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바타케 지카後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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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바타케 지카後嗣(北?親房)
기쿠치 요사이(菊池容斎)가 그린 《전현고실》(前賢故実)에 실려 있는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의 초상화
기쿠치 요사이(菊池容?)가 그린 《前現鼓室》(前賢故?)에 실려 있는 其他바타케 지카後嗣의 肖像畫
空家 情報
時代 가마쿠라 時代 (鎌倉時代) 後記 - 南北朝 時代 (南北朝時代)
出生 쇼오 (正?) 6年 陰曆 1月 ( 1293年 2月 ) [a]
死亡 쇼헤이 (正平) 9年/ 紛拏 (文和) 3年 4月 17日
( 1354年 5月 10日 ) [1]
改名 기타바타케 지카後嗣(北?親房) → 소겐(宗玄, 법명) → 가쿠코(?空, 법명)
別名 기타바타케 준후(北?准后), 기타바타케 1品(北?一品), 中院준후(中院准后)
中院 뉴도 1品(中院入道一品, 《 新葉집 》)
誡命 (前?) 천덕원太宗각圓(天?院台宗?元)
官位 情2位 (正二位) 貸納言 (大納言), 겐지 初子(源氏長者)
뉴도 種1位 準代身(入道?一位准大臣), 준후(准后, 南朝 )
贈呈1位(贈正一位, 메이지 41年에 追贈)
主君 후시미 天皇 (伏見天皇) → 高후시미 天皇 (後伏見天皇) → 고니兆 天皇 (後二?天皇)
하나條노 天皇 (花園天皇) → 고다이고 天皇 (後醍?天皇) → 高무라카미 天皇 (後村上天皇)
氏族 무라카미 겐지 (村上源氏) 重源流(中院流) 기타바타케 가(北?家)
父母 아버지: 기타바타케 모로시게 ( 北?師重 ), 어머니: 후지와라노 다카시게 ( 藤原隆重 )의 딸
養아버지: 기타바타케 모로치카 (北?師親 , 親할아버지)
兄弟姊妹 지카後嗣 ( 親房 ), 社네스케(?助), 레이제이 모치後嗣(冷泉持房), 기타바타케 미치後嗣 (通房) 等
子女 아키이에 (?家), 아키노部 (?信), 아키요시 (?能) ( 高무라카미 天皇 의 여어女御), 딸( 모리요시 親王 의 아내), 딸( 레이제이 모치社다 冷泉持定의 아내)
墓所 나라縣 (奈良?) 高調 時(五條市) 니시요시노 情(西吉野町) 아노(賀名生)의 化粧願(華?院) 터
나라縣 右다시 (宇陀市) 無로(室生)의 霧露地 (室生寺) 等

기타바타케 지카後嗣 ( 日本語 : 北?親房 きたばたけ ちかふさ [ * ] 1293年 3月 8日 ~ 1354年 6月 1日 )는 日本 가마쿠라 時代 (鎌倉時代) 末期부터 難보쿠初 時代 에 걸쳐 活躍했던 舊敎(公卿)이자 歷史가(?史家)이다. 《 新皇正統機 ( 神皇正統記 )》의 著者로도 이름 높다.

무라카미 겐지 (村上源氏)의 傍系로 겐지 쵸子(源氏長者)、南朝 種1位 準代身(?一位准大臣), 準삼후(准三后)였다. 贈呈1位(贈正一位). 고다이고 天皇의 側近 「노치노 散步」(後の三房)의 筆頭로 高무라카미 天皇(後村上天皇)의 治世 아래서도 고코쿠 (興?) 5年/ 고에이 (康永) 3年( 1344年 ) 봄에 요시노 行宮(吉野行宮)로 歸還하여 쇼헤이 (正平) 9年/ 紛拏 (文和) 3年 4月 17日( 1354年 5月 10日)에 死亡할 때까지 南朝를 實質的으로 指揮하였으며, 겐무 政權의 院訓(元?)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生涯 [ 編輯 ]

지카後嗣의 아버지는 血緣上 기타바타케 모로시게 (北?師重)인데 親할아버지인 모로치카(北?師親)에게 入籍되어 赤字(嫡子)가 되었다. 이는 親아버지 모로시게가 當時 勢力이 기울어가던 고우다 天皇 (後宇多天皇, 가메야마 天皇 의 아들로 고니兆 天皇 ? 다카하루 親王의 아버지이며 當時 인세이를 行하고 있었다 )의 側近이었기에 向後 대筒을 繼承하게 될 可能性이 稀薄한 고우다 系列의 舊敎(公卿)로써 구게 社會에 데뷔하는 것보다는 次期 東宮으로 豫定되어 있던 쓰네아키라 親王(恒明親王, 가메야마 天皇 의 막내 아들로 모로치카의 養子 ) 系列로 데뷔하는 것이 政治的으로 安全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2]

기타바타케 가 (北?家)는 무라카미 겐지 流派를 잇는 名門으로 지카後嗣 本人도 쇼오 (正?) 6年( 1293年 ) 6月 24日, 生後 겨우 半年만에 官爵이 서임되었다. 도쿠지 (?治) 2年( 1307年 ) 11月, 座小便(左少弁)에 在任할 무렵 세이카게 (?華家)인 기타바타케 가보다 집안의 格이 낮은 레이제이 料理打카 (冷泉?隆)가 便觀이 된 것에 激忿하여 지카後事는 座小便 官職을 辭任해 버렸다고 한다(《공경보임》). 엔쿄 (延慶) 元年( 1308年 ) 11月, 産氣(?議)가 아닌 채로 種3位(?三位)로써 舊敎 地位에 올랐다. 産氣가 된 것은 엔쿄 3年( 1310年 ) 12月의 일로, 産期가 되고 이듬해인 五秒 (?長) 元年( 1311年 ) 7月에 社에몬老카미 (左衛門督)에 任命되고 劍鼻位社別堂 (?非違使別?)을 겸했다. 그 해 12月 곤노주나곤 (?中納言)으로 昇進했다.

한便 지카後嗣가 養子로 들어간 親할아버지 모로치카의 養子이자 가메야마 天皇의 뒤를 이을 다이카쿠지 王統의 有力 繼承者로 指目받던, 도키와노미야(常盤井宮)로 불렸던 쓰네아키라 親王은 끝내 王位에 오르지 못했다. 어려서는 聯想의 조카에 該當하는 다카하루 親王(尊治親王)과 함께 아버지 가메야마 法皇의 寵愛를 받아, 가겐 3年(1305年)에 가메야마 法皇이 病死하면서는 油槽에 따라 그의 財産 大部分을 相續받았고, 또한 가메야마 法皇 自身이 孫子 고니兆 天皇 에게도 次期 다이카쿠지 王統의 王位를 拘泥요시 親王(邦良親王, 고니兆 天皇의 嫡男 )이 아닌 쓰네아키라에게 잇도록 命令하였을 程度였으며, 쓰네아키라 親王의 어머니 쇼쿤몬인(昭訓門院) 사이온지 에이시(西園寺瑛子)의 오빠(卽 親王의 外三寸)로 幕府와 調整間의 連絡을 맡고 있던 간토 新車(?東申次) 사이온지 긴히라(西園寺公衡)나 그 女同生(卽 親王의 姨母)인 에이후쿠몬인(永福門院) 사이온지 쇼視(西園寺?子)도 쓰네아키라 親王을 支持하였던 데다, 쇼市의 男便으로 다이카쿠지 王統과는 王位를 놓고 對立하는 立場이었던 至妙人 王統의 후시미 狀況 (伏見上皇)도 마침 自身의 아들(卽 至妙人 王統)인 高후시미 天皇 (後伏見天皇)을 멋대로 讓位시킨 고우다 天皇(다이카쿠지 王統)에게 反感이 컸으므로 여기에 同意하겠다는 姿勢를 幕府에 殿下였지만, 가마쿠라 幕府는 자칫 다이카쿠지 王統의 分裂을 招來할 수도 있는 쓰네아키라 親王의 太子 冊立에 同意하지 않았고, 도쿠지(?治) 3年( 1308年 ) 고니兆 天皇이 急逝하자 幕府는 고니兆 天皇의 敵南人 拘泥요시 親王이 成長할 때까지의 '代理'를 쓰네아키라 外의 다이카쿠지 王統의 다른 人物로서 當時 인세이를 行하고 있던 고우다 天皇의 推薦에 따라 쓰네아키라 親王의 聯想의 조카인 다카하루 親王을 卽位하게 하였다. 이가 바로 고다이고 天皇 이다. 이 일로 旣存의 간토 新車 地位를 통해 調整에서 威勢를 얻고 있었던 사이온지 家門은 크게 힘을 잃었다.

고다이고 天皇이 卽位하자, 요시다 社多後嗣 (吉田定房) ? 마데노코地 老部厚謝 (万里小路宣房)와 나란히 「노치노 散步」(後の三房)라 불릴 程度로 두터운 信任을 받았다(다만 이들 세 名은 元來 고우다 狀況을 섬기던 者들로 고다이고 한 사람을 보고 모인 것은 아니었다 [3] ). 그리고 고다이고 天皇의 아들 요요視 親王(世良親王)의 誘引(乳人)을 맡게 된 것 外에 겐誤 (元?) 2年( 1320年 ) 10月에는 準나인 別堂(淳和院別?)에 補任되어 겐코 (元亨) 3年(1323年) 1月, 곤노다이羅곤 (?大納言)으로 昇進하고 5月에는 장학원別堂(??院別?)를 겸하여 쇼秋 (正中) 2年(1325年) 1月에는 내敎坊別堂(??坊別?)도 겸하고, 이어 아버지나 할아버지를 넘어 겐지 長子(源氏長者)가 되었다. 겐토쿠 (元?) 2年( 1330年 ) 요요視 親王이 急逝하자 이를 恨歎하며 38歲에 出家, 一旦 政界를 떠났다. 法名(法名)은 소겐(宗玄). 이 時期 지카後嗣가 種1位와 準代身에 任命되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時期에 關해선 異說도 있다. 따라서, 가마쿠라 幕府 顚覆 計劃인 겐코의 난(元弘の?)이나 쇼錘의 便(正中の?) 等 고다이고 天皇의 가마쿠라 幕府 (鎌倉幕府) 打倒 計劃에는 加擔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한편 그의 아버지 기타바타케 모로시게와 그의 四寸 기타바타케 도모유키는 겐코의 亂에 加擔하였다가 處刑되었다).

가마쿠라 幕府가 무너지고 고다이고 天皇의 親庭인 겐무 新正 (建武の新政)이 始作되자, 지카後事는 政界로 復歸했다. 그러나 지카後事는 幕府 打倒의 主要 貢獻者 가운데 한 名으로써 고다이고 天皇과는 當時 對立하고 있던 모리요시 親王 (護良親王) 系派의 사람이었기에, 中央과는 距離가 먼 오슈 (?州)로의 駐屯을 命令받은 長男 아키이에 (?家)를 따라 노리요시 親王 (義良親王) 을 받들고 무쓰國 다가 性 (多賀城)으로 가게 된다. 마침 이곳에 무쓰 장군缶 (陸??軍府) 設置를 主導한 이는 모리요시 親王이었다. 모리요시 親王은 오슈 卽 日本 도호쿠 地方에 領地를 많이 가지고 있던 도고쿠 武士團이 아시카가氏 (足利氏)에 依해 그 麾下로 組織되어 가는 狀況을 憂慮하고 도호쿠 地方을 도고쿠 武士團의 影響으로부터 떼어 놓아 아시카가 勢力을 牽制하려 하였고 [2] 지카後事는 오슈로 向하게 된다.

기타바타케 지카後嗣와 모리요시 親王
기타바타케 지카後嗣. 모리요시 親王에게는 丈人이 된다.
모리요시 親王. 그의 情實은 지카後嗣의 딸이었다.

日本 學界에서는 當時 지카後嗣와 아키이에 富者를 무쓰로 向하게 한 것은 모리요시 親王의 意向이라는 解釋이 存在했고 이것이 正論으로 여겨져 왔다. 이에 對해서는 其他바타케 지카後嗣 自身의 著述인 《 新皇正統機 》(神皇正統記)에는 일찍이 지카後嗣와 모리요시 親王의 關係가 一切 描寫가 없다는 點을 들어 反論이 나왔다. 다만 《新皇正統機》에는 모리요시뿐 아니라 지카後嗣가 가장 마음을 쏟아 養育했을 요요視 親王에 關한 技術조차도 보이지 않고, 지카後嗣 自身이 모리요시 親王과 提携하여 當時 日本의 君主인 고다이고와 對立할 行動을 取하고 있었다는 소리를 굳이 (日本의 王權에 對해 强調하는 內容이 담긴) 《新皇正統機》에 써 넣었을 理 없다는 情況上 理由를 들어 《新皇正統機》에 보이지 않더라도 지카後嗣와 모리요시 親王은 깊은 連繫와 提携를 맺고 있었을 것이라는 [2] 反論도 있으며, 또한 겐무 政權 樹立 功臣의 일原因 지카後嗣나 그 아들인 아키이에에게 壁紙인 무쓰로 간다는 것은 말하자면 左遷과도 같은 것인데, 그걸 指示한 것이 모리요시가 아닌 고다이고였다면 적어도 지카後嗣나 아키이에를 高位 高官으로 敍任하고 나서 下向시켰을 것 [2] 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지카後嗣와 아키이에가 下向한 뒤 무쓰의 政治 體制는 「무쓰 小幕府」(?州小幕府) 體制라고까지 불릴 만한 것으로 그것은 스스로 세이이타이쇼군 (征夷大?軍)의 地位를 바라던 모리요시 親王의 發想과도 꼭 닮은 것이었으며, 어떤 形態로도 옛 幕府 政治의 復活을 決코 容認하지 않으려 했던 고다이고가 할 發想은 아니었다. [2] 덧붙여 모리요시 親王에게는 嬾夫 氏(南部氏)나 構圖 氏(工藤氏)라는 오슈 武士들이 出仕해 따르고 있었음이 《 매송론 》(梅松論)에 記錄되어 있어, 오슈 卽 무쓰가 모리요시 親王의 重要한 支持 基盤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點을 보더라도 지카後嗣와 모리요시 親王의 連繫 및 提携의 痕跡을 엿볼 수 있다. [2]

겐무 (建武) 2年(1335年) 好調 氏 殘黨에 依한 이른바 나카센다이의 난(中先代の?)이 일어나고 이를 鎭壓하러 나선 아시카가 다카우지 (足利尊氏)가 가마쿠라(鎌倉)에 그대로 눌러앉아 겐무 政權을 離脫해 돌아서서 以後 西쪽으로 方向을 틀어 올라와서 교토를 占領하자, 1336年 (겐무 3年) 1月 지카後事는 다카우지를 치기 위해 무쓰에서 교토로 돌아왔으며, 닛타 요시社다 (新田義貞) ? 구스盧키 마사시게 (楠木正成) 等과 함께 一旦 다카우지를 逐出하는 데 成功했다. 그러나 규슈로 내려간 다카우지는 急速히 體制를 세워 바로 大軍을 거느리고 東쪽으로 올라왔고, 이를 맞아 싸우던 요시社다나 마사시게의 軍勢를 5月 미나토價와 戰鬪 (湊川の?い)에서 擊破하고 나아가 다시금 교토를 占領, 히에이 山으로 逃亡쳤던 고다이고 天皇은 다시금 退位를 강요당한다. 그러나 고다이고 天皇은 교토를 빠져 나오는 데 成功했고, 요시노(吉野)에 行宮(行宮)을 짓고 南朝 (南朝)에 合流, 다카우지에 依해 옹립된 告廟 天皇 (光明天皇)의 북조 (北朝)에 對抗했다. 한便 지카後事는 次男 아키노部와 함께 이세국 (伊勢?)으로 避하였다.

엔겐 (延元) 3年/ 랴쿠오 (??) 元年(1338年) 5月에 아들 기타바타케 아키이에가 사카이우라 (堺浦)에서 戰死하고, 尹7月에 닛타 요시社茶道 에치젠國 (越前?) 度墓地나가테(?明寺?)에서 攻擊을 當해 죽음을 맞이하니, 南朝側의 總司令官이 된 지카後事는 二世에서 와타라이 이에유키 (度?家行)의 協力을 얻어 南朝側의 勢力 擴大를 圖謀하였다. 여기서 지카後事는 二世 神宮 의 神觀이었던 이에유키의 神國思想 (神?思想)에 깊은 影響을 받게 되는데, 지카後史의 主要 著作으로 꼽히는 《新皇正統機》에의 影響道에 對해서는 여러 가지 說이 存在한다. 지카後嗣가 二世에서 신토에 對한 理解를 심화시켜 《원院집》(1337~1338 成立)을 著述할 수 있었던 契機를 마련하기도 했지만, 이에유키가 主唱하는 二世 신토(伊勢神道)에 對해서는 批判的이었다고도 한다.

以後 간토 地方 (?東地方)에서 南朝 勢力을 擴張하기 위해 유키 무네히로(結城宗?)와 함께 노리요시 ? 무네요시 (宗良) 두 親王을 받들고 二世 國 오미나토(大湊, 미에縣 二世視 )에서 뱃길로 도고쿠로 건너 가고자 하였으나, 暴風으로 인해 두 親王과는 그만 헤어져 버렸고, 같이 배에 타고 있던 다테 유키土毛 (伊達行朝) ? 나카무라 쓰네나가 (中村?長) 等과 함께 히타치國 (常陸?)에 上陸했다. 처음에는 진구지 性(神宮寺城, 日本 이바라키縣 이나시키시 )의 오다 하루히사 (小田治久)를 依支하여 社타케 氏 (佐竹氏)에 攻擊당해 陷落되자 아와子키 性 (阿波崎城), 나아가 오다氏 (小田氏)의 本據地인 오다 性(小田城, 日本 이바라키 縣 쓰쿠바詩 )로 옮겼다.

오다 城에서 지카後事는 北조군과 對峙하면서 무쓰 國 시라카와 (白河)의 유키 지카土毛 (結城親朝)를 비롯한 도고쿠 各地의 武士들에게 半幕府 勢力으로 結集할 것을 呼訴하였으나, 우쓰노미야 긴쓰나 (宇都宮公綱) ? 下가 다카社다 (芳賀高貞)가 北朝側에 我軍이 되었으므로 다테 유키土毛 ? 나카무라 쓰네나가를 보내고 하가 다카社다 ? 다카土毛(高朝) 富者를 치게 하였다.

이 時期에 歷史서 《 新皇正統機 [4] 와 官職 解說書人 《職員初》(職原?) [b] 를 執筆했다고 傳한다. 《新皇正統機》를 脫稿한 것은 엔겐 4年( 1339年 ) 가을이었는데, 그 直前인 8月에 요시노에서 고다이고 天皇이 52歲로 崩御하고, 이歲에서 돌아와 있던 노리요시 親王이 當時 12歲의 나이로 고다이고 天皇의 붕어 하루 前날 父王의 兩位를 받아 高무라카미 天皇으로 卽位하였다.

오다 城에서 지카後事는 무쓰 시라카와의 유키 지카土毛에게 몇 番이나 書信을 보내 援兵을 要請했지만, 지카土毛는 勿論 周邊의 도고쿠 武士들은 領地와 官位 昇進만을 要求할 뿐 觀望하는 立場이었다(지카후사가 職員秒를 著述한 주된 目的도 官位 昇進을 要求하는 武士들에게 官職 授與의 原則과 秩序를 깨우치게 하려는 데에 있었다).

기타바타케 지카後嗣의 墓(北?親房墓)
日本 나라 縣(奈良?) 高調 時(五條市) 니시요시노 情(西吉野町) 아노(賀名生) 所在
무로지에 所在한 「前(?) 기타바타케 지카後嗣 墓」(?北?親房墓).

고코쿠 (興?) 元年/ 랴쿠오 (??) 3年( 1340年 ) 北朝側이 고노 모로後遺 (高師冬)를 간토 統治를 위해 派遣하고 오다 氏와 疏遠해진 지카後事는 이듬해 11月 北조君의 壓迫으로 세키 무네스케 (?宗祐)의 세키 性(?城, 이바라키 縣 지쿠세이시 )로 들어가 다테 유키土毛나 나카무라 쓰네나가를 비롯하여 유키土毛, 쓰네나가와 同族인 理事 性(伊佐城, 지쿠세이시 )의 理事 氏(伊佐氏), 多耳壺 性 (大?城, 이바라키 縣 시모쓰마시 )의 시모쓰마 氏(下妻氏) 等 히타치 西部의 南朝 勢力과 함께 2年間 籠城하며 對抗하였다. 지카後嗣의 히타치에서의 活動은 5年에 걸친 것이었다. 그러나 南朝의 관백 左大臣 고노에 쓰네타다 (近衛?忠)가 도지 長子(藤氏長者)의 立場에서 獨自的인 도고쿠의 후지와라氏 (藤原氏) 系統의 武士團을 統率하는 體制를 짜고자 한 것도 있어서 지카後嗣의 構想은 敵과 內部의 內訌으로 그 自身의 立地마저 약화시키는 結果를 招來했고, 고코쿠 4年/ 고에이 (康永) 2年( 1343年 ) 8月 유키 지카土毛가 北朝에 붙어버리고 11月에 세키, 多耳壺 두 性이 次例로 陷落되자 지카後事는 물러나 1344年 1月 요시노로 돌아와 있었다. 以後 이미 死亡한 고다이고 天皇을 代身하여 아직 어렸던 高무라카미 天皇을 끼고 南朝의 中心 人事가 되었다. 主로 셋칸(??)이나 天皇의 外戚, 生母 等에게 주어지던 準三宮(准三宮)으로 優待받았다는 것은 一介 「다이羅곤 뉴도」(大納言入道)에 지나지 않았던 지카後嗣가 南朝에 있어서 지녔던 位置와 權勢를 보여준다.

쇼헤이 (正平) 3年/ 조와 (貞和) 4年( 1348年 )에 時調나와테 戰鬪 (四條?の?い)에서 구스盧키 마사유키(楠木正行) 等 南朝側이 고노 모로나오 (高師直)에게 敗하고, 南朝는 요시노에서 山 깊은 곳의 아노 行宮 (賀名生行宮)까지 播遷하게 되었다. 間爐의 騷亂 (??の擾?)으로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南朝에 降伏하여 쇼헤이 一統 (正平一統)李 成立되었으나, 이듬해 스스로 協定을 어기고 지카後事는 一時的으로 교토와 가마쿠라의 奪還에도 成功하였다. 그리고 곧바로 다카우지 側의 反擊으로 南朝는 다시 아노로 退却해야 했다.

쇼헤이 9年/ 紛拏 (文和) 3年( 1354年 ) 4月에 기타바타케 지카後事는 아노에서 死亡하였다. 享年 62歲. 지카後嗣 事後 南朝에는 그를 代身할(혹은 凌駕할) 만한 指導者的인 人物이 나오지 않았고, 이는 南朝가 衰退의 길을 걷는 한 原因이 되었다. 1392年 日本 全國은 北朝에 依해 統一되었다.

지카後事는 아베盧 神社 (阿部野神社, 오사카市 아베노區 )나 料젠 神社 (?山神社, 후쿠시마縣 다테시 )에 먼저 世上을 떠난 아들 아키이에와 함께 모셔졌다. 지카後嗣의 무덤은 그가 숨을 거둔 땅인 아노에 있다. 또한 霧露地 (室生寺, 나라縣 右다시 )에도 지카後嗣의 것이라고 傳하는 무덤이 남아 있으며, 이는 日本의 國家 指定 重要 文化財이다. [5]

고다이고 天皇의 二世 行次와 其他바타케 지카後嗣 [ 編輯 ]

『유키 가 文書』(結城家文書)에는 엔겐(延元) 2年 正月 元旦(元旦)에 지카後嗣가 아키이에에게 보낸 署長이 收錄되어 있는데, 이 署長에는 「御願を果たされんが?、勢州に幸すべきの由、仰られ候なり。天下復興程あるべからず。愚身(지카後嗣 本人을 가리킴)勢州に於て逆徒?謐の計りごとを廻らし、臨幸を待ち申すべく候。」라고 記錄되어 있다. 卽 고다이고가 二世에 行幸하였다고 敍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지카後嗣가 二世로 내려간 것도 二世 天行(遷幸) 計劃의 先發隊라는 意味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된다. [2] 고다이고 天皇이 二世로 踐行하고자 한 것은 덴무 天皇 (天武天皇)의 妊娠의 亂 (壬申の?)을 念頭에 둔 것으로 또한 그것이 天皇家에게 있어서 언제나 되돌아가야 할 가장 빛나는 過去였기 때문이다. [2]

參考 文獻 [ 編輯 ]

  • 要코이 아키오 (?井金男)《 北?親房文書輯考 》 大日本百科全書刊行會 1942年 7月
  • 히라이즈미 기요시 (平泉澄)《 北?親房公の?究 》 日本文化硏究所 1954年 11月 增補版 1975年 3月 高갓칸 大學 (皇學館大?)出版部
  • 구보타 오사무 (久保田?)《 北?父子と足利兄弟 》 高갓칸 大學出版部 1977年
  • 《( 北?親房公歌集 》 아베盧 神社?기타바타케 지카後嗣 공 顯彰會 1984年 4月
  • 詩라야마 要視타로 (白山芳太?)《 北?親房の?究 》 베리칸샤 1991年, 增補版 1998年 ISBN   4-8315-0836-5
  • 이토 기요시 (伊藤喜良)《 東?の南北朝動? 北?親房と?人 》 요시카와 古墳칸(吉川弘文館) <歷史文化 라이브러리> 2001年 ISBN   4-642-05531-2
  • 시모카와 료코 (下川玲子)《 北?親房の儒? 》 베리칸샤 2001年 ISBN   4-8315-0954-X
  • 남기학 옮김 《 한국학술진흥재단 學術名著飜譯叢書 東洋便109 新皇正統機》 (소명출판, 2008年)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解說 [ 編輯 ]

  1. 《기타바타케 지카後嗣 警 御殿機》(北?親房卿御?記)에서는 1月 13日生으로, 《기타바타케 준후전》(北?准后?)에서는 1月 29日生이라고 되어 있다.
  2. 關聯 文獻으로 가지 히로에(加地宏江)의 《中世?史?述の展開 「職原?」と後期軍記》(吉川弘文館, 1999年) , 《和歌職原?》(今西祐一? 敎主, 헤이本샤 東洋文庫平凡社東洋文庫]], 2007年)가 있다.

出處 [ 編輯 ]

  1. (日本語) 北?親房 』 - Kotobank
  2. 岡野友彦 《北?親房:大日本は神?なり》 2009年 ミネルヴァ書房
  3. 本?和人「天皇の思想: ?う貴族北?親房の思惑」2010年 山川出版社
  4. 《神皇正統記》 岩佐正 敎主, 이와나미 文庫 (岩波文庫).
  5. “?指定文化財” . 宇陀市. 2016年 9月 1日 . 2021年 1月 22日에 確認함 .  
前任
기타바타케 모로시게
기타바타케가 堂主
1307年 ~ 1338年
後任
기타바타케 아키요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