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重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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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重業
人物 情報
業績

金重業 (金重業, 1922年 3月 9日 ~ 1988年 5月 11日 )은 大韓民國 建築家 이다.

生涯 [ 編輯 ]

平壤 眞鄕里 胎生이며, 父親은 日帝强占期 當時 平安南道 江東郡, 中和郡, 成川郡의 郡守를 지낸 김영필 (金永弼)이다. 異服兄으로 書藝家 김광업 이 있다. 1928年 경림普通學校에 入學, 1939年 3月 平壤高等普通學校 를 卒業했다. 渡日 1939年 日本 요코하마 高空 建築科에 入學 나카무라 準페이를 사사, 1941年 12月 卒業했고, 學校 先輩인 사카모토 토시오의 紹介로 1942年 1月부터 1944年까지 마츠打히라他設計에서 勤務했다. 1942年 5月12日 平壤에서 김병례(平壤서문여고 卒)와 結婚 後 다시 日本에서 生活. 1944年 4月 歸國한다. 歸國 後 平南道廳 旗手로 3個月 勤務, 朝鮮飛行機製作株式會社에서 勤務, 1945年 朝鮮住宅靈壇(LH의 前身) 旗手로 在職했으며, 1949年 서울大學校 工科大學 助敎授가 되었다. 韓國戰爭 中이던 1952年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열린 國際藝術會議에 韓國代表로 參席했다. 會議場에서 르코르뷔지에를 만나고 人事를 나눈다. 會議가 끝나고 戰爭中인 韓國으로 돌아오지 않고 프랑스로 가서 르코르뷔지에 아틀리에를 訪問, 見習生으로 始作해서 正職員이 되어 1956年까지 일한다. 歸國과 함께 金重業 建築硏究所를 設立, 後進養成에 힘쓰는 한便 個人展을 가졌다. 弘益大學校에서 敎授로 있었고 弘益大學校 建築 都市計劃硏究所 의 初代所長이 된다.

活動 [ 編輯 ]

1956年 以來 國展 審査委員, 1961年 文化財 保存委員, 1961年-1963年 文化自由會議展 準備委員, 1965年 現代作家招待展 運營委員을 歷任했다. 1962年 서울特別市 文化相을 受賞했다.

作業 [ 編輯 ]

代表 作品으로 부산대학교 本館, 建國大學校 圖書館(現 外國語敎育館), 西江大學校 本館, 駐韓 프랑스 大使館, 駐泰國 韓國 大使館, 太陽의집, 悠悠産業 安養工場(現 金重業博物館), 뉴욕 世界博物館會 韓國館, 31빌딩 , 단암빌딩, 安國빌딩, 니제르 陶瓷器工場, FNCB 支店長 住宅(現 시티銀行 뱅크하우스) 等이 있다.

기타 [ 編輯 ]

서울市 성북구 장위동에 金重業建築文化醫집이 있다.

安養金重業博物館 [ 編輯 ]

安養金重業博物館은 安養市 만안구 석수동에 있는, 옛 ㈜悠悠産業 安養工場을 리모델링 한 建物로, 金重業이 設計하였다. 悠悠産業 工場은 그의 初期 作品으로 工場建物에 彫刻作品을 椄木시키는 等 獨特한 形態를 갖고 있다. 現在 그가 設計한 建物 中 金重業館과 文化누리館 等 4個 棟이 現存하고 있으며 이를 리모델링하여 展示館 및 事務棟 等으로 使用하고 있다.

같이 보기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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