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도
(金三道,
1907年
~ ?)는
日帝强占期
의
佛敎
僧侶
이다.
법명
은
右輔
(牛步)이며, 우영(宇英)이라는 筆名도 使用했다.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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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慶尙南道
量産
出生으로,
京城府
의
京城第一高等普通學校
를 卒業하고 量産
通度寺
에서 宗務所 事務員으로 勤務했다.
1930年
宗敎 演劇人 布敎劇을 公演할 때 俳優로 出演한 記錄이 남아 있다.
1936年
第6回 卒業生으로
中央佛敎專門學校
를 卒業하고
日本
으로 留學했다.
도쿄
의
도요 大學
哲學科에 入學하였고, 留學 期間 동안 朝鮮佛敎도쿄留學生會에서 活動했다.
1939年
도요 大學을 卒業하고 歸國해 通度寺 佛敎傳受學校 敎員이 되었고, 慶南3本産終務協會 專務理事에 올랐다.
1940年
朝鮮佛敎中央敎務員
機關紙 《佛敎》의 編輯人 兼 發行人이 되었는데,
中日 戰爭
展示 體制 下에서 이 雜誌는 急激히 親日化하였다. 김삼도가 처음 編輯한 《佛敎》 新20輯 속表紙에는 〈
皇國臣民의 敍事
〉가
日本語
로 실려있고, 卷頭言은 直接 執筆한 〈黃芪 2600年을 맞이하여〉라는 題目의 親日 論說이다.
같은 해
創氏改名
政策이 實施될 때에도 〈'씨' 制度 創設의 問答〉이라는 글을 揭載하여
佛敎
僧侶와 信徒들에게 創氏改名 制度를 案內했다. 이 글에서는 創氏改名을 반드시 해야 한다고 强調하고 있다.
1941年
曹溪宗
宗團이
朝鮮總督府
의 操縱으로 設立된 後 佛敎史 編輯主任으로 發令받았다가 그해 말에 通度寺로 돌아갔다.
김삼도가 《佛敎》를 擔當하고 있던 萬 2年間 記名 親日 示唆文은 위의 두 篇 外에 〈寵厚 우리들의 日常生活에 取하야〉까지 總 3篇이 確認되었다.
光復 後인
1946年
慶南敎務院 敎務部長에 就任한 것을 끝으로 行跡이 알려져 있지 않다.
民族問題硏究所
가
2008年
發表한
친일인명사전 收錄豫定者 名單
宗敎 部門에 選定되었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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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考資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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