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렬
(金棟列, 1926年 3月 15日
(
1926-03-15
)
~ 2008年 5月 3日
(
2008-05-03
)
)은
大韓民國의 獨立運動家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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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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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尙南道
山淸
地域의 富農家 대농 집안에서 膝下 3男 6女(9男妹) 中 次男(일곱째)으로 出生한 그는 17歲 時節(만16歲)이던 1942年 5月 12日, 當時 結婚 18年次였던 첫째 누나(맏누나 夫婦)의 詩척 中
京城府
社는 첫째 누나 媤三寸 宅에서 下宿하던 中 日警에 쫓기는 獨立運動家 一行들을 支援하다가 發覺되어 獄苦를 치렀다. 京城 東大門 돈암정(現在의 서울 東大門區 돈암동(敦岩洞))의 첫째 누나 媤三寸
京城
분갓댁에서 下宿을 하던 그는 1942年 當時
大韓帝國
獨立의 實現을 目的으로 活動하다 逮捕된 後 脫獄한 정태옥(鄭泰玉)李 日警에 쫓기는 어려움에 處해 있을 때, 旅費 및 衣服 等 便宜를 提供하는 한便 向後 獨立에 對한 對話를 나누면서 同志的 關係를 맺었다. 그 當時 정태옥은 中央靑年同盟(中央靑年同盟)의 執行委員 等을 歷任했으며, 그 정태옥이야말로 1930年代 以來 朝鮮共産黨(朝鮮共産黨) 再建運動 競技도 仁川 組織準備委員會 中央執行委員 等을 지낸 責任者로 活動하던 社會運動家 出身이었다. 結局 정태옥은 1937年 懲役 10年型을 宣告받고 獄苦를 치르던 中 脫出하는 過程에서 當時 17歲 김동렬 그가 避身을 도왔던 것인데, 日警에 發覺되어 두 사람 모두 逮捕되었다. 김동렬은 1942年 12月 11日, 京城地方法院에서 懲役 6個月刑 및 執行猶豫 3年 宣告를 받기까지 7個月餘의 獄苦를 치렀으며 1942年 12月 11日, 電擊 釋放되었다.
그로부터 3年 後 20歲 時節(만19歲)이던 1945年 8月 15日, 그 當時 結婚 20年次였던 둘째 누나(작은누나 夫婦)의 詩척 中 慶尙南道 晉州 사는 둘째 누나 媤아주버님 宅에서 8·15(光復)를 目睹하였으며 또 그로부터 約40餘年이 지난 後날 1988年부터 1989年 脫黨(電擊 辭退 宣言)할때까지 한 해 동안
統一民主黨
黨務委員 등을 暫時 지냈다.
徐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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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民國 政府에서는 그의 功勳을 기리고자 2005年 8月 15日,
大統領 表彰狀
을 授與하였다.
事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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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遺骸는
大韓民國 國立 大戰 顯忠院(獨立有功者 墓域)
에 安葬되어 있다.
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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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兒名
(兒名)은 金棟悅(김동열)·金東悅(김동열)·金東烈(김동렬)·金棟烈(김동렬)
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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