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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話題集中 總理候補’ 정운찬의 祕密 스토리|新東亞

‘話題集中 總理候補’ 정운찬의 祕密 스토리

“두산그룹 오너家 도움으로 直線 서울대 總長 됐다”

  • 허만섭│同一步 新東亞 記者 mshue@donga.com│

    入力 2009-10-09 11: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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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용현 會長에 ‘醫大 敎授 票’ 付託
    • 백성학 會長 側 “정운찬에 用돈 줬다”
    • 數十 年間 大選 때 DJ만 찍어
    • 盧政權, 정운찬의 방배동 카페 뒷調査
    ‘화제집중 총리후보’ 정운찬의 비밀 스토리
    정운찬(63) 前 서울대 總長은 9月3日 李明博 大統領에 依해 國務總理 候補者로 拔擢됐다. 靑瓦臺 關係者는 “어렵게 모셨다”고 했다. 丁 總理 候補者의 登場은 與野 政治權 內部에서 커다란 波長을 낳고 있다. 世間의 視線은 그에게 集中됐다.

    丁 總理 候補者는 忠南 公州 出身으로 경기고, 서울대 經濟學科, 美國 프린스턴대 大學院 經濟學 博士를 마쳤다. 2002年 7月부터 2006年 7月까지 ‘總理級’으로 評價되기도 하는 ‘서울대 總長’을 歷任했다.

    最高의 뉴스메이커

    그는 △大選 때마다 캐스팅 보트 役割을 해온 忠淸 出身이라는 點 △經濟·敎育 專門家라는 點 △가난을 克服한 立志傳的 人生 스토리 △전두환 政權에 맞서 서울大 敎授들의 大統領直選制 改憲 署名을 主導한 改革性 △比較的 젊고 俊秀한 容貌 等이 더해져 政治權의 ‘러브콜’을 받아왔다. 2007年 17代 大統領選擧 때 그는 한나라당 候補에 맞서는 對抗馬로 大選 出馬 直前까지 갔다 4月30日 記者會見을 열고 抛棄한 적이 있다.

    ‘이명박 大統領-정운찬 國務總理’ 構圖는 政局에 다섯 가지 重要 爭點을 던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中道性向 總理 任命으로 이명박 政權의 ‘中道實用-親庶民’ 基調에 對한 支持가 上昇할지 與否다.

    ‘화제집중 총리후보’ 정운찬의 비밀 스토리

    9月3日 서울대 講義室에서 정운찬 總理 候補者가 마지막 經濟學 授業을 하고 있다.

    둘째, 忠淸 出身 總理에 따른 忠淸地域의 支持 與否다. 이와 關聯해 鄭 候補者는 總理 認准 發表 當日 忠淸地域 最大 懸案인 世宗市 事業과 關聯해 “效率的인 플랜은 아니다. 原案이 아니라 修正案을 마련할 것”이라고 해 野黨의 强한 反撥을 샀다.

    셋째, 鄭 候補者가 與圈의 競爭力 있는 次期 大選走者로 자리매김할지 與否다. 現在 與圈 主流인 親李(親李)界는 鄭 候補者가 朴槿惠 前 代表의 對抗馬가 될 材木인지 눈여겨보고 있다.

    넷째, 이명박 政權과 鄭 候補者가 서로 윈-윈 하는 化學的 結合을 이뤄낼지 與否다. 鄭 候補者가 ‘儀典 總理’에 머물면 그의 政治的 未來는 不透明해진다. 그러나 大統領과 對立角을 안 세워도 問題, 세워도 問題가 되는 딜레마에 빠질 수도 있다. 國政의 거의 모든 權限이 大統領에게 集中되어 있는 現 시스템에서 單騎匹馬로 들어와 國民的 支持를 받는 總理賞(像)을 具現해낸다는 건 決코 쉽지 않은 일이다.

    다섯째, 이런 理由로 鄭 候補者는 特定 政策에서 特化된 總理 役割을 찾으려 할 可能性이 있다. 그가 自身의 持論인 ‘敎育 改革’이나 ‘世宗市 修正’에 銃대를 메고 올인할 境遇 정운찬發(發) 드라이브는 政治權과 社會의 中心 이슈로 떠오를 수도 있다.

    分明한 事實은 적어도 當分間 鄭 候補者는 모든 오피니언 리더의 注目을 받는 우리 社會의 가장 重要한 뉴스메이커 中 한 名이 될 것이라는 點이다. 權限 行事에 現實的 制約이 따르기는 하지만 國務總理는 大統領의 命을 받아 行政 各部를 統轄하는 매우 重要한 公職이다. 그러나 話題의 中心에 서 있는 ‘정운찬’에 對한 情報는 空中(公衆)의 궁금症을 충족시켜주기에는 不足해 보인다. 量的으로 貧弱하고 內容에서도 表皮的 現象만 主로 다뤄졌다.

    例를 들어 ‘가슴으로 생각하라’라는 그의 自敍傳 外에 本人의 育成(인터뷰 等)은 적은 便이고 그의 삶을 紹介하는 大多數 報道도 비슷한 에피소드의 反復이거나 정운찬 個人을 피알(PR)해주는 性格이었다.

    巨物로 만들어준 ‘異變’

    ‘신동아’는 鄭 候補者의 知人 等 여러 經路를 통해 ‘鄭 候補者의 알려지지 않은 人生스토리’의 一端을 比較的 ‘두껍게’ 取材할 수 있었다. 私生活로 비칠 수 있는 部分이 一部 包含되었는데 이 點은 不可避한 側面이 있었다. 國家 2人者인 總理가 되면 個人의 些少한 性向이나 言行, 習性이라도 個人 次元에 그치지 않고 社會統合 等 다양한 公的 領域에 影響을 줄 수 있다.

    먼저 鄭 候補者가 서울대 總長이 되기까지의 스토리를 알아봤다. 事實 鄭 候補者를 只今의 ‘萬人之上 일인지하’의 巨物級으로 만들어준 것은 ‘서울대 總長 歷任’ 經歷이다. ‘서울대 總長을 지낸 정운찬’과 ‘서울大 敎授 정운찬’의 差異는 크다. 서울대 總長이 된 것은 그의 人生을 바꾸어놓았다고 해도 別 無理가 없다. 社會的 著名性을 안겨주었고 ‘政治人 정운찬’의 商品價値를 크게 끌어올렸다.

    정운찬 서울대 社會科學大學 經濟學科 敎授는 2002年 2月 社會科學大學 學長이 됐다. 5月8日 社外理事 兼職 等으로 論難을 빚은 이기준 當時 서울대 總長은 任期를 다 채우지 못하고 退任했다. 1991年부터 專任講師 以上 敎授들에 依한 總長直選制를 施行해오던 서울大는 새로운 總長 選出에 들어갔다. 比較的 젊은 56歲의 정운찬 敎授는 學長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總長選擧에 出馬했다.

    서울대 總長 選出은 5月28日 單科大別 敎授들로 構成된 候補選定委員會에서 總長候補 8名 選定, 6月3日 候補選定委員會에서 總長候補 5名 選定, 6月20日 全體敎授投票에서 多得票 巡으로 最終候補 2名 選定, 敎育部에 候補者 2名 報告, 國務會議에서 總長 選出 巡으로 進行됐다.

    정운찬 敎授는 8名 候補群, 5名 候補群에 잇따라 選定된 뒤 敎授 1210名이 參與한 全體敎授投票(投票率 87%)에서 667票를 얻어 1位를 차지했다. 송상현(61) 法大 敎授(前職 學長)는 574票를 얻어 2位에 올랐다. 한 候補 側에서 選擧運動에 不公正 行爲가 있었다며 異議를 提起해 開票가 2時間 미뤄졌으나 李 候補 側이 結果 承服 意思를 밝힘에 따라 開票가 이뤄지는 騷動이 있었다.(‘국민일보’ 2002年 6月21日 報道) 김대중 當時 大統領은 7月16日 國務會議에서 最多得票者인 정운찬 敎授를 서울대 總長에 임명했다.

    當時 정운찬 敎授가 選擧에서 1位를 한 것은 ‘異變’으로 받아들여졌다. “5名의 候補 가운데 最年少이며 改革的 性向을 지닌 것으로 評價받는 鄭 敎授가 豫想을 깨고 最多得票…”(‘한겨레’ 2002年 6月21日 報道). “누구도 豫想하지 못한 結果였다”(‘신동아’ 2007年 6月號). 鄭 敎授는 學校 行政經驗 不足이 選擧過程에서 弱點으로 指摘됐었다(‘경향신문’ 2002年 6月21日 報道). 候補들의 所見 發表에서도 差異點이 特別히 눈에 띄지 않았다(‘국민일보’ 2002年 6月19日).

    鄭 候補者가 이렇게 서울대 總長이 된 것과 關聯해 鄭 候補者와 斗山그룹 오너一家 間의 특별한 因緣說이 나왔다. 政治權과도 交分이 깊은 財界 人士 A氏는 “정운찬 敎授가 直線 서울대 總長이 된 裏面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斗山그룹 오너 一家 쪽에서 정운찬 敎授가 選擧에서 勝利하는 데 도움을 준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이어 A氏는 “정운찬 總理 候補者와 가까운 사이인 김종인 前 議員, 백성학 영안모자 會長이 鄭 候補者와 두산 오너 側의 架橋 役割을 했다”고 했다.

    ‘화제집중 총리후보’ 정운찬의 비밀 스토리

    서울대 總長 時節의 정운찬 總理 候補者.

    “보이진 않는 손 있었다”

    서울 鍾路區 김종인 前 議員 事務室에서 金 前 議員을 만나 事實인지 確認했다. 金 前 議員은 인터뷰 過程에서 “박용현 두산 代表理事 會長이 정운찬 敎授가 서울대 總長 選擧에서 1位를 하는 데 도움을 준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金 前 議員은 1980年代부터 現在에 이르기까지 20餘 年 동안 鄭 總理 候補者와 交分을 쌓아왔다. 總長 選出 問題에 앞서 鄭 候補者와 金 前 議員이 만나게 되는 過程에서부터 인터뷰를 始作했다. 鄭 候補者의 한 知人에 따르면 鄭 候補者와 金 前 議員이 처음 만난 時點은 1986年이다. 이해 4月 鄭 候補者는 2名의 敎授와 함께 ‘大統領直選制 改憲’ 署名運動을 主導했다. 그러자 전두환 大統領은 정운찬 等 이들 敎授 3名을 解雇하라고 指示했다. 김종인 當時 민정당 議員이 이를 막아주면서 두 사람이 因緣을 맺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음은 金 前 議員과의 一問一答이다.

    -정운찬 敎授가 主動한 署名運動에 當時 與圈 反應은 어땠나요?

    “엄청 興奮했죠. 다른 사람도 아닌 서울對 敎授들이 그런 거니까. 그때 雰圍氣로는 내가 막지 않았으면 바로 解雇했을 거예요. 내가 보기에 그건 甚한 일이었지만.”

    -누구에게 어떻게 얘기했습니까?

    “노태우 代表를 찾아갔죠. ‘서울大 敎授를 迫害하는 印象을 주어서는 政權에 아무 도움이 안 된다. 解雇해선 안 된다’고 强力하게 얘기했어요. 盧 代表가 理解를 하더라고요. 盧 代表가 손을 쓴 것으로 압니다.”

    -前에 鄭 敎授를 본 적 있었나요?

    “全혀 모르는 사이였죠. 그런데 鄭 敎授가 政權으로부터 相當한 壓力을 받아 不安해 하고 있을 것으로 斟酌됐어요. 내가 만나서 안심시켜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生面不知의 與黨 議員이 부르면 안 나올 것 같아서 鄭 敎授의 스승인 調馴 敎授에게 ‘함께 데리고 나오라’고 했죠.”

    -그렇게 만나게 되어 只今까지 親分을 이어온 거군요.

    “처음 만나서 얼마쯤 時間이 지나 調馴 敎授는 먼저 보냈어요. 그리고 둘이서 술을 잔뜩 마셨지. ‘앞으로도 勇氣 있게 살라’고 鄭 敎授에게 얘기한 記憶이 납니다.”

    奬忠壇 演說 DJ에 反해

    이날 만남 以後 두 사람은 자주 보는 사이가 됐다. 鄭 候補者는 金 前 議員에게 便하게 속마음을 털어놓거나 重要한 決定을 내릴 때 相議해왔다. 金 前 議員에 따르면 鄭 候補者는 “나는 1971年 大選 遊說 때 DJ(高 金大中 前 大統領)에게 반했다. 26年間 1971年, 1987年, 1992年, 1997年 네 番의 直選制 大選이 있었는데 DJ만 찍었다”고 말했다.

    1971年 大選에서 朴正熙 공화당 候補와 김대중 신민당 候補가 激突했다. 김대중 候補는 投票日 9日 前 100萬 人波가 모인 서울 奬忠壇公園 遊說에서 “이番에 政權 交替를 이루지 못하면 총통制가 實施될 것”이라며 熱辯을 吐했다. 鄭 候補者는 DJ 演說에 크게 感動받았다고 한다. 1972年 10月 維新體制가 들어섰고 以後 1980年代에도 軍事政權이 繼續됐다. 鄭 候補者가 서슬 퍼런 全斗煥 政權下에서 大統領直選制 改憲 署名運動을 벌인 건 1971年 奬忠壇公園 遊說의 로망이 影響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金 前 議員은 “鄭 候補者는 常識에 맞게 살아왔다. 그가 DJ만 찍었다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인터뷰가 어느 程度 무르익어갈 무렵 金 前 議員에게 서울대 總長 選擧 얘기를 꺼냈다.

    “金鍾仁→백성학→박용현”

    ▼ 2002年 정운찬 敎授가 直線 서울대 總長에 選出된 것과 關聯해 議員님이 擧名되고 있는데….

    “그걸 어디서 들었습니까?”

    ▼ 백성학 會長과 斗山그룹 오너 쪽 얘기도 나오고…. 어떻게 된 일인지 說明해주실 수 있습니까.

    “정운찬 敎授는 처음에는 總長選擧에 確信이 別로 없었던 것 같았어요. 選擧 두어 달을 앞두고 내가 鄭 敎授에게 먼저 强要했어요. ‘總長 選擧에 나가라’고. ‘無條件 나가라. 틀림없이 된다’고 했죠.”

    ▼ 정운찬 敎授는 最年少로 서울대 總長選擧에 나가게 됐는데요. 그 다음 對策이 있었나요.

    “出馬했으니 어떻게든 1位를 해야 하잖아요. 斗山그룹 오너가(家)의 박용현 現 두산 會長은 1998年 서울大病院腸이 되어 2002年 서울대 總長選擧 때에도 病院長 자리에 그대로 있었거든요. 總長은 敎授들의 直選投票로 選出되는데 서울大病院 敎授 數字가 많았어요. 그래서 내가 斗山그룹 오너 쪽과 因緣이 깊은 백성학 영안모자 會長에게 要請했어요. 박용현 病院長에게 얘기해서 ‘醫科大 敎授 票가 鄭 敎授에게 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요.”

    ▼ 議員님께선 百 會長과 잘 아는 사이였나요?

    “1980年代부터 親分이 있었죠. 나, 百 會長, 鄭 敎授가 서로 잘 알고 親하게 지내는 사이였습니다.”

    ▼ 百 會長이 박용현 當時 病院長에게 付託을 傳했을까요?

    “傳했습니다.”

    ▼ 朴 病院長이 實際로 鄭 敎授를 도왔을까요? 그래서 效果가 있었을까요?

    “그랬다고 봅니다. 처음에는 總長이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異變이 나서 1位를 했잖아요.”

    지난 4月30日 서울 그랜드하얏트호텔에선 ‘영안모자 백성학 會長 創業 50周年 祝賀宴’이 열렸다. 政治界, 財界 有力人士들이 이 行事에 參席했다. 參席者 B氏에 따르면 白 會長이 앉은 헤드테이블에 鄭 候補者, 김종인 前 議員, 박용성 斗山重工業 會長이 앉아 있었다고 한다. 이들 間의 親分關係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百 會長이 마이크를 잡고 參席者들에게 人事말을 하면서 옆에 앉아 있는 鄭 候補者를 擧名하며 “내가 앞장서서 정운찬 敎授가 서울대 總長이 되도록 뛰었다”고 했다.

    ‘화제집중 총리후보’ 정운찬의 비밀 스토리

    2008年 8月30日 프로野球 競技가 벌어진 잠실야구장에서 정운찬 總理 候補者가 交通放送 ‘1日 解說家’로 나와 캐스터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丁 總理 候補者는 두산 베어스의 팬으로 알려져 있다.

    金 前 議員의 證言과 百 會長의 이 같은 發言은 脈이 相通한다. 百 會長의 發言 亦是 自身의 積極的인 要請으로 斗山그룹 오너 出身인 서울大病院腸이 정운찬 敎授의 總長選擧에 도움을 줬다는 意味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財閥家 서울大病院腸이 百 會長의 要請을 받아 實際로 움직였을까’라는 疑問이 如前히 들었다. 이에 對해 百 會長과 가까운 財界 人士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自手成家한 百 會長이 帽子를 처음 輸出하려 할 때 保證金을 救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 百 會長을 눈여겨보던 두산그룹 創業主인 故 朴斗秉 會長이 선뜻 保證金을 내주었다. 以後 百 會長의 영안모자는 世界 最大 帽子 會社로 成長했고 白 會長은 各界에 폭넓은 人脈을 갖게 됐다. 斗山家(家)에 身世를 진 百 會長은 1998年 박용현 會長이 서울大病院腸이 될 때 自己 일처럼 나서서 도움을 준 것으로 들었다. 이 때문에 朴 會長이 百 會長의 정운찬 選擧 關聯 付託을 듣고 가만히 있지는 않은 것으로 안다.”

    2002年 서울대 總長選擧에서 1位인 정운찬 敎授(667票)와 2位 敎授(574票)와의 票 差異는 93票였다. 서울대병원 關係者는 “2002年 當時 서울대 總長 選擧에 投票權이 있던 서울大病院 敎授는 300餘 名으로 推算된다”고 말했다.

    정운찬 敎授의 選擧 勝利에는 旣存에 알려진 대로 ‘少壯派 改革’ 要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金 前 議員 等 當事者의 證言에 依하면 그 實體를 잘 드러내지는 않지만 分明히 現存하는 ‘우리 社會 最高 파워그룹 人脈 效果’가 作用했을 可能性도 있어 보인다. 그것이 不法이나 非倫理라는 意味는 아니지만 말이다.

    百 會長과 가까운 財界人士는 “百 會長 側은 정운찬 敎授에게 가끔 用돈을 提供한 것으로 안다. 서울大 敎授에게 어떤 代價를 바랄 것은 全혀 없었고 數十 年 前부터 알아온 鄭 敎授를 아끼고 도우려는 마음으로 들었다”고 했다. 이 人士에 따르면 鄭 候補者 側은 最近 百 會長 側에 “過去 일에 對해 있는 그대로만 (言論 等에) 말해달라”는 메시지를 傳해왔다고 한다.

    知人들의 證言에 따르면 鄭 候補者는 다양한, 或은 複合的인 面貌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面貌를 事實에 가깝게 把握하기 위해서는 술자리 逸話를 따라가지 않을 수 없다. 2007年 初 김종인 前 議員 等 側近 그룹은 정운찬 敎授에게 大選 出馬를 剛하게 勸誘하고 있었다. 鄭 候補者의 한 知人에 따르면 日曜日 敎授 硏究室에 出勤해 授業準備를 하는 정운찬 敎授를 知人들이 술자리로 불러냈다. 鄭 敎授는 爆彈酒가 돌아 雰圍氣가 무르익자 “大統領 한 番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일에 對해 묻자 김종인 前 議員은 “누구나 大統領 하고 싶어 하는 거 아니냐. 다르게 생각할 것 없다”고 말했다. 다음은 金 前 議員과의 一問一答이다.

    ▼ 鄭 候補者는 서울 서초구 방배동 카페에서 자주 술자리를 한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맞나요?

    “그런 것 같아요. 나도 같이 마시고 했어요.”

    ▼ 方背洞이고, 카페이고요.

    “그렇죠.”

    ▼ 失禮되지만 洋酒도 나오고 女性 從業員들이 同席하는 덴가요?

    “從業員들은 注文받아서 술이나 飮食을 갖다주기만 하지 앉지는 않아요. 저녁에 술 한盞 하며 스트레스도 푸는 게 問題될 일 없어요. 萬若 누군가가 總理 候補者가 다니는 술집으로 總理를 檢證하겠다고 한다면 그건 쓸데없는 일이에요.”

    “스무고개 게임 하시기도”

    2007年 初 정운찬 敎授의 大選 出馬 與否가 政治權에서 큰 關心事案으로 浮刻되던 때였다. 한 中央言論社 C記者의 證言에 따르면 平素 잘 알고 지내던 國家 情報機關 關係者가 異常한 提議를 해왔다. “정운찬 敎授가 方背洞 M카페에 자주 다닌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함께 가볼 意向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C記者는 提議에 應했다.

    M카페에서 C記者와 國家 情報機關 關係者는 洋酒 等을 시켜놓고 從業員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봤다고 한다. 從業員들은 정운찬 敎授를 잘 알고 있었다. 한 從業員은 “자주 오실 때도 있다. 점잖으시고 疏脫하시다. 스무고개 게임을 하시기도 했다”고 記者와 情報機關 關係者 一行에게 말했다.

    C記者는 當時 이 取材內容을 “大選 出馬說이 돌고 있는 정운찬 敎授는 몇 가지 술자리 逸話가 있다”라는 記事의 한 줄 文章으로 簡單히 處理했다. C記者는 “노무현 政權의 國家 情報機關이 有力 大選走者로 浮上할 可能性이 있던 정운찬 敎授의 술자리를 뒷調査해 본 것 같다”고 말했다.

    “爆彈酒 7盞에 70億”

    鄭 候補者의 自敍傳 ‘가슴으로 생각하라’에는 方背洞 단골 카페 이야기가 나온다. 民主化 改革運動과 방배동 카페는 잘 連結이 되지는 않지만 1980年代부터 그 곳에서 서울大 敎授들의 大統領直選制 改憲 署名運動을 論議한 것으로 그려져 있다. 이런 點이 정운찬의 캐릭터를 構成한다.

    “방배동 카페는 그 後 자주 찾는 곳이 되었다. 그로부터 6年 뒤, 두 先輩 敎授와 改憲署名을 論議하던 곳도 그 집 附近이었다.…그런데 나중에 보니, 술이라는 것도 接할수록 차츰 익숙해졌다. 只今은 나도 어느새 雰圍氣는 웬만큼 맞출 수 있는 水準이 되었다. 特히 學校의 經營을 맡은 뒤에는 싫든 좋든 한두 盞씩 술을 마셔야 할 자리가 잦아지면서 酒量이 몰라보게 늘었다. 언젠가 ‘하루 저녁에 爆彈酒 일곱 盞을 마시고 70億원을 募金했으니 鄭 總長의 爆彈酒 한盞은 10億원’이라고 言論에 報道된 적도 있었다.…술도 飮食이므로 아직 끊을 생각은 없다. 다만, 두꺼비 파리 잡아먹듯이 주는 盞을 덥석 받아 입에 그대로 털어 넣지 않고 量도 조금 줄일 作定이다. 술을 많이 마시지 않을 때는 電話番號를 참 많이 暗記했는데 요즘은 그 數字가 턱없이 줄어 手帖이 必要하게 되었다.”

    鄭 候補者는 社會를 떠들썩하게 했던 ‘서울대 于 助敎’ 性戱弄 事件과 關聯해 한 番 더 解明해야 할지 모른다. 總理의 ‘女性觀(觀)’은 매우 重要한 檢證對象이기 때문이다. 鄭 候補者는 서울대 總長 時節인 2002年 10月23日 韓明淑 當時 女性部 長官을 만난 자리에서 “郵 助敎는 事實 助敎가 아니고 助手로 1年間 契約된 境遇로 契約이 解止되자 怏心을 품고 한 일” “新 敎授 本人은 (性戱弄)을 안 했다고 한다” “그 事件은 誇張된 일로 申 敎授는 抑鬱하다” “터무니없는 소리인데 判決이 나버리면 그만” “事實 女性運動이 신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當時 法院에서 性戱弄 行爲가 있었음을 認定한 狀況에서 나온 發言이었다. 司法府 否定, 女性運動 貶下, 家父長的 態度 等 論難 兆朕이 보이자 그는 며칠 뒤 “女性界와 國民 여러분께…죄송한 마음을 禁할 길이 없다”고 謝過文을 냈다.

    그런데 같은 날 發行된 한 週刊誌 報道에 따르면 그는 “解明하는 것을 싫어하고 解明할 것도 없지만 祕書들이 오늘 안 하면 女性界 쪽에서 들고 일어나 오래갈 것 같다고 해 記者懇談會를 가졌다”고 發言했다. 그는 인터뷰를 통해 “相對 女性(郵 助敎)의 苦痛을 얘기할 수는 없지만 여러 가지 情況을 볼 때 申 敎授에 비해 苦痛은 別로 많이 겪지 못했다”며 從來 立場을 固守하는 發言도 했다.

    ‘화제집중 총리후보’ 정운찬의 비밀 스토리

    2007年 4月30日 서울 中區 세실레스토랑에서 정운찬 前 서울대 總長이 大選 不出馬 宣言을 하고 있다.

    ‘신정아 저녁食事’ 미스터리

    ‘신정아 스캔들’의 主人公인 신정아氏와 鄭 候補者는 말이 맞지 않는 部分이 있다. 신정아氏는 2007年 여러 次例 “2年 前 東國大 敎授 任用 무렵 정운찬 當時 서울대 總長으로부터 開館을 앞둔 서울대美術館의 初代 官長 자리 提議를 받았으나 敎授職과 美術館 學藝硏究室長의 兼任이 可能한 동국대를 擇했다. 代身 C敎授를 推薦했다”고 主張했다.

    2007年 9月9日 申氏는 “亂 동국대에서 2005年 9月1日 任命狀을 받고 (學校 敎授들이) 언짢은 얘기를 한다기에 바로 다음날로 辭表를 냈던 사람이다. 外壓이 있었으면 서울對 안 가고 東國大 갔겠느냐”라고 말했다.

    이에 對해 鄭 候補者 側은 2007年 當時 “全혀 事實과 다르다”고 反駁했다. “정운찬 總長은 서울대美術館 館長感을 物色하는 過程에서 美術系 몇몇 人士가 신氏에게도 물어보라고 해서 申氏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申氏는 某 敎授를 推薦했고 鄭 總長은 感謝의 뜻으로 申氏를 저녁食事에 한 次例 招待했을 뿐인데 申氏가 부풀리고 있다”고 했다.

    두 사람의 發言 內容을 綜合하면 鄭 候補者와 申氏가 저녁食事 자리를 包含해 두 次例 만난 건 事實이다. 다만 두 사람이 나눈 對話內容에서 말이 엇갈리는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이 만난 時點은 신정아氏의 예일大 博士 學位가 假짜라는 事實이 들통 나기 前으로 申氏가 美術界에서 名聲을 날리던 때였다. 또한 두 番의 만남 모두 정운찬 唐詩 總長이 먼저 申氏에게 만나자고 했고 저녁食事 等 面談 時間도 꽤 길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情況에 비추어 정운찬 總長이 申氏에게 館長職을 提案도 하고 申氏로부터 推薦도 받았을 蓋然性을 完全히 排除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신정아氏가 鄭 候補者와 關聯해 只今도 如前히 같은 立場을 固守한다면 두 사람 中 한 사람은 公開的으로 거짓말을 하고 있는 셈이 된다.

    鄭 候補者의 最大 競爭力은 ‘經濟·敎育 專門家 이미지’일 것이다. 이 部分을 무너뜨리기 위해 朴趾源 민주당 政策위議長은 “20年間 論文 한 篇 안 썼다”고 했다. 그러나 이 暴露는 엉터리로 判明났다. 以後 一部 言論社들의 自體 檢證取材에 依하면 丁 總理 候補者는 여러 番 論文을 重複 揭載한 것으로 나타났다.

    △2001年 ‘내가 본 韓國經濟’(韓國行政學會)↔1998年 ‘IMF와 韓國經濟’(經濟論集) : 內容 折半以上 重複揭載.

    △2000年 ‘우리나라 銀行産業의 效率性’(經濟學硏究)↔2001年 같은 題目의 英文論文(韓國經濟저널) : 英語로 飜譯해 重複揭載.

    △2002年 ‘韓國經濟 危機를 넘어서’ 英語論文(國際學術大會)↔2001年 ‘내가 본 韓國經濟’(韓國行政學會 學術大會) : 英語로 飜譯해 重複揭載.

    △2002年 ‘韓國經濟 危機’ 英語論文(리서치 인 아시아 이코노믹 스타디즈)↔2001年 ‘東아시아 經濟危機’ 英語論文(金融硏究) : 內容 大部分 重複揭載.

    獨特한 ‘聽聞會 倫理基準’

    鄭 候補者의 이러한 行爲에 對해 민주당 副代辯人은 “서울대 總長 時節 황우석 事態를 겪으면서 論文 二重揭載를 硏究不適切 行爲로 規定했던 鄭 候補者가 本人의 論文 二重揭載에 對해서는 慣行을 내세우는 것은 我田引水 格 江邊”이라고 攻擊했다.

    自己가 써놓은 論文을 다른 雜誌에 다시 揭載하는 것은 硏究 實績 부풀리기 等 不適切한 行爲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他人의 論文을 剽竊하는 것보다는 非難의 程度가 훨씬 덜하다. 鄭 候補者의 論文 二重揭載 論難이 BK21事業, 昇進 等 金錢的 利益과 連結된 徵候는 나타나지 않았다. 高麗大 韓 敎授는 이를 擁護하기도 했다. “引用 事實을 밝히지 않았다면 그 部分은 指摘받겠지만 自己 論文을 外國人들도 볼 수 있게 英語로 다른 雜誌에 揭載하는 건 오히려 ‘飜譯하느라 애썼다’고 稱讚받을 일이다.”

    民主黨 關係者는 “우리가 調査한 바로는 最近 10餘 年 동안 鄭 候補者의 論文 中 SSCI(社會科學論文引用索引)級 海外저널에 登載된 건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鄭 候補者의 ‘經濟·敎育 專門家 이미지’를 受容해주어야 할 必要는 없다는 意味다. 그러나 鄭 候補者가 一定 水準 以上의 學問的 貢獻이 없었다면 同僚 敎授에게 認定을 받지 못했을 것이고 서울대 社會科學大學 學長도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學者 정운찬’이 우리 社會에 미친 學問的 寄與度는 어느 程度인가. 여기엔 正答이 없어 보인다.

    總理를 學歷 巡으로 뽑는 건 아니다. 鄭 候補者의 學歷이나 學校經歷 程度면 歷代 總理의 平均 水準을 훨씬 上廻한다. 論文 實績까지 더해지면 錦上添花겠지만, ‘總理 정운찬’에게 더 重要한 것은 過去 論文이 아니라 現實의 國政運營에 必要한 責任 있는 言行과 리더십이다.

    丁 總理 候補者에게는 △夫人의 僞裝轉入 疑惑 △軍隊 免除 問題 △綜合所得稅 申告時 賃貸收入 顧問料 漏落 疑惑도 提起됐다. 僞裝轉入의 境遇 鄭 候補者의 夫人 崔某氏가 1988年 2月5日부터 4月1日까지 2個月餘 동안 實際 居住地인 서울 方背洞이 아닌 京畿 포천시 마명리로 住民登錄上 住所만 옮겨놓은 件이다. 포천의 땅을 買入한 記錄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鄭 候補者 側은 “큰 問題가 되지 않는 事案으로 聽聞會 때 밝히겠다”고만 했다.

    우리의 獨特한 ‘聽聞會 倫理 基準’에 따르면 ‘巨額의 不動産 差益을 본 僞裝轉入’은 相當히 무겁게, ‘子女敎育 目的의 僞裝轉入’은 相對的으로 가볍게 公職 候補者에게 道德性 責任을 묻는 傾向이다. 鄭 候補者의 件은 이 두 가지 中 어디에도 該當되지 않는 새로운 케이스(不動産 사려고 僞裝轉入했다 그만둔 境遇?)가 될 可能性도 있어 보인다. 이런 境遇에는 어느 程度의 道德性 責任을 물어야 하는지에 對해선 우리의 獨特한 聽聞會 倫理基準이 곧 答을 내려줄 것이다.

    民主黨과 戀愛 안 했다

    鄭 候補者는 總理 內政 發表가 있던 날 政治的 波長을 부를 ‘世宗市 修正’ 發言을 했다. 記者會見을 마친 後 鄭 候補者는 한 知人에게 心境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世宗市 修正 發言은 미리 意圖한 말이 아니었다. 戰略的으로 한 말도 아니다. 李 大統領과 世宗市를 놓고 議論한 적도 없다”는 얘기였다.

    聽聞會까지 念頭에 뒀다면 민주당과 自由先進黨의 毒氣(毒氣)를 最高潮로 북돋워 苦難의 旅程을 自招하는 發言은 自制했을 것이다. 안 그래도 민주당에서는 鄭 候補者를 向한 戰鬪意志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第2의 천성관(朴智元 政策委議長)” 發言에서 如實히 드러난다. 鄭 候補者는 自敍傳 ‘가슴으로 생각하라’에서 “政治權에 이름이 오르내리면서 나의 過去事들이 터무니없이 歪曲되었다”고 했다. 그는 앞으로는 이러한 包括的인 呼訴 代身 터무니없이 歪曲되었다는 自身의 具體的인 過去事들을 說得力 있게 立證해나가야 한다.

    김종인 前 議員이 ‘정운찬의 歪曲된 過去事’의 한 事例를 들었다. 金 前 議員은 “민주당은 ‘戀愛는 民主黨과 해놓고…’라고 말했는데 정운찬은 民主黨과 戀愛한 적이 없다”고 主張했다. “民主黨은 정운찬과 거의 만나지도 않았고, 그나마 盧武鉉 前 大統領 逝去 後에는 ‘정운찬의 用途는 끝났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親李系 鄭泰根 한나라당 議員은 總理候補 리스트가 나돌던 數個月 前 私席에서 “정운찬 總長은 中道進步인가요? 中道保守인가요”라고 知人에게 물었다. 知人은 “中道保守 아닌가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렇죠? 中道保守죠?”라고 했다. 이명박 政權 쪽에서도 그랬겠지만, 大選 때 DJ만 찍어온 鄭 候補者도 이명박 政權에 參與하기까지 여러 가지 맞춰봐야 할 게 많았다. 앞으로도 맞춰나가야 할 일들이 繼續 나올 것이다.

    빌헬름 레프케의 箴言

    鄭 候補者는 社會經濟學者 빌헬름 레프케의 箴言을 知人들 앞에서 자주 引用해왔다. “나라의 將來가 아무리 暗澹하더라도 세 部類의 사람, 卽 學問을 探究하는 學者, 法을 守護하는 法官, 輿論을 主導하는 言論人이 社會的 責任을 다하는 以上 希望은 있다.” 鄭 候補者는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다. 政權을 위해 일하는 部類의 사람이 될 것인가, 아니면 職分에 맞는 社會的 責任을 爲해 일하는 部類의 사람이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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