寄與를 한 그였기에 '萬若 셋사이가 5年 뒤 1560年의 오케下雌馬 戰鬪에까지 生存하였다면 요시모토가 오다 노부나가 에게 죽는 일은 決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마가와氏의 衰退는 셋사이의 죽음 以後부터 始作되었다'라고 評價한 文獻도 매우 많았다.

參考 및 參照文獻 [ 編輯 ]

  • ※歷史群像 그래픽前史시리즈 <<戰略戰術倂記事前>> 第2卷 <日本全國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