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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보르기니 vs 페라리|新東亞

람보르기니 vs 페라리

男性의 로망, 가장 탐나는 슈퍼카

  • 조창현| 東亞닷컴 記者 cch@donga.com

    入力 2012-08-22 10: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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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람보르기니 vs 페라리
    高性能 스포츠카의 範疇를 한 段階 뛰어넘은 超高性能이면서 디자인과 品質이 最上級이고 稀少價値까지 있는 高價의 車를 흔히 ‘슈퍼카(supercar)’라고 한다. 슈퍼카는 競走用 差 以上의 性能(平均 時速 300㎞ 以上)을 갖췄지만 一般 道路를 달릴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슈퍼카는 基本的으로 5P(Power, Performance, Proportion, Passion, Price)를 充足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을 갖췄다고 모두 슈퍼카는 아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重要한 한 가지가 더 있다. 그것이 바로 興奮(Excitation)이다. 슈퍼카로 불리려면 타는 사람과 보는 사람 모두를 흥분시키고 感動으로 몰아가는 힘이 있어야 한다. 서킷을 疾走하거나 偶然히 골목길에서 마주쳐도 눈길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바로 一般 自動車는 갖지 못한 슈퍼카만의 魅力이다. 世上의 수많은 男性이 이 魅力을 이기지 못하고 슈퍼카를 갖거나 一生에 單 한 番이라도 타보기를 꿈꾼다. 地球上에서 가장 섹시한 蹴球스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나 데이비드 베컴처럼.

    强力한 性能과 强烈한 原色, 아름다운 디자인으로 모든 스포츠카를 壓倒하는 이탈리아의 페라리와 람보르기니는 슈퍼카를 代表하는 兩大 山脈이면서 永遠한 라이벌이다. 슈퍼카에는 맥라렌F1이나 派가니존다 等도 있지만 두 브랜드에 匹敵해 名銜을 내밀기에는 아직 力不足이다. 自動車 歷史 가운데 두 브랜드가 서로를 이기기 위해 피 흘리며 싸워온 길을 그대로 슈퍼카의 歷史라고 보면 된다.

    스피드에 목숨 건 엔秒 페라리

    두 브랜드의 對決은 設立者인 엔秒 페라리(Enzo Ferrari·1898~1988)와 페루치오 람보르기니(Ferruccio Lamborghini·1916~1993)에서 始作된다. 1898年 2月 18日 이탈리아 모데나 地方의 鐵工所집 둘째 아들로 태어난 엔秒 페라리는 10歲 때 아버지와 兄 알프레도를 따라 간 볼로냐의 에밀리아 서킷에서 처음 自動車競走를 보게 된다. 펠리스 나자로가 優勝한 그 大會를 통해 어린 엔秒는 自動車競走의 魅力에 푹 빠져든다. 以後 13歲에 運轉을 처음 배운 엔秒는 마침 아버지가 自動車 整備所를 차려 車와 自動車競走에 더욱 沒入하게 된다.



    工夫에는 別 關心이 없던 엔秒는 詩와 哲學, 歷史를 耽讀했고 스포츠에도 才能을 보여 16歲에 스포츠新聞에 蹴球 記事를 寄稿하기도 했다. 하지만 1916年 아버지가 肺炎으로 世上을 떠난 데 이어 兄도 戰爭터에서 목숨을 잃고 自身마저 軍에 入隊하면서 自動車와 멀어진다. 그러나 酷毒한 軍 生活 途中 스파뇨라는 毒感에 걸려 두 番의 手術 끝에 除隊하게 된다.

    以後 엔秒는 當時 世界 自動車競走를 支配하던 피아트(Fiat) 社에 志願했으나 떨어지고 트럭會社에 運轉士로 就職한다. 1919年 選手들 모임에서 偶然히 A級 選手였던 피아트 팀의 페리體 나자로를 만난 엔秒는 그의 紹介로 스포츠카 製作社인 CMN(Costruzioni Meccaniche Nazionali)에 테스트 드라이버로 就職한다. 같은 해 CMN의 慶州팀長이던 詩보치에게서 運轉 技術을 인정받은 엔秒는 파르마-베르體土(Parma-Berceto) 慶州에 出戰해 11位를 차지하면서 카레이서로 데뷔한다. 이어 가장 酷毒한 慶州이자 中央 進出 舞臺인 타르가 플로리오(Targa Florio) 慶州에 出戰해 9位에 入賞하면서 名聲을 알리기 始作했다.

    1920年 CMN이 赤字로 破産하자 알파 로메오(Alfa Romeo) 팀으로 자리를 옮겨 타르가 플로리오 慶州에서 2位를 차지하면서 選手로서의 엔秒 時代를 꽃피우기 始作했다. A級 選手로 坦坦大路를 달리던 1923年 어느 날 地方의 小規模 競走에서 優勝한 그를 지켜본 바라카(Baracca) 伯爵 夫婦는 戰鬪機 操縱士였던 아들 프란체스코가 生前에 아끼던 뛰어오르는 말의 모습을 담은 배지를 엔秒에게 膳物했다. 그 배지가 바로 只今까지 페라리를 象徵하는 엠블럼이 됐다.

    當時는 피아트가 競走를 掌握하던 時代였는데 엔秒는 피아트를 따라잡기 위해 피아트의 技術者와 選手들을 스카우트한다. 德分에 팀의 戰力은 莫强해졌지만 所屬社인 알파 로메오는 資金事情이 나빠져 1925年 銀行으로 넘어간다. 1929年 엔秒는 慶州 팀에서 나와 알파 로메오의 販賣店을 세우고 自身의 이름을 딴 ‘스쿠데리아(Scuderia) 페라리’라는 競走 팀을 만든다. 이 팀은 現存하는 가장 오래된 그랑프리 競走 팀으로 只今까지 世界 最多勝 記錄을 保有하고 있다. 페라리 엠블럼의 뛰어오르는 말의 兩옆에 써 있는 ‘S’와 ‘F’글字는 이 팀을 象徵한다.

    自身의 팀과 함께 이탈리아의 모든 慶州를 席卷하면서 最高의 選手로 커가던 엔秒는 1932年 아들 디노(Dino)가 태어나면서 아내와의 約束을 지키기 위해 選手 生活을 整理하고 慶州 팀 管理와 競走用 自動車 製作에만 沒頭한다.

    람보르기니 vs 페라리

    페루치오 람보르기니(왼쪽)와 페라리 創業者 엔秒 페라리.

    以後에도 엔秒의 慶州 팀 스쿠데리아 페라리는 알파 로메오에서 支援한 車輛으로 F1 競技에 出戰해 乘勝長驅하지만, 알파 로메오가 스쿠데리아를 吸收한 뒤 自身을 내쫓으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엔秒는 1938年 알파 로메오와 訣別을 宣言한다.

    直接 競走車 開發에 나선 엔秒는 後援者에게 依存하는 競走車만으로는 會社를 經營하기 힘들다는 것을 實感하고, 1939年 一般道路龍 스포츠카 生産을 위한 會社 오토 바비誤 코스트루치오니(Auto Avio Costruzion)를 세워 이듬해 ‘티抛 815’를 첫 作品으로 내놓았다. 하지만 1940年 밀레 말리아 레이스에 出戰한 1.5L 가솔린 엔진의 이 自動車는 結局 엔진 缺陷으로 完走에 失敗하고 만다.

    엔秒는 알파 로메오와 訣別 當時 向後 4年間 自身의 競走車에 페라리라는 이름을 使用할 수 없도록 하는 契約書에 署名했다. 이 때문에 티抛 815에도 페라리라는 이름을 붙이지 못했다. 첫 作品에 滿足하지 못한 엔秒는 第2次 世界大戰 때문에 스포츠카 生産이 不可能해지자 꿈을 暫時 미뤄둔 채 航空機 엔진 附屬과 工具를 만들어 軍에 納品하며 큰돈을 번다. 戰爭이 끝나갈 무렵 自動車 生産이 再開되자 엔秒는 페라리 이름을 단 첫 番째 自動車人 ‘페라리125 Sport’를 탄생시킨다. 1.5L 12氣筒인 이 車는 1947年 5月 彼我첸車(Piacenza) 서킷에 데뷔한 지 2週 만에 로마 그랑프리에서 優勝을 차지해 世上을 놀라게 한다. 1年 後엔 2.0L 엔진의 道路用 스포츠카 페라리166S를 내놓는다.

    以後 엔秒 페라리는 4.1L 엔진에 220馬力의 힘을 가진 페라리 340아메리카를 비롯해 250유로파, 375아메리카 等을 잇달아 내놓으며 유럽의 수많은 自動車競走에 參加한다. 페라리는 當時 모든 車輛 開發의 最優先 條件을 最高時速 達成에 두고 오로지 競走에서 優勝하는 데 沒入했다. 結局 엔秒는 1951年 英國 그랑프리에서 當時 世界 最高였던 알파 로메오 레이싱 팀을 꺾고 優勝을 차지했다. 自身의 이름을 걸고 첫 車를 出市한 지 不過 4年 만이다.

    平素 알파 로메오에 復讐의 칼날을 갈아왔던 엔秒는 알파 로메오를 처음으로 이긴 이 大會 優勝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머니를 죽였다…”고. 自身을 最高의 레이서로 키워줬지만, 結局에는 背信한 알파 로메오를 向한 復讐의 한마디였다. 이 말은 엔秒의 勝負師 氣質과 當時에 느꼈던 背信感이 얼마나 컸는지 斟酌게 한다. 以後 페라리의 車들은 全 世界 自動車競走에서 5000回 以上 優勝하며 只今까지 傳說로 남아 있다.

    1952年 엔秒는 스포츠카의 巨匠 피닌 파리나를 迎入해 페라리만의 獨創的인 스타일을 만들어내기 始作한다. 이때부터 페라리는 달리는 藝術品이자 傳說의 슈퍼카로 徐徐히 자리를 잡아간다.

    엔秒의 毒舌이 탄생시킨 람보르기니

    람보르기니의 歷史는 페루치오 람보르기니를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다. 페루치오의 草稿 性能 슈퍼카에 對한 熱情과 執念이 이뤄낸 結果가 바로 람보르기니의 歷史이기 때문이다.

    람보르기니의 歷史는 1963年에 始作됐지만, 이탈리아 사람들은 그 根源을 1916年 페루치오의 誕生에서 찾는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태어난 성좌(星座)가 그 사람의 運命을 決定해준다고 믿는데, 페루치오는 총명하고 衝動的이며 意志가 굳은 황소자리를 타고났다. 그의 一生을 보면 황소자리의 性格이 그대로 나타난다.

    엔秒 페라리의 宿敵 페루치오 람보르기니는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 레나初에서 富農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自動車에 關心이 많았던 그는 大學에서 機械工學을 專攻한 뒤, 第2次 世界大戰에서 軍用車輛을 整備하는 兵士로 勤務한다. 戰爭이 끝난 後 結婚한 그는 新婚旅行을 떠났다가 길가에 버려진 軍用트럭을 보고 事業에 對한 靈感을 얻는다. 新婚旅行에서 돌아오자마자 버려진 軍用트럭을 끌어 모아 트랙터로 改造하는 事業을 벌여 큰돈을 번 페루치오는 自身의 피아트를 改造해 레이싱 大會에 出戰할 程度로 自動車狂이면서 同時에 여러 名車를 保有한 蒐集狂이었다. 그런 그도 처음부터 自動車會社를 設立할 생각은 없었다.

    람보르기니 vs 페라리

    카運打크 콰트로發볼레.

    페루치오가 슈퍼카를 만들게 된 契機는 아이러니하게도 라이벌인 페라리와의 惡緣에서 始作된다. 1960年代 初 페루치오는 當時 人氣 스포츠카였던 페라리 250GT를 所有했는데, 클러치의 缺陷을 發見하고 改善策을 찾기 위해 엔秒 페라리에게 面談을 要請했다. 그러나 엔秒는 “트랙터나 만들던 사람이 어떻게 슈퍼카를 알겠는가? 트랙터나 運轉하며 살라”고 面駁을 주며 門前薄待했다.

    엔지니어로서 自負心이 대단했던 페루치오는 甚한 侮辱感을 느끼고 ‘페라리를 凌駕하는 슈퍼카를 直接 만들겠다’고 決心한다. 卽時 自動車會社 設立에 着手한 페루치오는 1962年 自身의 이름을 딴 ‘람보르기니’를 創業한다. 페루치오는 “無條件 페라리보다 빨라야한다”는 첫 番째 原則을 세우고 只今의 本社가 있는 볼로냐 隣近에 最高의 施設을 갖춘 工場을 짓기 始作했다. 工場 바로 옆에 事務室을 둔 페루치오는 工場을 짓는 建設 現場에 直接 뛰어들어 職員들을 督勵하는 同時에 最高의 技術者들을 끌어 모았다. 當時 페라리에 勤務했던 파올로 스탄자니(Paolo Stanzani), 盞파울로 달라라(Gianpaolo Dallara) 等도 最高 待遇로 迎入했다.

    페루치오는 이때 페라리의 最新 엔진을 開發한 지오토 비자리니(Giotto Bizzarini)를 함께 迎入했다. V12 엔진을 開發해 페라리를 앞지르기 위해서였다. 람보르니기의 첫 作品은 1964年 5月에 誕生했다. 바로 350GT이다. 最大出力 270馬力에 最高時速 230km를 내는 이 車는 첫 作品치고는 대단하다는 評을 받았다. 하지만 競爭 모델이면서 페라리의 歷代 最高 모델로 꼽히는 페라리 250GTO를 따라잡기에는 力不足이었다. 250GTO는 V12 엔진에 最大出力 302馬力, 最高時速 273km의 性能을 지녀 350GT보다 한 수 위로 評價받았다. 첫 作品에 滿足하지 못한 페루치오는 後續모델인 400GT를 곧바로 내놔 市場에서 肯定的인 反應을 얻어내며 ‘슈퍼카 生産은 無謀한 試圖’라는 業界의 비웃음을 날려버렸다.

    以後 페루치오의 信任 아래 스탄자니와 달라라는 좀 더 새롭고 進步된 車를 開發하고자 2人乘 레이스카인 코드네임 400TP 開發에 着手한다. 지나치게 革新的인 아이디어였기에 두 엔지니어는 페루치오의 卽刻的인 承認이 떨어지자 깜짝 놀랐다. 페루치오는 이 모델이 기껏해야 50代 程度 팔릴 것으로 豫想했지만, 브랜드 弘報에 肯定的으로 作用할 것이라는 確信을 갖고 바로 承認했던 것이다. 1965年 10月 이 車는 이탈리아 토리노 오토쇼에서 처음 一般에 公開되며 큰 關心을 모은다. 하지만 페루치오가 오토 쇼에서 얻은 成果는 따로 있었다. 람보르기니를 世界 最高의 茶 班列에 올려놓을 天才 디자이너 누치誤 베르토네(Nuccio Bertone)를 만난 것이다. 400TP의 獨創的인 아이디어에 好感을 느낀 베르토네가 페루치오의 팀에 合流하면서 람보르기니는 비로소 슈퍼카 梁山의 基礎를 다진다. 베르토네는 以後 람보르기니만의 獨自的인 디자인 哲學을 完成해 람보르기니 歷史에 없어서는 안 될 人物로 評價받는다.

    最初 ‘슈퍼카’ 미우라

    1966年은 람보르기니 歷史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해다. 當代 最高의 名車이자 只今까지 最高의 슈퍼카 中 하나로 손꼽히는 미우라가 巨匠 마르첼로 간디니(Marcello Gandini)와 베르토네의 손에서 誕生한 해이기 때문이다. V12 4.0L 엔진을 搭載한 미우라는 最大出力 350馬力에 最高時速 295km라는 當時로서는 衝擊的인 性能을 내는 眞正한 스포츠카였다. 性能과 品質, 아름다움에서 페라리는 勿論 當時의 모든 스포츠카를 뛰어넘은 미우라는 自動車 歷史上 最初로 ‘슈퍼카’稱號를 附與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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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라리 工場 前景.

    미우라가 슈퍼카 歷史에서 重要한 位置를 차지하는 더 큰 理由는 바로 最初로 美드十(엔진을 運轉席 뒤쪽에 配置해 車輛의 前後 밸런스를 理想的으로 맞춘 方式)을 採擇해 成功했기 때문이다. 미우라 以後 람보르기니는 페라리를 凌駕하는 自動車 브랜드로 인정받기 始作했으며, 미우라로 始作된 美드十 方式은 競爭社인 페라리를 비롯해 타 브랜드들이 잇따라 따라 하면서 只今까지 正統 슈퍼카의 象徵으로 이어져왔다.

    美드十 엔진 方式은 1950年 末부터 F1 그랑프리 競走車에 쓰이기 始作했지만 量産型 自動車에 바로 適用되지는 않았다. 람보르기니가 미우라에 처음으로 이 方式을 導入했을 때도 사람들의 反應은 至極히 懷疑的이었다. 그러나 미우라는 보란 듯이 成功해 當代 最高의 스포츠카를 모두 제치고 最高時速 295km라는 驚異的인 世界 記錄을 세운다.

    結局 엔草島 “美드十 엔진 方式은 매우 優秀하다”는 말로 敗北를 認定했고, 이때부터 페라리度 美드十 方式이 適用된 모델을 生産하게 된다. 페루치오는 當時 “이제 페라리가 우리를 의식할 뿐만 아니라, 흉내까지 내고 있다”며 마음껏 嘲弄했다. 페라리를 模倣하는 브랜드에 不過하다는 비웃음을 듣던 람보르기니로서는 一擧에 痛快한 復讐를 한 셈이다.

    미우라의 衝擊이 채 가시기도 前인 1973年, 람보르기니는 미드십의 傳說 람보르기니 카運打크(Countach)를 量産한다. 람보르기니의 存在를 確固히 알린 이 모델은 몸을 구겨 넣듯 타야 하고 꽉 막힌 後方 視野에 좁은 室內 等 여러 가지 不便함에도 暴發的인 人氣를 얻었다. 그것은 엄청난 힘과 堪當하기 힘들 程度의 性能, 흉내 내기도 어려운 革新的인 디자인 德分이다. 카運打크는 只今도 람보르기니 하면 떠오르는 시저스 도어(Scissors door·가위처럼 日子로 위를 向해 열리는 門)를 最初로 採擇한 모델이기도 하다. 特有의 낮은 全高와 넓은 車體로 一般 도어를 適用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 車는 5.0L V12 엔진을 얹어 最大出力 446馬力, 最高時速 300km라는 驚異的인 性能으로 페라리를 威脅했다.

    하지만 上昇一路를 걷던 람보르기니度 1970年代 最大 危機를 맞는다. 첫 危機는 트랙터 事業에서 始作됐다. 南美에서 大規模 注文이 取消되면서 需要 增加에 對備해 新規 工場을 짓던 람보르기니는 큰 財政 損失을 입었고, 마침 勞使紛糾까지 겹쳐 1974年 트랙터 事業을 피아트에 넘긴다. 여기에 1, 2次 午日쇼크까지 겹치자 페루치오는 람보르기니의 持分 大部分을 스위스 投資社에 넘기고 남은 持分마저 親舊 르네 라이머(Rene Leimer)에게 넘긴 後 隱退를 宣言한다.

    페라리 또 한 番의 跳躍

    미우라와 카運타크에 잇달아 카운터펀치를 얻어맞은 페라리는 더욱 强力한 스포츠카를 만드는 데 沒頭한다. 이렇게 誕生한 모델이 슈퍼카 신드롬을 일으켰던 1984年 作品 288GTO다. 페라리 最初로 2.9L V8 엔진에 트윈 터보 車저를 裝着해 最大出力 400馬力, 最高時速 304km를 達成한 모델이다. 하지만 288GTO의 名聲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엄청난 性能과 速度를 자랑했지만, 競技 中 事故로 選手와 觀衆이 死亡하며 뚜렷한 成果를 거두지 못하고 歷史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페라리는 288GTO 後續모델 開發에 着手해 1987年 페라리 40周年 記念모델 F40을 發表한다. 페라리의 最大 傑作으로 꼽히는 이 車는 엔秒 페라리가 生前에 마지막으로 開發한 遺作이지만, 람보르기니를 겨냥해 만든 모델은 아니었다.

    當時는 獨逸 스포츠카의 代名詞 格인 포르셰 辭意 포르셰 959街 注目받던 時期였다. 포르셰 959는 2.8L 水平 對向 V6 엔진에 最大出力 450馬力, 最高時速 315㎞h를 자랑하는 4輪驅動 슈퍼카로, 當代 最高의 速度를 자랑하며 스포츠카의 先頭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1983年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처음 公開된 이 車는 F40이 公開되기 몇 달 前에 量産되기 始作했다.

    結局 페라리는 ‘世上에서 가장 빠른 車’라는 타이틀을 되찾아오기 위해 F40을 市場에 내놓게 된다. 後輪驅動 2人乘인 F40은 무게 1100㎏에 排氣量 3.0L의 DOHC V8 엔진을 搭載했다. 排氣量은 크지 않으나 트윈 터보에 힘입어 最大出力 478馬力에 最高時速은 無慮 324㎞를 냈다. 停止 狀態에서 100㎞까지 3.8秒에 到達하며, 페라리는 이 車 德分에 1987~1989年까지 世界 最高속 量産 車의 타이틀을 保有하게 된다.

    F40은 當初 400臺만 限定 生産할 豫定이었으나, 注文 物量이 쏟아지며 生産을 마친 1992年까지 모두 1310代가 製作됐다. F40은 特記할 點이 몇 가지 있는데 車輛을 注文하고 받으려면 4年이라는 時間이 걸리고, 出庫 當時 約 1億8000萬 원이던 車輛價格은 ‘가장 빠른 車’‘엔秒 페라리의 遺作’이라는 別稱이 붙으며 最近엔 5億 원을 呼價한다고 한다. 엔秒 페라리는 F40 誕生 이듬해 死亡했다.

    全 世界의 슈퍼카 中에서 못생기기로 손가락에 꼽히는 ‘엔秒 페라리’는 創業者 엔秒 페라리를 기리기 위해 2002年 出市한 車輛으로 6.0L V6 엔진에 最大出力 660馬力 最高時速 350km의 性能을 뽐낸다. 當代 最高인 페라리 F1팀에서 開發한 이 車는 一般 道路를 달리는 最高의 車를 目標로 만들어졌다. F1 드라이버 歷史上 가장 優秀하다는 살아 있는 傳說 미하엘 슈마허가 開發에 參與해 有名稅를 떨치기도 했던 이 茶는 當時 349臺만 限定 生産할 計劃이었지만 購買者들의 要求로 550臺를 追加 生産했다.


    2011年 韓國에 紹介된 페라리 FF는 ‘페라리 砲(Four)’의 略字로 4人乘과 4輪驅動을 의미하며, 페라리GT 스포츠카의 方向을 새롭게 提示한 페라리 最初의 4輪驅動 車輛이다. 페라리가 追求하는 自動車의 未來를 읽을 수 있는 모델인 이 車는 6.3L V12 엔진을 搭載해 最大出力 660馬力, 最高時速 335km의 性能을 發揮한다. 最高時速만을 追求하는 것이 아니라 環境을 생각해 CO₂ 排出을 낮추고 燃料效率을 높였으며, 顧客들이 車輛의 內·外裝 및 仕樣을 趣向과 嗜好에 따라 選擇할 수 있게 했다.

    페라리는 2011年 歷史上 類例없는 實績을 記錄했다. 世界에서 모두 7195代의 車輛을 팔아 22億5100萬 유로(3兆3377億 원)의 賣出을 올렸다.

    墜落하던 람보르기니의 復活

    1974年 페루치오가 떠난 람보르기니는 性能과 速度를 改善하는 데 努力하기보다는 全般的인 品質 向上에 重點을 두고 自動車를 生産해냈다. 하지만 販賣實績은 그리 좋지 못했다. 午日쇼크와 販賣不振을 克服하지 못한 람보르기니는 1978年 結局 破産하고 만다.

    以後 스위스의 밈람(Mimram) 兄弟는 破産한 람보르기니 工場을 引受해 1980年代 람보르기니 復活을 이끈다. 兄弟는 1981年 3月 제네바 모터쇼에서 새로 디자인한 미우라와 카運打크S를 선보였다. 그리고 새로워진 람보르기니의 모습을 가장 腸 表現한 모델 잘派(Jalpa)를 出市했다. 1985年에는 카運타크의 새로운 버전 콰트로發볼레(Quattrovalvole)를 처음 公開하는데, 이 車는 5.2L V12 엔진에 最大出力 455馬力을 뿜어낸다. 콰트로발볼레는 지난 22年間 람보르기니를 代表했던 固有의 엔진을 完全히 새롭게 바꾸고 性能을 大幅 强化한 모델로 競爭 車들을 앞서며 람보르기니의 復活을 알린 슈퍼카다.

    람보르기니를 復活시킨 밈람 兄弟는 會社를 크라이슬러에 넘기게 된다. 크라이슬러는 1990年 또 하나의 傳說的인 슈퍼카 디아블로를 出市해 큰 成功을 거두었다. 19世紀 鬪牛에서 名聲을 떨쳤던 황소를 뜻하는 디아블로는 492馬力의 5.2L V12 엔진을 가졌다.

    하지만 母會社 크라이슬러가 財政難을 겪으며 람보르기니는 1994年 인도네시아의 符號인 토미 수하르토에 賣却되는 運命을 맞게 된다. 1990年代 後半 經濟危機로 打擊을 입은 수하르토 家門은 디아블로 後續모델의 開發費用을 堪當하기 어려웠다. 結局 람보르기니는 1998年 아우디에 引受되면서 安定을 되찾게 된다.

    아우디와 손잡은 람보르기니는 第2의 全盛期를 맞는다. 아우디의 든든한 支援 아래 開發한 무르시엘라고는 2001年 出市 以後 12氣筒 슈퍼카 市場에서 最高의 모델로 脚光받았다. 2002年 出市돼 ‘베이비 람보르기니’라고 불리는 V10 엔진의 伽倻르도는 람보르기니의 顧客層을 넓힌 모델이다. 以後 람보르기니는 年間 2000代 內外의 꾸준한 販賣量을 誘致하고 있으며 2008年에는 2430代라는 歷史上 最高의 販賣實績을 記錄하기도 했다.

    죽음 놓고도 競爭한 두 巨人

    스포츠카와 自動車競走의 皇帝였던 엔秒는 個人的으로 不幸한 삶을 살았다. 1956年 외아들 디노가 心臟病으로 죽었고, 이듬해에는 A級 選手였던 알폰소 데 포르타高(Alfonso De Portago)가 밀레 밀리아 慶州에서 自身을 包含해 13名의 生命을 앗아가는 큰 事故를 일으켰다. 여기에 1936年 숨겨놓은 愛人이 낳은 아들의 存在가 알려져 世上을 놀라게 했을 뿐 아니라 아내와도 멀어졌다.

    하지만 더 큰 不幸은 1950年代 末부터 F1 그랑프리나 르망 慶州에서 王座가 흔들린 것이다. 그가 强力한 엔진의 레이스카를 만드는 데 置重하는 동안 英國 팀들은 가벼운 新素材와 에어로 다이내믹 스타일을 反映한 새로운 競走車를 만들어 페라리를 앞서갔다. 페라리 幹部들은 새로운 槪念을 導入하고 設計를 바꾸자고 强力하게 主張했으나, 엔秒는 番番이 이를 默殺했고 그들은 結局 하나둘 엔秒 곁을 떠나갔다. 이런 過程에서 그는 거칠고 無慈悲한 暴君으로 變해갔고, 아내마저 會社 經營에 끼어들자 그를 도왔던 職員들은 아무도 페라리에 남아 있을 수 없게 됐다.

    1963年 不景氣 속에서도 競走車 製作과 팀 運營에 많은 돈을 投資해 어려워진 엔秒에게 美國의 포드는 資本을 投資하겠다고 提案했으나, 엔秒의 眼下無人 같은 態度 때문에 協商은 깨지고 만다. 結局 財政難을 견디다 못한 엔秒는 1969年 피아트史를 찾아가 스포츠카 部門의 株式 50% 讓渡를 條件으로 도움을 請하게 된다. 피아트의 支援으로 活氣를 되찾은 페라리는 1975年, 1977年, 1986年에 그랑프리 월드챔피언에 登極하며 다시 한 番 榮光의 나날을 보낸다.

    하지만 健康이 極度로 나빠진 엔秒는 英國에서 祕密裏에 만들던 最新型 F1 그랑프리 競走車를 애타게 기다렸으나 結局 完成을 보지 못하고 1988年 90歲의 나이로 世上을 떠난다. 엔秒 페라리는 生前에 “페라리는 女子와 같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1973年 會社를 넘기고 隱退를 宣言한 페루치오 람보르기니는 이탈리아 움브리아 地方에 있던 그의 와이너리에서 와인 生産에 餘生을 바쳤다. 그의 라 포르리打 邸宅은 테니스코트와 람보르기니 自動車를 展示한 博物館, 올림픽 規格의 水泳場을 갖춘 것으로 有名하다. 이곳에서 그는 ‘미우라의 피’라고 불리는 컬리 델 트란시멘트(Colli Del Transiment)라는 레드 와인을 生産했다.

    그는 生前에 “엔秒 페라리가 90歲까지 살았으니 나는 91歲까지 살아 페라리를 이기겠다”고 壯談했지만, 結果的으로 페라리를 이기지는 못했다. 페라리가 숨을 거둔지 5年 만인 1993年 2月 20日 腦卒中으로 쓰러져 77歲의 나이로 世上을 떠났기 때문이다.

    람보르기니 vs 페라리

    2002年 出市돼 ‘베이비 람보르기니’라고 불리는 V10 엔진의 伽倻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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