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君臨하면 버림받고 讓步하면 亡한다? 食口들과도 去來를 하라 !|新東亞

君臨하면 버림받고 讓步하면 亡한다? 食口들과도 去來를 하라 !

① 家庭 內 政治

  • 李宗勳│時事評論家 rheehoon@naver.com

    入力 2013-07-22 17: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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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政治人만 政治를 하는 게 아니다. 우리 모두는 日常 속에서 늘 政治를 한다. 우리는 누군가와의 關係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런 關係에선 葛藤과 離合集散이 發生한다. 이를 잘 解決할 것인지 與否는 政治力이 決定한다.
    • 이에 따라 우리의 進路도 달라진다. 그렇다면 ‘生活政治’는 우리가 꼭 알아 둬야 할 삶의 指針이 된다. 이 連載를 통해 家庭 內 政治, 戀人關係 內 政治, 職場 內 政治, 學校 내 政治, 交友關係 內 政治 等 다양한 類型의 生活政治를 紹介한다.
    군림하면 버림받고 양보하면 망한다? 식구들과도 거래를 하라 !

    家族 關係를 素材로 한 映畫 ‘高齡化 家族’의 한 場面.

    政治는 權謀術數, 權力獨占, 非理 等 否定的인 무언가를 떠올리게 한다. 이런 評價는 萬國 共通인 듯하다. 映畫나 演劇,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政治人은 戱畫化의 對象이다. 오늘날 大衆의 머리에는 先入觀이 剛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政治는 나쁜 것이다’ ‘政治는 나와 상관없는 것이다’라는 것이 代表的이다.

    그러나 이는 現實에 對한 誤解일 수 있다. 政治가 나쁜 것이라면 政治가 없어져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國家가 存續할 수 없다. 國家 自體가 政治의 副産物이다. 政治가 나와 상관없다는 認識은 虛僞意識이자 危險한 思考다. 實際로 政治는 우리 日常을 支配한다. 우리는 오늘도 政治人이 決定한 大衆交通料金이나 稅金, 公課金을 낸다. 政治는 좋은 것이고, 우리와 아주 關聯이 깊은 것이고, 누구나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政治를 한다고 前提할 때, 特히 生活 속에서 政治를 잘해야 한다고 前提할 때 生活政治의 主 舞臺는 어디일까. 代表的인 세 곳을 想定할 수 있다. 家庭, 職場, 學校다. 學校를 包含시킨 理由는 우리나라의 수많은 사람이 大學 또는 大學院까지 學校를 다니고 結婚한 以後에는 子女 敎育을 最大 關心事로 여기기 때문이다.

    三位一體 生活政治는 家庭, 職場, 學校에서의 政治를 中心으로 生活政治가 綜合的으로 具現된다는 意味다. 말이 쉬워 三位一體地, 事實 세 領域에서 政治를 잘하는 것은 決코 만만치 않다. 그러나 힘들다고 抛棄할 수도 없다. 잘해내야 하고 또 잘해낼 수 있다.

    外食 메뉴 選擇의 政治學



    具體的으로 家庭 內 政治의 問題로 들어가보자. 우리는 政治에 無關心한 사이에 家族 構成員들에 對한 影響力을 漸次 잃어가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喪失한 影響力, 곧 ‘權力’을 되찾아야 한다. ‘暴君’李 돼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相對의 自發的 支持와 同意를 이끌어내는 것이야말로 眞正한 權力行使이자 政治다.

    家庭 內 政治에서 가장 重要한 原則은 ‘食口들과도 去來를 하라’이다. 家族 構成員 各各이 利己的인 存在라는 點을 認定해야 한다. 그리고 相對와 交換 可能한 價値들을 찾아내 去來를 하는 것이다. 事實 모든 種類의 政治는 妥協과 讓步, 卽 去來를 통한 全體 利益의 增大를 꾀하는 活動이다. 또한 政治는 限定된 資源을 合理的으로 配分하는 活動이기도 하다. 이 亦是 廣義의 去來라고 할 수 있다.

    家庭 內 政治의 主要 이슈는 衣食住다. 그中 먹는 問題는 큰 關心事다. 오늘, 어제 저녁 때 우리 家族은 무엇을 먹었는가. 누가 그 메뉴를 定했는가.

    當身이 主婦라면 當身이 定했을 可能性이 높을 것이다. 하지만 當身이 職場을 다니는 男子라면 주는 대로 먹었을 可能性이 높다. 當身이 그 집의 아들이나 딸이라면, 큰 異變이 없는 限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주는 대로 먹었을 可能性이 높다. 어머니가 旅行이나 外出 中이라면 무언가를 注文해서 먹었거나 있던 飮食을 데워서 먹었을 수 있다.

    저녁을 나 혼자 먹는다면 問題는 簡單하다. 하지만 家族이 다 함께 먹는다면 狀況은 조금 複雜해진다. 家族 構成員 個個人이 願하는 메뉴가 모두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집에서 저녁을 먹지 않고 外食을 할 때는 살짝 더 熾烈해진다. 그 機會가 자주 오지 않는다면 熾烈함의 水準은 높아진다. 쉽게 오지 않는 機會, 可能한 限 最高의 滿足을 追求하려 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 結果, 온 家族이 滿足할 만한 外食 메뉴와 그에 合當한 食堂을 찾는 일은 거의 퍼즐을 푸는 水準이 되어버리곤 한다. 決斷力이 出衆한 當身이 메뉴와 食堂을 斷乎하게 決定했다고 해서 問題가 解決되는 것은 아니다. 그때부터 누군가는 속으로 當身에게 不滿을 가질지 모른다.

    家族을 잘 說得해 一旦 어딘가로 갔다고 치자. 여기서 葛藤 狀況이 終了되는 것은 아니다. 食堂에서 뭔가 불만스러운 點이 發見되면 食堂을 批判한다. 時間이 지나면서 이 食堂을 決定한 사람에게로 怨望이 向하기 마련이다. 그러게 왜 이곳으로 왔느냐는 둥, 이래서 이 집은 싫다는 둥, 亦是 이럴 줄 알았다는 둥. 입 밖으로 이야기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不滿 어린 얼굴을 한 家族과 마주 앉아 不便한 時間을 이어가야 한다.

    이 瞬間 當身이 ‘그래도 맛은 좋지 않니?’ ‘다음番엔 다른 곳으로 가자’라는 慰勞 코멘트를 내놓아봐야 別 所用이 없다. 當身마저 暴發해버린다면? 狀況은 收拾하기 어려운 地境으로 간다. 서로 잘해보자는 趣旨로 마련한 外食 자리가 關係에 더 금이 가게 만들 것이다. 이렇게 되면 相當數 家族 構成員은 다시는 當身과 外食을 하고픈 생각이 없어지기 마련이다.

    些少한 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外食 메뉴 定하기, 食堂 定하기엔 高度의 政治力이 必要하다. 꼭 當身이 願하는 곳으로 가려고 한다면, 事前 整地作業을 해둬야 한다. 먼저 提案할 때 同調해줄 누군가를 包攝해야 한다. 그 사람이 配偶者일 수도 있고, 子女일수도 있고, 兄弟일 수도 있고, 父母일 수도 있다. 暫時 생각해보기 바란다. 누가 가장 만만한지를 말이다. 同調할 사람을 찾았다면, 成功에 한 걸음 다가섰다고 말할 수 있다.

    밑밥 던지고 밑간 보기

    하지만 이것으로 끝난 건 아니다. 누군가는 不滿을 가질 것인데 이 사람에게 밑밥을 던져두어야 한다. 當身의 決定에 태클을 걸 그 사람에게는 다음番에는 네가 좋아하는 곳으로 가자거나, 오늘 거기에 가주면 뭘 해주겠다거나, 뭔가를 免除해주겠다는 式의 接近法이 奏效할 것이다. 드물긴 하겠지만 相對가 돈을 要求할 수도 있다. 相對方이 剛하게 나오는 瞬間, 當身도 暫時 苦悶하게 될 것이다. 果然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選擇權을 내려놓는 瞬間 當身 입에서 나올 말은 定해져 있다.

    “나는 따라갈 테니까, 알아서 決定해!”

    이 瞬間, 다른 家族 構成員들은 暫時 움찔할 것이다. 相對方이 수그러든다면 좀 더 順調롭게 進行될 것이고, 當身이 줘야 할 것도 줄어들 것이다. 한 番쯤은 튕기면서 反應을 보는 것도 必要하다. 이렇게, 反對를 할 사람까지 손아귀에 넣었다면, 外食은 萬事亨通이다.

    그런데 이런 過程이 조금 疲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맞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내가 願하는 곳으로 갈 理由가 없다면, 果敢하게 讓步하는 것도 한 方法이다.

    하지만 이런 讓步가 지나쳐 每事에 當身의 意見을 開陳하지 않고 追從만 하면 家族 構成員들은 當身의 自己 決定權을 尊重하지 않게 된다. 家族에 對한 當身의 影響力이 縮小되는 것은 勿論이고 當身이 當身 人生의 主要 決定을 當身 뜻대로 하지 못하는 狀況에 몰릴 수 있다. 家族 構成員들이 當身의 일에, 當身의 進路에 자주 끼어들려 하고 干涉하려 하기 때문이다. 當身의 人生은 正말 危險에 빠질 수 있다.

    그러니 當身은 平素 些少한 日에라도 當身의 主張을 자주 表現해둬야 한다. 同時에 平和를 깨지 않는 政治力을 發揮해야 한다.

    若干의 밑간만 봐주면 家族의 外食은 훨씬 부드러울 수 있다. 또 즐거울 수 있다. ‘조용한 家族’의 ‘殺伐한 晩餐’이 아니라 ‘시끄러운 家族’의 ‘熱情的 晩餐’을 만들 수 있다. 政治는 싸울 것을 말로 하는 것이다. 이 點 잊지 말 일이다.

    內亂이 發生하지 않는 理由

    萬若 當身이 家長이고 外食 메뉴 定하기를 賢明하게 解決했다면 當身에게 좀 더 어려운 質問을 던져보고 싶다.

    ‘집 안에서 當身은 어떤 指導者인가?’

    時도 때도 없이 박근혜가 어쩌니 하며 政治 論評을 늘어놓는 當身! 정작 當身이 家庭에서 어떤 政治를 하고 있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獨裁者? 그보다 덜한 權威主義者? 아니면 極端的 放任主義者? 아니면 그 좋다는, 合理的 民主主義者?

    權威主義的 政治人에게 苛酷하기 그지없는 評價를 내리는 男性 家長 相當數는 家庭에서 獨裁를 일삼는다. ‘나는 絶對로 獨裁者가 아니다’라고 생각하는가. 當身 생각 말고, 家族들에게 眞摯하게 한番 물어보기 바란다. 어떤 評價가 나올지 좀 두려울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도 獨裁者였다. 政治學을 專攻했고, 大衆을 相對로 글을 쓸 때나 말을 할 때 늘 民主主義를 强調하곤 했지만, 정작 ‘집 안에서 아내는 男便에게 服從해야 한다’ ‘아이들은 無條件 아버지의 뜻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조금 卑怯한 핑계긴 하지만, 父母의 影響이 컸던 게 아닐까 한다.

    軍人이셨던 내 아버지는 映畫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트랩 大領 같았다. 트랩 大領처럼 美男에 富者였다는 뜻이 아니라, 完全히 ‘軍隊式’으로 家庭을 運營했다는 이야기다. 아버지의 뜻이었는지 어머니의 뜻이었는지는 正確히 모르겠지만, 아버지가 出退勤할 때 우리 다섯 兄弟는 트랩價의 子女들처럼 玄關 앞에 一列로 堵列했다.

    아버지가 退勤할 때 어머니는 門앞까지 마중을 나갔다 아버지의 뒤를 바짝 뒤쫓아 오면서 그날의 아버지 氣分을 몸짓으로 우리에게 表現하곤 했다. 아버지의 氣分이 나쁜 날에는 ‘뿔이 났다’는 意味로 머리 뒤로 兩쪽 검指를 들어올렸다. 이런 날엔 우리 兄弟들은 人事를 마치기 바쁘게 후다닥 房門을 닫고 들어가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냈다.

    이런 날의 食事 雰圍氣는 어둡기 짝이 없었다. 아버지의 기침소리 하나에도 흠칫 놀라곤 했다. 勿論 平常時 食事 雰圍氣도 썩 和氣靄靄했던 것은 아니다. 上席에 앉은 아버지를 中心으로 序列대로 앉아서 可能한 限 소리를 내지 않으면서 食事를 했다. 이어 아버지의 一場訓示가 길게 이어졌다. 食事 時間에 沈默을 깰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 어머니밖에 없었다.

    이런 環境 속에서 자라났으니 내가 家父長的인 行態를 보인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多幸히 내 아내 亦是 家父長制를 尊重하는 家庭에서 자라난 탓에, 속으로는 不滿이 쌓여도 可能하면 내 脾胃를 맞추려 애써왔고 그 때문에 內亂이 發生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나를 包含한 周圍의 많은 中年 男性은 가끔은 獨裁者로, 普通 때에는 權威主義者로, 하지만 겉으로는 合理的 民主主義者를 標榜하며 살아온 것 같다.

    暫時 앙탈을 부려본들…

    군림하면 버림받고 양보하면 망한다? 식구들과도 거래를 하라 !

    夫婦 關係는 다툼과 和解의 連續이다.

    當身은 어떤 指導者인가. 或是 나와 비슷하眞 않은가. 그래서 幸福한가. 只今도 家族들이 當身의 權威에 服從하는가. 單刀直入的으로 말해, 如前히 當身의 말이 家族들에게 씨알이 먹히는가. 처음에는 고분고분하던 아내, 군말 없이 따르던 子女들이 언제부턴가 當身의 말에 토를 달거나, 無視하진 않던가. 그래서 他律的 壓迫感을 느낀 나머지 民主的인 指導者로 變身하진 않았는가.

    많은 男性 家長은, 第3世界의 獨裁者들이 그러하듯이, 스스로의 決定이 아닌 아래로부터의 抵抗에 못 이겨, 民主主義를 實踐하는 方向으로 轉向한다. 權力의 無常함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말이다. 얼마 前 TV 連續劇에서 나이 먹은 媤어머니가 며느리의 부엌일을 도우면서 이런 말을 하는 場面이 나왔다.

    “내가 이런 일을 하는 게 집 안에서 밀려나는 내 位相을 보여주는 것 아니겠니?”

    그렇다! 權力의 論理는 家庭에서도 嚴正하게 貫徹되고 있는 것이다!

    新婚 初에 機先을 잡아야 한다! 人生 先輩들은 이런 助言을 많이 한다. 이런 助言을 따른답시고 結婚 初期 主導權 다툼을 벌인 이가 적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成功했는가. 아마도 失敗한 이가 더 많을 것이다.

    當身이 結婚 前에 이미 主導權을 쥐고 있었다면, 機先을 잡기 爲한 努力을 할 必要가 없었을 것이다. 커플 間의 主導權은 事實 戀愛 時節에 決定된다.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讓步할 수밖에 없는 構造. 그 얄궂은 사랑의 力學關係 속에서 ‘덜 사랑하는 쪽’李 戀愛 時節부터 主導權을 잡는 것이다. 그리고 이 關係는 結婚 後 家庭 內 權力關係의 基底를 形成하면서 잘 變하지도 않는다.

    當身의 境遇는 어떤가. 當身이 더 사랑하는가, 아니면 相對方이 더 사랑하는가. 萬若에 當身이 더 사랑하는 쪽이라면, 新婚 初의 主導權 다툼 따위는 無意味하다. 心理的으로 이미 접고 들어가는 狀況에서 暫時 앙탈을 부려본들 構造的인 變化가 생길 理 없기 때문이다. 또, 設令 一時的으로 當身에게 主導權이 오더라도 곧 元來 狀態로 還元될 可能性이 높다. 愛情關係의 彈性은 意外로 强하기 때문이다.

    愛情關係 다음으로 家庭 內의 權力關係를 결정짓는 變數는 經濟圈이다. 다시 말해, 누가 돈을 버느냐에 따라서 主導權을 잡는 쪽이 決定된다. 맞벌이 夫婦가 늘어난 狀況에서는 ‘누가 더 버느냐’에 따라 主導權을 쥐는 쪽이 달라진다. 아무래도 혼자서 돈을 버는 사람, 둘이 벌더라도 더 많이 버는 사람이 主導權을 쥘 可能性이 높다.

    經濟圈과 關聯해서는 ‘누가 管理하느냐’도 重要하다. 혼자서 돈을 버는 사람 또는 더 많이 버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銀行 計座管理를 파트너가 하고 있다면, 經濟圈을 完全하게 掌握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이럴 때 푸념처럼 늘어놓는 말이 바로 이것이다.

    “난 돈 버는 機械에 지나지 않아.”

    一般的으로 돈을 버는 사람이 管理에 對한 權限 乃至 發言權을 相當 部分 갖기 마련이지만, 그렇지 못할 境遇에는 일개미로 轉落할 수도 있는 뜻이다.

    永遠한 被支配層 ‘子女’

    子女 掌握力도 家庭 內 權力關係에 影響을 미친다. 家庭 內 永遠한 被支配層인 子女로부터 더 많은 支持를 받는 사람이 더 많은 權力을 行使할 수밖에 없다. 이런 點에서 혼자서 돈을 벌어야 하는 사람이 相對的으로 不利하다. 子女들과 함께 지낼 수 있는 時間이 絶對的으로 不足하기 때문이다. 週末에 挽回하려 애써보지만, 이것도 限界가 있을 수밖에 없다.

    子女들이 成長함에 따라서 狀況은 바뀔 수 있다. 아이들도 크면서 누구 德에 自己가 먹고사는지를 次次 알아가기 때문이다. 또, 아이들이 돈의 效力을 깨닫기 始作하는 것도 돈을 버는 사람에게는 有利하다. 이런 點 때문에 아이들이 成長한 以後에는 子女 掌握力이 經濟圈의 向背에 따라 變하는 樣相을 보이곤 한다.

    그러나 子女에 對한 掌握力은 金錢的 惠澤을 提供하는 것만으로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요즘 家庭 內 子女의 發言權은 數十 年 前과 比較할 때 훨씬 드세졌다. 父母가 子女에게 온 精誠을 쏟을수록 父母 모두의 子女 掌握力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군림하면 버림받고 양보하면 망한다? 식구들과도 거래를 하라 !


    군림하면 버림받고 양보하면 망한다? 식구들과도 거래를 하라 !
    家庭 內 權力關係에 影響을 미치는 變數는 以外에도 많다. 누가 더 나이가 많은가, 누가 더 身體的으로 健康한가, 누가 더 敎育을 많이 받았는가, 누가 더 積極的인 性格을 가졌는가, 누가 더 좋은 집안 背景을 가졌는가 等이 그것이다. 結局 夫婦 가운데 누가 더 많은 權力 資源을 가졌는지에 따라 主導權의 向背가 決定된다고 보는 것이 妥當하다. 當身이 家庭 內에서 相對方에 비해 얼마나 많은 權力資源을 가지고 있는지를 簡單하게 診斷해보자! ‘나’로 체크된 項目이 많을수록 當身이 主導權을 많이 行使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權力 資源이 影響을 미친 結果로 인해 4個의 權力關係 類型이 나타난다. 많은 專門家가 다양한 類型을 提示하지만 이를 整理하면 男便主導型, 아내主導型, 夫婦協力型, 夫婦對立型 等 4가지 類型으로 나뉜다.

    이 네 가지 夫婦 權力關係 類型 中 夫婦 모두에게 가장 滿足度가 높은 類型은 무엇일까. 夫婦協力型이다. 이어 男便主導型, 아내主導型, 夫婦對立型 巡이다. 男便主導型의 滿足度가 아내主導型보다 높은 理由는 家父長制의 傳統이 如前히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아내에게 順從해야 하는 男便보다는 기꺼이 男便에게 順從하려드는 아내의 모습이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雰圍氣 말이다. 하지만 最近 들어선 男便主導型의 比率은 빠르게 낮아지는 反面 夫婦協力型의 比率은 높아지고 있다.

    佳話(家和)는 空짜가 아니다

    우리는 人生에서 가장 많은 時間을 家族과 함께 보낸다. 그 時間이 苦痛의 連續이라면 人生 自體가 苦痛의 連續이라는 말과 다름없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는 옛말이 있다. ‘家庭이 和睦해야 萬事가 잘 풀린다’는 뜻이다. 그만큼 家族 構成員들 間 關係가 重要하다.

    내가 幸福하고 家族 構成員들도 幸福한 그런 家族 關係. 우리 모두는 이런 關係를 願하지만 絶對로 空짜로 얻어지지 않는다. 家庭 內에서도 政治가 必要하다는 點을 깨닫고 이를 實踐할 때 우리는 비로소 佳話(家和)의 境地에 다가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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