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원
(金炯元,
1900年
[1]
~ ?)은
日帝强占期
와
大韓民國
建國 初期의 詩人 兼 言論人이다. 呼價 石松(石松)이라
김석송
이라고도 불린다. 本貫은
金海
이다.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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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現
忠淸南道
論山郡
의 一部인
강경포
隣近에서 出生했다.
京城府
의
寶城高等普通學校
를 中退하고
1920年代
에
東亞日報
와
朝鮮日報
記者로 言論界에 入門했다.
이 무렵 詩人으로 文壇에도 登壇하여 韓國 新傾向派 文學의 先驅者로서 活潑히 活動했다.
[2]
《開闢》을 통해 美國 最初의 民衆詩人으로 꼽히는
월트 휘트먼
을 紹介한 바 있다.
朝鮮프롤레타리아藝術家同盟
에는 加擔하지 않았으나, 카프의 前身인
파스큘라
에
안석영
,
이익상
,
金基鎭
等과 함께 參加했고,
마태복음
을 引用한 〈不純의 피〉를 發表하는 等 感傷主義와
浪漫主義
에 反對하는 抵抗的 參與詩를 創作했다.
그러나 初期의 新傾向派的人 活動과는 달리 곧 轉向하여
社會主義
를 反對하는 言論人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朴烈
과
가네코 후미코
가 無政府主義 組織을 結成했을 때, 當時 동아일보 記者이던 김형원이 親日派이며 社會主義者를 罵倒했다 하여 毆打할 計劃을 세우고 集結한 일도 있었다.
[3]
동아일보 社會部長과
每日申報
編輯局長을 歷任했으며, 文藝誌 《生長》을 發刊하기도 했다. 日帝 强占期 末期에는
朝鮮文人協會
發起人을 지내는 等
朝鮮總督府
의 統治에 積極 協力했다.
民族問題硏究所
가
2008年
發表한
친일인명사전 收錄豫定者 名單
言論/出版 部門에 選定되었다.
太平洋 戰爭
終戰 後
이범석
의
朝鮮民族靑年團
系列에서 右翼 運動에 參加하였고,
大同新聞
副社長과 對共新聞 社長을 지냈다.
大韓民國 制憲國會 總選
에서
論山郡 甲
選擧區에 出馬한 後 2位로 落選한 뒤
第1共和國
招待
公報處
次長에 拔擢되었다.
1950年
韓國 戰爭
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으로 拉致된 것으로 알려졌다. 북에서의 行跡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出版社 校正員으로 일하다가
1956年
에
咸鏡南道
按酒炭鑛에 勞動者로 配置받은 뒤 消息이 끊겼다는 說이 있다.
[4]
作品으로 〈無産者의 絶叫〉, 〈生長(生長)의 均等〉, 〈生命의 썩은 내〉 等이 있으며, 월트 휘트먼의 影響을 받은 〈아 只今은 새벽 네時〉(1924)도 代表作으로 알려졌다. 作曲家
안기영
이 曲을 붙인 民謠風의 詩 〈그리운 江南〉은
歌曲
으로 愛唱되었다.
略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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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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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考資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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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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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901年
에 태어났다는 記錄도 있다.
“김형원”
. 韓國 브리태니커 온라인
. 2008年 7月 6日에 確認함
.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 ↑
電縫管 (2005年 1月 15日). 〈4. 金鑛 烈風은 어디서 불어왔는가〉. 《黃金狂時代》. 서울: 살림.
ISBN
8952203275
.
- ↑
야마다 쇼지; 정선태 (譯) (2003年 3月 15日). 〈第6張 가네코 후미코와 朴烈의 共同鬪爭〉. 《가네코 후미코 (植民地 朝鮮을 사랑한 日本 帝國의 아나키스트)》. 서울: 山처럼.
ISBN
8990062047
.
- ↑
鄭鎭奭 (2006年 8月 14日). 《6.25 戰爭 拉北》. 서울: 기파랑. 70쪽쪽.
ISBN
89919658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