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騷音은 어떻게 우리 삶에 關與하는가?|신동아

騷音은 어떻게 우리 삶에 關與하는가?

  • 장석주| 是認 kafkajs@hanmail.net

    入力 2011-09-21 17: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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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都市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自己도 모르는 사이에 騷音 中毒者가 된다. 騷音에서 달아나려고 努力하지만, 不可能한 일이다. 自動車 소리, 電話벨 소리, TV 소리, 사람들의 對話가 온 世上을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生活 어디에도 ‘沈默’은 없다. 騷音은 우리의 生活과 健康을 망가뜨린다. 反面 沈默은 知覺의 힘을 促進시키고, 우리 삶을 健康하게 만들며 神聖함을 깃들게 한다. 騷音의 世界와 訣別할 수는 없을까.
    • 沈默이 가져다주는 평화로움 속에 살아갈 수는 없을까.
    소음은 어떻게 우리 삶에 관여하는가?
    ‘그것’ 때문에 나는 人生을 망쳤다. ‘그것’은 내가 어디에 있든지 끊임없이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내 意識을 마구 갉아먹고 내 삶의 質을 粗惡하게 만들었다. ‘그것’ 때문만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어쨌든 나는 不幸해졌다. ‘그것’을 避할 方法이 없었다.

    ‘그것’은 바로 騷音이다. 우리는 漸漸 더 ‘騷音의 世上’ 속으로 밀려나고 있다. 갈수록 시끄러워지는 世上이다. 文明社會란 大體로 갖가지 騷音으로 소란스럽지만, 特히 大韓民國은 騷音에 寬大하고 騷音을 쉽게 容認한다는 側面에서 더도 덜도 아닌 騷音 社會다. 騷音과 그것이 일으키는 振動들은 내 삶과 日常 世界의 中心을 貫通한다. 그보다 더 深刻한 것은 內面의 騷音들이다.

    “心理的 混亂과 狂氣는 內面의 騷音들이다.”(마르크 드 스메트, ‘沈默 禮讚’)

    얼마나 많은 사람이 外部의 騷音과 內面의 騷音에 시달리며 살고 있는지! 그 渦中에 沈默이라는 資源은 枯渴되고 沈默은 우리 內面을 성장시키고 삶을 有意味하게 바꿀 수 있는 天然資源이다.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騷音이 그 沈默을 到處에서 殺害하고 있다.

    騷音은 선(腺), 內臟, 心臟, 血管 같은 身體의 內部器官에 影響을 미친다. 騷音에 持續的으로 露出된 사람들은 血液循環, 心臟 健康, 선 分泌에 障礙를 겪을 수도 있다. 超低周波陰과 超音波들은 不安, 頭痛, 耳鳴 等을 誘發하며, 騷音이 일으키는 被刺戟性, 攻擊性, 焦燥함을 放置하면 精神分裂症이나 偏執症 患者가 될 수도 있다. 騷音은 聽覺만이 아니라 몸과 精神, 그리고 存在 自體를 威脅한다.



    騷音의 相當 部分은 우리 自身이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種類의 소리를 내고, 그 소리의 一部가 騷音으로 變質된다. 그러니까 사람은 소리를 내는 發聲器官과 더불어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갖고 있다. 弱肉强食의 法則이 儼存하는 自然 生態系 안에서 動物은 基本的으로 沈默하며 먹잇감들의 낌새를 豫測하거나 捕食者들이 다가오는 危險을 感知하기 위해 귀를 쫑긋 세우고 소리를 들었다.

    소음은 어떻게 우리 삶에 관여하는가?

    交通滯症

    “動物은 自身의 모습을 감추기 위해 沈默하고, 肉體的 實體를 드러내기 위해 騷音을 낸다.”(조지 프로흐니크, ‘沈默의 追求’)

    周邊의 소리를 더 잘 듣게 하는 귀의 增幅 機能을 맡는 중이(中耳)는 다른 한便으로 소리의 緩和 機能을 한다. 이렇듯 귀는 살아남기 위해 소리를 키우고 한便으로는 自身이 내는 목소리를 죽이며 進化해왔다.

    1930年 도쿄衛生硏究所 所屬 科學者들이 有意味한 實驗을 始作했다. 醫師인 후지마키와 아리모토는 흰 쥐 40마리를 20마리씩 둘로 나눈 뒤 두 무리를 큰 騷音을 없앤 房과 시끄러운 環境에 놓아두고 兩쪽 무리의 몸에 나타난 變化와 健康狀態를 견주어봤다. 두 醫師는 날마다 汽車 1283臺가 지나가는 高架 鐵로 밑의 騷音 속에서 자란 쥐가 더욱 神經質的이고, 成長이 더디고, 새끼의 死亡率이 높고, 繁殖力이 떨어지고, 더 자주 먹는다는 事實을 밝혀낸다. 하지만 反轉이 숨어 있었다. 騷音 속에서 자란 쥐들의 삶은 確實히 고약했지만 壽命이 特別히 짧지는 않았다. 高架 鐵로 밑의 騷音 속에서 자란 쥐들은 騷音이 遮斷된 環境에서 자란 쥐보다 53日을 더 살았다. 騷音이 壽命을 短縮하는 것은 아니지만 삶의 質을 確實하게 떨어뜨린다는 것은 自明해 보인다. 어쨌든 好奇心 旺盛한 두 醫師 德分에 우리는 騷音이 生命體에 어떤 式으로든 深刻한 影響을 끼친다는 事實을 알게 되었다.

    騷音 中毒者로 산다는 것

    우리는 騷音과 ‘뒤엉켜’ 살며 騷音의 支配를 받고, 騷音이 끼치는 나쁜 影響을 持續的으로 몸과 마음으로 받으면서도 더러는 騷音을 사랑하기도 한다. 騷音을 괴로워하면서도 騷音을 사랑한다는 이 矛盾的 事實이 놀랍지 않은가? 조지 프로흐니크는 騷音이 일으키는 被害를 調査하고, 人類가 沈默하지 못하면서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를 探索하기 위해 醫師, 神經科學者, 進化學者, 音響 專門家 等을 만났다. 携帶用 音樂 機器들의 擴散, 鼓膜을 刺戟하는 시끄러운 音樂이 울려 퍼지는 쇼핑센터와 패스트푸드 飮食店들, 몇 年씩이나 울려 퍼지는 거리의 工事 騷音들, 大都市의 거리를 占領한 엄청난 車輛들이 내지르는 갖가지 騷音의 洪水 속에서 沈默의 空間은 사라져간다. 조지 프로흐니크는 騷音에 關聯된 專門家와 日常에서 沈默을 追求하는 사람을 만나고 直接 騷音과 沈默을 經驗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는 沈默과 騷音의 關係를 追跡하면서 우리 社會가 어째서 이토록 시끄러워졌는지, 沈默하지 못하면서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를 따져들어간다. 그의 目標는 분명해 보인다. 그는 우리가 잃어버린 ‘沈默의 權利’를 어떻게 되찾을 수 있는지를 具體的으로 풀어나간다. 그는 이렇게 적는다.

    “沈默에 對한 追求를 理解하려면 騷音을 追求하는 일에 對한 追跡이 또한 必要하다. 沈默과 騷音은 함께 連結되어 있어서 서로 反應을 보인다. 騷音에는 社會의 사랑을 받는 要素가 있는 것 같다. 騷音은 우리가 拒否하거나 때로는 여름밤의 放縱으로 웃어넘기기도 하는 熱烈하고 變德스러운 事件이다. 하지만 騷音은 놀랄 만큼 執拗하게 우리를 支配하기 때문에 眞心으로 沈默을 누리고 싶다면 自身이 騷音과 얼마나 뒤엉켜 있는지 깨달아야 한다. 沈默과 騷音은 한 가지 問題를 構成하는 兩面이므로 沈默이 自身에게 무엇을 안겨줄지, 그리고 自身을 그토록 소란스럽게 刺戟하는 要素가 무엇인지 함께 살펴봐야 한다.”(조지 프로흐니크, 앞의 冊)

    우리 삶을 둘러싸고 刺戟하는 騷音의 正體를 좀 더 仔細하게 들여다봐야 한다. 自鳴鐘의 搖亂한 소리가 새벽잠을 깨운다. 거리는 어떤가? 온통 騷音의 덩어리다. 오토바이와 大型트럭이 疾走하는 소리, 自動車의 타이어가 미끄러지는 소리, 自動車의 始動 거는 소리, 神經質的으로 울려대는 警笛들…, 騷音의 絢爛함에 우리 靈魂은 어리둥절해한다. 그러나 騷音에 對한 짧은 不適應症은 以內 解消된다. 騷音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거리를 지나서 事務室로 들어선다. 연이어 울리는 電話벨 소리, 팩스機나 複寫機 作動소리들, 椅子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 큰 목소리로 주고받는 사람들의 對話…, 낮의 事務室도 騷音의 占領地區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서 우리를 맞는 것은 騷音이다. 텔레비전이 기총소사하듯 쏟아내는 騷音들, 眞空淸掃器와 洗濯機가 돌아가는 소리…, 어디에도 沈默은 없다.

    都市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自身도 모르는 사이에 恒久的 難聽者나 騷音 中毒者가 되어 一生을 마친다. 어떤 사람들은 소리의 不在를 견디지 못한다. 周圍가 조용하면 그들은 안절부절못하며 心的 動搖를 감추지 못한다. 어떤 毒巨人들은 소리의 不在가 두렵다고 말한다. 더러는 잠자는 동안에도 텔레비전을 켜놓는다고 한다. 텔레비전이 쏟아내는 騷音이 不安을 잠재우고, 心的 動搖를 다독여주며, 靈魂을 쉴 수 있게 한다고 말한다.

    “現在 世界的으로 最大 騷音源은 交通이지만 그리 멀지 않은 未來에 電氣自動車가 量産되면 高速道路의 騷音은 相當히 줄어들 것이다. 나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過度하게 시끄럽다며 猛烈히 非難하는 商業的 環境 여러 곳을 訪問해서, 所有主가 그토록 시끄러운 音量을 내는 動機가 무엇인지 把握하려 했다. 商店과 飮食店은 손님의 關心을 끌려고 騷音을 내고 손님을 지나치게 刺戟하면서 自身들의 存在를 誇示한다. 個人이 自己 말소리를 듣고 싶어하고 빈房에 들어서자마자 텔레비전을 켜는 理由에는, 消滅에 對한 두려움, 沈默의 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永遠한 靜寂에 對한 두려움 等이 있다. 깨어 있거나 때로는 잠자는 내내 個人 音響 裝備로 사운드트랙을 듣는 사람들은 소리가 클수록 소리의 울림에 몸과 마음이 고동치고 쓸데없이 注意가 흩어지는 일이 줄어든다고 말했다. 내가 騷音을 위한 騷音으로 생각한 것은 自動車 오디오 分野로, 여기서 騷音을 부추기는 要因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베이스의 純粹한 官能性이었고, 또 하나는 붐 카를 모는 사람들 大部分이 搖亂한 交通 소리에 平生 파묻혀 산다는 事實이었다. 騷音에 묻혀 生活하는 現代人에게서 一種의 音響的 스톡홀름 신드롬을 찾아볼 수 있다는 뜻이다.”(조지 프로흐니크, 앞의 冊)

    우리가 騷音에서 달아나려고 하면서도 정작 沈默의 空間을 견디지 못한다는 事實은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室內의 沈默을 두려워해서 빈 房에 들어서자마자 自身도 모르게 텔레비전을 켜는 사람은 얼마나 많은가? 平生을 騷音과 뒤엉켜 살다가 우리는 ‘音響的 스톡홀름 신드롬’에 빠지기도 한다. 많은 境遇 騷音으로 생긴 被害는 報告되지 않는다. 그러나 開發途上國에서 騷音으로 인한 心血管 損傷으로 생기는 心臟痲痹가 年間 4萬5000件에 達한다는 事實은 놀랍지 않은가? 美國人 세 名 가운데 하나는 이어폰 使用으로 聽力에 深刻한 損失을 입고 있다. 많은 家庭 紛爭의 불씨가 되는 것도 騷音이다. 또 持續的으로 騷音 環境에 露出된 兒童은 言語 發達에 나쁜 影響을 받을 수 있고, 騷音은 自閉症 發生 增加와도 關係가 있다.

    沈默, 神이 준 膳物

    소음은 어떻게 우리 삶에 관여하는가?

    亂鬪劇 벌이는 政治人들.

    그렇다면 沈默은 우리에게 어떤 이로움을 주는가? 절의 修行者들이나 修道院의 修道僧들은 자주 沈默에 귀를 기울이며 修行을 한다. 절間의 ‘默言 隨行’이 代表的인 例다. 조지 프로흐니크는 修道院에 滯留하면서 修道僧들과 함께 時間을 보낸다.



    “나는 修道院에 滯留하는 내내 明快하고 具體的으로 實踐할 수 있는 가르침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가르침 代身 얻은 것은, 알지 못함으로써 그리고 마음이 繼續 밖으로 向함으로써 有益을 얻을 수 있다는 强力한 暗示였다.”(조지 프로흐니크, 앞의 冊)

    그럼 具體的으로 그 有益이란 어떤 것일까? 神經科學者 비노드 메논은 “소리 사이에 沈默이 흐르면서 頭腦가 다음 소리를 豫測하려 애쓸 때 頭腦 活動이 絶頂에 이른다”는 事實을 밝혀낸다.

    “精神은 소리 刺戟이 없을 때 터져 나오는 神經 點火 德澤에 集中하고 記憶을 符號化하는 主要 任務를 遂行한다.”(조지 프로흐니크, 앞의 冊)

    沈默이 遂行의 方便이 될 수 있는 理由는 分明하다. 沈默은 神이 人類에게 준 膳物이다. 말 속에도 沈默이 깃든다. 말들은 그 內部에 긴 沈默과 짧은 沈默을 갖고 있다. 건성으로 듣는 사람은 소리만 듣지만, 깊이 傾聽하는 사람은 말 속에 숨은 沈默에 귀를 기울인다. 冊은 他人의 말과 世界를, 저 멀리서부터 오는 意味들을 謙虛하게 傾聽하려는 者의 것이다. 冊을 읽을 때 集中하면 할수록 周邊 騷音을 잠재우는 힘은 强力해진다. 騷音은 잦아들고 沈默의 吳의(奧義)에 더 가깝게 다가간다.

    “省略法의 글쓰기, 不明確한 再現, 斷續的인 對話體, 그리고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말없음標”(마르크 드 스메트, 앞의 冊) 等은 가장 흔한 沈默의 樣態들이다. 말줄임標는 通史的 망설임, 判斷留保의 奇貨다. 군데군데 配置되어 있는 그 沈默들은 讀者를 冊 속으로 끌어들이고 能動的인 參與를 誘導한다.



    “읽히는 沈默. 그것은 音響的 現實에 겹쳐지는 하나의 副主題(副主題), 自我에 對한 省察과 世界 認識의 場所다.”(마르크 드 스메트, 앞의 冊)

    沈默은 닫힌 腦와 地殼을 열고, 感情을 豐富하게 할 뿐만 아니라 未來에 對한 先驗과 令監의 中樞를 刺戟한다. 大槪의 훌륭한 冊들은 文字와 文字 사이, 意味와 意味 單位 사이에 沈默을 配置한다. 때때로 冊을 읽다가 文字 너머로 廣漠하게 펼쳐진 沈默과 고요의 空間을 만나기도 한다. 그럴 때 우리는 文字의 世界에서 빠져나와 그 沈默 속에서 오롯하게 沈默을 吟味할 必要가 있다.

    “暫時 동안의 沈默도 우리에게 豐饒로운 未知의 世界를 안겨줄 수 있다. 精神을 集中하고 經驗을 吸收할 수 있는 空間을 提供하고, 함께 있는 사람이 뜻밖에 놀라운 存在일지 모른다는 信號를 보내고, 말로 表現할 수 없어도 眞實을 가슴에 울려 퍼지게 하며, 自身이 좀 더 偉大한 存在에 依存하고 있다는 事實을 다시 한 番 깨닫게 한다.”(조지 프로흐니크, 앞의 冊)

    沈默은 소리의 不在에서 빚어진 消極的인 事態가 아니라 能動的인 現象이다. 沈默은 意味의 融合이고 고요의 爆發이며 기쁨의 殺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意味 있는 “言語의 跳躍臺”(마르크 드 스메트, 앞의 冊)다. 헨리 데이비드 小路는 혼자 콩코드 江과 메리脈 講을 旅行한다. 그 旅行에서 소리와 沈默이 한데 어울려 있는 것을 느꼈다. 小路는 어둠 속에서 沈默은 두터웠고, 그 깊은 沈默이 내려앉은 自然 속에서 櫓를 저을 때 櫓가 물을 치며 내는 소리와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며 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小路는 모든 소리가 “沈默의 供給者이자 下人”이라는 事實을 깨닫고, “소리는 沈默과 對照를 이루고 沈默을 보듬을 때에만 듣기 좋다”고 적었다. 沈默이 意味 있는 삶에 不可缺한 要素라면, 우리 周邊에서 漸漸 더 沈默이 枯渴되고 있다는 事實은 憂慮할 만한 일이다. 우리가 사는 大都市에서 沈默은 거의 사라졌다. 代身에 騷音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騷音은 그 自體로 ‘작은 神’李 되어 우리의 敬拜를 받고 우리의 몸과 마음을 支配한다.

    沈默은 騷音의 안티테제가 아니다. 沈默은 스스로 存在를 平定하고 스스로 태어나는 存在다. 그 무엇의 안티테제가 아니란 뜻이다. 차라리 騷音은 沈默의 死體, 或은 突然變異다. 沈默은 騷音을 기르지 않는다. 沈默이 젖을 물려 기르는 것은 소리들이다. 소리들은 沈默에서 멀리 나갔다가도 沈默으로 돌아가려 하는 性質을 끝내 維持한다. 沈默과 소리는 血緣關係다. 소리의 波動을 調査해보면 波動의 사이사이에 짧은 沈默이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모든 좋은 소리 속에는 沈默의 痕跡들이 남아 있다. 좋은 소리들은 沈默을 좋아하고 沈默을 傾聽하는 傾向이 있다. 沈默과 소리는 相互 渗透한다. 소리는 沈默 속에서 避靜(避靜)하며 묵은 때를 벗는다. 그렇게 소리는 沈默을 받아들임으로써 高貴해진다. 거꾸로 沈默은 소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스스로 沈默임을 證明한다. 소리가 없다면 沈默도 없다. 그러나 騷音은 다르다. 騷音은 沈默과는 無關하게 存在한다. 차라리 그것은 存在가 아니라 存在의 흩뿌림이다. 소리는 沈默의 存在를 또렷하게 하지만, 騷音은 沈默을 假借 없이 殺害한다. 沈默과 소리는 共存이 可能하지만, 沈默이 騷音과 共存하는 일은 不可能하다.

    소리와 騷音의 差異

    沈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價値를 갖고 있다. 나는 더 많은 沈默을 누리고 싶다. 沈默의 豐富한 價値를 吟味하며 沈默의 祝福 속에서 살고자 한다는 것은 “바로 現在 時點에서 沈默을 包容하는 場所가 必要하다”는 事實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修道院을 巡禮하면서 沈默의 價値에는 未知의 世界를 復活하는 것이 包含된다고 結論 내렸다. 自身이 매우 잘 안다고 느끼는 生活樣式에서 方法을 찾는 사람이 많은 時代에, 熟考와 驚異에 接近하는 通路로써 沈默의 價値는 無限하다.”(조지 프로흐니크, 앞의 冊)

    소음은 어떻게 우리 삶에 관여하는가?
    장석주

    1955年 忠南 論山 出生

    1979年 조선일보 新春文藝 詩 當選, 동아일보 新春文藝 文學評論 入選

    同德女大, 경희사이버大 出講

    著書: ‘느림과 비움의 美學’ ‘只今 어디선가 누군가 울고 있다’ ‘몽海航로’ 等


    結論은 明瞭하다. 騷音은 우리의 生活과 健康을 망가뜨리고, 삶의 質을 떨어뜨리는 데 한몫을 한다. 反面에 “고요와 소리 사이의 특별한 均衡”인 沈默은 知覺의 힘을 促進시키고, 우리 삶에 神聖함이 깃들게 한다. 한마디로 騷音은 우리를 죽이고, 沈默은 우리를 살린다. 騷音의 世界와 斷乎하게 訣別하고, 저 깊고 평화로운 沈默의 世界를 向해 걸어가는 것이다. 者, 當身의 選擇은 沈默 너머의 世界인가, 아니면 現實의 騷音들인가.

    | 함께 읽으면 좋은 冊들

    ●조지 프로흐니크 | ‘沈默의 追求’ | 안기순 옮김 | 고즈윈, 2011

    ●마르크 드 스메트 | ‘沈默 禮讚’ |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2007

    ●막스 피카르트 | ‘沈默의 世界’ | 최승자 옮김 | 까치,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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