哲學的 拔本注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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哲學的 拔本注意 ( philosophical radicalism )는 19世紀 英國에서 제러미 벤담 제임스 밀 의 思想에서 影響을 받아 發想의 轉換을 통해서 社會改革을 追求한 사람들의 信條와 運動을 가리키는 用語이다. 이 思想을 믿는 이들을 哲學的 拔本派(philosophical radicals)라고 부른다.

主要 構成員 [ 編輯 ]

제러미 벤담 (1748-1832), 제임스 밀 (1773-1836), 프랜시스 플레이스(Francis Place, 1771-1854), 조지 그로트(George Grote, 1794-1871), 조지프 파크스(Joseph Parkes, 1796-1865), 존 아서 로벅(John Arthur Roebuck, 1802-1879), 찰스 불러(Charles Buller, 1806-1848), 존 스튜어트 밀 (1806-1873), 에드워드 존 트렐로니(Edward John Trelawny, 1792-1881), 윌리엄 몰즈워스(William Molesworth, 1810-1855) 等을 代表的으로 列擧할 수 있다. 이들 가운데 로벅, 불러, 존 스튜어트 밀, 몰스워스 等은 現實 政治人으로서 下院議員을 지냈다.

背景 [ 編輯 ]

1832年 選擧法 改正 以後 더욱 根本的인 改革을 要求하는 勢力들이 나타나서 拔本派( radicals )라고 불렸다. 이런 흐름은 大略 두 갈래로 나타났는데 民衆的 拔本波와 哲學的 拔本波로 나뉘었다. 民衆的 拔本파는 參政權 , 表現의 自由 , 貧困에 對한 社會的 口號 等을 要求했고, 示威 와 같은 實力行使를 통해 目標를 追求했다. 當時에는 集會와 示威가 反逆 또는 犯罪 와 混同되던 時節이기 때문에 示威는 警察과 衝突로 이어지기 일쑤였다. 哲學的 拔本파는 良心의 自由 宗敎의 自由 , 自由競爭市場注意 , 議會改革, 避妊이나 參政權을 包含한 女性의 權利, 功利主義 原理에 따른 社會秩序 等을 主張했고, 著述, 講演 및 議會進出을 통해서 目標를 追求했다.

議會에 進出하는 等, 實際 政治人으로서 制度改革을 追求한 사람들을 政治的 拔本派, 著述이나 講演을 通한 發想의 轉換에 强勢를 둔 사람들을 哲學的 拔本波로 나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런 區分은 二分法的인 問題가 아니라 程度의 問題로 接近해야 한다. 예컨대 존 스튜어트 밀 은 이들 가운데 가장 많은 著述을 남겼지만, 同時에 議會에도 進出한 履歷이 있다.

拔本파는 英國의 휘그당 이 紳士들 사이의 社交클럽이라는 殘滓를 벗고 이념적 政策的 正體性을 갖춘 自由黨 (Liberal Party)으로 탈바꿈하는 데 一助했다. 自有黨이란 1839年 頃부터 使用되기 始作하는 名稱으로서 從來의 휘그당, 拔本派, 그리고 글래드스턴 처럼 穀物法 廢止를 主張하면서 保守黨에서 빠져나온 勢力이 同盟한 形態로 始作되었다. 自由黨內 拔本파는 勞動黨이 생기기 前까지 社會主義的 發想들을 自由黨 안으로 導入했고, 길드 社會主義 페이飛雁 協會 等에게도 靈感을 提供했다.

拔本의 意味 [ 編輯 ]

拔本(拔本)이란 뿌리를 뽑는다는 뜻으로, 래디컬(radical)이라는 英語 單語가 "뿌리에 關한"이라는 意味이기 때문에 이렇게 飜譯하는 것이 適切하다. 흔히 急進(急進)이라는 번역어가 使用되기도 하지만, 발本派를 性急하다고 여기는 것은 典型的인 保守主義 視角이기 때문에 中立的인 用語가 될 수 없다. 예컨대 벤담이나 존 스튜어트 밀은 래디컬, 卽 拔本波인 것이 분명하지만, 어떤 面으로도 急進派, 卽 手段方法을 가리지 않고 性急하게 目的을 追求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이들의 思想에서 特히 拔本的인 性格은 다음과 같이 要約해볼 수 있다.

  1. 功利主義: 功利主義란 모든 線(good)은 곧 公理(功利, utility)이어야 하고, 公理가 아니라면 善일 수도 없다는 생각이다. 公理, 效用, 利益이라고 하면 흔히 線과는 對立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通俗的인 傾向이 있는데, 이는 但只 생각이 짧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個人의 境遇에도 目前의 利益에만 매달려서 人生을 망친다면 利益이 아닐 뿐만 아니라 線도 아니기 때문이다. 흔히 道德的 善行이라고 불리는 行爲들은 社會的 公理에 寄與하기 때문에 線이다. 社會平和, 곧胴體에 對한 信賴感, 낯선 사람에 對한 親近感, 等은 當然히 社會全體에 도움이 되며, 그렇기 때문에 禪이라는 것이다.
  2. 政策의 基準: 따라서 이들은 모든 政策을 공리의 原理에 따라서 저울질하고 決定해야 한다고 促求했다. 예컨대 벤담은 이라는 것이 復讐의 手段으로 轉落한다는 것은 野蠻일 뿐이고, 改名된 社會에서 犯罪에 對한 處罰은 恒常 그 結果 社會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에 焦點을 맞춰서 定해져야 한다고 主張했다. 被害者의 復讐心도 마냥 無視만 한다면 社會에 對한 一般的 不信으로 發展할 수 있는 만큼 當然히 考慮해야 하지만, 어디까지나 한 가지 考慮事項일 뿐 가장 重要한 考慮事項은 아니라는 얘기다. 從來의 刑罰 이 악을 除去한다고 하면서 더 큰 惡을 招來해 온 傾向이 있었다고 하면서, 特히 復古主義, 宗敎, 革新 賣渡, 隱喩, 허구, 幻想, 敵愾心과 同情心, 論點回避, 想像으로 만들어 낸 法 等이 그러한 傾向에 責任이 많다고 列擧했다.
  3. 主要 議題: 이들이 當時에 追求한 主要 議題로는 良心과 宗敎의 自由, 勞動者와 女性에 對한 參政權 擴大, 協同組合 形態의 農業과 企業을 통한 效率性과 分配의 向上, 土地制度 改革, 돈이나 身分이나 偏見이 作用할 餘地를 줄이는 方向으로 選擧制度改革, 避妊, 等이 있다.

《웨스트민스터 評論》 [ 編輯 ]

벤담은 哲學的 拔本主義의 代辯紙로 《웨스트민스터 評論》( Westminster Review )를 1824年에 創刊했다 (하지만 經營에는 參與하지 않았다). 當時 토리당의 代辯紙로 《系間評論》( Quaterly Review ), 휘그당의 代辯紙로 《에든버러 評論》( Edinburgh Review )이 있었는데, 《웨스트민스터 評論》은 主로 《에든버러 評論》의 記事들을 批判하면서 휘그당의 路線이 微溫的이고 皮相的이며 社會問題의 뿌리를 보지 못한다고 꾸짖었다.이 雜誌의 編輯은 草創期 事實上 밀 富者가 主導했는데, 經營에 關한 異見으로 밀 富者는 1828年부터는 여기서 손을 뗐다. 1835年에 몰즈워스가 사들여 《런던-웨스트민스터 評論》으로 題號를 바꿨다가, 1840年의 새 經營陣은 元來 題號로 되돌렸다.

1851年에는 존 채프먼(John Chapman)에게 넘어갔는데, 채프맨은 나중에 조지 엘리엇 을 部編輯人으로 起用했다. 이때부터는 哲學的 拔本파나 벤담主義와 直接 相關은 없게 되었지만, 如前히 넓은 意味에서 英國 社會의 拔本的 社會改革運動을 代辯하는 雜誌로 活躍했다. 채프먼과 엘리엇은 進化主義(evolutionism)를 信奉해서, 마티노(Harriet Martineau, 1802-1876), 스펜서 (1820-1903), 홀리오크(George Holyoake, 1817-1906), 존 스튜어트 밀과 같은 改革思想家들을 筆陣으로 모았다. 科學 分野에는 헉슬리 (1825-1895), 틴들(John Tyndall, 1820-1893) 等이 進化主義 論文들을 寄稿하면서 다윈 의 『 種의 起源 』(1859)이 英國社會에 收容될 수 있는 기틀을 닦았다. 1914年에 廢刊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