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映像] 勞動運動家가 왜 國民의힘으로
그의 삶은 鬪爭의 連續이었다. 大學 時節 學生運動이 그 始作이다. 1982年에는 集會 및 示威에 關한 法律 違反으로 1年間 獄살이를 했다. 獄에서 나온 뒤에는 勞動運動에 投身했다. 鎔接工으로 일했으며 프레스工場, 鑄物工場을 다니며 민주노총의 底邊을 닦았다. 以後 민주노총에서 代辯人, 政策硏究院 院長, 事務副總長을 맡았다. 이수봉 民生硏究院長이 걸어온 길이다.
그런 그가 國民의힘 合流를 생각하고 있다. “主思派 勢力이 이끄는 利權團體.” 그가 民主勞總에 내린 評價다. “民主勞總뿐만 아니라 自稱 ‘進步’라고 하는 勢力의 相當數가 主思派의 影響 아래 있다”는 게 그의 主張이다. 勞動者를 위해 鬪爭하던 活動家가 進步가 아닌 保守를 選擇한 理由는 뭘까.
언제부터 勞動界에 主思派 勢力이 合流했나.
“1980年代 後半부터 徵兆가 보였다.”
그런데도 勞動界가 主思派를 품은 理由가 있다면.
“軍事獨裁 時期였으니 一種의 抵抗 方式 中 하나로 龍仁이 됐다. 以後 1995年 민주노총이 생기며 이들도 合流했다.”
勞動界에서 主思派가 多數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活動家 10名이 있으면 10萬 名 程度를 左右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素數라 해서 影響力이 작다고 볼 수는 없다.”
그는 “처음에는 誠實한 活動家라고 생각했으나 조금씩 中央 組織을 掌握해 가더라”라면서 씁쓸한 表情을 지었다.
그의 所懷와 向後 計劃 等 最近 이야기는 이 記事 上段의 映像과 유튜브 ‘매거진東亞’ 채널에서 確認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