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케레코드
는 光復 前後에 存在했던
大韓民國
의 音盤 會社이다.
日帝 强占期
[
編輯
]
이철
이 日本의
帝國蓄音機商會
京城支部長으로 任命되면서
1933年
부터 오케라는 獨自的인 이름을 달고 音盤을 내기 始作했다.
[1]
오케는 英語의 'Okay'를 日本式으로 읽은 것이다.
알파벳
으로는 'Okeh'로 表記한다.
帝國蓄音機株式會社와 提携하였으나 이철이 獨自的으로 經營하였기 때문에 韓國人이 세운 最初의 音盤會社로 評價된다.
[2]
이철은 經營을 擔當하였고, 妹夫인 김성흠은
나라縣
에서 배운 技術을 擔當했다.
[3]
日帝 强占期의 大型 音盤 會社로는 오케레코드와
콜럼비아레코드
,
빅타레코드
,
捕吏돌레코드
,
太平레코드
等 다섯 군데가 있어
太平洋 戰爭
末期인
1943年
까지 音盤을 製作했다. 이 가운데 오케레코드는 5大 音盤會社 가운데 가장 늦게 音盤을 내기 始作했다. 그러나 音盤 發賣 종수에서 콜럼비아레코드에 이어 2位를 차지하였고, 大衆歌謠 部門에서 活潑한 活動으로 人氣 歌手와 노래를 가장 많이 輩出했다.
고복수
,
손목인
,
이난영
,
김정구
,
남인수
,
이화자
,
腸洗淨
,
이인권
,
조명암
,
박향림
等이 오케레코드에서 活動하였다.
1935年
發表된 이난영의 〈
木浦의 눈물
〉이 신드롬을 일으킬 程度로 크게 興行하는 等 人氣曲도 쏟아져 나왔다.
日帝 强占期 末期에 이철은 오케레코드 所屬 歌手들로 構成된 公演團의 巡廻 公演에 注力하였고, 戰爭 支援을 위한
軍國主義
音樂이 오케를 통해 發賣되기도 하였다.
1944年
이철이 死亡하고 이듬해
太平洋 戰爭
從前과 함께 日本 本社가 撤收하여 오케레코드는 門을 닫았다.
大韓民國
[
編輯
]
오케레코드는 韓國 音盤産業의 傳說的 存在였기에
1948年
에 같은 이름의 音盤會社가 再設立되었다. 새로 設立된 오케레코드는 以前의 이철이 運營하던 오케레코드와 이름도 같고 音盤商標度 類似하나, 實質的으로는 다른 會社이다. 以前의 오케레코드에서 核心 歌手와 作曲家, 作詞家로 活動했던 이난영, 腸洗淨,
조명암
,
김해송
等이 參與했다.
復活한 오케레코드는
1948年
5月에 《울어라 銀방울》과 《歲月은 간다》를 發賣하였다. 人氣曲으로는
悚憫도
의 〈고향초〉,
朴在鴻
과
옥두옥
의 듀엣曲인 〈눈물의 五里亭〉, 남인수의 〈蒙古의 밤〉 等이 있었고, 特히 조명암과 김해송 콤비가 만들고 腸洗淨이 노래한 〈울어라 銀방울〉은 오래 記憶되는 名曲이다.
[4]
그러나 記錄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아 正確한 發賣 規模는 把握되지 않고 있다.
韓國 戰爭
以後에도 오케레코드라는 이름을 달고 音盤이 發賣되었다. 《서울簿記》, 《서울의 거리》, 《靑春 하이킹》, 《자유부인》 等이 있다. 그러나 《서울簿記》를 낸 오케레코드가 韓國 戰爭 前인 1948年에 《울어라 銀방울》을 發賣한 오케레코드와 正確히 같은 곳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며, 解體된 時期도 알 수 없다.
參考資料
[
編輯
]
各州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