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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主義 信奉한 하영옥 그룹이 京畿東部 核心|新東亞

김일성主義 信奉한 하영옥 그룹이 京畿東部 核心

國會 進入한 ‘마지막 主思派’ 實體

  • 송홍근 記者| carrot@donga.com

    入力 2012-04-18 15: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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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統合進步黨 當選者 相當數가 범 京畿東部
    • 傳貰 빼서 선거지로 移徙할 만큼 組織力 强해
    • 박헌영 8月 테제 닮은 군자산의 約束
    • 李正姬 代表는 京畿東部보다 오른쪽에 서 있어
    2001年 어느 날 한 運動家가 詩(詩)를 썼다.



    萬若 우리 이番 機會를 놓친다면

    지나온 時間보다 더 많은 時間을

    한숨과 恥辱 속에서 보내야 할지 모른다.



    萬若 우리 이番 機會를 놓친다면

    지나온 歲月보다 더 많은 歲月을

    南과 北이 銃칼 맞대고 서 있어야 할지 모른다.

    지나간 時節의 揮發과 離脫, 分裂과 混亂을 艱辛히 딛고 선 全國聯合 10年

    이제 우리, 民族自主의 理念이 있고

    尊敬과 信望의 指導가 있고

    군자산의 約束이 있는 우리가

    祖國統一의 臺詞便器를 그냥 흘려보내고 만다면

    우리 스스로 이 어둔 世上의 對案이 되고

    民衆들의 希望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歷史와 民族에 씻을 수 없는 罪를 짓는 일이다.

    6·15 共同宣言을 바닥에 깐

    3年 안에 廣範圍한 民族民主前線, 民族民主 政黨 建設,

    10年 안에 自主的 民主政府 樹立, 聯邦統一祖國 建設은

    그리하여 農民은 이 땅의 主人이 되고

    勞動者는 工場의 主人이 되고

    靑年 學生 우리 모두 이 世上의 主人 되는 世上은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

    아 그것은 내가 갖고 있는 것 中 가장 所重한 것 하나를

    버리는 일로부터 始作될 것이다.

    眞實로 목숨까지 包含하여

    3年 後인 2004年엔 전교조 所屬 敎師 新○○氏가 ‘군자산의 約束’이라는 悲壯美 가득한 詩集을 냈다. 군자산의 約束이라는 게 都大體 뭔가? 統合進步黨의 特定 政派에게 이 約束은 테제(These·政治的, 社會的 運動의 基本 方針이 되는 綱領을 가리키는 獨逸語)다. 군자산은 忠北 槐山郡 칠성면에 서 있다. 忠北의 소금강이라 불렸을 만큼 山勢가 빼어나다. 2001年 9月 NL(民族解放) 運動家들이 군자산에 集合했다. 이날 決意 內容을 ‘9月 테제’라는 이름으로 내놓았다. 民主主義民族統一全國聯合(以下 全國聯合)李 決意한 이 테제의 슬로건은 다음과 같다.

    ‘廣範圍한 民族民主前線 政黨建設로 自主的 民主政府 樹立하여 聯邦統一祖國 建設하자.’ 9月 테제는 1945年 박헌영이 作成한 8月 테제를 聯想케 한다. 現 段階에서 組織이 나아갈 바를 整理한 것. 9月 테제가 군자산의 約束이다. 色眼鏡 쓰고 들여다보면 民族民主前線은 統一戰線戰術과, 聯邦統一曺國은 高麗聯邦制와 오버랩된다. 9月 테제의 各論을 보면 嫌疑가 더 짙다.

    김일성주의 신봉한 하영옥 그룹이 경기동부 핵심

    李正姬 統合進步黨 共同代表가 3月 23日 4·11總選 서울 관악乙 候補 辭退의 뜻을 밝힌 뒤 記者들의 質問에 對答하고 있다.

    ▲統一戰線運動의 꽃은 中間層과의 事業이다.

    ▲變革의 成敗는 中間層을 누가 戰取하느냐에 달려 있다.

    ▲政黨을 갖는 것이 반드시 必要하다.

    9月 테제는 또한 反美 自主化 鬪爭을 ‘以南 變革 運動의 戰略的 中心’으로 設定하고 있다.

    ▲反美 鬪爭은 以南 民衆만의 課題가 아니라 全 民族的 課題이며 反美 自主化를 實現하는 힘 亦是 全體 民族 自主 力量으로부터 나온다.

    ▲民主勞組運動을 이 反美 自主化를 周旋으로 하는 運動으로 발전시키자.

    ▲反美 自主化 鬪爭을 勝利로 이끈 以後 民族 民主 陣營이 廣範圍한 民衆의 支持를 받는 政治的 多數波로 자리 잡을 수 있다.

    9月 테제가 나온 後 10年 6個月의 歲月이 흘렀다. 흐른 時間만큼 世上도 바뀌었다. 군자산에 모여 聯邦統一祖國 建設을 決意한 이들은 只今,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는 格”

    京畿東部가 國會에 進入했다.

    이 政派는 李正姬 統合進步黨 共同代表가 4·11 總選 野圈候補 單一化 過程에서 輿論調査 造作 是非에 連累됐을 때 그 이름이 膾炙됐다. 進步陣營 內部에선 오래前부터 論爭의 中心에 서 있던 組織이다. 이 政派에 批判的인 이들은 ‘京畿東部스럽다’는 單語를 時代錯誤的이란 뜻으로 使用한다. 京畿東部는 理念 集團이라는 點에서 親朴系·親李系·鄭東泳界·孫鶴圭系라는 낱말과는 性格이 다르다.

    京畿東部聯合 所屬으로 指目된 人士들은 “나는 京畿東部와 無關하다”거나 “京畿東部는 實體 없는 組織”이라고 主張했다. 選擧 局面에서 根據 없는 色깔論을 꺼내 들고 있다고 몰아세웠다.

    李正姬 代表는 “京畿東部의 實體를 모른다”고 答했다. 言論 接觸을 避하고 입을 닫은 人事도 있다. 統合進步黨이 言論에 提供한 19代 總選 出馬者 連絡處 名簿엔 工巧롭게도 京畿東部 所屬으로 指目된 人士들의 携帶電話番號만 漏落돼 있다.

    李正姬 代表가 總選 出馬를 抛棄하면서 京畿東部에 集中하던 스포트라이트는 民間人 不法 査察과 ‘나는 꼼수다’ 金容民 막말 波紋으로 옮겨갔다. 言論도 選擧局面에 埋沒돼 이 政派와 關聯한 追跡報道에 나서지 못했다. 旣往에 나온 斷片的 報道엔 事實과 다른 內容도 적지 않게 담겼다.

    野圈이 候補 單一化를 통해 12月 大選에서 勝利하면 統合進步黨은 聯立政府의 一員이 된다. 一部 部處 長官도 割當받는다. 進步陣營에서 京畿東部로 불리던 勢力이 次期 政權의 한 軸이 될 수도 있는 것. 統合進步黨은 4·11總選을 통해 與小野大를 이룬 뒤 캐스팅보트를 쥐려고 했으나 失敗했다. 13席을 얻었다. 折半의 成功이다. 公式 選擧運動 期間 直前에 터진 京畿東部 이슈가 野圈 全體의 票를 一部 갉아먹고, 交涉團體 構成이라는 統合進步黨의 目標에 惡材로 作用했다는 評價가 있다.

    主思派의 하나인 자민통 그룹의 리더였던 옛 NL 核心人士 K氏는 京畿東部의 國會 進入을 이렇게 評했다.

    “그들이 國會에 들어간 것은 歷史的으로 意味가 相當하다. 그들은 ‘가장 늦게까지 생각을 바꾸지 않고 理念을 固執한’ 主思派다. 勿論 그들이 現在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다. 생각이 바뀌었을 素地도 排除할 수는 없다. 다만 4·11總選을 통해 名實相符한 親北左派가 國會에 進入한 것만은 분명하다. 南北關係에서 大韓民國의 正體性을 認定하지 않는 勢力이 立法機關에 들어간 것이다. 大韓民國 歷史에서 意味가 相當한 것 아닌가. 逆說的으로.”

    한쪽에서는 實體가 없는 組織이라거나 實體를 모른다고 하고, 다른 쪽에서는 ‘마지막 主思派’라고 한다. PD(民衆民主)啓가 主軸인 進步新黨 關係者는 “京畿東部를 모른다는 것은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는 格”이라고 했다. 都大體 京畿東部가 뭔가.

    “色깔論을 提起하고 있다”

    大衆이 옛 民主勞動黨 內部에서만 膾炙되던 京畿東部를 腦裏에 刻印한 것은 3月 20日 金於俊 氏가 總帥인 ‘딴지일보’가 ‘政治部長’ 名義로 쓰인 長文의 記事를 실으면서다. 이 글을 引用하는 것으로 京畿東部라고 불리는 勢力의 實體 追跡을 始作해보자.

    “이정희라는 젊은 政治人이 민노당에 이어 統合進步黨의 代表 자리에 있는 것조차 그들이 決定한 거다. 鄭鎭珝, 윤원석 모두 마찬가지다. 그런 그들에게 百날 責任을 지고 辭退하라고 우겨봐야 그 셋은 혼자 앉아 피눈물만 흘리게 될 것이다. 내가 決定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강요당하는 心情을 생각해보라. 都大體 누가 그 決定權을 가지고 있는가? 都大體 어떤 集團이 그들을 내세워 無理한 行動을 하게 만들고 結果的으로 物議를 일으키고 總選 全體 판局을 흐트러뜨리면서도 물러설 줄을 모르고 있는 걸까? 都大體 왜 이런 屬性을 가진 集團이 統合進步黨의 核心 意思決定權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들의 이름은 過去에 NL이었고, 酒邪派였다가, 最近에는 自主派로 불리기도 하고, 민노당 時節에는 進步新黨 그룹을 逐出해낸 黨權波였다가, 요즘 流行으로는 京畿東部라고도 불린다. 正式 當直도 없는 몇몇이 이너서클을 形成하고 거기에서 수많은 自己 系列 所屬 構成員들의 政治的 行動을 決定하고 命令을 내린다. 그들의 決定에는 아무도 反抗할 수 없으며, 그들의 決定은 公黨의 最高 意思決定機構보다도 더 强力한 影響力을 發揮한다. 隨時로 組織員들을 動員해서 黨의 意思決定에 介入하고 代議員大會에 影響力을 끼친다. 그들은 이番 總選을 準備하면서도, 正式으로 選出된 共同 黨代表들보다도 더 强力한 影響力을 發揮했고, 黨內 地域區 競選過程을 造作하다가 들통이 나서 柳時敏이 黨務 拒否라는 極端的인 行動까지 하게 만들기도 했으면서도, 아무런 被害도 입지 않고 當選 可能한 比例代表의 거의 모든 자리에 自己 系列 사람들을 앉히는 데 成功하기도 했다.”

    保守言論의 京畿東部 關聯 報道를 두고 이 政派 所屬으로 指目된 人士들은 “幽靈團體를 만들어 色깔論을 提起하고 있다”고 主張했다. 이 같은 主張은 억지다. 京畿東部를 아우팅한 것은 進步陣營 內部의 리버럴 勢力이다. 딴지일보 記事가 SNS를 통해 퍼지면서 京畿東部라는 낱말이 네이버, 다음의 實時間 人氣 檢索語로 떠올랐다. 保守言論이 京畿東部를 다룬 것은 SNS에서 한바탕 騷動이 벌어진 뒤의 일이다.

    “注射는 理性 아닌 信仰의 問題”

    京畿東部의 實體에 接近하려면 時計바늘을 過去로 돌려 運動圈 系譜를 들여다봐야 한다. NL은 民族解放 系列의 左派 運動 勢力이다. 비(非)注射 NL로 불린 그룹도 있다. NL은 主體思想을 받아들였다는 理由로 酒邪派로도 불렸다. NL과 競爭 關係인 PD는 社會主義 路線에 좀 더 忠實했다. 統合進步黨의 沈想奵, 盧會燦 當選者가 PD系列이다. 이 두 사람은 現在 西유럽 左派에 가까운 路線을 걷고 있다. 從北(從北·北韓 追從)이라는 單語는 PD가 NL을 批判하면서 처음 使用한 單語다.

    社會發展 5段階論에서 韓國이 어느 地點에 位置했느냐를 두고 NL, PD가 奮起했다. PD는 蘇聯式 社會主義에 傾倒됐고, NL의 酒邪派는 北韓을 모델로 삼았다. 民族解放(NL)을 이룬 뒤 民衆民主主義(PD)를 거쳐 革命(Revolution)을 해야 하는데, NLPDR에서의 位置를 두고 論爭을 벌인 것이다. PD는 NL 時期를 지났다고 봤고, NL은 南朝鮮은 미제 植民地라는 北韓의 主張을 따랐다. PD는 社會主義를 해야 한다고 主張한 것이고, NL은 “때가 아니다. 解放부터 이뤄야 한다”고 본 것이다.

    민주노동당 創黨 主體는 PD다. 민중당→國民勝利21→민주노동당으로 이어지는 進步政黨의 底邊은 PD 中心으로 이뤄졌다. 反面 NL은 讀者 政黨 構築에 否定的이었다. PD는 國家保安法이 存在하는 狀況에서 社會主義政黨(前衛黨)을 建設할 수 없으므로 戰術黨을 結成해야 한다고 봤다. NL은 前衛黨은 北韓에 存在하므로(북한 勞動黨) 構築할 必要가 없으며 野圈을 批判的으로 支持해 韓國의 政治體制를 바꿔나가는 게 먼저라고 여겼다. NL이 1992年 大選 때 백기완 候補를 돕지 않았고, 1997年 大選 때 권영길 候補를 積極的으로 支援하지 않은 까닭이다.

    2004年 17代 總選에서 민노당이 輩出한 議員 10名 中 NL은 현애자 前 議員이 唯一했다. 민노당은 PD의 政黨이었다. 그런데 2004年 민노당 黨權을 NL이 차지하는 一大 事件이 發生했다. 最高委員 選擧에선 ‘세팅 論難’ ‘組織的 談合 投票에 따른 몰票 現象’이 벌어졌다. 京畿東部라고 불리는 勢力을 비롯한 NL그룹은 沈想奵·노회찬·조승수 等 汎PD契를 누르고 黨權을 잡았다. 2004年 9月 以前의 민노당과 以後의 민노당은 헤게모니 集團과 政策에서 性格이 크게 다르다. 민노당에서 PD는 平等派 或은 左派, NL은 自主派로 불렸다.

    4·11總選에서 當選者를 排出하지 못한 進步新黨은 自主派(NL)에게 從北注意를 버리라고 要求하면서 민노당에서 떨어져 나온 勢力이 主軸을 이룬다. 進步陣營 內部의 從北 論難과 關聯해 陳重權 東洋大 敎授가 2008年 2月 4日 ‘프레시안’에 寄稿한 글은 뜻하는 바가 적지 않다. 勿論 時點이 4年 前이라는 것을 勘案하고 읽어야 한다.

    “몇 年 前에 내가 黨에 絶對로 主思派를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强力하게 主張했을 때, 民主勞動黨 內의 某 人事가 ‘그들도 언젠가 變할 것’이라며 主思派들과 나의 和解(?)의 자리를 周旋한 적이 있다. 그때 만난 酒邪派는 내게 自身이 周圍 사람들에게 어떤 민주노동당 加入을 勸誘하는지 자랑을 했다. ‘同志, 金 主席이라면 이 狀況에서 무엇을 했을 것 같소. 내 생각에 金 主席이라면 南朝鮮 狀況에서는 민주노동당을 했을 것이요.’ 都大體 이런 사람들하고 進步政黨을 같이해야 한단 말인가? 그때 내가 얼마나 慘澹했겠는가. 從北主義者들이 온갖 便法으로 민주노동당의 組織을 掌握해 들어와도 懲戒 하나 제대로 못하는 것을 보고, 나는 이미 當時에 民主勞動黨에 對한 期待를 접었다. 그때 내가 脫黨으로써 警告했던 일이 只今 現實로 나타난 것이다. 運動을 해봤다는 사람들이 結局 이렇게 될 줄 몰랐다는 말인가? 이것도 理解가 안 간다. 이른바 平等波濤 한때 亡해가던 蘇聯을 모델로 삼은 적이 있지만 東歐의 沒落을 보고 생각을 바꾼 것처럼, 北韓을 모델로 삼는 자주波濤 언젠가 생각을 바꿀 것이다. 이게 많은 사람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들도 언젠가 變할 것’이라는 期待는 主思派의 本質을 모르는 얘기다. 注射는 理性이 아니라 信仰의 問題. 어떤 經驗的 證據, 어떤 整合的 論理, 어떤 狀況的 變化를 들이대도 깨지지 않는 것이 信仰의 本質이다.”

    金榮煥, 하영옥의 민혁당

    ‘朝鮮日報’는 京畿東部聯合이 1990年代 最大 運動圈 組織인 京畿東部地域聯合에서 由來했다고 썼다. (3月 24日子 ‘交涉團體 노리는 政黨 實際 指導部, 國民은 모른다’ 題下 記事 參照) 이 報道는 事實의 一角을 담고 있기는 하나 眞實과는 다르다. 京畿東部聯合은 1990年代 運動圈 最大 組織이 아니다. 또한 酒邪派만의 組織도 아니다. 京畿東部聯合은 1991年 結成한 全國聯合의 下部組織으로 城南·龍仁 一帶를 아울렀다. 全國聯合은 고 김근태 前 議員, 李麟榮 民主統合黨 最高委員이 所屬했을 만큼 理念 志向이 다채로웠다. 재야민족민주운동의 全國組織 全國民主民族聯合(전민련)의 後身이라고 보면 된다.

    京畿東部의 核心은 오히려 1999年 安保當局이 摘發한 민혁당과 交集合을 이룬다. 민혁당을 擧論하지 않고는 現在의 京畿東部를 理解할 수 없다. 민혁당은 1980年代 以後 大學街에서 싹이 튼 主思派의 援助 格인 김영환 氏가 主導해 만든 不法 政黨이다. 金 氏는 ‘鋼鐵書信’이라는 主思派 팸플릿의 著者로 有名하다. 그는 1991年 江華島에서 北韓 潛水艇을 타고 越北해 김일성을 만나 “首領님의 뜻을 받들어 南朝鮮에서 地下黨을 組織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듬해 3月 16日 민혁당을 創黨했다. 金榮煥, 하영옥, 朴○○ 3人이 中央委員會를 構成했다. 金 氏는 눈으로 본 北韓에 失望한데다 食糧難 消息을 接하면서 민혁당 活動에 會議를 느꼈다. 1995年 ‘푸른사람들’을 組織하면서 北韓을 批判하기 始作했다. 1997年 민혁당은 金 氏 主導로 解體 手順을 밟았다. 中央委員會 票決에서 2:1로 解體를 決定했다. 그런데 하영옥은 金榮煥을 變節者로 여기면서 민혁당 傘下의 京畿南部委員會, 영남위원회를 管理했다. 統合進步黨 比例代表 2番이던 李石基 國會議員 當選者가 민혁당 京畿南部委員長이었다. 이의엽 統合進步黨 戰略企劃委員長 兼 19代 總選 選對委員長은 민혁당 영남위원회 傘下 釜山地域委員長으로 일했다.

    하영옥의 再建 민혁당은 1999年 査正當局에 摘發되면서 瓦解됐다. 1999年 檢擧된 김영환은 오래前 轉向했다는 理由로 公訴保留 處分을 받았다. 하영옥과 이의엽 委員長은 各各 1999年, 2000年 檢擧됐다. 李石基 當選者는 2002年 5月 拘束된 後 2003年 8·15 特別赦免으로 釋放됐다. 以後 이 當選者는 京畿東部의 機關紙 格이라는 評價가 있는 ‘民衆의 소리’에 參與했고 社會同鄕硏究所라는 이름의 輿論調査機關을 設立했다. 4·11總選 때 景氣 城南중원 候補로 決定됐다 性醜行 前歷이 밝혀져 落馬한 윤원석 前 民衆의 소리 代表가 이 當選者의 最側近이다. 이의엽 委員長은 李正姬 代表 時節 민노당에서 政策위議長을 맡았다.

    次官級 官僚로 일하는 민혁당 出身 人士의 證言이다.

    “민혁당 黨員은 나를 包含해 全國的으로 100名에 不過했다. 이들이 運動圈 團體의 尿路를 掌握하고 影響力을 行使한 것이다. 李石基 當選者가 민혁당에서 어떤 地位를 가졌는지 나는 알 수 없다. 黨員 100名이 橫的으로 連結돼 서로를 잘 몰랐다. 민혁당 京畿南部委員會와 全國葉合 傘下 京畿東部聯合은 人脈이 겹치기도 하고, 어긋나기도 한다. 이 當選者가 京畿東部聯合에서 主流는 아니었던 것으로 안다. 京畿東部聯合은 理念 스펙트럼이 多彩로운 곳이었다.”

    “李石基는 민혁당 넘버 투”

    김일성주의 신봉한 하영옥 그룹이 경기동부 핵심

    민혁당 事件을 알린 1999年 9月 1日子 東亞日報.

    또 다른 NL 出身 人士는 이렇게 말했다.

    “重河組織 成員은 少數의 민혁당원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잘 몰랐다. 민혁당원의 影響力 아래에 있었던 사람은 적어도 數千 名에 達한다. 黨員이 100名이면 그 아래 多數의 合法團體마다 細胞가 있고 그 사람들이 核心部의 指導를 받아 多重에게 影響力을 行使하는 것이다. 민혁당원 100名 中 25名假量이 轉向한 것으로 把握된다. 나머지 75名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하영옥은 公式 舞臺에서 사라졌다. 뭘 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이 내 周邊에는 없다. 李石基는 하영옥의 再建 민혁당에서 넘버 套였다.”

    자민통 그룹에 몸담았던 한 人士의 見解다.

    “하영옥의 現在 位置가 把握되지 않는 것을 두고 그가 아직도 地下黨 活動을 한다고 推測해볼 수도 있다. 公式的으로 活動하지 않는 게 오히려 異常한 것이다. 核心은 公式的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게 北韓式 組織의 特徵이다. 자민통度 그랬다. 하영옥은 민혁당이 瓦解됐을 때 組織員을 찾아다니면서 說得해 地下黨을 再建한 人物이다. 只今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非公開 組織에서 役割하고 있다고 推定해볼 수 있다.”

    全大協 祖國統一委員會에서 活動한 人士는 “하영옥이 幕後의 實力者라고도 할 수 있고, 內部 헤게모니 다툼에서 밀려났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統合進步黨에서 京畿東部라고 불리는 이들과 민혁당의 京畿南部委員會 人士들은 이렇듯 交集合을 이룬다. 京畿東部는 하영옥의 再建 민혁당 出身 人士와 외대 龍仁캠퍼스를 비롯한 競技 東南部의 學生運動 勢力, 城南地域의 在野勢力, 全國聯合 傘下 京畿東部聯合에 남은 NL勢力이 이룬 네트워크를 進步陣營 內部에서 가리키는 말이다.

    全國聯合은 1997年 以後 事實上 解消됐다. 1991年 出帆 當時 參與한 人士가 各自圖生한 것. NL도 分化했다. 李麟榮 等 전대협 出身은 政治權으로 들어갔다. 전대협을 幕後에서 操縱한 反美靑年會 所屬이던 安熙正 忠南道知事 같은 사람도 制度圈으로 編入했다. 反美靑年會 總責이던 條革 氏는 北韓 民主化運動을 하고 있다. NL界 非合法 組織을 이끌던 한 人士의 說明이다.

    “1997年, 1998年께 全國聯合이 事實上 瓦解된 後 NL이 PD가 꾸려놓은 進步政黨으로 移動하기 始作했다. 核心 幹部들은 各自 自己 길을 갔다. 政治權으로 간 사람도 있고, 生業에 專念하는 이들도 있고, 생각을 바꿔 北韓 民主化運動을 하는 이들도 있다. 時代가 바뀌고, 나이가 들면서 急進的인 생각이 사라진 것이다. 瓦解된 全國聯合에서 中下部에 있던 이들이 코어(core·核心)가 떠난 곳에서 主要 幹部로 올라섰다. 1991~97年의 全國聯合과 군자산의 約束을 내놓은 全國聯合은 人的 構成은 勿論이고 指導部 또한 다르다. 옛 민노당 黨權波이던 京畿東部니 蔚山聯合이니 仁川聯合이니 하는 곳에 屬한 人士들은 NL의 核心 리더들이 各自圖生한 뒤에도 오랫동안 생각을 바꾸지 않은 이들이다. 그 사람들을 中心으로 한 勢力이 2004年 以後 민노당 黨權을 掌握했고, 現在 統合進步黨에서 影響力을 行使하고 있다. 하영옥의 민혁당 出身 中 轉向하지 않은 이들은 2000年 무렵부터 進步政黨에 參與했다. 그들은 主思派의 始初이던 김영환은 勿論이고 安熙正, 李仁榮, 條革 等이 모두 健康한 길로 갔는데도 낡은 理念을 오랫동안 固守했다. 只今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時代錯誤的이라고 批判할 수 있겠다. PD는 사민主義나 西유럽 進步政黨 모델로 스스로를 一新하지 않았는가.”

    傳貰 빼서 선거지로 集團 理事

    김일성주의 신봉한 하영옥 그룹이 경기동부 핵심

    李石基 國會議員 當選者가 2003年 6月 25日 矯導所의 配慮로 特別休暇를 받아 나와 生命이 危篤한 어머니 김복순 氏와 만났다. 이 當選者는 2002年 5月 拘束됐다.

    ‘신동아’는 하영옥 前 민혁당 中央委員을 인터뷰하고자 그를 搜所聞했으나 所在를 把握하지 못했다. 保守言論은 勿論이고 進步言論과도 인터뷰를 꺼려온 李石基 當選者 쪽으로도 連絡을 取했으나 만나지 못했다. 下 前 中央委員과 이 當選者가 이 記事와 關聯해 異見(異見)을 披瀝해오면 ‘신동아’는 6月號에서 인터뷰 形式으로 紹介할 것이다.

    1990年代 後半부터 進步政黨에 들어가기 始作한 NL은 민혁당 그룹이 2000年 以後 민노당에 入黨한하면서 PD가 掌握하던 組織을 하나둘 接受하기 始作했다. 黨權 다툼 過程에서 僞裝轉入, 黨費 代納, 不法 地區黨 創黨 等이 일어났다. 李正姬 代表의 輿論調査 造作 是非 때 進步新黨 쪽에서 “그쪽은 元來부터 그런 짓을 해왔다”는 反應이 나온 것은 그 때문이다. 京畿東部만 뭇매를 맞았으나 민노당 黨權波를 科占했던 蔚山聯合, 仁川聯合도 共히 非難받을 行動을 했다. 主思派 系列인 이들은 때로는 競爭하고 때로는 協力했다. 一部 言論이 京畿東部가 僞裝 轉入으로 용산地區黨 黨權을 掌握했다고 紹介한 事件은 實際로는 仁川聯合이 저지른 것이다.

    한 PD 系列 人士의 說明이다.

    “용산地區黨에선 벌어진 일은 僞裝轉入보다 더 독한 것이었다. 居住地나 職場이 位置한 地域 外에는 黨籍을 옮기지 못하게 하자 仁川聯合 사람들이 傳貰를 빼서 용산구로 移徙를 갔다. 한 집에 數十 名이 살기도 했다. 結局 이들이 地區黨 當直을 獨食했다. 2000年 總選 때는 蔚山聯合이 勢力 優位를 利用해 蔚山 北區 候補를 갈아치워버렸다. 最初의 國會議員을 낼 수 있었는데, 그 일 때문에 敗北했다. 京畿東部度 이러저런 便法으로 全國 곳곳에서 物議를 일으켰다. 主思派가 2005年 黨 機關紙 ‘理論과 實踐’을 掌握한 것도 민노당 內部에서는 衝擊的인 事件이었다.”

    17代 總選에서 10名의 國會議員을 輩出한 後 민주노동당의 支持率은 一時的으로 20%에 肉薄하기도 했으나 政派 葛藤은 민노당을 墜落으로 이끌었다. 조현연 성공회대 敎授는 2009年 내놓은 冊에서 이렇게 썼다.

    “민노당의 支配政派로서 自主派는 多數決이라는 이름으로 少數 意見을 無視 或은 拒否했는데, 이는 民主主義라는 이름으로 民主主義를 질식시키는 事態를 빚게 했다. 민주노동당 盆唐(分黨) 事態는 支配政派의 非民主的이고 霸權的인 行態가 黨內의 民主的 討論과 意思 決定 構造를 毁損함으로써 黨 活動家들과 黨員을 逐出해버린 意味를 지니고 있었으며, 이들 가운데 一部가 以後 進步新黨을 創黨하는 데 힘을 모았던 것이다.”(한국 進步政黨 運動史, 2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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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年 2月 3日 민주노동당 非常對策委員會 革新案 中 一心會 事件 關聯者 除名案이 否決되자 沈想奵 非對委 代表가 굳은 表情으로 黨大會場을 빠져 나가고 있다.

    조 敎授는 민노당 政策위 副委員長, 進步新黨 政策위 議長을 지냈다. 그의 說明을 좀 더 들어보자.

    “(2006年 北韓 核實驗과 이른바 ‘一心會 事件’ 以後) 平等派 系列에 屬하는 政派들 사이에서는 旣存의 政派 聯合 構造를 維持하는 데 對한 會議가 集中的으로, 全面的으로 나오기 始作했다. 問題의 深刻性은 黨 內部에서 路線鬪爭이 展開된다는 것 自體가 아니라, ‘우리 民族 第一主義’와 植民地 規定 等 支配政派로서 自主派의 路線과 世界觀이 너무나 時代錯誤的이고 退行的이라는 데 있었다.”(같은 冊, 254쪽)

    2007年 민노당 大選候補 競選 때 自主派는 盧會燦 當時 候補를 陰害하는 動映像을 製作해 流布했다. 2008年 2月 臨時全黨大會에서 黨權派가 ‘沈想奵 非對委’의 革新案을 相當한 票差로 否決시키면서 2008年 2月 민노당은 分黨됐다. 沈想奵 盧會燦 조승수는 민노당을 나가 進步新黨을 創黨했다.

    “自主派 系列의 헤게모니 그룹인 從北派가 自主派 全體를 掌握하고 있고 또 時代錯誤的인 事態認識이 從北派의 意識을 支配하고 있는 狀況에서 沈想奵 非對委의 革新案이 通過되기를 바라는 것은 無望한 일이었다.”(같은 冊, 263쪽)

    조 敎授는 自主派의 從北·霸權主義의 根源으로서 9月 테제를 꼽는다.

    “自主派, 特히 從北派에게 민노당은 自主的 民主政府 樹立을 위한 統一戰線的 性格을 지닌 政黨으로, 그것은 戰略的 地位의 政黨이 別途로 存在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統一戰線的 性格의 戰術 政黨이기에 그들에게 민주노동당은 掌握해야 할 對象에 不過했고 黨을 掌握하면 鐘北派 路線의 霸權主義的 貫徹이 우선시되었다. 卽 從北注意 때문에 霸權主義가 懶惰는 것이다. 이들의 基本路線과 宿願事業은 2001年에 마련된 59쪽 分量의 ‘3年의 計劃! 10年의 展望!’이른바 9月 테제 文件에 잘 드러나 있다. 1930年代式 統一戰線戰術의 思考를 담고 있는 9月 테제의 內容은 민주노동당의 綱領과 精神을 自身의 길로 認定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結局 從北派에 依해 捕獲된 自主派가 地域과 中央의 黨權을 위해 세팅 選擧, 僞裝 轉入, 集團的 住所 移轉, 黨費 代納, 代理投票, 黑色宣傳 等 多彩로운 不法과 便法을 敢行한 것, 北核 問題에 對한 常識 以下의 態度나 이른바 ‘一心會 事件’, 코리아聯邦共和國 波動, 大選公約으로 ‘美軍 撤收 後 北核 廢棄 項目’을 슬그머니 끼워 넣기 等은 偶然히 發生한 것이 아니라, 時代의 흐름에 맞지 않는 9月 테제의 內容을 無理하게 現實化시키려는 데서 빚어진 必然的인 結果였다.”(같은 冊, 265~267쪽)

    自主派 全體가 從北路線을 따른 것은 아니지만 從北派가 自主派를 掌握하고, 自主派가 黨權을 쥔 게 2004年 9月 以後의 민노당이라는 것이다. 그 中心에 서 있는 것이 京畿東部다. 조 敎授의 言及에서 ‘戰略的 地位의 正當’은 統一戰線 戰術을 援用하면 4月 11日 黨代表者會에서 김정일을 ‘永遠한 總祕書’로 推戴한 北韓의 勞動黨 或은 別途의 前衛黨이다.

    主思派가 進步政黨에 組織的으로 參與하기로 처음 決定한 때는 1997年 大選 무렵이다. 以後 進步政黨 加入이 이어졌으나 2001年 9月 테제가 나오기 前까지는 組織的 參與가 後退하는 樣相을 보이기도 했다. 군자산에서 綱領을 決議한 後 從北派가 大大的으로 민노당에 入黨한 것. 이들은 2004年 9月부터 黨權波로 떠올랐다. 2005年엔 黨 機關紙인 ‘進步政治’ ‘理論과 實踐’ 編輯陣을 自身들과 意見이 다르다는 理由로 交替해버렸다. 2006年 민주노동당 黨員 2名이 國家保安法 違反으로 拘束된 一心會 事件 때 平等派가 이들의 除名 및 黜黨을 要求했으나 自主派는 오히려 이들을 被害者로 規定하고 도왔다. 一心會 事件은 2008年 민노당 분당의 核心이슈로 作用했다. 從北이란 單語가 日常에서 쓰이기 始作한 것도 이때부터다. 北韓은 일심회에 보낸 指令文에서 민노당을 ‘民會社’로, 市民團體는 ‘年會社’로, 反美鬪爭은 ‘輸出’로, 金正日은 ‘社長님’으로 表記했다. 崔起榮 當時 민노당 事務副總長은 민노당 人士 300餘 名의 性向을 分類해 北韓에 報告했다. 主思派에 批判的인 一部 進步 人士가 北韓을 ‘本社’라는 비아냥거리는 表現으로 指稱하는 것은 一心會 事件을 거치면서다.

    主思派 민노당 掌握 事件

    統合進步黨은 4·11總選을 거치면서 옛 민노당 黨權派 탓에 시끄러웠다. 서울 관악乙 輿論調査 年齡帶 造作 文字 波動, 比例代表 選出 現場投票, 온라인投票를 合算하는 過程에서 벌어진 疑惑, 靑年 比例代表 選出 時 投票管理者가 데이터 貯藏 프로그램을 變更했다는 主張이 불거져 나왔다. 2月 末 柳時敏 共同代表가 나흘間 黨務를 拒否한 것도 민노당界에 對한 問題 提起였다는 게 統合進步黨 한 人士의 說明이다.

    京畿東部의 組織力은 혀를 내두를 程度다. 進步新黨의 한 黨員은 지난해 孫鶴圭 민주당 常任顧問이 當選한 4·27 再·補闕選擧 때 盆唐에서 겪은 經驗談을 長文의 글로 內部에 傳했다. 要約해 紹介하면 다음과 같다.

    “城南 ○○○ 事務室을 어렵게 찾아갔는데 入口에서부터 衝擊的이었습니다. ‘2012年 執權을 準備하자!’ 正말 놀라웠습니다.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京畿東部구나 하는 衝擊이 와 닿았습니다. 自身들을 執權의 主體로 明確히 設定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제가 가장 싫어하고 排斥하는 組織이지만 그들의 活動만큼은 매우 존경스러웠습니다. 京畿東部는 비록 우리는 決코 同意하지 않지만 그들 나름의 目標를 設定하고 그것을 위해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進步新黨은 自身의 正體性조차 제대로 設定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分明한 志向이 있으며 그것 때문에 混亂을 겪지 않습니다. 또한 그들의 全國的 活動網이 부러웠습니다. 日曜日에도 거기서 잠을 請하게 됐는데 城南 活動家의 一部는 성남시議會 抗議 籠城場에 結合하고 있었고, 다른 一部는 멀리 全南 順天(國會 本會議場 催淚彈 投擲으로 有名한 金善東 議員이 4·27 再·補闕選擧 때 當選했다)으로 選擧 支援을 갔다가 밤늦게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自己의 事業 領域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全國을 包括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進步新黨은 絶對로 京畿東部를 이길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되었습니다.”

    ‘中央日報’가 報道한 ‘野圈連帶 關聯 現況’이란 題目의 文件은 統合進步黨의 現 構圖를 잘 說明하고 있다. 文件은 統合進步黨 政派를 ▶汎京畿東部聯合(黨權派와 京畿東部聯合+光州全南聯合黨權波) ▶仁川聯合(全國農民會 包含) ▶汎蔚山聯合 ▶左派(沈想奵+盧會燦, 500名 內外 不過) ▶參與黨(陳誠黨員 數는 最大이나 地域單位로 美編制)으로 分類했다. ‘統合進步黨 內部現況’이란 대목에선 ‘柳時敏 共同代表의 黨務拒否 時 非公式 첫 番째 條件이 (京畿東部聯合) 장원섭 事務總長 辭退, 이에 張 總長은 總長職은 維持하되 光州 光山甲에 早期 落鄕하는 것으로 整理됨’ ‘(野圈連帶 協商代表이자 京畿東部聯合 所屬 이의엽 政策위議長이) 協商 內容을 自派 以外에는 全혀 共有하지 않아 他 政派들의 不滿이 增幅되고 있는 狀況’이라고 적었다. 沈想奵·노회찬 當選者는 지난해 末 進步新黨을 脫黨해 통합진보당에 參與했다.

    김일성주의 신봉한 하영옥 그룹이 경기동부 핵심
    統合進步黨 內部現況

    李正姬 代表가 물러난 서울 관악乙에서는 李相奎 前 민주노동당 서울市黨 委員長이 當選했다. 陳重權 敎授는 “李正姬가 얼굴이라면, 이상규는 몸통’이라고 했다. 이 當選者는 全國聯合 傘下 京畿東部聯合이나 민혁당 京畿南部委員會와 無關하다. 京畿 東部地域에서 地域運動을 한 적도 없다. 그는 한 라디오放送에 出演해 이렇게 말했다.

    “京畿東部聯合이라는 組織은 없다. 그 이야기가 뭐 아주 옛날 90年代에 全國聯合이라고 하는 全國的인 連帶團體가 있었는데, 그中 一介 地域組織, 그것을 가지고 繼續 부풀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든다.”

    그의 說明 自體는 거짓말은 아니다.

    李正姬 代表의 男便인 심재환 辯護士는 言論 인터뷰에서 “京畿東部聯合은 現在 存在하지 않는 連帶體이며 10餘 年 前에 解散된, 90年代에 活動하던 민주在野團體다. 只今은 存在하지도 않는 幽靈團體를 만들어 色깔論을 提起하는 것은 이미 言論이길 抛棄한 것이다. 過去에 있었던 組織인 것은 맞는 것으로 알고 있다. 1991年頃으로 알고 있다. 그때 全國聯合이라는 進步的 運動團體가 結成됐고, 그 下部組織으로 地域組織이 몇 군데 있었는데 그 地域組織의 하나로 結成돼 活動한 것으로 알고 있다. 全國聯合은 2001年頃에 6·15 共同宣言 以後 情勢가 바뀌면서 統一連帶, 民衆連帶라는 進步的 運動團體가 새로 생기면서 事實上 活動을 中斷한 것으로 안다. 그렇게 이름만 維持하다가 2007年에 公式的으로 解散했다”고 말했다.

    審 辯護士의 說明 亦是 事實에 어긋나지 않는다. 다만 眞實을 담고 있지는 않다. 이 說明은 빌 클린턴의 그것을 닮았다. 白堊館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섹스 스캔들이 불거졌을 때 클린턴은 “나는 그女와 性關係를 갖지 않았다”고 말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클린턴은 口腔性交를 했다.

    京畿東部는 保守 日刊紙가 報道한 것처럼 全國聯合 傘下 京畿東部聯合과 오롯이 連結되지 않을뿐더러 競技 東南部 地域을 基盤으로 한 이가 많지만 特定 地域에서만 活動하는 組織도 아니다. 앞서 言及했듯 再建 민혁당 出身 人士들과 외대 龍仁캠퍼스 一帶의 學生運動, 城南·龍仁 地域의 活動家, 마지막 남은 從北派가 全國的으로 네트워크를 形成한 것이다.

    李石基 當選者는 進步勢力이나 統合進步黨 內部에서 別로 알려지지 않았는데도 比例代表 一般名簿 投票 1位를 했다. 投票 前부터 그가 1位를 할 것이라는 所聞이 나돌았다.

    統合進步黨 當選者의 相當數가 京畿東部 네트워크에 屬했거나 自主派와 가까운 人士다. 윤원석 前 代表를 代身해 出馬해 國會에 進入한 城南市 市議員 出身의 金美希 當選者(城南 中院), 李正姬 代表의 地域區를 물려받아 當選한 李相奎 當選者도 이 네트워크에 連結된다.

    靑年 몫 比例代表로 國會에 進入한 統合進步黨 金在姸 當選者는 海軍을 海賊으로 指稱해 物議를 일으킨 김지윤 氏를 黨內 選擧에서 豫想과 다르게 壓倒的 票差로 제쳤다. 京畿東部가 組織力을 發揮했다는 게 定說이다. 김지윤 氏는 PD系列인 ‘다함께’ 所屬이다. 다함께는 PD면서도 NL쪽과의 親分도 두터운 모습을 보이는데, 沈想奵 盧會燦 當選者보다는 1980~90年代의 PD와 닮은 組織이다. 反面 金在姸 當選者는 京畿東部 네트워크의 赤字(嫡子)로 불린다. 그는 외대 總學生會長을 지냈다. 龍仁캠퍼스, 서울캠퍼스를 網羅한 外大 出身이 京畿東部 核心部의 主流를 이룬다. ‘民衆의 소리’ 女記者 性醜行 前歷으로 辭退한 윤원석 前 代表, 李石基 當選者, 이용대 前 민노당 政策위議長이 外大 出身이다. 우위영 통합진보당 代辯人도 외대를 나왔다.

    김일성주의 신봉한 하영옥 그룹이 경기동부 핵심

    野圈連帶는 이념적 스펙트럼이 새누리黨보다 다채롭다. 한명숙 前 民主統合黨 代表가 4月 1日 競技 고양시에서 李正姬·유시민 統合進步黨 共同代表와 함께 支援遊說를 하고 있다.

    保守陣營 一角에선 主思派가 민주당을 包含한 野圈을 掌握하려고 한다고 憂慮한다. 조갑제 前 月刊朝鮮 代表를 비롯한 極右에 가까운 人事가 이런 見解를 表明한다. 誇張한 것으로 보인다. 主思派가 統合進步黨에서 影響力을 行使하고 있으나 沈想奵, 盧會燦 같은 人士가 버티고 서 있는데다 리버럴한 國民參與當 勢力의 힘도 만만찮다. 李正姬 代表는 京畿東部의 支援으로 민노당 代表에 올랐으나 하영옥, 李石基 같은 민혁당 出身 人物과는 결이 다르다. 그들보다 오른쪽에 位置해 있다. 다만 이 代表의 男便인 심재환 辯護士는 夫人보다는 急進的인 것으로 評價받는다. 또한 京畿東部가 首領論을 버린 지 오래고, 人間中心 思想을 비롯한 主體哲學의 一部만 固守한다는 評價가 進步陣營 內部에서 相對的으로 더 優勢하다. 西歐 政黨 歷史에서 急進 勢力이 制度圈으로 編入한 뒤 右傾化한 것도 京畿東部의 未來를 豫測하는 데 示唆하는 바가 크다.

    김일성主義者

    NL系列 出身인 河泰慶 國會議員 當選者(釜山 海雲臺기장乙)는 總選이 끝난 後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李石基 當選者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李石基가 民主化運動을 했다고 하는데 나는 그와 함께 民族解放民衆民主革命(NLPDR)에 나선 오래前 동지다. 有權者를 속일 수는 있어도 나를 속일 수는 없다. 李石基는 只今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釋名(釋明)해야 한다.”

    마음속 良心이 품은 생각을 밝히라고 要求하는 것은 暴力的이다. 파쇼的인 側面도 있다. 하지만 이 當選者는 公人이다. 國會議員이면서 立法機關이다. 自身의 志向과 政策을 밝히는 게 마땅하다. 公職에 進出한 김일성主義者이던 사람에게 金日成을 只今도 追從하느냐고 묻는 것은 色깔論이 아니다. 野圈의 一角을 形成한 마지막 酒邪派는 大選 局面에서 論難이 될 수밖에 없다. 그들이 아직도 김일성主義를 固守한다면 制度圈 政治를 떠나는 게 옳다. 京畿東部는 自身들의 志向, 價値를 12月에 열리는 大選 前에 釋明해야 한다. 그게 野圈連帶에도 도움이 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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