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두남
(趙斗南, 1912年 11月 3日
(
1912-11-03
)
~
1984年
11月 8日
)은
日帝强占期
와 大韓民國의 作曲家 兼
西洋 古典 클래식 音樂
피아노 演奏者
였었다. 雅號는 潟湖(夕湖).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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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平壤
의 西歐的으로 開化한
가톨릭
家庭에서 태어나 어릴 때
美國
出身의 新婦 조지프 캐논스에게 西洋 音樂과 作曲을 배웠다. 11歲이던
1923年
에 歌曲 〈옛이야기〉를 作曲해 作曲家로 데뷔했을 만큼 資質을 보였고, 17歲 때 첫 歌曲集을 發刊했으며, 21歲 때 歌曲 〈先驅者〉를 作曲했다.
[1]
平壤
숭실學校
를 卒業한 뒤
滿洲
에서 活動했다. 光復 以後 歸國하여
서울
에서 創作 活動을 하였고,
韓國 戰爭
後에는
馬山
에 定着하여 作曲 活動보다는 主로
피아노
敎育에 邁進했다.
1962年
韓國文化藝術團體總聯合會
馬山市支部의 初代 支部長에 오르는 等 馬山 地域 藝術 振興에 많은 貢獻을 했다.
代表曲으로는 "일송정 푸른솔은 늙어늙어 갔어도"라는 歌詞로 始作되는
歌曲
〈
先驅者
〉가 있다. 이 노래는 조두남이 滿洲에 머물 때 作曲한 曲으로 民族的 氣像을 담은 것으로 알려져 널리 불렸으나, 원 題目은 〈龍亭의 노래〉이며 內容도 알려진 바와 다르다는 主張이 提起되었다.
初期의 作品 傾向은 抒情的이나 後期에는 民族的 情緖를 强調하는 쪽으로 變化했다. 1962年 慶尙南道文化相,
1976年
눌院文化相
을 받았다.
代表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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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驅者〉 外에도 多數의 歌曲과 大規模 聲樂曲인 칸타타 〈農村〉, 오페레타 〈에밀레鐘〉 等이 있다.
[1]
事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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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두남이 死亡한 直後
文化勳章
이 追敍되었다.
[2]
親日 論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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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先驅者〉의 作詞者인
윤해영
의 親日 行跡이 드러나면서 滿洲에서의 조두남의 行跡에 對한 疑惑이 불거졌다. 延邊 音樂界 元老인 김종화는
2002年
조두남이 日帝 强占期 末期에 戰爭 協力 性格이 짙은 〈徵兵制 萬歲〉, 〈皇國의 어머니〉와 함께 日本의 滿洲國 建設을 讚揚하는 內容의 〈아리랑 滿洲〉와 같은 노래를 作曲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確認하기 어려운 오래前 滿洲에서의 行跡이기 때문에 論難이 이어졌고 昌原市 馬山合浦區 신포동의 조두남記念館 名稱을 놓고도 贊反 兩論이 對峙했다.
[3]
[4]
[5]
그 結果 조두남記念館은 開館 1個月이 채 못되어 休館하였다. 結局
2005年
6月 15日
,
조두남記念館
을
馬山音樂觀
으로 改稱하고, 조두남 以外의 다른 地域 出身家들의 資料도 함께 展示하는 場所로 바꾸고 나서야 開館할 수 있었다.
[6]
2008年
民族問題硏究所
에서
친일인명사전
에 收錄하기 위해 整理한
친일인명사전 收錄豫定者 名單
音樂 分野에 包含되었다.
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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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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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考資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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