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의 映畫化
라는 것은
小說
이나
電氣
따위의
文學作品
을
映畫
로 만드는 것을 뜻한다.
槪要
[
編輯
]
文學
텍스트와
映畫
텍스트 사이의 가장 一般的이며 頻繁한 相互交流를 우리는
各色
이라고 한다.
各色
은
時
,
戱曲
,
小說
等
活字
로 이루어진
文學作品
이 視覺的 이미지로 轉化되어
映像化
되는 것을 말한다.
[1]
이는 單純히 읽을거리를 볼거리로 전환시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2]
文學作品
의
플롯
이
鑄物
이라고 한다면
各色
은
鑄型틀
을 利用해서 새로운
鑄型
을 만드는 作業이라고 할 수 있다. 새롭게 製作된
鑄型
이
原州물
과 內容物이 같지만 形態가 다르듯이 文學을
映像化
한 作品도
플롯
의 構成物이 같더라도 形態面에서 差異가 나는 것이다.
各色
된 作品은
原作
의 感動을 傳達하는 한便,
原作
과는 다른 意味와 示唆點을 만들어낸다.
[3]
조지 블루스턴
(J.Bluestone)은 槪念에 對해서 일찍부터 韓國的으로 探索했다. 그는 小說이 觀念的인 形態라면, 映畫는 知覺的, 再現的인 形態의 藝術라고 서로의 差異를 對照했었다. 또한 映畫가 小說을 아무리 充實하게
各色
한다고 해도 根本的으로
創作
인 것이기 때문에,
시나리오
作家는 言語的 感覺에만 制限되어 있는
小說
의
原作
을 主觀的으로 解釋해서 알기 쉽게 解說하기에
創作
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4]
小說
을
映畫
로
各色
하는 것에는 單純한 視覺的인 再現에만 滿足할 수 없기에 그 어려움이 따른다.
小說
을
映畫
的인 言語로 再創造해야 한다는 原則과 當爲性이 얼마만큼 충족시켜주어야 하느냐에 따라
各色
의 成敗 與否가 갈린다.
[2]
文學
과
映畫
의 共通點
[
編輯
]
文學
이란 쉽게 말해
言語藝術
이라고 할 수 있다. 卽 넒은 意味로 보면, 말로 된 것이든 글로 表現된 것이든
言語藝術
이면 모두 다
文學
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생각해보면
映畫
도
文學
에 包含되는 것이며, 따라서 서로 많이 닮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글
이 아닌
映像
을 통해 實現되지만, 基本的인 構成要素가
言語
이며,
藝術
의 한 樣相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繼續 論議되고 있는
文學
은
各色
의
對象
이 되는 것으로서,
광의
의
文學
이라기보다는 좁은 意味의
文學
을 의미한다.
[5]
그런데, 이렇게
文學
을 좁게 규정지어 보면,
映畫
는 그 以前에 넓은 意味에서 가질 수 있었던
文學
과의 共通的 性質을 잃는 것처럼 보인다.
글
로 表現 되었다는 條件을 잃기 때문이다. 그러나
映畫
를 만들기 위한 必須 作業이자,
映畫
의 根幹이 되는
시나리오
에 對해 생각해본다면,
映畫
와
文學
사이의 關係는 다시 한 番 緊密해진다.
시나리오
를 통해
映畫
는 ‘텍스트性을 가진 敍事’라는 要素를 確保하게 되고, 그에 따라 ‘좁은 意味의 文學’과의
交集合
을 形成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特性上의 共有는
映畫
의
事件 展開
가
小說
이나
戱曲
에서의
事件 展開
와 아주 비슷한 樣相을 가지게 되는 데까지 나아가게 만든다.
[5]
小說
이나
戱曲
에서의
事件 展開
를 簡單하게 나타내는 用語가
프라이타크(Freytag)의 三角形
이다. 卽, 事件의 展開를
發端
,
上昇
,
危機
或은
絶頂
, 下降,
破局
의 다섯 段階로 진전시키는 것이다.
發端
과
上昇
段階 사이에는 刺戟的 契機를 만들어서 보는 이들의 關心을 집중시키고,
最高潮
에 이른 事件을
破局
으로 끌어내리기 위해서는 悲劇的 契機를 만들어 事件의 흐름을 危機나
絶頂
에서 끌어내어 매듭을 짓는다. 바로 이러한 事件 展開 方式을 基本으로
시나리오
의
事件 展開
도 이루어지게 된다.
[6]
한便,
文學
과
映畫
의 媒體的 共通點은 이렇게 같은 要素의 共有에서도 나오지만, 다른 要素의 類似性에서도 發見할 수 있다. 그 例로 映畫의
몽타주
技法을 들 수 있는데
몽타주
란, 프랑스語로 ‘monter(組立하다)’와 ‘narratage(解說하다)’의 結合語이며, '時間이나 事件의 經過를 나타낼 때 使用하는 映像의 編輯된 場面 轉換'을 말한다. 映畫의 場面과 場面을 連結시키는 技法이라고 할 수 있으며,
編輯
과 同義語로 쓰이기도 한다.
[7]
한便, 이러한
몽타주
에 對應하는 英語單語 'compostion'은 文學의 '構成'에 對應하는 槪念이며, 敍事學에서
몽타주
의 配列 原理는
플롯
에 對應된다.
[8]
이렇게 볼 때, 映畫의 技法으로서의
몽타주
가
文學
에서는 '構成'의 役割을 하고,
몽타주
의 配列 原理는
敍事文學
에서의
플롯
과 같은 役割을 함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例로는
미장센
을 들 수 있다.
미장센
이란 한 畵面 속에 담기는 이미지의 모든 構成要素들과, 이를 통해 主題를 드러내도록 하는 監督의 作業을 가리킨다.
[9]
이는
小說文學
에서의
指紋
,
戱曲文學
에서의
指示文
의 役割과 對應된다고 할 수 있다.
小說
의
指紋
이나
戱曲
의
指示文
이, 讀者의 머릿속에 一種의
이미지
를 形成 하고, 그
構成要素들
은 主題와 緊密한 聯關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映畫
와
文學
은 같은 要素를 共有한다는 點에서 그리고 다른 要素지만 같은 役割을 遂行한다는 點에서 媒體的 特性上의 共通點을 가진다.
[5]
文學
과
映畫
의 差異點
[
編輯
]
이 둘의 差異點은 둘의 共通點의 障壁을 單番에 무너뜨린다. 먼저
戱曲
과
시나리오
를 比較해보면,
戱曲
은 그 自體로
文學
의 한
장르
가 된다. 구태여
演劇化
되지 않아도
作品
을 鑑賞하는 것이 可能한 것이다. 그리고 이 때 가장 重要한 役割을 하는 要素는 言語的 要素인
大使
이다. 하지만.
시나리
오는
戱曲
과 달리 獨自的인
文學
의 장르로서 存在하기보다는
映畫
를 찍기 위한 手段의 役割이 더 優先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映畫
의 感動은
大使
한마디의 文學性에서 오기보다는 畵面에 나타난
이미지
에 많은 程度 依存한다. 極端的으로 말해서
映畫
는
大使
가 없이도 存在할 수 있는 것이다.
[5]
根本的인 次元에서,
文學
, 特히
小說
이나
戱曲
과 같은
敍事文學
은 읽는 媒體이므로, 讀者들은
文字
로 드러나는 事件들을 읽으면서 이를 連續된 場面으로 再認識해야한다. 反面,
映畫
는 보이는 媒體이므로 鑑賞者는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結局
映畫
가
이미지
를 一次的인 疏通手段으로 삼고 있다면,
文學
은 二次的인 手段으로
이미지
를 利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모든
藝術
은 그 存在의 第1目的이
鑑賞
의 對象이 되는 것이다. 卽,
鑑賞
되기 위해
藝術
이 存在한다. 이를 通해
文學
과
映畫
라는 두
장르
는 모든 共通點을 相殺하고도 남을 만큼의 큰 差異點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5]
映畫
의 發展에 對한
文學
專門家들의 立場
[
編輯
]
映畫
의 暴發的인 底邊의 擴大에 對해
文學
專門家들의 立場은 둘로 나뉜다. ‘
文學
의 危機’로 보는 立場과 ‘
文學
의 擴大’로 보는 立場이다. 危機로 보는 立場은 映像媒體는 斷片的, 感覺的, 卽物的인 特徵에 商業的 特徵까지 結合되어 있는 것에 따라서
文學 作品
을 읽지 않는 世態에 憂慮를 표한다. 擴大로 보는 立場은
映畫
와
文學
을 가르는 代身에 이 둘의 相互疏通을 認定해서
映畫
를 現代的으로 變容된
文學
享有方式으로 解釋한다. 어떤 觀點을 取하든지 現代에
文學
과
映畫
가 相互 共存하는 現象을 無視할 수 없다.
[10]
歷史
[
編輯
]
文學
의
映像化
의 側面에서
各色
의 歷史를 살펴보면,
文學作品
을 통해
映畫
를 만드는 것은
映畫
自體의 歷史만큼이나 오래되었으며, 그에 對한 世間의 關心도 相當했다.
映畫社
에서 最初의
映畫
上映은
프랑스
의
뤼미에르 兄弟
가 파리의 한 살롱에서
시네마토그래프로 필름을
上映했던 1895年이었다.
[11]
그리고 最初의
脚色映畫
또한
뤼미에르 兄弟
가 선보였는데, 첫
映畫
를 上映한 2年 뒤인 1897年의 일이었다. 두 兄弟는 基督敎 聖書를
내러티브
의 素材로 삼아 13個의 場面들로 이루어진
脚色映畫
를 선보였다. 1910年代에 이르러서는 많은
映畫
製作者들이 大衆에게 잘 알려진
古典的 영미小說
들을
映畫
로 脚色하기 始作하였다. 이
無聲映畫
時期의 代表的
脚色映畫
로는 [[<로빈슨 크루소 漂流記>]](Robinson Crusoe, 1902), [[<걸리버 旅行記>]](Gulliver’s Travel, 1902), [[<톰 아저씨의 오두幕>]](Uncle Tom's Cabin, 1902),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 1905) 等이 있다.
小說
과
映畫
두
媒體
사이의 交流는 如前히 活潑하게 이어져 오고 있는 것에 따라서 100年 以上이 지난 오늘날 商業的인 目的으로 만들어진 모든
映畫
의 折半 以上이
文學作品
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時
나
戱曲
을 비롯한 다양한
文學
장르
로부터
各色
된 많은
映畫
들이 있지만 그 中에서도
小說
은 特히
映畫
歷史上 가장 人氣 있는
내러티브
의 源泉이 되어왔다고 할 수 있다. 批評家
패트리샤 홀트
(patricia Holt)의 調査에 依하면
映畫
의 平均 30% 程度가
小說
을 바탕으로
各色
된 作品이라고 하고,
베스트셀러
名單에 오른
小說
은 거의 80% 程度가
各色
되어
映畫
로 上映된다고 한다.
[1]
各色의 패러다임
[
編輯
]
個別的 映畫理論家들이 提示하는 脚色의 種類
[
編輯
]
文學作品
으로부터
各色
된
映畫
에 對해서는 종잡을 수 없는 評價의 差異가 存在한다. 같은
映畫
에 對해서
批評家
들은 서로 相反되는 劇團의 評을 내리곤 한다. 그런
評價
의 差異는
批評家
個個人의 主觀的인 性向에 依한 것이기보다는 根本的으로
批評家
들이 저마다 서로 다른 理論的
패러다임
을 基準으로 各
映畫
를 判斷하고
批評
하기 때문이다.
[1]
지프리 와그너
(Geoffrey Wagner)
[
編輯
]
各色의 세 가지 範疇를 “轉換(transposition)”, “論評(commentary)”, “類似(analogy)”로 나누고 있다.
[12]
- 轉換은 “눈에 띄는 두드러진 干涉 없이
原作小說
을 그대로 直接
映畫
로 옮기는
各色
方式을 뜻한다”
[12]
- 論評은 “
原作
을 中心으로 따르지만 意圖的으로는 또는 無心코 어떤 部分을 변화시키는 것으로, 이것은
原作
에 對한 背信이나 徹底한 違反이라기보다는 製作社 側에서 다른 意圖를 가질 때 생긴다고 할 수 있다”
[12]
- 類似란 “全혀 다른
藝術作品
을 만들어 내기 위해
原作
으로부터 相當히 많은 離脫을 包含하는 것”
[12]
으로
原作
과 거의 닮은 點이 없는
各色
이다.
마이클 클라인
(Michael Klein)과
길리안 파커
(Gillian Parker)
[
編輯
]
두
批評家
는 主張하는
小說
에서
映畫
로 옮겨지는
各色
過程에 對한 세 가지 主要 接近法으로는 “原作그대로의 脚色(literal adaptation)” “批判的 脚色(critical adaptation)” “自由 脚色(free adaptation)”이다.
[13]
- 《傲慢과 偏見》(Pride and Prejudice, 1940年 映畫)
,
《크리스마스 캐롤》(Christmas Carol, 1959年 映畫)
,
《人間의 굴레》(Of Human Bondage, 1964年 映畫)
,
《아들과 戀人들》(Sons and Lovers, 1960年 映畫)
- 原作小說
의 核心的인
내러티브
構造를 나름대로 維持하면서도
原作
텍스트에 對한 獨創的인 再解釋이나 解體的 顚覆을 試圖하는 것을 指稱한다. 主로 自身만의 獨特한 視角으로 旣存의
文學
敵 素材를 새롭게 接近하는 作家主義 監督들의 作品에서 두드러진다.
- 루이스 不累엘(Luis Bunuel)李 脚色한 다니엘 디포(Daniel Dofoe) 原作의
《로빈슨 크루소》(Robinson Crousoe, 1954年 映畫)
,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
監督이
윌리암 새커리(William Thackery)
의 19世紀 小說을 直接
各色
,
製作
,
演出
하여 話題가 된
《베리 린든》(Barry Lyndon, 1975年 映畫)
,
조셉 스트릭(Joseph Strick)
이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
의 小說을 脚色한
《젊은 藝術家의 肖像》(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 1979年 映畫)
- 原作小說
의 忠實한 再演에는 別 關心이 없고 오로지
原作
을 基本 素材로만 利用하여 새로운 作品을 만들어내는 데에 集中하는 것이다.
- 19世紀 末에 發表된
브램 스토커(Bram Stoker)
의 고딕小說
《드라큘라》(Dracula, 1897)
를 原作에 相關없이 自由롭게 脚色한
워너 허조그(Werner Herzog)
의
《吸血鬼 노스페라土》(Nosferato the Vampyre 1979年 映畫)
, 英國 小說이
조셉 콘래드(Joseph Conrad)
의
《어둠의 核心》(Heart of Darkness, 1902)
을 베트남 戰爭을 背景으로
各色
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Francis Ford Coppola)
監督의
《地獄의 默示錄》(Apocalypse Now, 1979年 映畫)
等이 있다.
더들리 앤드루
(Dudley Andrew)
[
編輯
]
著名한 映畫理論家
더들리 앤드루
(Dudley Andrew)는
各色
의 基本樣相을 “車用,” “交叉,” 그리고 “變形” 세 가지로 區分 지어 提示하고 있다.
[14]
- 借用(borrowing)이란 “藝術家가 一般的으로 成功을 거둔 移轉 텍스트의 素材, 아이디어 또는 形式을 多少 廣範圍하게 使用하는 것”
[14]
을 指稱한다. 여기에서 重要한 關心의 對象이 되는 것은 藝術的 獨創性이지,
原作
에 對한 充實性은 아니다.
- 交叉(intersecting)는
各色
에 同化되지 않고
原作
텍스트 固有의 獨特性이 어느 程度 그대로 保存된
各色
形態이다.
[14]
- 變形(transformation)은 “
各色
에 關한 論議 中 가장 흔하고도 지루한 것”
[14]
으로 “
各色
이 해야 할 일은
原作
에 關한 어떤 本質的인 것을 映畫 속에 再生産 하는 것”
[14]
을 主張하는 理論으로
原作
의 忠實한
再演
을 强調하는 것으로 理解될 수 있다.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 大學
의 英文科 敎授이며 國內에서도 잘 알려진 映畫理論家
루이스 자네티(Louis Gianetti)
는
原作小說
에 對한 充實度를 基準으로 세 가지 種類의 脚色을 提示하고 있다.
[15]
- 느슨한 脚色(the Loose adaptation)
[15]
- 文學
텍스트로부터 但只 어떠한 아이디어나 狀況 또는 登場人物을 選擇한 後에 그 다음부터는
原作
과 相關없이 獨自的으로 自由롭게
映畫
를 進行시켜 나가는 것이다. 자네티는
日本 映畫
의 巨匠
구로사와 아키라(Kurosawa Akira)
監督이
셰익스피어
의
《멕베스》(Macbeth)
와
《리어 王》(King Lear)
을 各各 再解釋한 映畫
《거미집의 性》(The Throne of Blood, 1957年 映畫)
과
《亂》(Ran, 1985年 映畫)
을 이의 代表的인 實例로 들고 있다. 구로사와 監督의
脚色映畫
들과
셰익스피어의 悲劇
들과의 關係는 事實 皮相的이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뛰어난
各色
으로 評價받고 있다. 特히
《거미집의 性》
은 原作의 充實한 再現을 美德으로 삼던 旣存의
셰익스피어 戱曲
의 脚色 傳統을 果敢히 脫皮하고
《멕베스》
의 臺詞를 거의 直譯하지 않고 오직 映畫的 이미지로 視覺化하는 데에 卓越한 藝術的 力量을 集中했다.
[16]
- 忠實한 脚色(the Faithful adaptation)
[15]
- 最大限
原作
의 精神에 가깝게
文學作品
을 映像的 視角에서 再創造하는 것이다.
헨리 彼日딩(Henry Fielding)
의 18世紀 英國小說을
各色
한
토니 리차드슨(Tony Richardson)
監督의 1963年度 作品
《톰 존스》(Tom Jones, 1963年 映畫)
는 忠實한 脚色에 屬한 映畫이다.
原作小說
의 基本 이야기 構造와 主要 事件, 人物들을 大部分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그러나 이
映畫
는
脚色映畫
의 本質에 따라서 이야기의 進行上
小說
속의 수많은 事件과 場面들을 省略하고 主要한
에피蘇
드에 焦點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原作
을 單純히
視覺化
하여 그대로 옮겨놓은 것은 아니다.
- 原作 그대로의 脚色(the Literal adaptation)
[15]
普通 오리지널
演劇 作品
을 脚色하는 境遇에만 限定된다고 할 수 있다. 主로
舞臺
위의 登場人物의 行爲와 臺詞를 그대로 카메라에 담아내는
各色
理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롱 쇼트
로 카메라를 客席에 固定시킨 채
失戀
中인
演劇
을 찍는 것은 初期
無聲映畫
時代부터 많이 쓰였던 方法이기도 했다.
흔히 쓰이는 各色의 세 가지 패러다임
[
編輯
]
明確한 區分의 便宜上 세 가지를 서로 다른 類型으로 紹介하지만 實際로는 저마다 完全히 다른 差別性과 排他性을 지닌다기보다는 서로 비슷한 共通點들도 많이 갖고 있다. 이 들
패러다임
間 差異는 理論的 優先 順位에 對한 强調의 程度 差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7]
忠實한 脚色
[
編輯
]
映畫
를
原作小說
에 充實하게 視覺化하는 過程이다.
原作小說
의
내러티브
要素들인
背景
,
人物
,
主題
,
플롯
等을 얼마나
原作
에 近接하게 옮겨놓았는지에 따라서 그
脚色映畫
의 價値가 決定된다. 그러나
小說
은 普通
映畫
臺本의 세 倍 程度의 分量이기 때문에
映畫化
過程에서
單純化
와
省略
은 同伴될 수밖에 없다. 이런 制約에도 不拘하고 充實性
패러다임
에 立脚한
批評家
들은
映畫
가
原作小說
의 內容과 主題를 忠實히 살려주기를 期待한다. 이
패러다임
에 基底에는 小說의 優越性과 映畫의 相對的인 劣等感을 假定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映畫
를 評價하는 基準으로
充實度
를 唯一하게 꼽기 때문에
映畫的 表現技法
이나
視覺的 要素
들에 對해서는 別로 關心이 없다.
[17]
多元的 脚色
[
編輯
]
허만 메빌
의
《빌리 버드》(Billy Budd)
의 1962年度
各色
을 맡았던
드윗 보딘(DeWitt Bodeen)
은
文學作品
을
映畫
로
各色
하는 것은 疑心할 餘地없이 創造的인 作業이라 할 수 있지만 이것은 一種의 選擇的인 解釋과 더불어
原作小說
에서 具現된 雰圍氣를 再創造하며 維持할 수 있는 能力을 必要로 하다고 했다.
[18]
批評家
모리스 베자 (Morris Beja)
는
脚色映畫
는 하나의
藝術 作品
으로서
原作小說
과 關係는 되지만 同時에 獨立性을 지니며, 하나의 藝術的인 業績으로서
原作
과 奇妙하게 같으면서도 무언가는 다르다고 했다.
[19]
卽 이
패러다임
은 原作과
脚色映畫
사이의 調和를 擁護하는 中道的 立場이라고 할 수 있다.
映畫
가 그 自體로서의 獨立性을 維持하며 存在하는 것을 强調하면서 同時에
原作小說
의
語調
,
雰圍氣
,
精神
等도
映像
을 통해 具現되는 것을 重要視 한다. 이 같은 理論에서는 두 媒體 卽,
原作小說
과
映畫
사이의 類似點들을 提示하는 것이 成功的인
各色
으로 일컬어진다.
[17]
變形的 脚色
[
編輯
]
原作小說
을 앞으로 새롭게 加工될 原料 程度로 取扱한다. 이는 그 自體로서
原作小說
에서 完全히 벗어나 있는 하나의 藝術的 成就라고 할 수 있다. 이 立場을 取하는
映畫 批評家
들 사이에서도
原作小說
과
脚色映畫
의 獨立性 程度에 따라 조금씩은 다른 理論的 見解를 갖는다. 그러나 重要한 것은
映畫
가 얼마나
原作小說
을 尊重하며 만든
各色
이냐가 아니라 얼마나 自身의 視覺的인 비전을 尊重하면 創意的으로
各色
下였느냐가 關鍵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文學
과
映畫
를 完全히 別個의 自律的인
藝術 活動
으로 看做하고 저마다 다른
意味化 體系
를 基盤에 두고 있다는 點을 認定하는 바이다. 그리고
原作小說
보다
各色
된
映像 텍스트
를 優先視하는 批判的 性向을 가지고 있다.
原作小說
의
主題
나
形式
에서 完全히 벗어났다고 할지라도 非難해서는 안 된다고 主張한다.
[17]
社會的 意味
[
編輯
]
映畫
가
藝術作品
을 集團的, 同時的으로 收容하게 함에 따라서
對中
들은 批評的 鑑賞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는 自己만의 空間에서 이루어지는
文學作品
읽기의 方式과는 다른
文學
享有方式
이다.
映畫
에 對한 觀客들의 反應은 自身만의 內的 體驗일 수는 없으며
映畫
의 觀客들은
映畫
나
비디오
出市에 따라서 나오는 公式的, 非公式情 評들과 함께 作品을 接하게 되고 本人 스스로도 그런 評을 하기도 한다. 卽
映畫
는
集團性
과
同時性
을 最大限 浮刻시킨 媒體이다. 따라서 文學의 映畫化에 對한 深層的 解釋은
社會
라는 巨視的 次元에서의 觀點을 必要로 한다. 이는
映畫
가 다른 어떤
藝術 分野
보다
政治學
,
經濟學
과 密接한 關聯이 있는 理由이기도 하다.
[20]
文學의 映畫化는 單純히
原作小說
을
映像化
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當代의 社會 文化的 理念에 基盤한 集團的 讀解라고 할 수 있다. 特定 時代와
對中
의 要求를 反映해서
原作
을 再生産한 것이라 할 수 있다.
原作
과
映畫化
된 作品의 差異는 監督과 觀客이 處하고 있는 時代의 欲望과 價値觀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20]
우리들의 일그러진 英雄
[
編輯
]
映畫로의 脚色
에서
政治性
을 보여주는 例로서
1987年
에
李箱文學賞
을 受賞한
李文烈
의 同名小說을 映畫한
우리들의 일그러진 英雄
(박종원 監督, 홍경인, 고경일 主演, 1992年 映畫)을 들 수 있다. 이
映畫
는 主人公
한병태
와
嚴石臺
, 擔任先生님을 中心으로 오고간
權力
과
自由
의 函數를 中心 줄거리로 하며,
人物
의 基本性格이 거의 變함이 없다는 點에서
原作
의 많은 部分을 參照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原作
에서는 警察에 잡혀가는
嚴石臺
가
映畫
에서는 繼續 權力을 維持하며,
4·19精神
의 改革意志를 가졌던 擔任先生님이 國會議員이 돼서 舊態依然한 政治人의 모습을 보인다. 이를
1992年
現代史的 意味
로 따져볼 수 있다.
1992年
에는
1987年
부터 高揚되었던
民主化 熱氣
가
3黨 合黨
과
92年 總選
에서의
與圈勝利
때문에 꺾여 나갔었다. 이는 國民들의
直選制 改憲
에서의 勝利 經驗이 다시 挫折되는 時期였다. 映畫에서의 擔任 先生님의 轉向과 엄석臺의 乘勝長驅는 그러한 挫折을 드러내는 裝置라고 볼 수 있다.
[20]
利點
[
編輯
]
많은
映畫製作者
들은
小說
속의
이미지
나
場面
,
觀念
,
內러티
브 等을 基盤으로
映畫
를 만들 곤 한다. 그렇게
映畫
를 만드는 데에는 複合的인 要因들이 있겠지만 다음과 利點들을 꼽을 수 있다.
[1]
大衆에게 잘 알려져 있는
古典的 小說
이나 最近의
人氣作
을 映像化하는 것은 많은 觀客動員으로 이어질 可能性이 높기 때문에 商業的으로 利得을 낼 可能性도 높아진다. 個人이 負擔 可能한 範圍 內의 小資本으로도
出版
이 可能한
小說
과는 달리 莫大한 資本이 投入되는
映畫
라는 媒體의 特性上 經濟的 危險負擔을 줄이고
利潤
을 極大化하고자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20世紀 初盤부터 本格化된
小說의 脚色
을 통해서
映畫
의 地位는 向上되었다. 以前에는 勞動者를 위한 娛樂的인 文化樣態로 認識되던 보잘것없는 地位에 있었지만, 文學的
내러티브
를 視覺的으로 具現하는 尊敬받을 만한
藝術作品
으로서의 地位에 놓였다.
意義
[
編輯
]
文字의 時代
에는
文字
를 통해 배우고 익힐 수 있지만
디지털 멀티미디어 時代
에는 배우고, 느끼고, 選擇하고, 感知하고. 記憶하는 過程이 循環 體驗되면서
文化
를 익힌다. 더 以上
文字
는
旣得權
을 維持할 수 없다. 이러한
脫 中心的
,
多媒體的
事故는
文學
과
各色
의 關係에도 適用된다. 恒常
脚色作品
은
原作
의
主題
와
內容
에서 너무 벗어났다거나
意圖
를 못 살렸느니 非難받았던 反面
文學作品
은 上位의 價値를 維持해왔다. 그러나
各色
은 한
장르
內에서, 또는 여러 장르 間에 걸쳐서 實行되면서 相互間에 表現
內容
이나
形式
에 影響을 미칠 수 있다. 이에 따라서
元來 텍스트
마저
變形
시키고 새로운
創造的
意味를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文學의 映畫化를 對할 때
先入見
에서 벗어나
文化 産業
의 觀點에서 바라봐야 한다. 하나의 材料를 土臺로 다양한
再創造
를 試圖하는 創作을 무턱대로 貶下해서는 안 된다.
[21]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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