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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영욱|記者 購讀|東亞日報
변영욱

변영욱 記者

동아일보 寫眞部

購讀 17

推薦

安寧하세요. 변영욱 記者입니다.

cut@donga.com

取材分野

2024-05-11~2024-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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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저흰 괜찮죠?

    地下鐵 驛長님이 ‘絶對 올라서지 마시오’라고 붙여놓은 琉璃 가림幕 위에 참새 두 마리가 보란 듯이 올라서 있네요.―서울 中區 시청역에서 변영욱 記者 cut@donga.com}

    • 2023-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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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머그샷과 基督敎 團體 旗발 [淸溪川 옆 寫眞館]

    ▶100年 前 新聞에 실린 寫眞을 통해 오늘의 寫眞을 생각해보는 [百年寫眞]입니다.사진을 보기 前에 지난 週 우리들에게 傳해졌던 두 張의 머그샷 寫眞 이야기부터 하고자 합니다. ‘mug shot’이라는 用語는 寫眞記者들에게는 친숙한 表現입니다. 警察이나 檢察이 犯人의 얼굴을 찍어 公開한다는 意味 以前에 ‘背景이 없이 얼굴과 가슴까지 찍는 寫眞’으로 使用하고 있었던 用語입니다. 被寫體 또는 取材源의 職業이나 背景을 알 수 있는 ‘environmental portrait’과 다른 槪念의 寫眞입니다. 于先 신림동 登山路 殺人 被疑者의 上半身을 警察이 公開했습니다. 그런데 뭔가 語塞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新聞에서 一般的으로 使用하는 머그샷과 差異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寫眞 登山路 殺人 被疑者의 얼굴이라는 說明이 없었다면 그냥 個人의 ‘셀카’라고 해도 異常할 게 없는 寫眞이었습니다. 흔히 美國의 司法機關이 公開해왔던 머그샷의 背景으로 있던 줄자가 없어서였을까요?어제 25日 또 하나의 머그샷이 公開됐습니다. 2020年 美國 大選 當時 自身이 敗했던 조지아州에서의 選擧 結果를 뒤집으려는 試圖를 한 嫌疑로 起訴된 트럼프 前 美國 大統領이 現地時間 24日 애틀랜타 풀턴카운티 拘置所에서 찍은 머그샷이죠. 美國 前現職 大統領 最初로 찍은 犯人 識別龍 寫眞이라 뉴스 價値가 큰 寫眞입니다. 그런데 寫眞 왼쪽 위에 엠블럼이 하나 찍혀 있습니다. 조지아州 풀턴카운티 保安官室이 寫眞에 圖章처럼 合成해 내보낸 겁니다. 트럼프의 머그샷이 本人 또는 記者들이 찍은 寫眞과 달리 ‘司法의 領域’으로 보여지는 理由일 겁니다. ▶小說이 좀 길었습니다. 오늘 紹介해 드리는 寫眞은 1923年 8月 22日 동아일보 紙面에 실린 寫眞입니다. 正面을 바라보는 어른들과 어린이 그리고 뒷줄의 女性들 모습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團體 寫眞이라고 하기에는 緊張感이 들고 뭔가를 呼訴하는 느낌입니다. 正面을 凝視하고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旗발을 들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十字架 위에 ‘水害 救濟’라는 漢字가 써 있습니다. 무슨 事緣이 있는걸까요? 옆의 記事를 읽어보겠습니다.[동정을 求하여 - 市內의 家家戶戶를 訪問하는 水害救濟團은 昨日부터 活動](鼠銑地方의) 可憐한 水害民을 救濟하기 위하여 市內 인사동 ‘中央 엡윗 靑年會’에서는 牧師 김창준氏 等 여러 有志가 ‘구루마’를 親히 끌고 市內의 家家戶戶를 訪問하며 눈물을 잇는 이의 同情을 求한다함은 本報에 이미 報道한바 이어니와 이에 對하여 그 救濟團에서는 裁作十九日부터 市內 各號를 訪問하기로 하였으나 當局으로부터 寄附金 許可가 나오지 아니하기 때문에 訪問하지 못하고 作 二十一日 正午에야 그 許可가 나왔음으로 그날 午後 2時부터 비로소 구루마를 끌고 나섰는데 한 臺에 다섯 사람씩 나누어 류양호 심명섭 梁氏가 그 大將이 되어가지고 먼저 鍾路通으로부터 東大門을 들러 황금정을 지나 南大門通으로 向할 터이며 今日에는 西大門桶 의주통 南大門通 等地로 다닐터이라는데 이미 再昨日에 모모 維持로부터 衣服과 樣式과 現金 等 多數한 寄附金이 들어왔다하며 그 救濟團에서는 企及적市內의 家家戶戶를 訪問할 터이나 미처 찾아가지 못하는 곳에서는 ‘東亞夫人商會’나 中央엡윗 靑年會‘道 通知를 하여주면 靑年會員이 구루마를 끌고 訪問할 터이라더라. ▶100年 前 水魔가 韓半島 곳곳을 할퀴고 가자, 서울의 基督敎 靑年 團體가 救護活動에 나섰던 模樣입니다. ‘엡윗 靑年會’의 牧師를 비롯해 敎人들이 리어카를 끌며 서울 市內 商店과 家庭집을 돌며 口號物品을 募集하기 始作했다는 消息입니다. 寄附金을 걷겠다는 申告를 받은 日帝 當局이 許可를 미루다 뒤늦게 許可를 해줬고 비로소 이날 午後부터 5人 1組로 鍾路-東大門-乙支路-南大門-西大門 等을 돌기 始作했습니다. 옷과 食糧, 現金 等을 모아 水災民들에게 傳達하는 活動이었습니다. ▶엡윗(엡웟)靑年會를 인터넷에서 檢索해보니 “韓國에서 가장 먼저 設立된 改新敎 靑年團體. 1897年 第 13回 美國 監理會 韓國宣敎宴會의 決定으로 創立한 靑年團體이다. 創立以後 韓國 靑年 運動의 形成에 重要한 役割을 擔當하였다. 以後 仁川 내리敎會 靑年會를 나인데 靑年會를 始作으로, 1897年 9月 5日 상동敎會 靑年會, 平壤 남선현敎會 靑年會, 정동교회 靑年會가 各各 組織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이트)는 說明입니다. 日帝 强占期 많은 宗敎 團體들 中에서 特히 監理敎는 現實 政治 參與에 積極的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907年 高宗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萬國平和會議에 參加하기 위한 特使라 이상설 李儁 李瑋鍾 等 3人의 密使를 보냈는데 그때 密使를 보내는 具體的 計劃을 實行한 것이 監理敎 상동교회였었습니다. 엡윗 靑年會도 이런 風土 속에서 創立되고 活動을 한 것으로 理解됩니다. ▶우리 民族에게 旗발의 傳統이 있었던가요? 戰爭을 하는 境遇 我軍을 標示하는 旗발이 있었을테지만 水害라는 災難을 克服하기 위한 團體가 만들어지고 그 團體가 旗발을 들고 都市의 거리를 걸어 다니는 모습은 市民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요? 國權을 빼앗겨 太極旗를 들 수 없었던 市民들에게 水害復舊 十字架는 宗敎의 象徵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려움을 겪는 市民들 마음에 慰安을 주지 않았을까요? 權力을 行使하고 있던 日帝에게는 어땠을까 생각해봅니다. 威脅으로 느껴졌을 수도 있었겠습니다. ▶團體寫眞처럼 平凡해 보일 수 있는 寫眞이 저의 視線을 끈 것은 아마 旗발 때문이었을 겁니다. 旗발, 엠블럼, CI 이런 象徵들은 우리나라에서는 자연스러운 表現 方法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族譜는 있을지언정 家門을 象徵하는 엠블럼은 우리 文化에는 語塞하지 않나요? 權力機關이나 權力이 許可한 機關 以外의 團體가 自身들의 旗발을 만들어 貰를 確認하고 誇示했던 歷史를 別로 찾지 못하겠습니다. 司法 處理 對象에 對해 찍은 머그샷이 一般 寫眞과 形式上 差異가 없었던 것이 이런 理由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여러분은 寫眞에서 어떤 게 또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意見을 듣고 싶습니다.변영욱기자 cut@donga.com}

    • 2023-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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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름 캠프는 이런 곳에서 하는 것이 좋습니다…100년 前 基準은?[청계천 옆 寫眞館]

    ▶數十 名의 女高生들이 줄을 맞춰 山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1923年 8月 17日子 동아일보에 실린 寫眞입니다. 寫眞 오른쪽 아래에 帽子를 쓴 男性이 學生들의 行列을 統制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라 무슨 일일까 궁금해서 寫眞 說明을 읽어 봅니다. ▶‘林間 敎授’라는 單語인데 如前히 무슨 말인지 正確하게 모르겠습니다. 寫眞 옆 記事를 보니 ‘林間 學校’라는 表現이 있습니다. “하기 林間 學校에 對하여아동의 心身發達에 必要世界 各國에 盛行하는 일“ 卽, 林間 學校라는 것은 世界 各國에서 盛行하는 일인데 學生들의 몸과 마음을 발달시키는 프로그램인 模樣입니다. 저는 처음 들어본 말이라 네이버 辭典을 찾아보았더니 다음과 같은 說明입니다. “主로 夏期 放學 中에 實施한다. 自然 속에서 集團生活과 自然을 배우며, 自然을 사랑하는 態度를 기르는 것을 目的으로 한 野外活動 프로그램서비스이다. 林間學校는 自己들 스스로가 텐트를 치고 炊事를 하는 境遇와 旣存 施設을 利用하는 境遇가 있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自然에 關한 知識 習得은 勿論 共同生活로서의 行動規範?協同心 涵養 等이 그 目標가 되고 있다.[네이버 知識百科] 林間 學校 [林間學枝] (體育學大辭典, 2000. 2. 25., 이태신) 그렇다면 林間學校는 日帝時代 때 여름放學을 맞은 學生들이 寫眞 속 說明처럼 奬忠壇 公園이나 청량리의 들판, 孝昌公園, 세검정 溪谷, 漢江邊, 北漢山 等 서울의 名所에서 一種의 野外 授業을 받는 것을 의미하는 거였군요.▶동아일보 데이터베이스에서 林間學校를 찾아보니 1927年 7月 19日子에도 記事가 하나 있습니다. “京城府學務課(京城府學務課)에서는 今年下긔를 리용하야 市內孝昌園(市內孝昌園)에 林間學校(林間學校)를 設市하고 七月이十一日부터 八月六일까지 이週日 동안은 日本兒童으로서 허약한 兒童을 各學校에서 六十名式뽑아 午前 아홉時부터 午後 다섯時까지 敎授하고 八月七日부터 洞 二十一日까지 藥이주일동안은 朝鮮兒童으로서 허약한 兒童 六十名을 各 學校에서 뽑아 午前 아홉時부터 午後 다섯時까지 敎授하겟淡니다”라는 記事입니다. 허약한 學生을 日本學生과 朝鮮學生으로 各各 나눠 캠프에 入所시킨 後, 60名의 學生들이 3週間 午前 9時부터 午後 5時까지 野外 授業을 했다는 內容입니다. ▶ 위 寫眞 옆에 있는 記事를 좀 더 읽어보니, 林間學校는 中學校 以上 어린이들이 여름放學동안 나쁜 버릇이 들지 않도록 健康과 德性 訓鍊을 하는 한便, 社會奉仕와 리더십 實習도 包含하였다고 합니다. 行事에 必要한 豫算은 學校에서 全額 負擔하기 어려우니 社會와 地域 社會에서 後援해줘야 한다고 說明하고 있습니다. 獨逸, 스위스, 덴마크, 프랑스 等에서 몸이 弱한 어린이들을 위한 ‘숲 속 푸른 敎室’ 槪念이 있었는데 그게 韓半島로 輸入되면서 林間學校라는 이름으로 運營된 것으로 보입니다. “都會의 먼지와 더위를 떠나서 시원하고 깨끗한 自然에 나아가서 兒童을 데리고 노는 것이 下溪 캠프로는 理想的이다”라고 하면서 記事는 場所에 對한 助言도 하고 있습니다.0. 自然 風景이 훌륭하던지 어떤 歷史的 意味가 있던지 爲人과 관계된 땅 같은 意味가 깊은 地方을 擇하는 것이 좋겠다. 1. 附近에 山林이 있을 것 (소나무 밭이 가장 좋습니다)2 . 土地가 濕하지 않을 것3. 물이 좋고 또 많을 것4. 傳染病의 念慮가 없을 것5. 햇빛을 充分히 받을 수 있을 것6. 團體 娛樂을 할 만한 넓은 벌판이 있는 곳7. 景致 좋은 곳8. 交通 便한 곳9. 될 수 있으면 절間이나 亭子 같은 것이 있어서 遊戱 外의 授業時間에는 들어갈 수 있도록 또는 비오는 날 모일 수 있도록 되면 좋겠습니다.10. 바닷가에 가까운 곳이면 勿論 海水浴에 適當한 海岸을 擇할 것이니, 傾斜가 急하지 않은 모래밭과 물결이 甚하지 않은 곳이 海水浴에 適當합니다. 海水浴을 할 때는 勿論 主任 先生님의 嚴密한 監督을 要求합니다. ▶ 記事에는 바람직한 時間表도 言及되어 있는데 한番 보시죠. 午前 8時 ? 9時 30分 授業 (30分 에 한番씩 休息)午前 9時 30分 ? 11時 30分 野外地圖 또는 遊戱, 海水浴 等 午後 1時 ? 2時 낮잠, 休息午後 2時-4時 散步, 自由讀書, 海水浴午後 7時 ?8時 童話口演 等▶數十 名의 女學生들이 監督官의 指揮 아래 山으로 줄지어 올라가는 寫眞은 說明이 없다면 疑訝할 수밖에 없습니다. 特異해서 들여다 본 寫眞이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只今은 거의 사라진 林間學校라는 表現, 100年 前 旣成 世代들이 未來 世代를 위해 어떤 苦悶과 準備를 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寫眞에서 어떤 게 또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意見을 듣고 싶습니다.변영욱 記者 cut@donga.com}

    • 2023-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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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文化, ICT 技術 經驗하도록…기업·지자체들, 잼버리 隊員들 支援[淸溪川 옆 寫眞館]

    ‘2023 새만금 第25回 世界스카우트 잼버리’를 맞아 大韓民國을 訪問한 마케도니아 스카우트 隊員 50餘 名이 9日 午後 서울 中區 을지로 本社에 位置한 未來技術體驗館 티움(T.um)을 訪問했다. 隊員들은 티움에서 ‘未來 人類가 宇宙에서 生活하며 地球의 環境을 모니터링하고 尖端 海底都市를 構築하는 모습’을 假想 體驗했다. SKT는 尖端 技術로 社會 問題를 解決하고 便安하게 生活하는 未來의 모습을 體驗하게 하는 프로그램 外에도 서울 麻浦區 弘益大學校 隣近의 情報通信技術(ICT) 複合 文化空間 T팩토리에서 最新 OTT와 音源서비스, 게임 等을 體驗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마련해, 暴炎에 지친 잼버리 參加者들을 慰勞했다. 한便, 이날 서울을 비롯해 全國으로 흩어진 잼버리 隊員들은 地自體와 企業들이 急하지만 最善을 다해 마련한 體驗行事를 하며 뜻깊은 時間을 보냈다. 변영욱 記者 cut@donga.com}

    • 2023-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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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0年 前, 다리를 꼰 포즈로 寫眞 찍은 美國 大統領[淸溪川 옆 寫眞館]

    ▶무더위가 絶頂을 向하고 있습니다. 寫眞記者들에게 第一 힘든 季節이 아마 여름이 아닐까 싶습니다. 겨울 추위도 힘들지만, 防寒服이나 핫팩으로 極限의 추위를 避할 수 있습니다. 그나마 濕度가 높지 않아 多幸입니다만, 올 여름은 正말 매섭습니다. 지난 週에 發生한 분당 書峴驛 묻지마 칼부림 殺人 事件과 오늘과 來日 分岐點을 맞고 있는 새만금 잼버리 이슈도 寫眞記者들이 갑자기 챙겨야 할 現場이었기에 寫眞部의 業務 荷重이 엄청났습니다. 사흘 後(8日)면 가을의 始作이라는 立秋이니, 暴炎도 이제 물러갈 準備를 하지 않을까 살짝 期待를 해봅니다. 100年 前 新聞에 실린 寫眞을 한 張 골라 오늘을 생각해보는 [100年 寫眞] 코너입니다. 오늘은 ‘다리를 꼬고 앉아 寫眞 포즈를 取한 美國 大統領 夫婦’ 寫眞을 골라봤습니다. ▶ 인터넷을 檢索해보니 美國 大統領 中에 쿨리지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존 캘빈 쿨리지 주니어(英語: John Calvin Coolidge, Jr., 1872年 7月 4日 ~ 1933年 1月 5日)는 美國의 30代 大統領이었다. 1923年부터 1929年까지 大統領職을 지냈다. 그는 워런 G. 하딩 大統領 아래 副統領이 되었고, 그러고 나서 1923年 하딩이 死亡할 때 大統領으로 그의 뒤를 이었다. 그는 1924年 再選되었다.”라고 說明되어 있습니다. ▶ 제가 注目한 것은 쿨리지 大統領 夫婦가 카메라 앞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포즈를 取하고 있다는 點입니다. 100年 前 韓國 사람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았을 포즈였을 겁니다. 堂堂해 보이기도 하지만 한便으로는 無禮해 보이는… 그 前의 高宗 皇帝 等 朝鮮 末期의 王들이나 日本 統治者들의 모습에서도 다리를 꼬고 카메라나 畫家 앞에 선 사람은 없었을 겁니다. 제가 모르는 것일 수도 있으니, 或是 그 前에 이런 포즈의 韓國人 또는 韓國을 支配한 日帝 時代 權力者 寫眞이 있으면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다리를 꼬고 카메라를 凝視하는 政治人. 우리나라政治人의 모습으로는 아직 語塞한 것 같습니다. 萬若, 大統領이 20代들과 타운홀 미팅을 하면서 다리를 꼰다면 言論과 輿論은 어떻게 될까요? 게다가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國民을 凝視하고 있다는 건데, 다리를 꼬는 포즈는 우리 情緖上 ‘相對方을 낮게 본다’는 非難을 받을 수도 있을 겁니다.▶문제는 美國 等 西洋의 國家 指導者를 大統領이 만났을 때입니다. 美國 大統領이 다리를 꼬고 앉았는데 萬若 우리 大統領이 공수를 하고 있으면 자연스러워 보일까요? 2022年 바이든 美國 大統領이 日本을 訪問, 나루히토(德仁) 日王과 나란히 앉아 對話를 하면서 바이든 大統領이 다리를 꼰 채 앉아 있는 모습이 公開되었습니다. 白堊館 公式 트위터에서 公開한 寫眞에는 바이든이 다리를 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日本 NHK와 교도通信이 公開한 寫眞에는 바이든이 다리를 꼰 채 앉아 있는 모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1961年 朴正熙 大統領이 美國을 訪問해 케네니 大統領을 만났을 때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꼰 채 담배를 물었던 것은 아닐까요? 軍士쿠데타를 통해 權力을 잡은 軍人 出身인데다 戰爭의 廢墟를 再建하기 위해 美國의 援助를 付託해야 하는 狀況이었기 때문에 氣가 죽을 만한 狀況이었을 텐데 오히려 同等한 外交의 이미지를 보여주려 했을 겁니다. ▶ 이렇게 100年 前 新聞에서 確認되는 美國 大統領의 ‘倨慢한(?)’ 포즈는 以後에 韓國 政治에서도 가끔 이슈가 됩니다. 어쩌면 韓國 大統領이나 權力者들은 “다리를 꼬아도 問題, 다리를 꼬고 앉은 相對方 앞에서 다리를 안 꼬는 것도 問題”의 딜레마에 있는 거 아닐까요? 輿論의 推移를 생각하며 狀況에 맞게 對處하는 거 말고 다른 方法이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신가요?변영욱 記者 cut@donga.com}

    • 2023-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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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꽃나무

    낮은 곳에 피던 꽃들이 藝術家의 손을 거쳐 꽃나무로 變身했습니다. 높은 곳에 서니 새 世上이 보이네요.―서울 열린송현공원에서변영욱 記者 cut@donga.com}

    • 2023-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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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0年 前 龍山 西部二村洞에 大型 洪水 發生 [淸溪川 옆 寫眞館]

    ▶ 100年 前 新聞에 실린 寫眞을 통해 오늘의 寫眞을 생각해보는 [百年寫眞]입니다. 우리 俗談에 뽕나무 밭이 바다가 된다는 말이 있듯이 오늘 紹介해 드리는 寫眞이 딱 맞는 事例 같습니다. 100年 前 이番 週에 서울 용산 漢江邊에 모여 살던 사람들이 洪水 被害를 입고 待避한 모습이 新聞에 실렸습니다. 于先 1923年 7月 23字 동아일보에 실린 寫眞입니다. ▼ 只今은 아마 國民 大多數가 알고 있고 게다가 機會가 된다면 살고 싶어 하는 서울 용산구 漢江邊의 二村洞 地域이 100年 前에는 勞動者들의 臨時 宿所 程度로만 利用되었었군요. 記事에서 言及된 룡강면이라는 곳은 只今의 서울 용산과 西江大橋 近處이고, 麻布와 二村洞 一帶가 물에 잠겼다는 것으로 보아, 이 해에 내린 洪水로 漢江 近處에 있던 마을들이 큰 被害를 입었습니다. 歷史를 檢索해보면, 이 地域은 1920年代 以前과 그 以後에도 끊임없이 물亂離와 水災民이 發生한 地域입니다. 서울 市內와 가까운 漢江邊은 일자리를 보고 全國에서 모여 든 肉體 勞動者들이 低廉한 住居費를 堪當하면서 서울에서 버틸 수 있는 價性比 높은 住居地였을 겁니다. 危險해서 돈 있는 사람들은 욕심내지 않는 땅이었을 테니까요. ▼ 寫眞을 보면, 100年 前에도 水害 被害를 입은 마을 사람들은 安全한 官廳으로 避身을 할 수 있었었군요. 7月 20日부터 벌써 3日째 不龍産 出張所라는 곳에 待避해 있는데 오늘날과는 달리, 國家가 水災民들이 願할 때까지 保護하는 게 아니라 23日에는 官廳의 收容施設에서 나가야 하는 가슴 아픈 環境이었었습니다. 물이 휩쓸고 간 터전으로 돌아가, 다시 집을 일으켜야했을 사람들의 모습은 只今도 그렇지만 當時에도 記者들에게 重要한 取材 對象이었습니다. 동아일보는 二村洞 水害 罹災民 모습을 報道한 이틀 後인 25日에는 좀 더 剛한 寫眞을 報道합니다. 新聞을 만드는 사람들은 重要하게 생각하는 이슈나 人物의 寫眞의 크기를 키우는 方式으로 世上에 말을 겁니다. 世上 사람들은 모르지만, 韓江의 鐵橋 왼쪽 아래 江邊에 사람이 살고 있고, 300 家口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洪水 때면 힘든 時間을 보낸다는 걸 寫眞으로 報道했네요. ▼ 높은 사람들에게만 向하지 않는 카메라의 포커스는 100年 前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情報 檢索이 쉬워진 것은 여러분을 비롯한 人類 全體에게 이롭지만, 寫眞記者들의 일에는 큰 變化를 주었습니다. 100年 前 水災民 寫眞에서 出發한 저의 好奇心은 龍山 西部이촌동의 水害에 對한 歷史를 인터넷 檢索을 통해 찾아보게 만들었습니다. 100年 前 용산과 麻布 一帶 漢江邊 洪水 被害를 동아일보가 報道했다고 해서 이 地域이 곧바로 살기 좋은 곳으로 變하지는 않았더군요. 그 以後에도 더 큰 水害가 나기도 했고, 反復된 水害로 인해 反體制 勢力이 結集한 곳이라고 認識이 생겨 日帝가 强制 移住를 시킨 마을도 있었더군요. ▼ 이 寫眞들은 當時 權力者들의 立場에서 보면 아주 不便한 內容이고 寫眞의 크기도 너무 커서 뭔가 意圖가 있는 報道라고 느낄 만도 했을 겁니다. 뭔가를 보여준다는 건 뭔가를 알려준다는 건데 言論이 市民들에게 우리 社會의 어둡고 根本的인 問題를 알려주는 건 權力 立場에서는 不便할 수 있습니다. 비가 오면 치數가 잘 안된 地域에서 被害가 나고, 權力은 나름의 解法으로 解決해보려 하는데 言論이 끼어듭니다. 工事 現場이 不實해 人命 被害가 나면, 擔當者들은 補修工事를 해서 再發 防止 裝置가 마련되었다고 主張하며 事態를 마무리하고 싶어 하는데 言論이 또 끼어들어 第 3者들에게 그걸 알려줍니다. ▼ 곁가지 말씀을 하나 더 드리자면, 寫眞記者로 마주 치는 여러 가지 災難 現場 中에서 水害 取材 現場이 가장 慘酷하다고 個人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山불 取材 現場에서 도깨비불은 火災 鎭壓을 하고 있는 消防隊員들의 머리 위를 날아 反對便 山으로 날아갑니다. 山불 進化가 時間이 걸리는 理由이기도 합니다. 물 取材는 불 取材와 달리 現場이 廣範圍합니다. 불은 大型 山불이라도 始作과 끝 地點이 그나마 분명한 便입니다. 물은 넓은 地域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지나갑니다. 그리고 물이 지나가고 난 곳에서 꺼낸 價制度구나 農事 痕跡들은 慘酷합니다. ▼ 오늘은 100年 前 瘠薄한 環境이었던 서울 漢江邊 寫眞을 紹介해드렸습니다. 只今과 다를 바 없어보였지만, 寫眞의 脈絡을 찾아보니 平凡하지 않은, 이야기를 寫眞이 들려주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뭐가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意見을 듣고 싶습니다. 변영욱 記者 cut@donga.com}

    • 2023-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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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新舊의 調和

    暴炎 속 반가운 쉼터. 鐵製 그늘幕과 藤나무 넝쿨이 나란히 서서 사람들의 더위를 식혀 주네요.―서울 신촌에서 변영욱 記者 cut@donga.com}

    • 2023-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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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0年 前 雨傘의 모습 [淸溪川 옆 寫眞館]

    ▶ 100年 前 新聞에 실린 寫眞을 통해 오늘의 寫眞을 생각해보는 [百年寫眞]입니다. 1923年 7月 20과 22日子 동아일보에 실린 寫眞입니다. 두 張 모두 비 내리는 서울의 모습입니다. 여름 비 치곤 가느다란 비가 내리는 서울 麻布 나루터 風景입니다. 배를 타고 서울로 傳해진 物件을 실은 소달구지를 商人들이 點檢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商人들은 市內로 이 物件들을 갖고 가 市民들에게 利文을 남기고 팔겠죠?소달구지의 主人들 머리에는 대나무 材質로 된 것으로 보이는 帽子가 하나씩 얹혀 있습니다. 큰 비가 아니라면 비를 避하는데 充分한 것 같습니다. 네이버로 檢索을 해보니 이 物件은 ‘갈帽’라고 부르는데, ‘朝鮮時代에 使用한 防水用 母子. 구불구불한 삿갓 模樣으로, 뼈대 위에 기름종이를 발라 만들어졌는데, 접으면 부채처럼 되고, 펼치면 고깔帽子處럼된다’는 說明입니다. ▶ 이틀 後인 1923年 7月 22日子 寫眞입니다.바퀴가 달린 수레 위에 놓인 賣臺 위에 참외처럼 보이는 과일이 수북이 쌓여 있습니다. 다양한 材質의 雨傘을 쓴 商人과 市民들이 수레 옆에 서 있는 모습입니다. 寫眞 왼쪽 사람이 들고 있는 雨傘은 模樣으로 봐서는 ‘紙雨傘’ 같습니다. 只今이야 천으로 만든 雨傘이 主로 使用되거나 비닐 材質의 雨傘이 簡便用으로 使用되지만, 朝鮮時代에는 기름을 먹인 종이를 대나무 雨傘살에 붙여 使用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어릴 敵인 1980年代 初盤에만 해도 파란色 비닐 아래 대나무로 만든 雨傘살을 넣어 만든 1回用 雨傘을 地下鐵驛이나 버스 停留場에서 팔았던 記憶이 납니다. 只今으로 말하면 便宜店에서 파는 ‘오늘 하루만 비를 避하도록 해주는 비닐우산’ 役割이었습니다. 100年 前 寫眞에서 종이 雨傘과 千 雨傘이 함께 登場한 걸 보니 이 時代는 傳統과 신문물이 共存했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 두 張의 非 寫眞에서 빗줄기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두 場面이 모두 비오는 날 撮影된 寫眞이라고 믿습니다. 新聞에 함께 실린 寫眞說明에서 비오는 날이라고 써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寫眞 속 人物들의 帽子와 雨傘이 讀者들에게 비를 想像하게 하기 때문에 그렇게 믿는 것입니다. 勿論 요즘의 카메라와 新聞 印刷技術은 가랑비도 讀者의 눈에 보이도록 表現할 수 있습니다. ▶ 서울에 내린 비 寫眞을 보면서, 지난 週 비 寫眞에 對한 寫眞記者로서의 所懷를 잠깐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一週日 前인 지난 週 土曜日 忠淸圈과 嶺南圈에 ‘極限 豪雨’가 내렸습니다. 제가 入社했을 때와 달리 요즘은 新聞社 記者들은 土曜日이 休務日입니다. 週 7日 24時間 稼動되는 인터넷뉴스팀을 除外하고 그렇습니다. 新聞社 寫眞不渡 쉬는 날에 이番과 같은 大型 事件事故가 發生하면 平素와 달리 取材 現場으로 달려가는 게 쉽지 않습니다. 동아일보 寫眞部의 境遇는 새벽에 意思決定이 이뤄졌고 午前에 忠淸北道 槐山에 到着, 槐山댐 越流 모습부터 寫眞取材를 始作해 淸州 吳淞 地下車道 周邊 取材까지 했습니다. 勤務일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날은 自願者가 投入됩니다. 會社에선 必要한 車輛과 費用을 支援합니다. 이렇게 取材된 寫眞은 土曜日 午後와 日曜日에는 新聞 發行이 없으니 인터넷 뉴스 形式으로 讀者들에게 傳해졌습니다. 그리고 月曜日子 新聞 1面 等으로 통해 紙面에 揭載되었구요. 누군가는 해야 하는 記錄이기에 休日이지만 現場으로 가야 하는 게 寫眞記者들의 삶입니다. 보기에 따라선 안쓰러울 수도 있지만, 그런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勿論 土曜 勤務를 했던 그 寫眞記者는 平日에 代休를 썼을 겁니다. ▶‘極限 豪雨’는 寫眞記者들은 事實 여러 番 經驗하는 事件입니다. 치數가 漸漸 잘 되어 每年 水害地域이 줄어들고 있어 安心하고 있었는데 最近 몇 年 사이에 다시 ‘예전에는 經驗하지 못한’ 水害 場面들이 생겨 그걸 報道하면서 마음이 무겁습니다. 自然의 변덕스러움이 問題인지, 사람이 만들어 놓은 시스템이 아직 不足한 지 잘 檢討해서 來年과 後年에는 悲劇이 反復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오늘은 100年 前 서울에 내린 비를 記錄한 두 張의 寫眞을 紹介해 드렸습니다. 여러분은 저 寫眞에서 어떤 게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意見을 듣고 싶습니다. 변영욱 記者 cut@donga.com}

    • 2023-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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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노란 꽃 親舊

    누군가 오래 세워둔 自轉車 바퀴에 새 親舊가 찾아왔네요. 이제 마음껏 달릴 순 없겠지만 외롭진 않겠어요. ―서울 鍾路區에서변영욱 記者 cut@donga.com}

    • 2023-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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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저 예쁘죠?

    各樣各色의 액세서리들이 새 主人님을 기다리고 있네요. 답답한 陳列臺를 어서 벗어나길 바랍니다. ―仁川 富平驛 地下商街에서 변영욱 記者 cut@donga.com}

    • 2023-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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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와이에서 온 故國 訪問團을 記錄하는 方式[淸溪川 옆 寫眞館]

    ▶ 100年 前 新聞에 실린 寫眞을 통해 오늘의 寫眞을 생각해보는 [百年寫眞]입니다. 1923年 7月 15日子 동아일보에 실린 寫眞입니다. 네이버로 檢索을 해보니 仁川에는 아직 내리敎會가 있습니다. 仁川廣域市 中區 내동에 位置해 있는 監理會 所屬 敎會라고 說明이 되어 있습니다. 寫眞 속 甓돌 建物도 只今과 거의 같아 보입니다. ▶하와이로 移民을 가서 살던 僑民의 子女들이 韓國을 訪問한 模樣입니다. 하와이 학생단이라는 키워드로 檢索을 해보니 뜻밖에 ‘全北의 소리’라는 블로그에서 關聯 消息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1923年 8月 15日子 동아일보 記事 ‘하와이 학생단 群山에서도 盛況’이라는 記事입니다. 內容을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砲와(布?)학생단 一行은 豫定과 같이 지난 5日 午後 11時에 榮光으로부터 群山에 來着 하였는데…. 군산역 앞에는 미선組合 洋樂隊를 先頭로 하여 오륙백名이 熱을 作하여 盛大한 幻影이 있었다”▶ 3週가 넘는 期間 동안 全國을 돌며, 行事에 參與하는 日程을 消化했던 模樣입니다. 祖國을 잃은 슬픔에 美國으로 移民을 가, 20年 남짓 苦生을 하고 子女들과 함께 故國을 訪問해 美國의 스포츠와 音樂會, 敎育 狀況을 證言하고 보여주려고 했던 분들의 가슴은 얼마나 切切했을까요?▶제가 오늘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조금 엉뚱할 수 있지만, 故國 訪問團의 모습에서 只今도 이어지고 있는 ‘우리式 記念寫眞’에 對한 이야기입니다. 個人的인 取材 經驗談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15年 前 쯤 어떤 中堅企業의 獨居 老人 돕기 캠페인 取材를 간 적이 있습니다. 낡은 天井 壁紙를 뜯어내고 새 壁紙를 바르고, 페인트를 漆하고 집 周邊쓰레기를 淸掃하는 場面을 記錄해서 報道하는 일이었습니다. 7~8名의 會社 職員들이 現場에 參與했고, 저는 그 中에 젊은 靑年을 쫓아다니며 寫眞을 찍었습니다. 그가 무거운 짐을 이리저리 옮기는 모습을 獨居老人이 흐뭇한 表情으로 지켜보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寫眞說明에는 ‘아직 살만한 世上. 어려운 이웃을 돕는 職場人들’ 이렇게 쓸 料量이었던거죠. 그런데 한 十餘 分쯤 지나서였을까요. 現場에 妙한 雰圍氣가 감돌기 始作했습니다. 及其也 한 女職員이 저에게 “왜 다같이 奉仕하는데 한 사람만 찍으세요?”라고 弄談半眞談半 말을 건넸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職員들도 고개를 끄덕이는 게 아닌가요. 좁고 지저분한 집에서 저는 ‘그림이 될 場面’을 하나 얼른 찍고 자리를 비켜주는 게 作業하는 분들과 獨居老人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지만, 奉仕活動에 參與한 분들의 마음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結局, 저는 奉仕活動에 參與한 분들을 좁은 골목에 다 모으고, 獨居 할머니까지 가운데 位置시킨 後 記念寫眞을 찍었습니다. 죄송스럽게도 新聞에는 제가 처음에 찍었던 젊은 靑年과 할머니가 主人公으로 찍힌 ‘投 샷’寫眞이 실렸습니다. ▶ 우리는 記念寫眞을 좋아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平等하게 登場할 수 있는 寫眞이기 때문 아닐까 싶습니다. 또 한便으로는 經濟的인 方法이기도 합니다. 요즘이야 인터넷으로 뉴스를 傳達할 方法이 있으니 寫眞을 다양하게 찍어 여러 登場人物들이 露出될 수 있도록 編輯할 수 있지만, 예전에야 新聞 紙面이 唯一한 媒介體였기 때문에 한 張 또는 두 張으로 現場을 壓縮해서 表現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登場해야 할 사람이 많은 境遇 寫眞記者는 記念寫眞이라는 形式을 選擇하게 됩니다. ▶ 1920年代에 獨逸 히틀러는 寫眞을 갖고 大衆을 煽動하는데 利用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平平하고 主題가 浮刻되지 않는 밋밋한 寫眞을 主로 揭載했습니다. 主人公이 없는 寫眞. 그런데 이게 韓國式 公正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100年 前, 只今과는 比較할 수 없을 程度로 먼 곳인 하와이에서 韓半島까지 故國을 잊지 않고 訪問한 학생단 한名 한名이 所重했을 겁니다. 萬若 記念寫眞의 形式으로 寫眞을 ‘朴’地 않았다면, 參加한 學生들도 보는 사람들도 뭔가 不便하지 않았을까요?▶ 오늘은 100年 前 하와이 學生段의 記念寫眞에서 우리의 ‘보여주기 方式’에 對해 생각해봤습니다. 여러분은 저 寫眞에서 어떤 게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意見을 듣고 싶습니다. 변영욱 記者 cut@donga.com}

    • 2023-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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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0年 된 新聞社에는 몇 名의 寫眞記者가 있었을까요?[청계천 옆 寫眞館]

    ▶100年 前 新聞에 실린 寫眞을 통해 오늘을 생각해 보기 위해 동아일보 寫眞部에서 인터넷에 連載하고 있는 [百年 寫眞] 코너입니다. 오늘로 26番째 이야기입니다. 동아일보 寫眞部 記者들은 [淸溪川옆寫眞館]이라는 一種의 블로그를 運營하고 있습니다. [百年 寫眞]은 그 中 하나의 連載物입니다. 오늘은 元來 準備했던 寫眞 이야기 말고 寫眞記者 自體에 對한 이야기입니다. 앞으로 동아일보 紙面과 인터넷 블로그에서 두 名의 낯선 寫眞記者 이름이 登場할 거기 때문에 미리 說明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이걸 技士라고 올리느냐는 댓글이 豫想되긴 하지만, 100年 前의 新聞 紙面에 실리는 寫眞이라는 ‘歷史性’과 어울린다고 생각에 동아일보 寫眞部에 最近 合流한 寫眞記者의 이야기를 [百年 寫眞] 코너를 통해 傳하려 합니다. 특별한 內容은 아니니 바쁘신 분들은 다른 뉴스 포스팅으로 가셔도 좋습니다. ▶訊問을 만드는 사람을 新聞 記者라고 할 때, 新聞에 실리는 寫眞 밑에 이름이 들어간 사람을 寫眞記者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周邊에서 寫眞記者라는 職業을 갖고 있는 親舊나 知人을 만나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생각보다 많이 없으실 겁니다. 寫眞記者라는 職業 自體가 戱笑해서 그렇습니다. 2023年 現在 全國에는 約 450名 程度의 종이 新聞 所屬 寫眞記者와 비슷한 規模의 인터넷 新聞 寫眞記者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職業人으로서의 寫眞記者는 1000名이 채 안 되는 數字입니다. 동아일보에는 지난週까지 13名의 寫眞記者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番 週에 15名으로 늘었습니다. 約 두 달間의 銓衡 過程을 거쳐 두 名의 젊은 寫眞記者가 合流했기 때문입니다. 올 下半期와 來年 年末에 두 名의 停年退職이 豫定되어 있어서 이番에 經歷 公採를 했습니다. 大學에서 各各 미디어와 寫眞을 專攻했습니다.▶동아일보는 1920年에 創刊되어 올해로 103年째 紙面을 發行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歷代 寫眞記者는 몇 名이나 될까요? 예전에 동아일보 사사(社史)와 紙面을 훑어보면서 大略的인 規模를 推定해봤던 적이 있었습니다. 1920年 創刊 때 寫眞部 세팅에 役割했던 분을 1號로 봤을 때, 1996年에 入社한 제가 藥 70戶쯤 된다는 걸 알았습니다. 이番에 入社한 두 名의 젊은 寫眞記者는 東亞日報 103年 동안 寫眞記者로서는 連番으로 約 80番째 前後가 될 겁니다. 重要하지는 않은 얘기를 너무 複雜하게 드린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韓國의 포토저널리즘은 韓國의 文化 社會 政治的 環境에 맞춰 세팅되어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固有한 特性을 이어오면서도 한便으로는 時代에 變化에 따라 繼續 새로운 形式을 實驗하고 있구요. 몇 年 前부터 동아일보 寫眞部 記者들이 運營하고 있는 [淸溪川옆寫眞館]도 時代 變化에 따른 저널리즘의 變化입니다. 事實 이 블로그에 對한 計劃은 2001年인가 2002年에 세워졌습니다. 當時 美國 뉴욕타임즈가 홈페이지를 통해 “뉴욕타임즈가 자랑스러워 하는 寫眞記者들을 인터넷 讀者 여러분께 紹介합니다”라며 寫眞記者들의 블로그 始作을 宣言했습니다. 거기서 아이디어를 얻어서 準備했는데 생각보다 우리나라에서 자리 잡는 데는 15年 以上의 긴 時間이 걸렸습니다. 이番에 동아일보 寫眞部에 合流한 두 名의 젊은 捕討그래퍼들도 새로운 저널리즘을 여러분에게 提供하지 않을까 期待합니다. ▶너무 사사로운 말씀을 길게 드렸습니다. 그래도 이番 週 100年 前 紙面에서 특별한 寫眞 하나는 여러분과 共有해야겠죠? 寫眞記者들이 찍어 온 寫眞으로 全體 紙面을 채웠던 날이 있었네요. 1923年 7月 5日子 6面에 실린 庭球大會 選手들과 應援團 모습입니다. 무더운 여름 틈틈이 運動하시면서 健康 잘 챙기시길 바랍니다. 다음 週 土曜日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변영욱記者 cut@donga.com}

    • 2023-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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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0年 前 自己 땅 小作人에 寄附하고 서울서 아이스크림 파는 男性의 얼굴 [淸溪川 옆 寫眞館]

    ▶100年 前 新聞에 실린 寫眞을 통해 오늘을 생각해 보기 위해 동아일보 寫眞部에서 每週 土曜日 連載하고 있는 [百年 寫眞] 코너입니다. 이番 週 고른 寫眞은 1923年 6月 26日 字 동아일보에 실린 寫眞입니다. 帽子를 쓰고 멜빵 바지를 입은 中年의 男性과 앳띤 얼굴의 靑年 한 名이 카메라를 凝視하며 서 있습니다. 무슨 事緣이 있는 것일까요? 題目은 아이스크림입니다. 100年 前 이 땅에 처음 들어온 아이스크림에 關한 이야기일까요? 寫眞에 붙어 있는 說明을 읽어보았습니다.▶자기 힘으로 일하지 않고 남의 힘으로 만든 것을 搾取해서 사는 生活이 良心에 부끄러워 自身의 논밭을 小作人에게 주고 장사를 始作했다는 강택진氏라는 說明입니다. 寫眞 왼쪽 젊은 靑年에 對한 說明은 없어, 강택진氏의 知人인지 손님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스토리가 너무 興味로을 것 같은데 이날 新聞에는 더 以上 內容이 나오지 않습니다. ▶寫眞記者는 電話로 일할 수 없는 職業입니다. 取材記者가 인터뷰를 하고 必要한 寫眞을 찍어 달라고 할 때 찍는 寫眞도 있지만, 寫眞記者가 스케쥴을 챙겨 現場에 나가 事件과 行事를 記錄하거나 이곳저곳 돌아다니다 재미있거나 스토리가 있는 人物이나 現場을 發見하기도 합니다. 이런 境遇, 寫眞技士라고 해서 寫眞을 爲主로 하고 簡略한 說明으로 마무리하는 境遇가 많습니다. 이 寫眞도 分類하자면 一種의 寫眞技士라고 볼 수 있을 것 같구요. 寫眞技士라고 하지만 스토리가 不足한 것이 너무 아쉽습니다. 或是나 하는 마음에 인터넷으로 ‘강택진 아이스크림’이라는 키워드로 檢索을 해보았습니다. 구글링을 통해 두 個의 記事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https://www.yji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8470▶ 두 個의 記事는 모두 慶尙北道 榮州의 地域 言論에서 作成한 글입니다. 글에 따르면 강택진氏의 事緣은 이미 2달 前 동아일보 紙面에 紹介되었다고 했습니다. 찾아보니 實際로 1923年 4月 26日子 東亞日報 5面에는 강택진氏 夫婦의 寫眞과 함께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紹介되어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地主들의 독한 손에서 죽어오던 朝鮮의 小作人들度 近年에 이르러는 最後의 피와 힘을 다하여 各自의 權利를 세우며 勞動이 保守를 完全히 얻기 위하여 頑惡한 地主들에게 反抗하며 따라서 地主들도 時勢를 깨닫고 良心에 찔리어 小作人들의 要求를 多少間 들어주는 模樣이나 아직 시원한 것이 하나도 없음으로 小作人 運動은 漸漸 猛烈하여 가는 터인데 수월 前 慶尙北道 地方에서는 아직까지 꿈 가운데 있는 地主들에게 頂門一鍼되는 事實이 있었다. 慶尙北道 영주군 풍기면 금계동에서 三十餘年 동안 地主의 호사로운 살림을 하던 강택진氏는 自己가 가지고 있던 財産 全部(토지 19000坪)을 小作人 組合에 내어주는 同時에 ‘小作人에게 高喊’이라는 글을 지어 그곳 小作會에 보내고 알몸으로 나선 일이다. .......姜氏는 여러 해 동안 滿洲 上海 等地에서 돌아다녔으며 姜氏의 맏아들은 故鄕에 있는 自己 兄에게 付託하여 普通學校에 다니며 只今은 自己 아내와 둘째아들(7歲) 等 세 食口가 살아가는 터인데 方今 벌이 할 方法을 求하는 中이라 하며 姜氏의 今年 나이는 32이라 한다. ▶慶尙北道 영주의 富者집 아들로 태어났다가 滿洲 傷害를 돌며 새로운 世上에 對한 꿈을 꾸고 歸國한 강택진 先生은 自身의 땅을 小作人들에게 넘겨주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榮州 地域新聞의 記事는 강택진 先生을 社會主義 系列 獨立運動家로 評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아니면 1925年 享年 35歲의 나이로 殉國해서 일까요? 그에 對한 記錄은 現在 인터넷에서 많이 檢索되지 않습니다. ▶동아일보 紙面에 실린 두 張의 寫眞만이 以後에도 강택진 先生의 生涯를 證明하는 證據로 引用되고 있었습니다. 멜빵 바지와 콧鬚髥, 異色的인 아이스크림 박스에 눈이 끌려 들여다 본 寫眞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네요. 강택진 先生의 寫眞에서 여러분은 어떤 게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意見을 듣고 싶습니다. 변영욱記者 cut@donga.com}

    • 2023-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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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0年 前 漢江 다리에 設置된 ‘自殺하지 마세요’ 標識板[淸溪川 옆 寫眞館]

    ▶100年 前 新聞에 실린 寫眞을 통해 오늘을 생각해 보기 위해 동아일보 寫眞部에서 每週 土曜日 連載하고 있는 百年 寫眞 코너입니다. 오늘은 1923年 6月 22日 字에 실린 寫眞을 골랐습니다.한강 다리 위에서 뛰어내려 自殺하려는 사람을 막으려는 標識板 寫眞입니다. 寫眞의 構圖는 특별한 技巧를 부리지 않고 눈 높이에서 보이는 그대로 찍어 剛한 印象을 남기지는 않습니다. 오른쪽 鐵橋 기둥의 垂直線度 크게 神經 쓰지 않아 若干 기울어져 있는 狀態입니다. 왼쪽 畵面의 넓은 하늘 모습도 只今의 寫眞記者들이라면 避했을 ‘不必要한 餘白’입니다. ▶100年 前에도 韓江의 鐵橋에서 뛰어 내려 自殺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었나 봅니다. 漢江 다리 위에 日本語와 한글로 ‘잠깐만 停止하시오’라는 쓰인 標識板이 서 있습니다. 標識板 앞 印度에는 갓을 쓴 成人 두 名이 各各 앉아 있거나 선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더운 여름 漢江 다리를 건너다 暫時 休息을 取하는 사람들이겠죠?▶스스로 生을 마감하기 위해 漢江을 찾는 사람들이 100年 前에도 꽤 있었나 봅니다. 오늘날과 別로 다를 것 없는 모습입니다. 어떤 事緣이 있었을까 하고 新聞 紙面을 더 훑어보았더 理事陣과 조금 떨어진 紙面에 關聯 記事가 있습니다. 記事 內容은 아래와 같습니다.○철교 自殺- 未遂者 또 3名漢江 鐵橋에 빠져 죽으려 하는 사람을 裁作 二十日에도 세 사람을 多幸히 求하였다. 高陽郡 韓紙면 往十里 임익수(49)는 身柄을 견디지 못하여 高陽郡 龍强面 아현리 種指名(61)은 홀아비의 몸으로 어린 아들의 病 救援하기가 어려워 또 高陽郡 둑도面 신당리 한의소(61)는 子息의 驅迫을 못이기어 죽으려는 것을 小科人道橋 派出所에서 發覺하여 各各 懇曲한 說諭를 한 後 돌려보내었다더라. ▶1923年 6月 20日 하루 동안에만 自殺하려고 漢江 다리를 찾았다가 警察에 發見된 사람이 無慮 3名이나 있었습니다. 망설이며 漢江 다리 위를 서성이던 40代 1名과 60代 2名 等 總 3名이 漢江 近處 派出所 警察官에 依해 發見되어 多幸히 집으로 돌아갔다는 記事입니다. 病을 견디지 못해, 어린 아들의 病看護에 지쳐, 子息의 驅迫을 못이기어 自殺하려고 했다는 內容입니다. ▶그 當時 記事는 自殺을 하려고 했던 3名의 이름과 住所, 나이를 모두 標示해 놓은 것이 눈에 띕니다. 只今과는 다른 報道 方式입니다. 그러고 보니 달라진 게 또 하나 있습니다. 요즘은 新聞에서 自殺이라는 表現을 잘 쓰지 않습니다. ‘極端的 選擇’이라는 模糊한 表現을 使用합니다. 게다가 특별한 일이 아니면 報道 自體를 하지 않는 境遇가 大部分입니다. 100年 前 報道처럼 失明을 밝히면서 그가 自殺을 試圖했다고 直說 表現을 하는 것이 것인지, 匿名의 사람이 極端的 選擇을 하려고 했다는 迂廻 表現이 나은 것인지 생각해봅니다. 當事者 뿐만 아니라 影響을 받는 사람들의 生命이 더 保護되고 尊重되는 表現은 무엇일까요? 오늘은 寫眞과 함께 用語에 對해서도 한番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변영욱 記者 cut@donga.com}

    • 2023-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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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드디어 北發射體 引揚 成功…新聞에 美潛水艦 寫眞을 함께 揭載한 理由는?[청계천 옆 寫眞館]

    ▶드디어 北韓 宇宙 發射體 殘骸가 言論을 통해 公開되었습니다. 北韓이 彈道미사일 技術을 利用해 發射한 ‘千里馬 1型’ 발사체가 西海에 墜落한 지 15日 만인 16日 引揚돼 京畿道 평택시 海軍 第2艦隊司令部에서 言論에 公開되었습니다. 11年 前 北韓 로켓 ‘銀河 3號’의 1段階 推進體 殘骸의 言論 公開 行事를 取材했던 記憶이 떠오릅니다. 2012年 12月 12日 北韓을 出發한 ‘銀河 3號’가 北韓 發表에 따르면 成功的으로 役割을 한 後, 9分 만에 西海에 떨어졌었습니다. 그리고 이틀 만에 우리 軍 當局이 殘骸를 바다에서 陸地로 引揚했습니다. 그 때도 우리 軍 當局이 평택시 海軍 第2艦隊 司令部로 取材 希望하는 言論社를 招請해 北韓 미사일 發射體를 撮影하도록 했었습니다. 부슬부슬보다는 많은 비가 내렸는데 배의 操舵室 쪽에 올라가 아래 甲板에 놓여있는 ‘北韓製 깡筒’을 찍는데 왠지 마음이 錯雜했었습니다. 歷史的 現場이라는 기쁨보다는, 우리의 日常을 끊임없이 威脅하는 北韓의 行動을 로케트 殘骸를 통해 直接 確認하는 現場이어서 그런 마음이 들었을 겁니다. ▶이番에도 今方 뭍으로 올릴 거라고 期待하고 있었는데, 보름이 걸렸습니다. 北韓 스스로 失敗라고 한 發射였기 때문에 이番에 引揚한 發射體 ‘千里馬 1型’은 ‘깡筒’이 아니라 그 안에 北韓이 宇宙로 쏘아 보내려고 있던 많은 것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狀態라고 합니다. 損傷없이 물 위로 올리느라 時間이 많이 걸렸을 것으로 推測해 봅니다. ▶2023年 6月 17日子 全國 新聞의 1面에는 北韓 ‘千里馬 1型’ 殘骸 寫眞이 크게 실렸습니다. 寫眞記者協會 所屬 2個 新聞社의 寫眞記者가 代表 取材(POOL 取材)韓 寫眞에서 고른 寫眞들입니다. 그런데 많은 新聞에서 北韓 發射體 寫眞과 함께 美國의 核潛水艦 寫眞을 나란히 실었습니다. 같은 날 釜山港으로 入港한 美國 7艦隊 所屬 核推進 潛水艦인 미시간湖(SSGN 722)가 海軍 釜山 機智에 入港한 모습의 寫眞입니다. ▶모든 言論社의 端末機에 北韓 推進體와 美國 核潛水艦 寫眞이 들어왔지만, 같은 寫眞을 어떻게 쓰는가는 各 言論社의 判斷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內部의 意思決定 過程을 거쳐서 最終 紙面이 編輯됩니다. 北韓의 挑發 痕跡과 함께, 굳건한 韓美 同盟의 象徵을 보여주는 것이 讀者들에게 더 重要한 情報 傳達 方式이라고 생각하는 言論社도 있을 것이고, 뉴스의 强度가 ‘보름 만에 우리 눈앞에 나타난 北韓 挑發 痕跡’을 보여주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 言論社도 있을 것입니다. ▶ 小說이 좀 길었습니다. 다시 100年 前 新聞 紙面으로 돌아가 봅니다. 1923年 6月 11日子 동아일보에 실린 寫眞입니다. 서울에서 열린 各種 體育大會 中 재미있는 場面 2張을 아래위로 나란히 編輯해 놓았습니다. ▶우리나라 新聞에서는 只今도 2張의 寫眞을 使用하는 境遇가 아주 많습니다. 어떤 行事가 벌어지면 畫報 形式으로 여러 張을 보여주어 다양한 모습을 傳達할 수도 있지만 誌面이라는 게 制限이 있으니 普通 2張 그리고 아주 특별한 境遇 3張 程度의 寫眞을 揭載합니다. 그런데 政治的 理由 때문에 2張을 使用하는 境遇가 꽤 많습니다. 한 張의 이미지로 ‘임팩트’있게 紙面을 만들어야 한다고 主張도 있고, ‘均衡’있는 紙面이 重要하다고 主張도 있습니다. 2張의 寫眞은 均衡을 重視하는 意見이 優勢할 때 揭載됩니다. 與黨 寫眞이 들어가면, 野黨 寫眞도 들어가야 하고, 北韓의 미사일 寫眞이 들어가면 우리나라의 미사일 寫眞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할 때가 꽤 많습니다. 寡聞해서 全 世界 狀況을 알 수는 없지만, 機械的 均衡의 程度는 우리나라 紙面이 좀 높을 겁니다. ▶2張의 寫眞으로 均衡을 맞추려는 寫眞編輯의 傾向이 100年 前에도 이미 있었다는 게 神奇해서 여러분께 紹介해드렸습니다. 서울에서 열린 體育大會 場面 中에서 위의 두 寫眞은 ‘壯年層 行事’와 ‘幼年層 行事’를 골라서 揭載했습니다. 性別로 나눌 수도 있고, 種目 別로 나눌 수도 있는데 年齡別로 나눠서 寫眞을 選擇했습니다. 萬若 서울에서 열린 各種 體育行事 中에서 딱 한 張의 寫眞만을 골라서 紙面에 실어야 한다는 注文이 왔을 때 저라면 두 張의 寫眞 中 어떤 걸 골랐을까요? 苦悶을 좀 해봤는데 難題네요. 어렵습니다. 結局 두 張 程度 寫眞을 쓰는 方向으로 妥協을 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떤 寫眞을 고르셨을 거 같으신가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意見을 듣고 싶습니다. 변영욱 記者 cut@donga.com}

    • 2023-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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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金正恩 寫眞에 나타난 高度肥滿과 過勞 痕跡, 公開 意圖는?

    ?2021年 10月 國會 情報委員會 幹事인 더불어民主黨 金炳基 議員은 國家情報院(國精院) 報告를 土臺로 記者들에게 “金正恩 北韓 國防委員長의 體重이 2019年 140㎏에 비해 約 20㎏ 減量된 것으로 보인다”고 說明했다. 그로부터 2年 남짓 지난 올해 5月, 이番에는 國會 情報委員會 幹事인 國民의힘 유상범 議員이 金奎顯 國精院長의 報告를 土臺로 “金 委員長의 體重이 140㎏臺 中盤에 이르는 것으로 把握된다”고 說明했다. 韓國 政府와 言論의 推定에 따르면 金 委員長(以下 呼稱 省略)의 體重은 지난 10餘 年間 80㎏에서 140㎏까지 늘었다(그래프 參照).北韓 ‘1號 寫眞’ 公開 件數 急增國家機關이 北韓 最高指導者의 體重을 分析하고 推定하는 理由는 무엇일까. 北韓 最高指導者가 유고 또는 合理的 判斷을 하지 못하는 狀況에 빠지면 우리 國家 安保에도 큰 影響을 끼치기 때문이다. 그런데 當事者가 밝히지 않는 體重을 外部 觀察者들이 어떻게 特定 數字로 表現할 수 있는 걸까. 金 議員과 劉 議員에 따르면 國精院은 顔面 分析과 體重 追跡 모델, 超解像度 映像 分析 技法 等으로 體重을 推定한다고 한다. 이런 分析이 可能한 것은 北韓 最高指導者의 寫眞, 卽 金正恩의 ‘1號 寫眞’李 過去와는 다른 特徵을 갖기 때문이다.‘쇼잉’ 좋아하는 金正恩于先 北韓 內部 要素로는 ‘쇼잉(showing)’을 좋아하는 金正恩의 特徵을 들 수 있다. 아버지 金正日 때와 달리 김정은 時代에 들어서 北韓 政權은 그야말로 ‘寫眞의 時代’를 맞았다. 드론을 띄워 平壤 市內 모습과 그 속의 김정은을 보여주기도 하고, 인스타그램 計定을 만들어 金正恩의 個人 活動을 弘報하기도 한다. 北韓 ‘勞動新聞’ 紙面을 基準으로 할아버지 김일성은 1週日에 平均 1.32番, 아버지 김정일은 3.92番 登場한 데 비해, 金正恩(執權한 2012年 1月 1日부터 17個月間)은 平均 7.58回 登場했다. 頻度를 分析하는 것이 意味가 없을 만큼 金正恩의 寫眞은 北韓 어느 時代보다 頻繁하게 露出되고 있다. 全 世界 어떤 指導者와 比較해도 公開된 寫眞量이 많아 보인다.디지털 寫眞 原本을 포토샵 프로그램으로 읽으면 撮影 時間과 場所 等 메타 情報를 알 수 있다. 그래서 北韓은 解像度는 높되 撮影 情報를 가릴 수 있는 PDF 파일로 金正恩 寫眞을 公開한다. 또한 아무나 김정은을 撮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3~5名 規模의 專屬 寫眞家 그룹만 寫眞을 찍도록 統制하고 있다. 다만 寫眞 量 自體가 많기에 김정은 動向에 關心 있는 外國 情報機關은 充分한 分析 資料를 確保할 수 있는 狀況이다. 김정일과 달리 金正恩의 境遇 클로즈업 撮影을 許容하고 群衆으로부터 指導者가 分離되는 望遠렌즈 撮影도 頻繁하다. 寫眞 分析이 以前보다 훨씬 쉬워진 것이다.두 番째 變數는 人工知能(AI)이나 빅테이터 分析 能力 等 技術 發展이다. 北韓이 提供하는 高解像度 寫眞을 土臺로 一般人 平均値를 適用해 金正恩의 體重을 類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撮影 角度가 同一한 寫眞을 골라 같은 骨格에 붙은 살의 부피를 比較함으로써 年度別 變化를 推定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얼굴의 點과 티눈까지 그대로 보일 만큼 높은 解像度의 컬러 寫眞을 北韓 스스로 提供하고 있어 얼굴 色깔로도 健康 狀態를 類推할 수 있는 條件이 마련됐다.여기서 한 가지 疑問이 들 수 있다. 왜 北韓은 最高指導者의 健康 狀態에 對한 힌트를 줄 수 있는 다크서클, 긁은 痕跡, 티눈, 뾰루지 等을 포토샵 프로그램으로 지워서 내보내지 않는 것일까. 北韓은 얼마 前 미사일 部隊 幹部로 推定되는 人物을 金正恩 寫眞에서 모자이크 處理해 配布한 적이 있다. 北韓 側도 ‘뽀샵’을 全혀 하지 않는 게 아니라는 意味다. 다만 北韓에선 寫眞일지라도 金正恩 얼굴을 건드리는 것은 危險이 따르는 일이다.당신이 平壤 市內 아파트 完工式에 參席한 金正恩의 寫眞을 찍는 專屬 寫眞家라고 想像해보자. 金正恩은 前날 夜勤하고 오늘 日程을 消化하느라 疲困한 氣色이 歷歷하다. 移動하는 車輛에서 등받이에 기대어 잠을 잤는지 뒤쪽 머리가 가지런하지 않고 지저분한 모습이다. 찍은 寫眞을 골라 勞動新聞과 조선중앙通信使에 電送해야 한다. 어쩌면 當身이 고른 寫眞이 AP 平壤支局을 통해 全 世界로 傳達될 수도 있다. 當身은 포토샵 프로그램으로 뒷머리를 가지런히 整理할 것인가, 아니면 찍은 寫眞 中에서 그나마 ‘똘똘한’ 커트를 고를 것인가. 或是 포토샵으로 寫眞을 건드렸다가는 苦楚를 겪을지도 모를 일이다. 寫眞을 總括하는 누군가가 細細하게 注文하지 않는 以上 健康과 關聯된 작은 힌트들은 寫眞에 그대로 表現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마지막으로 생각해볼 問題는 北韓 政權과 最高指導者의 動向을 分析하는 根據 資料가 寫眞만으로 充分할까 하는 點이다. 20餘 年間 北韓 言論 속 ‘1號 寫眞’을 關心 있게 지켜봐 온 筆者 立場에서 볼 때 北韓이 公式的으로 公開하는 이미지는 有用한 情報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北韓 專門家라면 寫眞 分析에 머물지 않고 휴민트(人的 情報), 텍스트, 監聽 等 다른 形態의 情報를 綜合해 分析해야 할 것이다. 韓國 情報當局도 이미 充分히 綜合的인 情報 分析을 하고 있으리라 본다. 이 같은 綜合的 情報에 덧붙여 寫眞을 본다면 그 裏面에 숨은 北韓 政權의 脈絡과 動機를 더 깊이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北韓 最高指導者의 向後 行步도 豫想할 수 있을지 모른다.北 ‘夜間 寫眞’ 公開 늘어난 背景 눈길金正恩은 쇼잉을 좋아하거나, 最小限 쇼잉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筆者가 注目하는 寫眞 形式 中 하나가 김정은 時代 特히 늘어난 夜間 寫眞이다. 어두운 밤하늘을 밝히는 祝砲가 자주 登場하고, 夜間 群衆集會를 내려다보는 金正恩의 모습이 種種 눈에 띈다. 技術的으로 必要해서인지 모르겠지만, 굳이 낮이 아닌 밤에 미사일 試驗發射를 하는 것도 特異해 보인다. 밤은 感性의 時間이다. 검은 背景에서 불을 뿜으며 날아가는 미사일은 보는 사람의 感情을 激하게 刺戟하는 效果가 있다. 記憶에도 오래 남고 集中하게 된다. 밤 寫眞이 많다는 것은 夜勤이 많다는 意味다. 不規則한 睡眠뿐 아니라 不規則한 食事로 이어질 蓋然性이 크다. 밤에 먹는 間食이 나이 마흔 살이 코앞인 男性의 健康에 얼마나 해로운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지금 西海에서는 北韓이 쏘아 올린 軍事衛星 發射體의 殘骸를 찾고 있다. 失敗한 發射 現場이라 金正恩의 모습은 寫眞에서 보이지 않는다. 成功했다면 寫眞이 달라졌을 것이다. 只今 北韓은 公式 媒體를 통해 高度肥滿 狀態인 金正恩 모습을 公開하고 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김정은 寫眞의 撮影과 公開에서 偶然은 없다는 點이다. 1號 寫眞家와 그 寫眞의 配布를 最終 許諾하는 사람들의 經歷은 外部 觀察者보다 길고, 寫眞 選擇 過程은 훨씬 戰略的이라는 얘기다. 健康 情報 流出이라는 損害보다 內外部 宣傳 效果가 크다고 보는 것이다. 易地思之(易地思之)를 통해 北韓 寫眞, 特히 김정은 寫眞을 綿密히 觀察할 必要가 있다.[이 記事는 에 실렸습니다]변영욱 동아일보 寫眞部長 cut@donga.com}

    • 2023-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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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0年 前 피사의 斜塔…塔은 그대로인데 寫眞의 主人이 바뀌었다[청계천 옆 寫眞館]

    ▶100年 前 新聞에서 피사의 斜塔 寫眞을 發見했습니다. ‘世界 7代 驚異로운 文化財’를 連續으로 紹介하는 連載物 두 番째 企劃記事에 紹介된 寫眞입니다. 只今의 우리는 그냥 ‘斜塔(斜塔)이라고 부르는데 그 時代에는 기울어졌다고 해서 ‘피사의 警査塔’이라고 表現했었네요. 문득 저 피사의 斜塔 寫眞은 누가 찍었을까 생각해봤습니다.▶1923년 新聞에 실린 피사의 斜塔 寫眞을 찍은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오늘날과 달리 著作權에 對한 槪念이 없던 時代였는지, 寫眞의 出處와 主人에 對한 表記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저 寫眞을 찍기 爲해 서울에서 寫眞記者가 이탈리아 現地로 出張을 가진 않았을 겁니다. 저 寫眞의 主人은 一般 市民이라기 보다는 寫眞 專門家가 찍었을 겁니다. 카메라가 비싼 物件이라 大衆化 되기 以前이었으니까요. 카카오톡으로 챗GPT에게 “1923年 世界 人口가 얼마나 됐어요?”라고 물어봤습니다. “1923年 世界 人口는 約 1.93億 名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近似値日 뿐이며, 過去의 人口 數는 正確한 데이터를 求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는 推定値에 不過합니다”라고 答辯을 해주네요. “그러면 그 當時 人口 中에 카메라를 所有한 사람은 몇 名이나 될까”라고 다시 質問을 하니 “1923年에는 카메라를 所有한 사람이 相對的으로 적었기 때문에, 正確한 數値를 把握하기 어렵습니다. 當時 카메라는 高價의 럭셔리 製品으로, 많은 사람들이 所有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世界 人口 對備 카메라 普及率은 現在와 比較할 때 매우 낮았을 것으로 推測됩니다”라고 答을 줍니다. ▶ 萬若, 우리가 오늘 인터넷으로 ‘피사의 斜塔’을 檢索해서 이미지를 確認한다고 했을 때 나오는 寫眞의 主人은 누구일까요? 人工知能(AI)도 가늠할 수 없을 程度로 많은 數字의 ‘피사의 斜塔’ 寫眞이 인터넷에 떠 있습니다. 하나의 實物인 ‘피사의 斜塔’李 無限 數字의 寫眞으로 記錄되어 떠돌아다니고 있는 中입니다. ▶이미지가 흔해지고, 사람과 사람의 疏通 過程에서 重要한 媒介體로 利用된다고 해서 只今을 寫眞의 時代, 映像의 時代라고 表現하는 거 같습니다. 只今도 全 世界 人類들은 自身의 스마트폰으로 世界 各國에서 每瞬間 일어나는 일을 記錄하거나 表現하고 있고 우리는 그 이미지를 통해 世界를 理解하고 있습니다.▶전문가만이 唯一한 目擊者였던 時代가 있었습니다. 新聞社 記者들만이 神奇한 것을 찍어서 世上에 알릴 수 있었던 時代 말입니다. 只今은 寫眞의 主人이 無限 擴張되는 時代입니다. 더 以上 權威的인 소스(source)에 依해서만 現實이 이미지로 再現되는 時代가 아닙니다. 新聞 製作過程에서 各自의 役割이 바뀌었다는 意味로 “Post-protocol era”(Costas M. Constantinou, 2018)라는 表現을 쓰는 學者도 있습니다. ▶寫眞記者가 事件 事故의 唯一한 目擊者도 아닙니다. 昨年인가요, 아프가니스탄을 脫出하는 사람들 寫眞이 新聞에 실렸습니다. 滑走路를 離陸하려는 軍用 飛行機에 올라타서라도 脫出하려는 切迫한 사람들의 모습과, 離陸한 飛行機에서 바닥으로 사람이 떨어지는 場面이 捕捉되었습니다. 너무나 悲劇的이어서 衝擊이었습니다. 그 場面을 찍은 사람은 記者가 아니었습니다. 어떤 記者도 現場에 없었지만 그 現場은 世上에 알려졌습니다. 이름도 生疏한 그리고 아마 歷史에서 한番 言及되지 않았던 아프가니스탄人이 SNS에 올린 動映像에서 決定的 場面을 記者들이 停止畵面으로 캡쳐했습니다. 100年 前 피사의 斜塔 寫眞처럼 寫眞의 主人이 누구인지 다시 모르는 時代가 된 걸까요?▶여기서 쓸데없는 苦悶 한 가지를 해봅니다. 그럼 寫眞記者의 存在 理由는 存在하는가 하는 質問입니다. 모든 사람이 事件을 記錄하고, 甚至於 AI가 이미지를 生成해 주는 時代에 큰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現場을 記錄하는 寫眞記者의 役割이 있을까요?역설적으로 SNS와 AI 時代에는 專門家 그룹으로서의 寫眞記者들이 더 重要한 役割을 하게 됩니다. ‘信賴性 높은 이미지를 提供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新聞社의 誤報는 그야말로 會社 信賴度에 致命傷을 입힙니다. 寫眞이 繼續 들어가야 하는 時代, 每番 포스팅에 들어갈 寫眞을 檢證해야 한다는 건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그 사람이 찍은 寫眞이 確實하다고 할 때 그걸 프린트하거나 포스팅하는 게 全혀 두렵거나 부끄럽지 않은 사람들이 必要한 時代입니다. 그게 寫眞記者의 存在 理由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韓國뿐만 아니라 全 世界的으로요. ▶ 피사의 斜塔은 어쩌면 그대로인데, 피사의 斜塔 寫眞의 主人은 바뀌었습니다. 寫眞에서 여러분은 뭐가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意見을 듣고 싶습니다. 변영욱 記者 cut@donga.com}

    • 2023-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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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높은 곳에 올라가 찍는 寫眞 vs 눈앞에서 찍는 寫眞[淸溪川 옆 寫眞館]

    ▶百年 前 이番 週 7日치 新聞에는 하루 1張 程度의 寫眞이 실렸습니다. 그 中 고른 寫眞은 1923年 6月 2日子 新聞에 실린 學校 開校 記念式 寫眞입니다. 記事 本文의 잉크가 번져 pdf 파일 判讀이 잘 안되는데다 寫眞과 直接 關係가 없는 行事에 對한 描寫가 많아 記事 全體를 여기에 옮기지는 않으려 합니다. 于先 寫眞과 함께 揭載된 記事 本文을 보겠습니다.▶이화(梨花)냐 百合(白合)이냐 -깨끗하게 丹粧한 三百의 學生 이番 놀이의 중심되는 정원극市內 貞洞 理化學當에서는 豫報와 같이 裁作 三十一日 午後 4時부터 錄音이 우거진 同巧 앞뜰 잔디밭에서 盛大한 開校 記念式을 擧行하였다. 正刻前부터 모여든 來賓과 學父兄은 거의 몇(?)白 餘名에 이르러 立場을 謝絶하는 事情에까지 이르렀다. 來賓席에는 多數한 外國人과…. 곱게 차린 三百 餘名 學生은 滿面에 기쁜 빛을 띄운 ‘阿片說라’ 校長의 指導下에 入場式을 마치고 뒤를 이어 幼稚園 아해들의 丹心株라는 遊戱와….만장의 拍手 소리는 맑게 개인 하늘에 울려 넘치는 中에 順序는 차차 展開되어 普通과 3學年의 遊戱 體操 高等科 學生들의 洗練받은 器械體操 普通과 아해들의 優勝꺼리 體操가 있은 後 비로소 理化學黨의 韓자랑꺼리이며 朝鮮에 하나이라 할만한 理化學當合唱隊의 고은 노래가 울려나왔다….▶지금도 서울 市內 名門女高로 名聲 높은 梨花學堂의 開校 記念式을 撮影한 寫眞이네요. 5月 31日 午後 4時 梨花學堂의 잔디밭에서 數百 名의 來賓, 學父兄, 學生들이 參席한 가운데 開校 記念式이 열렸는데 行事場이 人波를 堪當하지 못해 一部 學父兄은 校內로 들어오지 못하기 까지 했다는 內容입니다. 寫眞의 오른쪽에 學父兄들이 있고 가운데 階段을 내려온 왼쪽 아래쪽에 學生들이 줄지어 서 있는 모습입니다. 왼쪽 위쪽 그러니까 學生들의 視線이 一齊히 向한 곳에 校長先生님과 來賓들이 앉아 있을 겁니다. ▶머리를 길게 길러 땋은 女學生의 뒷모습이 이채롭습니다. 校服이라는 같은 服裝을 하고 헤어스타일도 같은 模樣을 한 一連의 사람들이 줄을 서서 一定한 ‘패턴’을 이루고 있습니다. 寫眞찍는 사람들은 이런 式의 規則이 있는 패턴을 좋아합니다. 畵面이 整理되어 깔끔하게 表現되기 때문일 겁니다. 이 寫眞의 特徵은 行事가 열리는 잔디밭이라고 하는 地表面에 카메라가 있지 않고 建物이나 나무 위에 位置해 있다는 點입니다. 卽, 눈높이(eye-level)李 아니라 내려보기(high-level) 支店에서 撮影된 寫眞인 것이죠.▶ 被寫體의 눈높이에서 찍으면 只今처럼 學生들 行列의 뒤쪽에서 撮影하는 것 보다는 正面에서 表情을 찍는 게 나을 겁니다. 그러면, 當時의 讀者들과 只今의 우리들은 저 現場에 있는 그當時 어린 女學生들 몇 名의 얼굴을 正確하게 볼 수 있었겠지만, 寫眞記者는 얼굴 代身 行事의 全體 모습과 整理된 ‘패턴’을 擇했습니다. ▶ 높은 곳에서 全體를 보여주면서 整理整頓된 行列을 보여주는 寫眞은 韓國 新聞에서 가장 많이 使用되는 寫眞입니다. 只今이야 어떤 行事나 人波가 모인 現場을 보여주는 뉴스를 寫眞으로 表現하기 위해 다양한 앵글을 撮影해서 인터넷에 올릴 수 있는 時代지만, 예전에는 新聞에 딱 1張 또는 2張의 寫眞을 揭載하는 게 全部였습니다. 그래서 主로 全體를 다 보여주는 寫眞을 揭載했고, 寫眞記者들度 그런 種類의 寫眞을 主로 撮影했습니다. 옛날 寫眞記者들이 다양하게 찍었을 수도 있습니다. 新聞에 실린 寫眞 말고도 다양한 앵글로 現場을 記錄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新聞에 실린 寫眞들이 前景 스타일이 많다는 것은 寫眞記者들度 거기에 適應했을 거라는 推論이 可能합니다. 찍어와 봐야 안 쓰니까 쓸 寫眞만 찍게 되었을 거라는 推論 말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높은 곳에 올라가서 寫眞 찍는 걸 좋아할까요? 韓國 寫眞記者들이 높은 곳에 올라가서 寫眞 찍는 걸 選好했기 때문에 歷史的으로 有名한 寫眞을 韓國 記者들은 못찍었던 代表 事例가 있습니다. 映畫 ‘1987’에서도 描寫된 故 이한열 烈士의 寫眞을 아시는 분들 많으실 겁니다. 軍事獨裁에 抗拒해 示威하던 연세대학교 學生이 警察이 쏜 催淚彈에 맞고 쓰러지는 場面 말입니다. 이 寫眞을 제대로 찍은 寫眞記者는 정태원이라고 하는 로이터 通信 所屬 寫眞記者였습니다. 쓰러지는 이한열 烈士를 눈앞에서 찍은 唯一한 記者였습니다. 現場에 있던 數十 名의 韓國 新聞社 所屬 寫眞記者들은 연세대 正門을 眺望할 수 있는 鐵길 위에 있었습니다. 높은 곳에서 警察과 示威隊를 한 앵글에 넣고 撮影하고 있었던 거죠. 위에서 찍으면 많은 사람들이 寫眞에 찍힐 수 있습니다. 事件의 全體를 보여주는 撮影方式입니다. ▶韓國 寫眞記者들이 示威 現場을 멀리 위에서 본 것은 示威現場의 돌멩이나 警察의 棍棒이 무서워서가 아닐 겁니다. 그게 客觀的인 視線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밑에서 찍으면 하나를 選擇해야 합니다. 警察의 棍棒을 맞아 피를 흘리는 學生이거나 學生의 쇠파이프를 避하며 恐怖스러워 하는 警察의 모습 둘 中 하나를 말입니다. 警察의 配置 狀態 그리고 學生들의 規模를 寫眞 한 張으로 다 보여주는 것이 그나마 政治的으로 中立的인 寫眞이라고 判斷했을 겁니다(물론 그런 報道 寫眞도 偏向이라고 主張하는 분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 멀리서 찍는 前景 스타일의 寫眞이 正答이냐, 아니면 現場의 가장 다이내믹한 表情을 捕捉해 보여주는 寫眞이 正答이냐 하는 論爭은 寫眞記者와 新聞社 內部에서 數十 年째 이어지는 話頭이기도 합니다. 클로즈업을 한다는 것은 미니멀리즘의 美學을 따른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現代 디자인의 트렌드를 미니멀리즘, 單純化라고 볼 때 韓國 寫眞이 世界 트렌드를 못 쫓아간다고 할 수 있을까요?▶100년 前 新聞에 실린 ‘秩序 井然한 寫眞’에서 우리 新聞 寫眞의 傳統的인 形式에 對해 한番 생각해 봤습니다. 寫眞에서 여러분은 뭐가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意見을 듣고 싶습니다. 변영욱 記者 cut@donga.com}

    • 2023-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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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얼짱 角度는 오른 뺨일까, 왼 뺨일까?[청계천 옆 寫眞館]

    ▶ 100年 前 新聞에 실린 寫眞으로 요즘 寫眞에 對해 생각해보는 百年 寫眞입니다. 우리가 當然하게 봐왔던 이미지에 對해 한番 되돌아보고, 現在와 未來에 對한 인사이트를 얻기 위해 지난 世紀의 낡은 이미지를 發掘해 보고자 始作했습니다. 可能한 1週日에 한番씩 土曜日에 포스팅하려 하고 있습니다. ▶ 100年 前 이番 週, 동아일보 寫眞部는 거의 開店休業 狀態였었네요. 지면 PDF를 아무리 뒤져봐도 눈에 띄는 寫眞이 없습니다. 人物 寫眞 3張 以外에 스케치性 寫眞 2張이 1週日 치 新聞에 실린 寫眞의 全部였습니다. 寫眞이 뉴스를 視覺化해서 讀者에게 보여주고, 視線을 끌기 위한 決定的 役割을 한다고 하지만, 그 時節에는 그런 認識이 別로 없었을테고, 또 印刷 技術의 限界 때문에 紙面에서는 아주 貧弱한 位置였다는 걸 잘 보여주는 한 週였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新聞에 揭載되었던 3張의 人物 寫眞도 어쩌면 대단히 어려운 過程을 통해 撮影되거나 入手되어 印刷되었을 거 같긴 합니다. 新聞에 얼굴 寫眞이 실린다는 事實 自體만으로도 注目할 만한 뉴스 人物이라는 意味이기도 하구요. 오늘은 人物 寫眞 3張을 골랐습니다. 5月 23日子에 실린 寫眞을 보면 ‘새로 歸國한 許姓氏’라고 說明이 붙어 있습니다. 美國에서 體育을 硏究하고 10年 만에 歸國했다는 記事內容이 있습니다. 左側 얼굴 아래쪽에 카메라를 設置해 若干 우러러보는 느낌으로 撮影되었습니다. ▶5月 24日子 新聞에 실린 寫眞은 “英國의 새 首相으로 任命된 볼드元氏”라는 說明입니다. 인터넷 檢索을 해보니 1923年 5月 23日부터 首相에 就任했고 以後에도, 두 番 또 總理가 되었다고 합니다. 저 멀리 英國에서 어제 發生한 뉴스의 人物 寫眞을 바로 다음 날 韓國의 新聞에 揭載했다는 事實이 좀 놀랍습니다. 다만, 카메라가 被寫體보다 높은 곳에서 ‘찍어 누르듯’ 撮影되어 權威的인 느낌보다는 오히려 矮小한 느낌을 주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게다가 外國人이지만 中年의 男性이 無表情하게 카메라를 凝視하고 있어 부드러운 느낌은 아닙니다. ▶ 5月 24日子에 실린 ‘바이올린의 世界的 名手 크라이슬러’氏 寫眞은 앞의 두 寫眞과 달리 主人公의 職業을 보여주는 小品이 손에 들려 있습니다. 來韓 公演을 한 世界的 바이올리니스트를 紹介하는 記事와 함께 실린 寫眞입니다. 100年 前이나 只今이나 뉴스 人物을 表現할 때 樂器를 비롯해 職業을 보여주는 小品이나 背景을 寫眞에 함께 넣고 찍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人物 寫眞을 ‘environmental portrait’라고 하고, 背景이나 小品없이 얼굴만 表現하는 人物 寫眞을 ‘mug shot‘이라고 합니다. ▶新聞社 寫眞記者들은 불이 나거나, 列車가 脫線하거나, 政治人들이 싸우거나, 天然記念物이 發見되는 等 굵직한 事件事故를 찍으러 다닌다고 생각하는 분이 많습니다. 新聞社 寫眞記者를 하려고 入社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 생각을 하고 始作합니다. 하지만, 막상 하루 日程을 보면, 가장 많이 찍는 寫眞이 人物 寫眞입니다. 아마 寫眞記者 일의 50% 以上이 人物 寫眞 찍는 일일 겁니다. 그리고 日程이 많다보니 한 사람을 찍는데 많은 時間을 割愛하지 못하는 境遇가 꽤 많습니다. 簡單한 人事말과 小小한 이야기로 語塞한 雰圍氣를 아이스브레이킹하고 寫眞을 찍기 때문에, 寫眞記者를 만난 사람들이 寫眞記者를 記憶하지 못하는 境遇가 太半입니다. 勿論, 요즘은 인터넷으로 뉴스 人物과 그 寫眞을 찍은 寫眞記者가 持續해서 確認되기 때문에 寫眞記者 이름을 記憶하는 분들이 많아지고는 있습니다. ▶ 人物 寫眞 얘기를 한 김에, 제가 예전에 어디선가 갈무리해놨던 노하우를 여러분과 共有하고자 합니다. 1. 寫眞에서 自身의 모습이 잘 나오게 하려면 3가지를 銘心하라고 말했다. 正面을 보지 말고 비스듬히 포즈를 取하며, 턱을 내리고, 微笑를 짓는 것이다(맨즈 헬스 雜誌의 專屬 모델 앤디 스피어).2. 카메라를 바로 앞에 대고 찍으면 얼굴의 特徵이 歪曲될 수 있다. 2m 거리에서 찍으면 얼굴이 平平하고, 20㎝ 안의 거리로 바짝 대고 찍으면 코가 너무 커보이므로 40㎝에서 85㎝ 거리에서 찍으면 자연스러운 이미지로 사람들의 氣分을 맞춰준다(영국 요크大學 心理學 敎授 대니얼 베이커 博士는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3. 우리나라 사람들은 왼쪽 뺨이 오른쪽 뺨을 찍은 寫眞보다 자연스럽고 自己를 잘 表現한다고 생각한다. 肖像畫도 그렇다. 1千원, 5千원, 1萬원 짜리 紙幣에 그려진 李滉 李珥 세종대왕의 肖像畫는 왼쪽에서 찍은 寫眞이라고 보면 된다. 왜 왼쪽일까? 왼쪽 얼굴에 사람의 印象이 더 잘 나타나기 때문이다. 사람의 腦는 右腦와 左腦로 이뤄지는데 右腦는 感情 表現을, 左腦는 論理的 表現을 擔當한다. 右腦가 發達한 사람은 音樂이나 美術을, 左腦가 發達한 사람은 數學이나 科學을 잘한다. 右腦는 사람의 身體 왼쪽을, 左腦는 사람의 身體 오른쪽을 管掌하는데 感情 表現이 豐富한 右腦를 擔當하는 왼쪽 얼굴의 印象이 훨씬 좋다. ▶느낌을 表現하는 寫眞을 위의 몇 가지 팁처럼 圖式化해서 說明할 수는 없겠지만, 心理學의 側面에서 接近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共有해봤습니다. 100年 前 新聞에 실린 3名의 人物 寫眞에서 여러분은 뭐가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意見을 듣고 싶습니다. 변영욱 記者 cut@donga.com}

    • 2023-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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