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政治的 自由와 經濟的 不自由의 아이러니|新東亞

政治的 自由와 經濟的 不自由의 아이러니

[김호기의 古典으로 읽는 21世紀] 金洙暎의 詩·최인훈의 小說로 보는 韓國 自由主義 現住所

  • 김호기 연세대 社會學科 敎授

    入力 2024-05-07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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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現實的 自由主義 絶頂, 金洙暎의 마지막 時 ‘풀’

    • “풀이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 우리 現代史로 들어가는 좁은 門, 최인훈의 ‘廣場’

    • ‘廣場 없는 密室’과 ‘密室 없는 廣場’의 共存

    • 21世紀 自由主義 課題, 더 좋은 自由 志向

    2011년 동아일보와 인터뷰 당시 최인훈 작가(왼쪽). 생전 김수영 시인. [동아DB]

    2011年 東亞日報와 인터뷰 當時 최인훈 作家(왼쪽). 生前 金洙暎 詩人. [東亞DB]

    來年이면 ‘光復 80年’李 된다. 20年 前 2005年 ‘光復 60年’을 맞이해 KBS에서 放映한 다큐멘터리 4部作 ‘韓國 知性史’의 進行을 맡은 적이 있다. 그때 光復 60年 記念으로 ‘교수신문’과 KBS가 敎授 100名을 對象으로 흥미로운 調査를 했다. 光復 60年의 知省事에서 影響力이 큰 知識人에 關한 設問調査였다. 應答者들이 選擇한 人物 가운데 가장 앞에 놓인 이들은 함석헌, 김수영, 金芝河였다.

    이 調査에서 詩人 두 사람이 推薦된 것이 印象的이었다. 우리 知識社會에서 詩人과 小說家를 包含한 作家들의 影響力을 實感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東아시아에서 ‘문사철’을 重視한 것은 오랜 傳統이다. 이런 脈絡에서 光復 以後 詩人 金洙暎과 金芝河, 小說家 최인훈과 이청춘이 當代를 代辯하는 知識人으로 자리매김된 것은 자연스러운 結果였다.

    知識社會學을 工夫해 온 내게 光復 以後 우리 社會에서 代表的 詩人과 小說家를 한 사람씩만 고르라면 누구를 들 수 있을까.

    나는 金洙暎과 최인훈을 꼽고 싶다. 金洙暎은 ‘巨大한 뿌리’와 ‘풀’의 詩人이다. 최인훈은 ‘廣場’과 ‘話頭’의 小說家다. 앞서 引用한 光復 60年 調査에서 볼 수 있듯 金洙暎의 位相은 말할 나위 없거니와 文學評論家 金炫과 金允植은 그들의 著書 ‘韓國 文學社’에서 최인훈을 ‘前後 最大의 作家’라고 評價한 바 있다.

    널리 알려졌듯 金洙暎과 최인훈 모두 自由主義에 가까운 知識人이다. 文學史的으로 金洙暎은 모더니즘과 自由主義를 代表하는 詩人이고, 최인훈은 中道主義와 自由主義를 代表하는 小說家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光復 以後 우리 現代文學을 代表해 온 두 사람이 自由主義 志向을 보인 反面, 정작 現實은 自由主義의 貧困으로 특징지을 수 있었다는 點이다.



    金洙暎과 최인훈은 自身들의 作品에서 어떤 自由主義를 선보였을까. 自由主義란 무엇을 追求하는 理念이고 哲學일까. 나아가 21世紀 現在 이 自由主義가 서 있는 자리는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이番 號에서는 金洙暎 市와 최인훈 小說에 나타난 自由主義를 注目함으로써 韓國 自由主義가 걸어온 길과 나아갈 길을 생각해 보려고 한다. 主要 텍스트는 金洙暎의 ‘金洙暎 全集 1: 時’와 최인훈의 ‘廣場’이다.

    金洙暎의 現實的 自由主義

    2009년 공개된 김수영 시인의 ‘겨울의 사랑’ 육필 원고. [민음사]

    2009年 公開된 金洙暎 詩人의 ‘겨울의 사랑’ 肉筆 原稿. [민음사]

    金洙暎은 鎭靜 問題的 詩人이다. 日帝强占期에서 光復으로, 光復에서 政府 樹立으로, 政府 樹立에서 戰爭으로, 戰爭에서 産業化로 나아가는 길 위에서 그는 때로는 비켜서서 때로는 한가운데서 삶과 詩를 自身의 말대로 ‘온몸으로 밀고 나갔던’ 知識人이다.

    光復 以後 우리말로 쓰인 가장 뛰어난 詩를 하나 고르라면 나는 躊躇 없이 金洙暎의 ‘巨大한 뿌리’를 들고 싶다.

    “傳統은 아무리 더러운 傳統이라도 좋다 나는 光化門 / 네거리에서 屍口門의 진창을 聯想하고 人寰(寅煥)네 / 妻家집 옆의 只今은 埋立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 洋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時節을 생각하고 / 이 憂鬱한 時代를 패러다이스처럼 생각한다 (…) 歷史는 아무리 / 더러운 歷史라도 좋다 /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 나에게 놋周鉢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追憶이 / 있는 한 人間은 永遠하고 사랑도 그렇다.”

    1964年에 쓰인 이 詩는 傳統과 마주한 우리 社會 知識人의 內面 意識을 잘 보여준다. 金洙暎이 發見한 ‘더러운 傳統’은 過去로의 素朴한 回歸가 아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傳統이다. 이 詩는 西歐中心主義에서 벗어나 우리 歷史와 社會를 있는 그대로 凝視하고 그 속에서 人間과 사랑의 意味를 堂堂히 發見하려는 金洙暎의 問題意識을 鮮明히 드러내고 있다.

    金洙暎은 1921年 서울에서 태어났다. 선린상고를 卒業하고 日帝强占期 末期 日本과 滿洲를 거쳐 光復 後 서울로 돌아와 詩人의 길을 걸었다. 그의 ‘전집 1: 時’를 보면, 김수영다운 첫 詩는 스물여섯에 쓴 ‘가까이 할 수 없는 書籍’(1947)이다.

    김수영 전집 1. [민음사]

    金洙暎 全集 1. [민음사]

    “가리포루니兒라는 곳에서 온 것만은 / 確實하지만 누가 지은 것인 줄도 모르고 (…) 어린 동생들과 雜談도 마치고 / 오늘도 어제와 같이 괴로운 잠을 / 이루蔚 (…) 이 時間에 (…) 나는 이 冊을 멀리 보고 있다.”

    김수영 問題意識의 出發點을 보여주는 시다. 西歐를 그리워하지만 그 西歐는 너무나 멀리 떨어진, 가까이 할 수 없는 書籍과도 같은 存在다. 日帝 植民地로부터 解放된 나라에서 새로운 國家와 社會를 일궈가고 싶은 熱望은 누구나 품고 있던 꿈이었다. 光復은 우리에게 自由를 膳賜했다. 그러나 그 自由가 뿌리내리기에 現實은 너무 瘠薄했다.

    金洙暎은 타고난 自由主義者였다. 스스로 밝혔듯 그는 左派나 右派가 되기 어려웠다. 그의 奔放한 想像力과 銳敏한 自意識은 이념적 拘束에 어울리지 않았다. 金洙暎의 自由主義가 그렇다고 해서 西歐 自由主義의 一方的 受容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6·25戰爭과 함께 그의 自由主義는 現實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4月革命 以後에는 西歐的 自由主義의 ‘포즈’로부터 벗어나 ‘現實的 自由主義’를 摸索하고 追求했다.

    文學評論家들은 金洙暎의 詩가 보여준 世界를 크게 4月革命 以前과 以後로 나누곤 한다. 그의 1950年代 詩에 對해서는 相反된 見解가 提示돼 왔다. 한便에서는 모더니즘의 설익음이 남아 있다고 봤고, 다른 한便에서는 詩的 完成度가 이미 相當한 水準에 到達했다고 評價했다. 이 1950年代 市에서 내가 注目하고 싶은 것은 非西歐 社會 知識人의 苦惱다.

    “1950年 7月 以後에 헬리콥터는 / 이 나라의 비좁은 山脈 위에 姿態를 보이었고 (…) 悲哀의 垂直線을 그리면서 날아가는 그의 설운 模樣을 / 우리는 좁은 뜰 안에서뿐만 아니라 / 甚至於는 缸아리 속에서부터라도 내어다볼 수 있고 / 이러한 우리의 純粹한 癡情(痴情)을 / 헬리콥터에서도 내려다볼 수 있을 것을 斟酌하기 때문에 / ‘헬리콥터餘 너는 설운 動物이다’ / ㅡ自由 / ㅡ悲哀.”

    ‘헬리콥터’(1955)다. 헬리콥터가 象徵하는 것은 西歐 文明이다. 西歐 文明을 바라보는 非西歐 知識人의 視線은 그 ‘自由’에 熱狂하지만, 同時에 現實을 돌아보면 ‘悲哀’를 갖지 않을 수 없다. 西歐的 理想과 韓國的 現實의 距離에서 金洙暎이 發見한 것은 悲哀의 感情이다. 그것은 “거리에 나와서 집을 보고 / 집에 앉아서 거리를 그리던 어리석음”(‘구름의 把守兵’·1956)李 보여주는 內的 緊張과 葛藤이다

    1950年代 中盤에 麻浦路 移徙한 金洙暎은 兩界를 職業으로 삼아 專業 詩人으로 나섰다. 1958年 第1回 한국시인협회賞을 受賞한 그가 社會 前面에 나선 것은 1960年 4月革命을 통해서였다. 以後 그는 빛나는 詩를 거침없이 吐해 냈다.

    “푸른 하늘을 制壓하는 / 노고지리가 자유로웠다고 / 부러워하던 / 어느 詩人의 말은 修正되어야 한다 / 自由를 위해서 / 飛上하여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 어째서 自由에는 /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 革命은 / 왜 孤獨한 것인가를.”

    ‘푸른 하늘은’(1960)이다. 4月革命 精神을 代表하는 市의 하나로 꼽혀 왔다. 社會變革을 追求하는 革命은 以上인 同時에 現實이다. 삶의 現場 및 苦痛과 마주해야 한다는 것을, 그러기에 孤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김수영은 노래한다.

    어떤 拘束도 拒否한 金洙暎의 목소리는 5·16 軍事政變度 막을 수 없었다. 그는 歷史的 現實에 마주했다. 그 속에서 나온 作品이 ‘巨大한 뿌리’(1964), ‘現代式 橋梁’(1964), ‘어느날 古宮을 나오면서’(1965) 等이었다.

    1960年代 金洙暎의 詩를 어떻게 볼 것인지는 여러 解釋이 提示돼 왔다. 내가 注目하고 싶은 것은 그의 詩가 우리 現實에 安着돼 가는 過程이다. ‘헬리콥터’에서 느끼게 된 ‘自由와 悲哀’는 이제 “退溪든 정다산이든 鬚髥난 令監이면 / 福德房 詐欺꾼도 盜賊놈 持株라도 좋으니 제발 순조로와라”(‘미역국’·1965)라고 노래하는 ‘能辯과 餘裕’로 變化됐다. 이러한 能辯과 餘裕에 담긴 것은 앞서 引用한 ‘巨大한 뿌리’에서 볼 수 있는 現實과의 密着이며, 이 密着을 통해 金洙暎은 現實的 自由主義로 나아갔다.

    이 現實的 自由主義는 個人과 社會의 共存, 個人과 歷史의 和解를 摸索하면서도 市民的 個人의 自由와 意志를 重視한다. 이러한 現實的 自由主義의 絶頂이 그의 마지막 時 ‘풀’(1968)이다.

    “풀이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고 더 빨리 울지만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먼저 웃는 풀이 象徵하는 對象은 누구일까. 그것은 個人일 수도 있고 民衆일 수도 있다. 또 너일 수도 있고 나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金洙暎이 바람의 拘束을 拒否하고 풀의 自由를 熱烈히 擁護한다는 點이다.

    金洙暎은 體質的으로 保守的 엘리트主義나 進步的 民衆主義에 기울어지기 어려운 知識人이었다. 金炫이 指摘하듯 그에게 一生 동안 가장 所重한 價値는 自由였다. 이 自由를 向한 熱望을 金洙暎은 現實과 歷史 안에 位置시키고, 이 自由를 抑壓하는 모든 權力에 抵抗하려 했다. 西歐的 自由主義가 現實的 自由主義로 電話하는 過程에서 그는 1968年 交通事故로 突然 우리 곁을 떠났다.

    2013년 11월 ‘김수영문학관’ 개관에 앞서 동아일보와 만난 고(故) 김수영 시인의 부인 김현경 씨가 그의 초상화를 소개하고 있다. [동아DB]

    2013年 11月 ‘김수영文學觀’ 開館에 앞서 東亞日報와 만난 故(故) 金洙暎 詩人의 夫人 김현경 氏가 그의 肖像畫를 紹介하고 있다. [東亞DB]

    최인훈의 中道的 自由主義

    金洙暎만큼 최인훈 亦是 鎭靜 問題的 小說家다. 최인훈이 世上을 떠난 다음 딸 최윤경은 아버지를 記憶하는 散文集 ‘灰色人의 자장歌’를 내놨다. 아버지와 함께했던 딸의 追憶은 잔잔했다. 최윤경은 최인훈이 推薦했던 冊의 하나인 앙드레 지드의 ‘좁은 門’에 對해 다음과 같이 썼다.

    “‘좁은 門’을 權限 아버지는 내가 잘 모르는 아버지다. ‘좁은 門’은 내가 아직 모르는 일이다. 그 좁다란 門을 열면 冊 안에서 아버지의 音聲을 만날 수 있을지. 만나게 된대도 가슴이 철렁하고, 못 만나게 된다면 限없이 허전할 것이다. (…) 좁은 門을 열면 아버지가 서 있을까.”

    이 句節을 읽은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作家 최인훈의 文學 世界는 光復 以後 絶望과 希望, 苦惱와 榮光으로 點綴된 우리 現代史로 들어가는 좁은 門이다. 좁은 門에 들어서면 그 안에서 우리는 韓國 現代史에 對한 깊이 있는 省察과 遭遇한다. 그 좁은 門 안의 가장 앞에 놓인 作品이 ‘廣場’이다.

    “아시아的 前提의 椅子를 타고 앉아서 民衆에겐 西歐的 自由의 風聞만 들려줄 뿐 그 自由를 ‘사는 것’을 許諾지 않았던 舊政權下에서라면 이런 素材가 아무리 口味에 당기더라도 敢히 다루지 못하리라는 걸 생각하면서 빛나는 4月이 가져온 새 共和國에 사는 作家의 보람을 느낍니다.”‘

    廣場’은 1960年 10月 雜誌 ‘새벽’에 發表된 中篇小說이다. 여기에 나오는 序文의 한 句節이다. ‘舊政權’은 李承晩 政權을, ‘빛나는 4月’은 4月革命을 指稱한다. 최인훈은 ‘廣場’을 以後 여섯 番이나 고쳐 다시 發表했다. ‘廣場’을 통해 최인훈은 光復에서 1950年代에 이르는 歷史的 激變과 그 안에 놓인 理念 問題를 注目한다.

    최인훈의 ‘광장’ 초판본. [동아DB]

    최인훈의 ‘廣場’ 初版本. [東亞DB]

    主人公 이명준의 人生은 최인훈 自身의 삶을 反映한다. 1936年 咸鏡北道 會寧에서 태어난 최인훈은 光復 後 家族과 함께 元山으로 移徙했다. 高等學校 在學 中 6·25戰爭이 일어났고, 家族과 함께 越南했다. 서울대를 다니다가 陸軍 通譯將校로 일한 다음 大學을 卒業하지 않고 小說家의 길로 들어섰다.

    6·25戰爭 以前에는 北韓에서, 以後에는 南韓에서 살아온 經驗은 최인훈으로 하여금 두 社會를 比較해 볼 機會를 提供했다. ‘廣場’에서 哲學도 이명준 亦是 南과 北의 現實을 모두 體驗하고, 南과 北의 이념적 拘束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최인훈은 南과 北을 다음과 같이 記述한다.

    “個人만 있고 國民은 없습니다. 密室만 푸짐하고 廣場은 죽었습니다. (…) 아무도 廣場에서 머물지 않아요. 必要한 掠奪과 詐欺만 끝나면 廣場은 텅 빕니다. 廣場이 죽은 곳. 이게 南韓이 아닙니까? 廣場은 비어 있습니다.”

    “명준이 北녘에서 만난 것은 잿빛 共和國이었다. 이 滿洲의 저녁노을처럼 핏빛으로 타면서, 나라의 들뜸 속에 살고 있는 共和國이 아니었다. 더욱 그를 놀라게 한 것은, 코뮤니스트들이 들뜨거나 激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일이었다.”

    小說의 時間은 1945年 光復에서 6·25戰爭까지지만, 光復에서 1960年 4月革命까지의 南과 北의 現實을 최인훈이 날카롭게 指摘한 句節이다. 살아 있되 欲望만 넘치는 社會와 革命을 내세우지만 人間이 죽어 있는 社會, 다시 말해 ‘廣場 없는 密室’(南韓)과 ‘密室 없는 廣場’(北韓)은 1950年代 韓半島에 存在한 두 自畫像이었다. 主人公에게 이제 남아 있는 選擇이란 韓半島가 아닌 다른 곳일 수밖에 없다. 中立國으로 가는 배 위에서 이명준은 結局 自殺을 敢行한다.

    ‘廣場’은 中道主義의 悲劇을 象徵한다. 최인훈은 左派와 右派로부터 모두 벗어나려고 했다는 點에서 中道的 自由主義를 志向했다. 自由主義는 人間에게 附與된 自由를 무엇보다 所重히 생각한다. 하지만 1950年代 現實에서 이 自由主義는 어디에도 닻을 내릴 수 없었다. 冷戰·分斷體制가 作動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南韓의 冷戰·分斷體制는 反共主義와 權威主義가 養畜을 이뤘다. 反共主義가 思想의 自由에 對한 檢閱 裝置였다면, 權威主義는 社會의 再生産 方式이었다. 北韓은 더 深刻했다. 憎惡로 武裝된 反美主義와 全體主義가 社會를 徹底히 支配했다.

    이러한 최인훈의 時代感覺은 金洙暎에게서도 發見된다. 金洙暎은 1950年代 現實이라는 氷壁 앞에서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고 告白했다(‘거미’·1954). 여기서 설움은 앞서 引用한 ‘헬리콥터’에 나오는 悲哀다. 설움과 悲哀의 感情은 최인훈 亦是 共有하고 있던 心情이었다. 그것은 時代的 憂鬱이었다.

    ‘廣場’ 以後 최인훈의 作品 活動은 눈부셨다. ‘九雲夢’ ‘灰色人’ ‘西遊記’ ‘小說家 구보氏의 一日’ ‘颱風’ 等의 小說을 發表했고, 1970年代 暫時 美國에 머문 다음 돌아와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 等의 戱曲을 내놓았다. ‘廣場’은 英語, 日本語, 프랑스語, 獨逸語, 러시아語, 中國語 等으로 飜譯됐다. 최인훈의 마지막 小說은 1994年 出刊한 ‘話頭’였다.

    2008년 최인훈 작가 등단 50주년을 맞아 출간한 전집. [동아DB]

    2008年 최인훈 作家 登壇 50周年을 맞아 出刊한 全集. [東亞DB]

    ‘話頭’에서 최인훈은 이명준을 代身해 스스로 主人公을 맡는다. 그리고 ‘廣場’ 以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최인훈의 한 正體性인 ‘廣場’의 主人公이 南과 北을 觀察했다면, 또 다른 正體性인 ‘話頭’의 主人公은 이제 美國과 蘇聯을 旅行한다. ‘話頭’의 가장 感動的 場面은 美國 버지니아에 머물렀을 때 偶然히 주어진 平安北道 博川郡誌에 실린 아기장수 說話와의 만남이다.

    博川郡의 한 가난한 집에서 겨드랑이 밑에 날갯죽지가 달린 아기가 태어난다. 父母는 家族이 겪게 될 不幸을 念慮해 아기장수를 죽이고 만다. 아기장수 說話는 支配權力에 抵抗하는 民衆의 悲願을 담고 있고, 强大國에 맞서는 弱小國의 所望으로 읽을 수 있다. 이 說話를 통해 최인훈은 民族을 다시 發見한다.

    “그런데 갖다두고만 있던 冊을 시덥잖게 뒤적이다가 만난 이야기가 急하게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었다. 그 소리는 어딘가로 나를 부르고 있었다. (…) 밤이 支配하는 故鄕으로 가기를 나는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 나는 이제는 두렵지 않았다. (…) 왜냐하면 내게는 꿈꾸는 힘이 남아 있다. (…) 나는 한 달 後 歸國하는 飛行機에 올랐다.”

    ‘廣場’의 主人公 이명준은 中立國으로 向하는 배 위에서 自殺을 敢行했지만, ‘話頭’의 主人公 최인훈은 ‘밤이 支配하는 故鄕’인 祖國으로 돌아온다. ‘話頭’에서 최인훈은 民族과 遭遇하면서 비로소 懷疑主義와 悲觀主義로부터 벗어났다.

    民族을 다시 發見했다고 해서 최인훈이 個人의 自由와 想像力을 抛棄한 것은 아니다. 그에게 如前히 重要한 것은 ‘꿈꾸는 힘’이다. 꿈꾸는 힘이란 나와 겨레의 記憶, 그 속에 담긴 絶望과 希望을 母國語로 傳達하려는 欲望이다. 그것은 理念 對立을 넘어서 人間다운 삶을 살아가려는 中道的 自由主義의 熱望으로 읽을 수 있다.

    小說家로서 최인훈의 卓越함은 ‘廣場’과 ‘話頭’에서 볼 수 있듯 歷史와 理念 問題를 回避하지 않고 正直하게 대면한다는 데 있다. 그는 南과 北의 分斷 時代, 美國과 蘇聯의 冷戰 時代가 던지는 意味를 깊이 있게 省察한다. 分斷과 冷戰은 지난 20世紀 後半 우리 現代史를 規定해 온 두 겹의 時代的 拘束이다. 이 拘束에 堂堂히 맞서 中立과 自由를 꿈꿨던 최인훈은 2018年 우리 곁을 떠났다.

    自由主義가 놓인 자리

    自由主義는 西歐에서 發展한 政治哲學이자 이데올로기다. 그것은 무엇보다 個人의 自由를 重視한다. 思想과 表現의 自由는 勿論 私有財産의 保護가 自由主義의 出發點이다. 自由主義에 따르면, 自由가 우리 人間에게 最上의 社會的 價値이고, 社會制度는 個人의 自由를 위해 存在한다.

    西歐社會에서 自由主義의 基礎를 세운 이는 英國 哲學者이자 經濟學者인 존 스튜어트 밀이다. 밀은 ‘自由論’에서 思想의 自由, 表現의 自由, 集會와 決死의 自由, 그리고 良心의 自由를 先驅的으로 主張했다. 이러한 自由主義는 하나의 理論만으로 存在하지 않았다. 歷史的으로 古典的 自由主義, 社會的 自由主義, 新自由主義 等으로 發展해 왔고, 對象에 따라서 政治的 自由主義, 經濟的 自由主義, 文化的 自由主義 等으로 分類할 수 있다.

    自由主義의 歷史에서 19世紀 自由主義와 20世紀 自由主義의 政治的 位相은 사뭇 다르다. 19世紀 自由市場 擁護者들이 進步로 分類된 反面, 20世紀 新自由主義 擁護者들은 保守로 자리매김됐다. 이렇듯 自由主義는 保守 또는 進步와 結合할 수 있는 理念이다. 21世紀 現在 ‘進步的 自由主義’와 ‘保守的 自由主義’ 모두 現實에서 觀察할 수 있다.

    自由主義가 個人主義와 雙生兒라는 事實도 注目을 요한다. 個人主義는 自律的 個人을 優先視하는 政治·社會哲學이다. 이 個人의 自律性에 맞서는 價値가 共同體의 秩序다. 한 社會가 維持되기 위해서는 共同體의 秩序가 要求된다. 그런데 이 共同體의 秩序는 個人의 自律性을 制限하거나 抑壓할 수 있다. 바로 이 地點에서 自由主義와 個人主義는 銅錢의 兩面을 이룬다.

    注目할 것은 이러한 自由主義가 우리 現代史에서 貧困했다는 데 있다. 保守와 進步 모두 自由主義를 앞세웠지만 그 肖像은 초라했다. 保守는 自由民主主義를 自己 正體性으로 標榜했음에도 非自由主義的 國家主義로 自身을 支撐해 왔다. 進步 亦是 自由主義를 政治 理念의 하나로 强調했음에도 自由主義에 맞서는 마르크스주의로부터 큰 影響을 받았다.

    이렇게 貧困한 自由主義에 生命을 불어넣은 知識人들은 人文·社會科學者가 아니라 藝術家였다. 詩人 金洙暎과 小說家 최인훈이 바로 그들이었다. 金洙暎의 詩는 金炫의 말처럼 自由를 拘束하는 現實에 對해 絶叫했다. 이 自由의 拘束이라는 心臟에 金洙暎은 다음과 같은 화살을 겨눈다.

    “한番 正正堂堂하게 / 붙잡혀간 小說家를 爲해서 / 言論의 自由를 要求하고 越南 派兵에 反對하는 / 自由를 履行하지 못하고 / 20원을 받으러 세 番씩 네 番씩 / 찾아오는 夜警꾼들만 憎惡하고 있는가.”(‘어느 날 古宮을 나오면서’·1965)

    이러한 金洙暎의 獨白은 表現의 自由와 言論의 自由를 向한 中斷 없는 省察을 要求한 거였다. 1960年代는 自由主義者 ‘金洙暎의 時代’였다. 최인훈 亦是 自由에 對한 깊이 있는 省察을 摸索했다. ‘廣場’ 1973年版 序文에서 최인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12年 前, 이명준이란 潛水夫를 想像의 工房에서 製作해서, 삶의 바다 속에 내려보냈다. 그는 ‘이데올로기’와 ‘사랑’이라는 深海의 숨은 바위에 걸려 다시는 떠오르지 않았다.”

    이 陳述은 ‘廣場’李 이데올로기 小說이라는 것을 최인훈 스스로 잘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廣場’에서 최인훈이 꿈꿨던 것은 南과 北을 넘어 中立을 向한 自由主義였다. 勿論 최인훈이 注目했던 當時의 現實과 21世紀 現實 사이에는 距離가 存在한다. 北韓은 如前히 全體主義的 共産主義 體制이지만, 우리 大韓民國은 民主化 時代를 거치면서 다양한 理念이 競爭하고 있다.

    21世紀가 열린 지 20餘 年이 흐른 現在, 그렇다면 自由主義가 서 있는 자리는 어떻게 볼 수 있을까. 最近 그 視線은 多重的이다.

    먼저 政治的 自由는 크게 擴張했다. 情報社會의 進展으로 1人 미디어 時代가 滿開한 것은 그 具體的 證據다. 그러나 同時에, 포퓰리즘의 負傷에서 볼 수 있듯, 온라인 集團主義가 個人的 自由主義를 위축시키고 있다. 政治學者 얀 베르너-뮐러가 指摘하듯 ‘非自由主義的 民主主義’로서의 포퓰리즘이 언제든지 多元的 民主主義를 威脅할 수 있다는 點에 注目해야 한다.

    經濟·社會的 自由가 處한 狀況도 눈여겨볼 만하다. 社會學者 지그문트 바우만은 오늘날 누구나 市場에서 商品과 文化를 消費할 수 있는 自由의 時代가 滿開했지만, 이 消費의 自由는 個人이 갖는 貨幣의 規模에 따라 決定된다고 主張한 바 있다. 政治的으론 자유로운데 적지 않은 이들이 經濟的으론 不自由하다는 아이러니가 오늘날 自由의 現住所라는 事實 또한 注目해야 한다.

    이러한 自由主義의 風景은 우리 社會에서도 觀察할 수 있는 現象이다. 한便에서는 相對方을 嫌惡하고 惡魔化하는 포퓰리즘이 政治的 自由主義를 짓누르고 있다. 다른 한便에서는 삶의 質 差異를 漸漸 鞏固히 하는 經濟的 兩極化가 社會·文化的 自由를 威脅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더 많은 自由’를 위해 우리 社會가 달려왔다는 點이다. 여기에는 金洙暎과 최인훈 같은 知識人들이 나름의 意味 있는 役割을 맡았다. 이러한 自由主義는 21世紀 現在 새로운 課題에 直面해 있다. 그 課題는 21世紀 現實에 걸맞은 政治的 自由와 社會·文化的 自由를, 다시 말해 ‘더 좋은 自由’를 豐盛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自由主義가 더 좋은 自由를 向해 나아가길 나는 所望한다.

    김호기
    ● 1960年 京畿 洋酒 出生
    ● 연세대 社會學科 卒業. 獨逸 빌레펠트臺 社會學 博士
    ● 美國 스탠퍼드대 亞太硏究센터 코렛 펠로
    ● 現 연세대 社會學科 敎授
    ● 著書 : ‘現代 資本主義와 韓國社會’ ‘韓國의 現代性과 社會變動’ ‘韓國 市民社會의 省察’ ‘South Korea's Democracy in Crisis’(신기욱과 共編)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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