郭子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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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양왕 郭子儀

郭子儀 (郭子儀, 697年 ~ 781年 )는 中國 唐나라 중기의 名將으로, 作爲는 분양왕(汾陽王), 諡號는 忠武(忠武)이다. 顯宗 (玄宗)부터 肅宗 (肅宗), 大宗 (代宗), 德宗 (德宗)에 이르는 4臺를 섬겼으며, 안사의 亂 에서 큰 功을 세우고 以後로도 잇따른 吐蕃, 위구르의 侵入을 막아냈다.

聖堂(盛唐) ~ 中唐(中唐) 時期를 代表하는 名將으로 그의 孫女는 後날 憲宗 (憲宗)의 皇后가 되기도 했다.

生涯 [ 編輯 ]

出資 [ 編輯 ]

貨主(華州) 정현(鄭縣) [1] 사람이다. 者(字)와 휘(諱)가 같으며, 諡號는 忠武(忠武), 五代 十國 時期 後進(後晋)의 遺構(劉?)가 編纂한 《 舊唐書 (舊唐書)》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 境地(敬之)는 黨에서 喪主(上州)로 分類되었던 債主(綏州) ? 爲主(渭州) ? 契主(桂州) ? 受注(壽州, 受注壽州) ? 使嗾(泗州)의 自社(刺史)를 歷任했다고 하며, 이것은 그의 身分이 決코 낮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北送 (北宋)의 歐陽脩 (毆陽脩)가 讚한 《 新唐書 (新唐書)》 백관지(百官志)4하(下)에 따르면 黨에서 「尙州」로 分類되는 注意 自社는 「종3品」에 相當했으며, 爲主 ? 受注 等에는 重都督府(中都督府)가 設置되었는데 重都督의 官品도 「正3品」에 該當하는 것이었다. 黨의 府兵制 (府兵制)가 무너지기 以前까지, 都督 (都督) ? 自社의 官職은 地方職(外棺外官)으로서는 高官에 屬했다고 말할 수 있다.

武裝願(武壯元) [ 編輯 ]

現存하는 記錄에는 郭子儀의 出生은 勿論 幼年期부터 靑壯年期에 이르는 동안의 來歷이 全혀 남아있지 않다. 地方 長官의 子息이기는 했으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거나, 「 蔭官 (蔭官)」 [2] 等의 制度에 따라 政界(政界)에 入門했다는 痕跡도 없으며, 무거(武擧) [3] 에서 憂愁를 인정받아 官職을 받았다거나 [4] 그 뒤 거듭 단우大都護(?于副都護), 震源軍社(振遠軍使)가 되었다는 것도 大體로 中年의 나이에 접어든 以後의 일로 推測될 뿐이다.

黨 王朝뿐 아니라 中國 歷史上의 爲人으로서 後世 여러 話題를 불러모은 有名人이지만, 典型的인 大器晩成型 人物이기도 했다. 史料에 따르면 顯宗 千步 (天寶) 8年( 749年 ), 목資産(木剌山)에 橫새軍(橫塞軍)과 안북都護府(安北都護府)가 設置될 무렵에, 郭子儀는 橫새軍士(橫塞軍使)로 任命되는데, 이것이 年號를 確認할 수 있는 가장 이른 時期의 經歷으로 이때 郭子儀의 나이는 이미 53歲였다. 이길보(李吉甫)가 지은 《원貨군현도지(元和郡縣圖志)》勸第4 천덕군兆에 보면, 「천보 8年에 腸制球(張齊丘), 또 西夏豚腥(西可敦城)에 횡새군을 두고, 또 數항성(受降城)에서 橫새軍을 옮겨 다스렸다」고 되어 있으며, 梧亭便(?廷燮)이 지은 《當方진연표(唐方鎭年表)》權1에 따르면, 이듬해인 千步 9年( 750年 )까지 現地 節度使를 맡았던 腸制球(張齊丘) [5] 의 麾下에 있었다. 그 뒤 新任 節度使로 赴任한 안사순(安思順), 이림보(李林甫) 等을 섬겼다.

節度使 昇進 [ 編輯 ]

千步 13年( 754年 ), 앞서 設置된 횡새군이 位置한 땅이 農事짓기에는 適合하지 않은 瘠薄한 땅으로 人口도 적었기에, 새로이 影靑冊(永淸柵) 北쪽에 城을 쌓고 횡새군과 안북都護府(安北都護府)를 그곳으로 옮겼다. 以後 횡새군은 「천덕군(天德軍)」으로 改稱되었다. 그 功으로 郭子儀는 거듭 천덕군社(天德軍使)가 되고 舊怨태수(九原太守)까지 겸하게 되어, 削榜절도우병마사(朔方節度右兵馬使)로 任命되었다(《신당서》).

이 때의 上司이자 節度使인 안사순은 안록산(安祿山)의 四寸동생이었는데(《당방진연표》 및 腰輿능姚汝能이 讚한 《안록산私的安?山事適》商圈) 이듬해인 千步 14齋( 755年 ) 11月에 안록산이 亂을 일으켰을 때( 안록산의 亂 ) 以前부터 안록산이 反逆할 마음이 있음을 皇帝에게 進言해왔다 하여 죽음만을 겨우 면한 채 [6] 中央으로 召喚되었다. 안사순의 後任으로 禹兵馬使가 된 自意는 削榜節度使(朔方節度使)로 昇格되고, 나아가 위僞經(衛尉卿) [7] 에 任命되었으며, 영무郡太守(靈武郡太守)를 兼務하여 삭방군의 兵馬를 거느리고 안록산을 討伐할 것을 命하는 詔勅이 내려졌다. 危機狀況이라는 특수한 事情을 考慮하더라도 그것은 破格的인 出世였다.

안 · 社의 亂 [ 編輯 ]

叛亂 平定을 맡아, 郭子儀는 삭방군의 이광필(李光弼)과 連繫하여 兵士를 나누어 河北(河北)으로 進擊, 上山(常山)에서 軍士를 合쳐 史思明(史思明)의 君을 패배시키고 河北을 收復했다. 이때 郭子儀는 皇帝에게 北쪽으로 범양(范陽)을 차지하고 곧장 叛軍의 巢窟로 進擊할 것을 建議했지만, 玄宗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뒤 千步 15齋( 756年 ) 위구르軍과 함께 河谷(河曲)을 平定하였으며, 이듬해 봄에는 河東(河東)과 風霜(馮翊)을 次例대로 收復하고 東館(潼關)으로 進擊, 敵軍의 최건우(崔乾祐)와 싸워 1萬이 넘는 唐軍 死傷者를 낸 끝에 그를 패배시켰고, 최건우는 물러나 布陣(蒲津)을 지켰다. 얼마 뒤 안록산이 아들 경서(慶?)에게 殺害되고, 玄宗은 太子에게 讓位하였다. 새로 皇帝가 된 肅宗은 郭子儀를 兵部尙書(兵部尙書) 同中書門下平章事(同中書門下平章事)로 삼았다.

지덕(至德) 2齋 757年 ), 郭子儀는 칙을 받들어 棒狀(鳳翔)으로 나아갔고, 途中에 白蕖(白渠) 有雲橋(留運橋)에서 이귀인(李歸仁)의 鐵器(鐵騎) 5千 人을 쳐서 패배시켰지만, 5月에는 按手衝(安守忠), 이귀인과 請去(淸渠, 只今의 시안 西쪽)에서 치른 싸움에서 不利하여 물러나 무공(武功)을 지켰다. 9月 怨讐(元帥) 광평王(廣平王) 숙(?)을 따라 黨과 위구르의 聯合軍 15萬 人을 거느리고 다시 향적사(香積寺, 只今의 장안현 西南쪽) 北쪽에서 戰鬪를 벌였고, 위구르 兵士들이 敵의 後方을 맡아 前後로 攻擊하여 敵軍 6萬을 죽였다. 赤腸 長通油(張通儒)는 섬君(陜郡)으로 달아나고, 마침내 唐軍은 首都 長安을 收復하였다.

그 뒤 唐軍은 勝勢를 몰아 東쪽으로 進擊하여, 神占(新店)에서 敵將 엄장(嚴莊)과 長通油 等이 이끌던 15萬 人을 패배시키고, 안경서를 뒤쫓아 黃河(黃河)를 건넜다가 물러나 喪主(相州)로 돌아왔다. 동도(東郡) 洛陽(洛陽)으로 돌아온 郭子儀는 專攻으로 사도(司徒)가 되고 大國공(代國公)에 封해졌다. 史思明은 범양으로 軍士를 거느리고 안경서를 救援하러 왔고, 兩軍은 安養下(安陽河) 北쪽에서 陣을 치고 接戰했다. 이때 唐軍을 指揮한 것은 宦官 語調은(魚朝恩)이었지만, 軍事的 才能이 없었던 그는 60萬에 達하는 唐軍만 잃고 물러나야 했다(업성?城 戰鬪). 語調隱隱 敗戰 責任을 모두 郭子儀에게 돌린 바람에 郭子儀는 長安으로 불려가 兵權을 박탈당하고 閑職에 머물러야 했다.

異民族과의 戰爭 [ 編輯 ]

報應(寶應) 元年( 762年 ), 太原(太原)과 講主(絳州)에서 軍亂이 일어나자 唐慌한 朝廷은 字義를 분양왕(汾陽王)에 封하여 講主를 지키도록 했지만, 宦官 정원진(程元振)의 謀陷으로 다시 兵權을 回收당했다. 廣德(廣德) 元年( 763年 ), 안사의 亂이라는 混亂을 틈타 吐蕃 (吐蕃)은 黨을 侵攻했고, 10月에 吐蕃은 長安에서 멀지 않은 奉天縣(奉天縣)까지 攻擊해 들어왔다. 長安이 直接的인 攻擊 威脅에 露出되면서 首都 사람들은 恐怖에 떨었고, 朝廷은 다시 郭子儀를 管內副元帥(關內副元帥)로 起用해 티베트를 막게 했다. 이때 吐蕃은 이미 衛戍(渭水)를 건넌 狀態로, 大宗은 長安을 버린 채 東쪽으로 蟾注(陝州)로 달아났다. 郭子儀는 尙州(商州)에 이르러 앞서 흩어져 달아났던 兵士 數千 人을 다시 모으고, 낮에는 북을 울리고 旗발을 많이 세워서, 밤에는 여기저기 烽火를 올림으로서 吐蕃에 對한 攪亂作戰을 펼쳤다. 吐蕃은 이에 물러났다. 長安이 收復되고 12月에, 長安으로 돌아온 大宗을 郭子儀가 迎接했을 때, 大宗은 "卿(卿)을 일찍 起用하지 못해 이 地境에 이르렀다"며 勞苦를 致賀했다.

廣德 2年( 764年 ), 削榜節度使로 있던 復古회은이 위구르와 吐蕃의 軍事 10萬을 끌어들여 觀衆으로 쳐들어왔다. 郭子儀는 太原으로 進攻하여 이를 擊退하였다. 이때 郭子儀는 乾陵에 窟을 파서 伏兵을 숨겼고, 위구르와 吐蕃은 당군의 防備를 보고 더 나아가지 않은 채 돌아왔다고 한다. 이듬해인 靈胎(永泰) 元年( 765年 )에는 吐蕃과 위구르는 다시 兵士를 합쳐 黨을 侵攻했다. 郭子儀는 경양(涇陽)에서 德宗으로부터 위구르의 攻擊을 받지만, 그때 이미 郭子儀의 이름은 위구르人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었기에 親히 數十 氣를 거느리고 戰線으로 가서 위구르의 臺數(大帥) 樂갈라(藥葛羅)를 說得해 同盟을 맺고, 거꾸로 土蕃을 擊退하기에 이른다.

大力(大曆) 元年( 766年 ), 荷重(河中)에 駐屯하면서 軍糧을 充分히 確保하게 했다. 大力 8年( 737年 )에 吐蕃이 10萬의 軍士를 내어 警(涇), 빈(?) 地域으로 쳐들어오자, 郭子儀는 鐵勒族 出身의 兵馬使(兵馬使) 魂감(渾?)을 시켜 兵士를 醫錄(宜祿) 方面으로 보냈지만, 結果的으로 黨病이 不利했다. 마침내 여러 將帥들을 모아 敗戰의 原因을 檢討하고서, 郭子儀는 다시 作戰을 바꾸어 兵士를 세 길로 나누어 進軍시켜 百姓(百城), 遙遠(潘原) 等의 땅을 次例대로 陷落시켰고, 마침내 吐蕃은 敗하여 물러났다.

萬年 [ 編輯 ]

大力 14年( 780年 ) 大宗이 죽고 德宗이 卽位하자, 上部(尙父)라는 稱號를 받고, 太尉(太尉) ? 中書令(中書令)에 昇進하였다.

件中(建中) 2年( 781年 ) 6月에 郭子儀는 死亡하였다. 享年 85歲였다(《구당서》 列傳). 德宗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5日 동안 朝會를 廢했고, 健陵(建陵)에 配臟(陪葬)하게 했으며, 1品 管理의 封墳 높이는 8張(丈)을 넘지 못하도록 했던 規定을 깨고 異例的으로 10隻을 높이도록 했다. 健陵 西南쪽의 派陽村(坡陽村), 卽 只今의 산시省 (陝西省) 셴양視 (咸陽市) 里取안 縣(?泉?)에 마련된 그의 무덤 앞에는 後날 靑 時代에 碑石이 세워졌지만, 只今의 封墳은 平平하게 變해 있다.

郭子儀는 歷代 中國의 過去에서 壯元으로 拔擢된 人物 가운데서는 唯一하게 武科 장원 出身으로서 宰相에까지 이른 者였고, 4代에 걸쳐 調整을 섬기며 두 番 宰相으로 拔擢되었다. 또한 武科 장원 出身으로서 그 공이 가장 두드러진 字로 評價받고 있다.

著書로 《中書令高(中書令考)》(前 24篇)를 지었다.

人物 [ 編輯 ]

  • 《舊唐書》에는 그의 키가 6隻 남짓이었다고 적고 있으며, 《新唐書》에는 키가 7隻 2村이었다고 되어 있다. 이를 1隻=藥 31.1cm인 唐尺(唐尺), 1隻=藥 30.72cm인 訟隻(宋尺)으로 換算하면 大體로 190cm 程度에 該當하는, 當時로서는 相當히 體格이 좋은 便이었다고 할 수 있다.
  • 是認 二百 (李白)李 안사의 亂에서 肅宗의 동생인 영왕(永王) 린(璘)을 따랐다가 영왕이 反逆罪로 處罰되자 그의 臣下로서 拘禁되고 罪를 받게 되었을 때, 郭子儀가 나서서 李白의 無罪를 呼訴하여 死刑罪에서 流配罪로 處罰이 輕減되었다. 이에 對해서는 郭子儀가 靑年 時節, 二百 德分에 목숨을 건진 일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 함께 안사의 亂을 平定하는 데 功을 세운 名將 이광필(李光弼)과 함께 「伊霍(李郭)」이라는 尊稱으로 불렸다. 郭子儀의 後任이 되기까지 했던 이광필은 元來 郭子儀의 속管으로, 自己 能力에 對한 剛한 自信感을 갖고 있어 上官인 郭子儀에게조차 直言을 꺼리지 않았다. 하지만 郭子儀는 李光弼이 主張한 計策을 採用하지 않아, 처음에 이광필은 郭子儀를 無能한 相關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事實 郭子儀는 이광필의 才能을 높이 評價했고 그가 내놓은 計策의 妥當性도 理解하고 있었지만, 쉽게 그것을 受容한다면 自尊心 剛한 李光弼이 自慢에 빠져 짐짓 自己 修養을 게을리 할 것이라 여기고 함부로 그의 計策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안록산의 亂이 일어나자 郭子儀는 곧장 李光弼을 君의 將帥로 拔擢하도록 皇帝에게 進言했고, 이때서야 이광필은 自身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郭子儀에게 容恕를 빌었으며 함께 亂을 鎭壓하는데 힘을 쏟았다고 한다.
  • 寬厚한 人品으로 모든 사람들의 敬愛를 받았고 出廷하고 歸還할 때마다 皇帝가 直接 맞이하는 等 특별한 待遇를 받았음을 史料에서 確認할 수 있다. 《舊唐書》에는 「權勢가 天下를 기울일 만 하였음에도 朝廷은 그를 꺼리지 않았고, 功績은 한 時代를 덮었음에도 朱君은 疑心하지 않았으며, 그의 奢侈함이 사람의 欲望을 다하였음에도 君子들은 이를 罪라 하지 않았다.」라는 最高의 讚辭를 붙였다. 곽 領空(令公)이라 불리며 漢族뿐 아니라 敵對했던 異民族인 위구르人들까지도 敬畏心을 가지고 그를 對했다고 한다.
  • 郭子儀의 아버지 무덤이 파헤쳐지는 事件이 벌어지자, 當時 사람들은 모두 郭子儀에 對해 不滿이 가장 많았던 宦官 어조은의 짓이라고 疑心했다. 調整에 들어온 郭子儀는 눈물을 흘리면서 "제가 軍隊를 이끌어 統率한 지가 이미 오래인데 士兵(士兵)의 軍令을 嚴하게 하지 못하여 그들이 무덤을 파헤치는 것도 막지 못했습니다. 오늘의 일은 모두 하늘이 제게 내린 벌일 뿐, 사람이 한 짓이 아닙니다." 라고 對答했다고 한다.
  • 「지나統社(支那通史)」에는, 「自意는 功勳과 德望이 모두 높아 사도(司徒) ? 中書令에 分讓王이 되었으며, 管內 ? 河東의 副元帥로서 荷重 또는 貧廚를 進水했다. 大宗이 例로서 重視했고, 讒訴하는 말이 있어도 듣지 않았다. 朝廷에 나아가지 않았으나 이(夷, 異民族)와 下(夏, 중원 王朝) 모두 그 委命(威名)에 服從하였다. 당실(唐室)은 그 몸 德分에 安危를 얻은 것이 거의 30年이었다. 德宗이 그를 높여 上部라 하였다. 件中 2年에 卒(卒)하였다. 여덟 아들과 일곱 사위가 모두 顯達하였으며 將佐(將佐)의 名臣(名臣)이 된 者들이 甚히 많았다.」고 評하고 있다.
  • 自意의 여섯째 아들 곽愛(郭曖)는 大宗의 딸 昇平公主(昇平公主)를 아내로 맞아 駙馬가 되었는데, 大力 (大曆) 2年( 767年 ), 郭子儀의 生日에 집안 사람들이 모두 나와서 生日을 祝賀하는 자리에 昇平公主만이 나오지 않은 것에 火가 난 곽애는 昇平公主와 말다툼을 벌이다, 그만 "當身 아버지가 天子라고 우쭐대지 마시오. 내 아버님은 언제든지 天子가 되실 수 있는 분이지만, 天子 따위는 거저 줘도 안 하시는 분이오!"라고 말해버렸다. 公主는 그날로 皇宮으로 돌아가 이 이야기를 大宗에게 일러바쳤지만, 皇帝는 거꾸로 昇平公主를 달래어 돌려보냈다. 나중에 이 일을 알게 된 郭子儀는 아들을 잡아 묶어서 入闕하여 大宗에게 罪를 빌었지만, 大宗은 郭子儀에게 "보고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하지 않으면 좋은 媤아버지가 되지 못할 것이다(不癡不聾,不作家翁)"라는 俗談을 引用하며 夫婦싸움은 내버려두는 便이 낫다고, 오히려 郭子儀를 慰勞하였다. 집으로 돌아온 郭子儀는 自身의 손으로 아들을 매질했다(《자치통감》권224). 이 故事가 바로 오늘날 京劇 (京劇)의 한 대목인 《吹打禁忌(醉打金枝)》의 原形이 되었다. 大宗이 이렇게까지 한 데에는 黨의 再建은 郭子儀 德分이라는 意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家計 [ 編輯 ]

記錄에는 郭子儀의 아들로 者喜(子晞), 요(曜), 鳳(鋒), 애(曖) 等의 이름이 記錄되어 있다. 大宗의 駙馬가 된 곽애의 딸은 宗室인 광릉왕(廣陵王) 순(純)에게 시집가서 後날 穆宗 (穆宗)을 낳았으며, 議案皇后(懿安皇后, ? - 848年)에 封해졌다.

동생
* 곽有名(郭幼明)
아내
* 王氏(王氏) - 704年 또는 705年 生. 天寶 年間에 처음 낭야賢君(琅?縣君)에 封해졌으며 그 뒤 太原郡君(太原郡君), 괵국夫人(?國夫人)에 봉해짐. 郭子儀와의 사이에서 6男 2女를 두었다. 777年 死亡.
아들
* 곽요(郭曜) - 長男. 어머니는 王氏.
* 곽간(郭?) - 次男. 어머니는 未詳.
* 郭熙(郭晞) - 3男. 어머니는 王氏. 曺國공(趙國公)에 封해짐.
* 곽出(郭?) - 4男. 어머니는 未詳.
* 곽誤(郭晤) - 5男. 어머니는 王氏.
* 곽愛(郭曖) - 6男. 어머니는 王氏. 大宗의 딸 昇平公主를 아내로 맞아 大宗의 駙馬가 되었다.
* 곽서(郭曙) - 7男. 어머니는 王氏. 기국공(祁國公)에 封해짐.
* 곽영(郭映) - 8男. 어머니는 王氏.
[8]
* 長女 - 聖徒縣令(成都顯令) 노양금(盧讓金)에게 시집감.
* 次女 - 惡酒觀察使(鄂州觀察使) 誤重油(吳仲孺)에게 시집감.
* 3女 - 위僞經 長蹲(張浚)에게 시집감.
* 4女 - 箋中所感(殿中少監) 移動靑(李洞淸)에게 시집감.
* 5女 - 沙門郎中(司門?中) 定婚(鄭渾)에게 시집감.
* 6女 - 奔走別加(汾州別駕) 腸癰(張邕)에게 시집감.
* 7女 - 貨主自社(和州刺史) 操縱(趙縱)에게 시집감.
* 8女 - 太常寺勝(太常寺丞) 王才(王宰)에게 시집감.
孫자녀
* 곽봉(郭鋒) - 곽遼의 아들.
* 곽강(郭鋼) - 郭熙의 長男. 曺國공(趙國公)에 封해짐. 增(贈) 兵部尙書.
* 곽균(郭鈞) - 郭熙의 次男.
* 곽番(郭?) - 곽吳의 아들.
* 孫女 郭氏 - 곽愛와 昇平公主의 長女. 憲宗의 貴妃(貴妃)로서 穆宗을 낳았고 議案皇后로 封해짐.
* 孫女 郭氏 - 昇平公主(升平公主) 所生의 次女.
* 곽주(郭鑄) - 곽애의 아들로 昇平公主(昇平公主)의 庶子.
* 곽쇠(郭釗) - 곽愛와 昇平公主의 아들. 아내 沈氏(沈氏)의 어머니 卽 丈母가 大宗의 딸 長林公州(長林公主)이고 아내 沈氏(沈氏)의 아버지 卽 匠人이 大宗의 駙馬 심명 (沈明)이다.
* 곽종(郭?) - 곽愛와 昇平公主의 아들로 純宗 (順宗)의 딸 漢陽公州(漢陽公主) 窓(暢)에게 장가들었다. 增 尙書左僕射(尙書左僕射).
* 곽섬(郭?) - 곽愛와 昇平公主의 아들로 純種의 딸 西夏公主(西河公主)에게 장가들었다. 後嗣가 없어 西夏公主의 前 男便 審휘 (沈?)의 아들을 養子로 들여 後嗣를 이었다.

後孫 [ 編輯 ]

黨 末期는 勿論 黨이 滅亡한 뒤에도 後代까지 郭子儀의 後孫을 稱하는 사람이 많았다. 唐말 五代 初의 人物이었던 곽숭도(郭崇韜, ?~926年)는 대주(代州) 안門(雁門) 사람으로 李克用 (李克用) · 존욱 (存?) 富者를 섬겨 官職이 重文士(中門使)에 이르렀는데, 이존욱이 後唐(後唐)을 세우고 皇帝가 된 뒤에도 兵部尙書(兵部尙書) ? 樞密司(樞密使)에 重用되었으며 後涼 (後梁)을 멸망시키는 데에도 공이 1等으로 市中(侍中) ? 성덕君節度使(成德軍節度使)가 되어 地位가 가장 높았지만, 以後 宦官의 誣告로 處刑되었다. 後唐의 宰相이 된 두로革(豆盧革)李 곽숭도의 性이 郭氏라는 것 하나만으로 郭子儀의 後孫이라고 부추겨, 곽숭도 自身도 그 말을 곧이 믿고 郭子儀의 무덤에 찾아가 曲까지 했지만, 當時 사람들은 오히려 그것을 비웃었다고 한다.

吳代 時代 民間宗敎를 創始한 光澤존王(廣澤尊王)은 本名을 곽洪福(郭洪福) 또는 곽건(郭乾)이라 하였으며, 마찬가지로 郭子儀의 後孫을 自稱했다. (金)의 支配下에 있었던 한족 出身으로 「극서新人(極西神人)」이라 불리며 칭기즈 칸 을 섬겨 몽골 帝國 의 將軍으로 採用된 곽寶玉(郭寶玉)과 그 孫子 곽간(郭侃, ? ~ 1277年 )도 郭子儀의 後孫으로 알려졌다.

韓國의 境遇 淸州 郭氏 (相當 郭氏)는 郭子儀의 5代 손이라는 郭上(郭祥)이라는 人物을 집안의 始祖로 모시고 있다.

傳說 [ 編輯 ]

郭子儀의 出世와 關聯한 說話 [ 編輯 ]

《太平廣記(太平廣記)》勸第19에는 『新鮮感右前(神仙感遇傳)』을 引用해 다음과 같은 說話를 傳하고 있다.

大宗 大力 秒에, 郭子儀가 荷重(河中)의 軍陣에 있었을 때 重病을 얻었는데, 三群(三軍)은 自身들도 軍陣에서 죽는 것이 아니냐며 두려워했다. 그러나 이를 들은 郭子儀는 醫師와 幕僚(幕僚)였던 王연窓(王延昌), 早慧백(趙?伯), 嚴正(??) 等을 불러, "이까짓 病은 아무 것도 아니네. 나는 決코 이런 곳에서 죽지 않을 걸세."라고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過去 無關으로서 削榜의 瘠薄한 땅에서 從軍하던 靑年 時節, 食事를 마치고 은주(銀州)로 向하던 길에 數十 里를 남겨두고 날이 저물었는데, 바람에 모래 먼지가 일어 가지고 있던 짐도 어디다 두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때 저만치서 華麗하게 治粧한 수레 한 臺가 천천히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왔고, 수레 안에는 한 美女가 타고 있었다. 郭子儀는 美女를 向해 절을 올리고 "오늘이 7月 7日이니 分明 하늘의 織女 (織女)께서 地上에 내려오신 게구료. 萬若 그렇다면 부디 내가 長壽와 富貴를 누리도록 해주옵소서." 라고 말했고, 女子는 웃으며 "아주 큰 福을 누리며 아주 크게 出世할 것이고, 오래 事實 겁니다"라고 對答했다. 그러고는 다시 천천히 하늘로 떠올라 그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女子는 郭子儀를 바라보고 있었다. 以後 郭子儀는 큰 功을 세우고 出世하여 그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들은 軍士들은 모두 祝賀하고 기뻐했다. 그 뒤 郭子儀는 臣下로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地位에까지 올랐고, 太尉 ? 尙書令에 上部의 地位까지 누리고 아흔까지 살다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郭子儀의 富貴와 長壽 [ 編輯 ]

郭子儀의 「富貴」와 「長壽」에 對해 《新唐書》 列傳에서는 「(郭子儀의 邸宅은) 親隣里(親仁里, 長安의 坊里 가운데 하나)의 1/4을 차지하고 敷地 안에도 긴 골목이 지나갔으며, 恒時 3千餘 名의 가인(家人)李 드나들었음에도 너무도 넓었기에 字義가 어느 建物에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下賜받은 田畓과 아름다운 器物, 이름난 庭園과 邸宅의 數는 셀 수도 없었다. 大宗이 그의 이름(휘)를 입에 담지 않고 늘 「代身(大臣)」으로 불렀으며, 몸으로 天下의 安危를 다하기를 20年이었고 그 사이에 《中書令高(中書令考)》 24篇을 지었다. 여덟 名의 子息과 일곱 名의 사위가 모두 調整에서 貴하고 顯達하였는데, 내손(內孫, 親孫子)과 外孫 합쳐 數十 人에 이르러, 모두의 얼굴과 이름조차 다 記憶하지 못해 문안드리러 왔을 때조차 그저 『오냐오냐』하고 끄덕일 뿐이었다.」고 적었다.

郭汾陽行樂圖 [ 編輯 ]

官僚로서 成功的인 삶을 살았고, 長壽를 누렸을 뿐 아니라 子孫들 또한 繁昌하여 世俗에서의 福을 마음껏 누린 人物로서 郭子儀는 後代에 富貴功名의 象徵이 되었다. 朝鮮 時代에는 이러한 郭子儀의 삶을 屛風으로 形象化한 《郭汾陽行樂圖(郭汾陽行樂圖)》라는 屛風이 크게 流行했는데, 郭子儀와 같은 富貴와 長壽를 念願하는 吉祥의 意味가 담긴 工藝品으로서 現在 韓國에 20點 程度의 《郭汾陽行樂圖》가 남아 傳하고 있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只今의 中國 陝西省 (陝西省) 화현(華縣)이다.
  2. 淫書制度. 卽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公的으로 官職에 오르는 것.
  3. 武科. 官僚(特히 文官)를 選拔하는 過去 試驗과 마찬가지로 武官을 뽑기 위한 試驗.
  4. 《新唐書》 郭子儀展에 「無據에 이등(異等)함으로서 左衛장사(左衛長史)로 補任되었다」 , 또는 서송(徐松)李 撰하고 猛移動(孟二冬)李 補正한 『登科記高補正(登科記考補正)』權27의 記錄에서 찾아볼 수 있다.
  5. 具를 「句邱」로 쓴 것도 있다.
  6. 《新唐書》 街書翰箋(哥舒翰傳) 「처음, 안사순은 菉山이 반드시 反逆을 일으킬 것이라 일찍부터 皇帝를 위해 말한 바가 있어 緣坐를 면하였다.」
  7. 五感(五監)의 하나로 衛尉寺(衛尉寺)의 長官. 官品은 種3品.
  8. 《新唐書》列傳에는 郭子儀에게 여덟 아들과 일곱 사위가 있었다고 했으며, 夫人 王氏의 神道碑(神道碑)에는 여덟 딸을 두었다고 했다.

外部 링크 [ 編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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