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토 다이사쿠
(
日本語
:
河本 大作
,
1883年
1月 24日
~
1955年
8月 25日
)는
關東軍
參謀로 이른바
皇考둔 事件
(
皇姑屯事件
)의 主役이다.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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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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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고현
사요群
(只今의
社妖精
)의 地主 아들로 태어났다. 1903年에
日本 陸軍士官學校
를 15期로 卒業하였으며, 卒業 後 騎兵少尉로
러일戰爭
에 參戰하였다. 러일戰爭에서 重傷을 입은 다이사쿠는 故國으로 돌아와 1914年에 26期로
日本 陸軍大學校
를 卒業하였고 滿洲로 건너가
關東軍
高級 參謀로 赴任하였다.
皇考둔 事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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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8年
6月 4日
베이징
에서
滿洲
로 歸還하던 滿洲의 實質的인 權力者인
장쭤린
이 타고 있던 列車가
皇考둔 驛
近處에서 爆破되는 事件이 일어나 장쭤린이 死亡하는 일이 벌어졌다. 日本 言論들은
中國 國民黨
의 所行으로 報道했지만 以後 調査에서 다이사쿠의 計劃을
關東軍
이 實行한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다이사쿠의 關與 事實은 所聞으로만 茂盛했기 때문에 그 眞相은 確實히 糾明되지 못하였고, 이 때문에
日本 帝國
은 이를 認定하지 않았다.
日本 帝國
이 다이사쿠의 介入을 否定하자 곧 關東軍의 介入 事實도 否定되었다. 그러던 中 다이사쿠가
도쿄
에 사는 知人에게 보낸 便紙에 장쭤린의 죽음에 對하여 "장쭤린 한 名이나 두 사람이 죽어도 좋지 아니한가"라는 內容을 言及한 것이 밝혀져 疑惑은 거세졌다. 當時 장쭤린은 中國 國民黨과
中國 共産黨
사이의 對立을 緩衝해주는 役割을 하였고, 그 때문에 장쭤린과
日本 帝國
은 緊密한 關係를 가지고 있었으나 皇考둔 事件으로 장쭤린의 軍閥과의 關係는 깨졌다.
또한 다이사쿠의 이러한 行動은 日本 帝國에 알리지 않은 獨斷 行爲였으므로
쇼와 天皇
은 憤怒했다. 이 事件으로 日本 帝國에서는 內閣이 總 辭退하는 等 內紛이 일어났다.
日本 帝國 陸軍內部에선 다이사쿠를 軍法會議에 回附하는 代身
1929年
4月
다이사쿠를 豫備役에 편입시키는 아주 가벼운 刑罰을 내려 事件을 撫摩시켰는데, 이에 日本 帝國 陸軍大將
마쓰이 이와네
는 이런 가벼운 處分에 對하여 끝까지 强力 反撥하였다.
退役 後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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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年
다이사쿠는 軍에서 물러나고, 關東軍 時節의 人脈을 利用해
滿鐵
(滿鐵)의 理事職을 맡았다. 그 後 다이사쿠는
1934年
滿洲에서 炭鑛會社의 理事長이 되었다.
1942年
日本 帝國 陸軍
第1軍
參謀長
이던
하나야 다다시
(
花谷正
)의 推薦으로 國營會社인 산시 産業 株式會社의 社長이 되었다.
소비에트 聯邦
의 滿洲 侵攻 以後에도 中國에 남아있던 고모토 다이사쿠는 戰爭 捕虜가 되어 1955年 8月 25日 中國
타이위안
收容所에서 病으로 死亡하였다.
參考 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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