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主演 유태준, 演出 어머니 코믹出演 金正日…|新東亞

主演 유태준, 演出 어머니 코믹出演 金正日…

喜劇이 된 유태준 再脫北 騷動 顚末記

  • 이정훈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hoon@donga.com

    入力 2004-11-05 14:05:00

  • 글字크기 설정 닫기
    • 2001年 4月30日 김정일이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은 祖國을 사랑한다’는 親筆 指示를 내림으로써 32年型을 宣告받은 유태준氏는 釋放되었고 그後 그는 中國으로 脫出했다. 아들이 김정일의 配慮로 살아난 것을 안 어머니는 아들에게 이러한 事實을 말하지 말라고 當付해 柳氏의 거짓말은 始作되었다.
    설 連休 다음날인 2月14日子 몇몇 新聞은 北韓을 再脫北한 유태준(劉泰俊·34)氏 事件을 報道하며, 柳氏를 韓國의 ‘빠삐용’으로 描寫했다. 北韓의 國家保衛部는 韓國의 國家情報院과 類似한 機構다. 이 날짜 新聞들은 柳氏가 平壤에 있는 國家保衛部 監獄의 담牆을 넘어 脫獄한 다음 中國으로 再脫北했다고 報道했다. 그런데 바로 이날 柳氏는 平壤의 國家保衛部 監獄에서 脫獄한 것이 아니라, 平南 平成軍에 있는 楊汀(糧政)事業所(말하면 糧穀 道政소)에서 勞動者로 일하다 再脫北한 事實이 確認됐다. 그러자 몇몇 言論은 僞裝間諜 ‘李穗根(李穗根)’을 擧論하면서 柳氏를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몰아붙였다.

    柳氏가 北韓으로 다시 들어간 것은 咸興에 살고 있는 妻를 데려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柳氏는 妻를 데리고 나오지 못하고 國家保衛部에 붙잡혔다. 2月16日子 新聞은 柳氏는 北韓에 붙잡힌 後 南派工作員을 養成하는 平壤의 文殊招待所에서 婦人과 25日間 生活했다고 報道했다. 文殊招待所에서 지낼 때인 2001年 5月, 柳氏는 北韓의 라디오와 TV 放送에 나와 自進 入北했음을 밝히고 北韓 體制를 讚揚했다. 이러한 柳氏가 再脫北한 뒤 北韓을 非難한 것도 柳氏를 믿지 못하게 하는 한 要因이 되었다. 新聞들은 柳氏가 間諜을 養成하는 招待所 生活까지 했으니 工作 任務를 띠고 僞裝 再脫北한 것이 아니냐고 疑心했다.

    1998年 12月2日 韓國에 처음 들어온 後 柳氏는 韓國 國民이 되었다. 大韓民國 國民이 政府의 許可를 받지 않고 몰래 北韓에 들어가면 關聯法에 따라 處罰을 받는다. 1996年 7月31日 小說家 김하기(本名 金榮)氏는 北韓과 가까운 中國 都市에서 술에 醉해 北韓으로 들어갔다가, 10餘日 後 돌아온 적이 있다. 檢察은 韓國으로 送還된 金氏를 國家保安法의 潛入脫出과 鼓舞讚揚 嫌疑로 起訴했다. 大法院은 檢察의 起訴를 認定해 金氏에게 宣告한 3年6月의 懲役刑을 確定한 바 있다. 김하기氏의 事例는 같은 韓國人인 유태준氏에 그대로 適用할 수 있다. 그러나 警察은 國家保安法이 아니라 南北交流協力法 違反 嫌疑로 柳氏를 不拘束 調査했다.

    하루아침에 빠삐용에서 李穗根으로 轉落한 유태준 再脫北 事件의 眞實은 무엇인가. 이 疑問을 풀어가려면 柳氏의 家族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韓國에 온 柳氏의 家族은 어머니 안정숙(安貞淑·59)氏와 性(姓)다른 동생 이근혁(21)氏 그리고 柳氏의 여섯 살짜리 아들로 構成돼 있다. 柳氏에게 ‘배다른’이 아니라 ‘아버지가 다른’ 동생이 있다는 事實은 많은 讀者의 눈길을 끌었다. 吏部(異父) 兄弟를 두었으니 讀者들은 柳氏의 어머니는 事緣이 있을 것이라는 先入觀을 가졌을 것이다. 相當數의 國民들은 ‘紀綱이 무너진 콩가루 집안이니 아들이 再入北을 했을 것이다’라며 兪氏 家族을 白眼視했을지도 모른다.

    柳氏의 어머니 안정숙氏는 엘리트 女性이다. 北韓에서 손꼽히는 名門인 金策工大를 卒業한 安氏는 1965年부터 1992年까지 8個 國語로 出版物을 製作하는 平壤의 外國文出版社에서 硏究士 生活을 했다. 日本語로 製作되는 ‘朝鮮畫報’(朝鮮畵報)는 韓國人에게도 매우 익숙한 北韓의 出版物인데, 朝鮮畫報를 製作하는 곳이 바로 外國文出版社다.



    安氏의 아버지는 1943年 日本 巡査를 죽이고 家族을 데리고 中國으로 逃走했다. 이때 安氏의 오빠는 日本에서 工夫하고 있었다. 光復 後 安氏의 오빠는 北韓으로 돌아와 人民軍 軍官(將校)이 되었다. 1950年 6·25戰爭이 일어나자 오빠는 大隊長으로 參戰해 慶北 盈德에서 戰死했다. 그리고 4年 後인 1954年 安氏 家族은 北韓으로 돌아왔다.

    北韓 政府는 죽은 오빠에게 ‘烈士症(烈士證)’을 發給했는데, 烈士症 德分에 安氏의 家族은 成分을 認定받는 階層이 될 수 있었다. 外國文出版社 硏究史를 할 때 安氏는 人民經濟大學 敎員(敎授)과 結婚해, 유태준을 孕胎했다. 그러나 그女의 男便은 孕胎 4個月 뒤 病死했다. 遺腹子를 낳은 安氏는 10餘 年을 守節하다 아내와 死別한 高級 軍官을 만나 再婚했다. 安氏의 두 番째 男便은 所長(韓國軍에서는 准將)까지 進級해, 前 人民軍에게 醫藥品을 供給하는 後方總局의 君의(軍醫)국장을 맡았다. 두 番째 男便에게는 死別한 前妻에게서 얻은 長成한 子息이 있었다. 安氏는 둘째 男便과의 사이에서 이근혁을 낳았다. 근혁은 安氏의 큰아들인 유태준과 13살 差異가 난다.

    유태준은 새 아버지를 반기지 않았다고 한다. 靑少年期 때부터 집밖으로 돌며 工夫를 게을리했다. 代身 光跡으로 小說을 耽讀했다. 北韓 小說은 全혀 읽지 않고 알렉산더 뒤마, 세익스피어 等 西洋 作家들의 名作을 耽讀했다고 한다. 이때 그는 라디오를 組立해 KBS를 비롯한 韓國 放送을 들으며, 韓國을 憧憬하기 始作했다고 한다.

    北韓에서는 내로라 하는 엘리트들인 安氏 夫婦도 김정일 體制에 嫌惡感을 품기 始作했다. 安氏는 “平壤에서 남들이 보기에는 分明 好衣好食하고 살았지만 우리는 北韓은 곧 亡한다, 아니 亡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고 말했다.

    不知不識間에 北韓體制에 對한 不滿이 露出됐는지 1992年 男便은 咸南 咸興으로 撤職(左遷)되었다. 安氏는 外國文出版史를 그만두고 咸興으로 따라가 函남도일보사에서 일하게 되었다. 1994年 두 番째 男便이 또 病死했다. 그러자 前妻와의 사이에서 낳은 男便의 子息과 安氏는 自然 멀어지고, 安氏는 性 다른 두 아들을 거느린 家庭의 家長이 되었다. 工夫에 趣味가 없었던 큰아들 태준氏는 大學에 가지 못했다. 그러나 生母와 季父가 莫强한 자리에 있었던 만큼 ‘빵빵한 職場’인 咸興 燃料販賣所에서 指導員으로 일할 수 있었다.

    둘째아들 이근혁이 思春期에 들어서자 두 兄弟는 서로를 싫어해, 자주 다투었다. 季父가 死亡한 이듬해 유태준은 咸南道 國家保衛部 指導員 집안의 딸인 최정남과 結婚했다. 北韓은 旅券(女權)李 伸張되지 않은 社會라 女性은 男性을 하늘처럼 떠받드는 文化가 남아 있다. 최정남이 그러한 文化에 젖은 女子였다. 최정남과 結婚한 유태준이 分家하여 나간 後 安氏와 둘째 아들은 北韓 體制에 對해 深刻한 不滿을 주고받게 되었다.

    1998年 4月 帽子는 장사를 하기 위해 霧散行 汽車에 올라탔는데, 淸津 北쪽을 달리던 中 이 列車가 脫線·顚覆하는 事故가 일어났다. 여러 사람이 死亡한 큰 事故였으나 帽子는 멀쩡했다. 이때 安氏가 才致를 發揮했다. “근혁아, 사람들이 여럿 죽고 失踪者가 나왔다고 하니, 此際에 中國으로 도망치자.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큰 事故가 일어났으니 우리가 失踪된 것으로만 알 것이다. 親戚들도 다치지 않을 것이니 中國으로 넘어가자.”

    아들이 同意하자 帽子는 아주 쉽게 中國으로 넘어왔다(1998년 4月15日).

    安氏는 11살이 될 때까지 中國에서 살았으므로 中國에는 知人이 있었다. 知人의 도움으로 食堂에서 일하며 돈을 모은 安氏는 그해 11月 어느 날 근혁에게 돈을 주며, “兄이 어찌 사는지 보고 오라. 데리고 나올 수 있으면 더욱 좋고…”라고 말했다. 17살 少年 이근혁은 깜쪽같이 咸興까지 들어가 兄을 만났다(탈북자들에 따르면 兆·中 國境을 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고 한다). 汽車事故 때 失踪된 줄 알았던 동생이 나타나 어머니 消息까지 傳해주자, 유태준은 躊躇하지 않고 동생을 따라 滿洲로 가겠다고 했다.

    유태준은 妻도 데려갈 생각으로 “滿洲로 갈 생각이 있는가”하고 넌지시 떠보았다. 妻는 保衛部 집안 出身답게 “虛無孟浪한 소리 말라우”하며 펄쩍 뛰었다. 태준氏는 ‘두 살 난 아들만 데려 간다’는 쪽으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平壤에는 태준氏의 親할머니가 살고 계셨다.

    태준氏는 妻에게 “아이를 데리고 平壤에 가 曾祖할머니에게 인사시키고 오겠다”고 속이고, 咸興驛으로 나와 霧散行 汽車에 올랐다. 11月23日 柳氏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中國으로 넘어와 어머니와 再會했다. 그 直後 安氏 家族은 베이징((北京)으로 移動해 세 番이나 韓國 大使館을 찾아가 “韓國으로 가고 싶다”고 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러자 유태준이 代案으로 韓國으로 가는 배에 몰래 올라타자고 提議했다. 몰래 배에 타기 위해서는 바다를 헤엄쳐 배로 기어올라가야 하는 狀況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 때문에 바다에 뛰어들 수 있는 유태준과 이근혁이 먼저 韓國으로 가 定着한 後, 어머니와 아이를 데려오기로 約束했다. 유태준과 이근혁은 텐진(天津)項으로 옮겨가 密航을 試圖했는데, 뜻밖에도 너무 쉽게 韓國行 배에 몰래 올라타게 되었다. 12月2日 이 배가 釜山港에 到着하자 두 사람은 몸을 드러내 歸順을 申請했다. 韓國 入國의 꿈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런데 四端이 일어났다. 목숨을 건 韓國行에 成功했으면 以後부터라도 兄弟는 사이좋게 지내야 하는데, ‘개 버릇 남 못 준다’고 다시 險하게 다투기 始作한 것. 보다못한 國精院이 두 사람을 떼어놓았다. 태준은 大邱에, 근혁은 서울에 各各 住居地를 마련해주었다. 大邱에서 職場生活을 始作한 유태준은 中國에 남은 어머니와 連絡을 하다, 1999年 9月 베이징으로 날아갔다. 그곳에서 朝鮮族 어린이의 旅券을 購入해, 그 旅券으로 세 살이 된 아이를 데리고 韓國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하는 사이 어머니 安氏는 朝鮮族 虎口(戶口·戶籍)를 만들었다. 戶口가 있으면 中國 旅券을 만들 수 있다. 이미 韓國人이 된 두 아들은 이러한 어머니에게 招請狀을 보냄으로써 2000年 2月2日 ‘朝鮮族’ 安氏가 仁川空港으로 들어와 歸順했다. 이로써 安氏 家族은 全部 韓國에 오게 되었다. 그러나 큰아들 태준氏는 北韓에 남은 ‘그의 家族(妻)’ 때문에 深刻한 외로움을 겪게 되었다.

    周圍에서는 외로움을 타는 柳氏에게 아가씨를 紹介하며 “새 장가를 가라”고 勸誘했지만, 그는 ‘콧대 높은’ 韓國 女性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럴수록 그를 하늘처럼 떠받들어주던 咸興의 妻 생각이 懇切해졌다. 아이를 제대로 키우기 위해서라도 妻를 데려오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 그는 北韓에 들어갔다 오자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김대중 大統領이 平壤을 訪問하기 나흘 前인 2000年 6月9日 柳氏는 延吉行 航空機에 몸을 실었다. 執着이 剛한 柳氏의 性格이 또 일을 벌이게 된 것이다.

    6月16日 吉林省 화룡시 送電툰으로 간 柳氏는 1998年 脫北 때 알게 된 朝鮮族 崔○○氏(37)를 만났다. 崔氏의 도움으로 北韓 哨所 警備兵에게 中國돈 400위안(韓貨 約 6萬원)을 준 柳氏는 咸北 霧散으로 들어갔다. 霧散에서는 密入北 및 脫北 斡旋自認 限○○을 만나 中國 돈 400원을 주고, ○○○ 名醫의 身分證을 빌렸다. 이 身分證으로 列車票를 사, 6月21日 柳氏는 함흥시에 到着했다. 妻家 附近에 旅裝을 푼 태준은 妻를 불러내기 위해 몇 次例 連絡을 試圖했으나 失敗했다.

    6月25日 柳氏는 計劃을 바꿔 直接 처가집을 訪問했다. 그러나 그를 맞은 것은 妻家 아니라 丈母였다. 1年 半만에 나타난 사위를 본 丈母는 當場에 “保衛部에 申告하겠다”고 해, 怯을 먹은 태준은 밖으로 뛰어나왔다. 汽車를 기다리는 사이 태준은 丈母의 申告를 받고 달려온 保衛部員들이 처가집 洞네를 에워싸는 것을 보며 霧散行 列車에 올라타고 脫北 斡旋者 한○○의 집으로 되돌아 왔다. 그런데 6月30日 咸北 무산군 保衛部員들이 나타나 그가 숨어 있는 곳을 包圍했다. 怯을 먹은 태준은 밖으로 逃走하다 發이 접질려 붙잡히게 되었다.

    그날로 유태준은 咸北 淸津市 保衛部로 押送돼 拘留狀에 收監되고 2000年 10月初까지 甚한 拷問을 받으며 調査 받았다. 그리고 平壤의 國家保衛部 拘留狀으로 移送돼 調査 받다가 2001年 1月15日 열린 裁判에서 ‘祖國 反逆罪 및 國境 越境罪’로 嫌疑로 10分만에 32年型을 宣告받았다. 그리고 3個月 後 다시 咸北 淸津으로 移送돼 ‘第25 政治犯 敎化所’로 收監되었다(유태준씨가 平壤의 國家保衛部 監獄에 있었던 期間은 約 5個月이었다). 아내를 데려와 幸福하게 살아보겠다던 柳氏에게는 暗黑 같은 監獄 生活만 남게 된 것이다.

    한便 며느리를 데리고 닷새 後쯤 돌아오겠다던 아들이 석달이 넘어도 돌아오지 않자 어머니 安氏는 애가 타게 되었다. 이러한 安氏를 慰勞해준 이가 ‘朝鮮日報’의 金某 記者였다. 北韓 問題를 專門으로 다루는 金記者는 우연한 機會에 北韓의 엘리트 女性인 安氏를 알게 됐는데, 安氏가 北韓에 간 아들 問題로 애태워하는 것을 함께 걱정해주었다. 2001年 3月 初 金記者는 某情報機關이 ‘北韓에 들어간 유태준氏가 公開處刑되었다’는 諜報를 入手했다는 消息을 들었다. 이 所聞이 여러 곳으로 퍼지면서 旣定事實化돼 가자 金記者는 安氏에게 電話를 걸어 “아들이 公開處刑됐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傳했다.

    金記者는 이 所聞이 事實일 境遇에는 北韓의 無慈悲한 人權 彈壓을 告發하기 위해서, 事實이 아니면 柳氏를 處刑하지 못하게 할 생각으로 ‘아들이 公開處刑되었다는 所聞을 報道하고 싶다’고 말했다. 靑天霹靂같은 이야기를 들은 安氏는 大聲痛哭을 하고 이틀間 苦悶에 빠졌다. 그리고 金記者의 생각이 全的으로 옳다는데 同意했다. 마음을 定한 安氏는 金記者에게 “報道를 내달라”고 付託했다. 이로써 金記者는 2001年 3月17日子 ‘朝鮮日報’에 ‘아내를 찾으러 北韓에 들어간 유태준氏가 公開處刑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는 內容의 記事를 報道하게 되었다.

    이 報道가 나가자 韓國에 있는 北韓 人權團體들이 벌떼같이 일어나 김정일 政權을 批判했다. 4月이 되자 이들 團體들은 ‘被拉·脫北者 人權과 救命을 위한 市民連帶’(以下 市民連帶)를 結成했다. 市民連帶는 言論機關을 찾아다니며 柳氏의 公開處刑을 反對한다는 意見을 開陳했는데 몇몇 言論이 이에 同調해 數次例 劉氏 公開處刑 問題를 擧論했다.

    2000年 6月에 열린 南北頂上會談과 8月에 있었던 言論社 社長團 訪北 때 김정일 國防委員長은 韓國 言論을 보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김정일 委員長의 말은 虛言(虛言)이 아니었다.

    韓國 言論 外에는 유태준氏 公開處刑을 떠든 데가 없는데, 4月30日 金委員長이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은 曺國도 사랑합니다’라는 親筆메모와 함께 32年型을 宣告받고 敎化所에 收監돼 있는 柳氏를 釋放하라고 命令한 것이다. 그 直後 柳氏는 敎化所를 찾아온 國家保衛部의 幹部로부터 “眞情으로 妻를 데리러 온 것이냐. 妻가 보고 싶으면 祖國에 충성해야 한다”고 懷柔를 받고, “그렇게 하겠다”고 對答했다고 한다.

    5月 初, 이番에는 中央黨의 한 幹部가 찾아와 그날로 그를 석방시키고, 平南 坪聖君의 糧政事業所로 데려가 勞動者로 配置했다. 이때 中央黨 幹部는 金委員長의 親筆指示 때문에 特別히 釋放하는 것이라며, 일부러 要德에 있는 政治犯收容所 附近을 거쳐 柳氏를 平壤으로 데려왔다.

    柳氏가 公開處刑됐다는 ‘朝鮮日報’의 誤報는 結果的으로는 柳氏를 석방시키는 契機가 된 것이다. 糧政事業所에 配置된 柳氏는 며칠 後 祖平統 慘事 안명국을 따라 平壤에 와 文殊招待所에서 25日間 ‘꿈에 그리던’ 妻를 만나게 되었다. 안명국은 柳氏와 가까와지자 自身은 가끔 韓國에 浸透해 大學生들을 만나고 온다는 이야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리고 5月30日에는, 6月12日 放送된 라디오 放送을 錄音하고 이어 8月14日 放映된 TV 記者會見을 錄畫했다. 柳氏는 放送에서 脫北者를 管理하는 韓國의 祕密組織 ‘大聲工事’ 組織에 對해 아는 바를 詳細히 털어놓는 等 적잖은 國家 祕密을 이야기했다. 또 그는 “國精院과 이父(異父) 동생의 꾐에 속아 南韓으로 끌려갔다가 艱辛히 北韓으로 돌아왔다”며 北韓을 讚揚하는 發言을 했다. 8月14日 放映된 유태준氏 記者會見 프로그램을 入手한 것은 MBC였다. 그 直後 MBC는 테이프를 公開, 柳氏가 살아 있다는 것을 最初로 確認, 報道했다.

    糧政事業所는 穀食을 다루는 곳이므로 배 곯을 일이 없다. 金委員長이 柳氏에게 양정사業所라는 職場을 준 것은 相當한 配慮이면서 同時에 人民에게는 ‘桶 큰 政治’(廣幅政治) 스타일을 보여주려는 政治的 제스처일 수도 있다.

    어찌되었건 사지(死地)에서 빠져나온 兪氏는 양정사業所 일에 沒頭했다. 그러나 自由에 對한 渴望을 떨쳐 버릴 수 없어 11月10日 徒步로 糧政事業所를 脫出했다. 平南 順天 驛에서 霧散行 夜間 列車의 지붕에 올라탄 그는 길주역에서 汽車를 내렸다. 이때까지도 柳氏는 짧은 머리에 罪囚服 차림이었다.

    차라리 軍人 行世를 하는 것이 安全하다고 생각한 柳氏는 人民軍을 1名을 때려 눕히고 軍服을 뺏어 입었다. 두 番째로 脫北하다 붙잡힌 霧散에는 保衛部員이 새카맣게 깔려 있을 것으로 생각한 柳氏는 걸어서 양강도 보천보(惠山)로 移動했다. 보천보는 過去 咸興에서 職場生活을 할 때 或是 脫北하게 되면 보천보를 거쳐 넘어갈 생각으로 踏査를 해둔 적이 있었다. 그때의 記憶을 살려 보천보에 到着한 柳氏는 12月1日 鴨綠江을 넘어 中國 吉林省 장백현으로 再脫北하는데 成功했다. 그리고 12月3日 中國 公安(警察)에 붙잡혔는데 中國 公安은 北韓 말을 쓰는 柳氏를 脫北者로 判斷해 足鎖를 채워 收監했다.

    이에 對해 柳氏는 “北韓 말을 쓰지만 나는 韓國人이다. 旅券과 韓國 住民番號는 이러한데 2000年 6月9日 延吉空港을 통해 내가 中國에 온 記錄이 있을 것이다”라고 主張했다. 柳氏의 主張이 事實이라는 것을 確認한 吉林省 公安은, 베이징 駐在 韓國大使館에 ‘이러한 旅券과 住民番號를 가진 유태준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韓國 사람이 맞느냐’고 물어왔다. 2002年 1月17日 韓國 大使館은 “맞다”는 通報를 보내고, 2月5日 유태준 名義로 된 臨時旅行證明書를 吉林省 公安에 보내주었다. 吉林省 公安은 柳氏를 不法滯留者로 判定해 强制 追放하기로 決定했다.

    2月9日 中國 公安은 延吉空港에서 仁川空港으로 가는 航空機에 柳氏를 태워 出國시켰다. 柳氏는 全的으로 自己의 運과 힘만으로 韓國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20個月만에 韓國으로 되돌아오게 된 柳氏는 바로 國精院의 調査를 받았다. 國精院은 큰 言論과 市民團體가 救命運動을 벌인 柳氏에 對해 시큰둥했던 만큼 다음날 柳氏를 풀어주었다. 柳氏는 그날부터 警察의 調査를 받게 되었다. 柳氏는 國精院과 警察 調査에서 平壤의 國家保衛部 監獄을 脫獄했다는 等의 거짓말은 全혀 하지 않았다. 警察은 國精院이 손을 뗀만큼 保安法 違反이 아니라 南北交流協力法 違反 嫌疑로 調査했다. 柳氏가 大韓民國 國民인 만큼 刑事訴訟法上의 節次도 지켰다.

    交流協力法 違反罪는 刑量이 가벼우므로 警察은 檢察의 指揮를 받아 2月11日 不拘束으로 柳氏를 釋放했다. 설날을 하루 앞둔 날밤 ‘아들 生還’이라는 엄청난 膳物을 받게 된 어머니는 너무 기뻤다. 그러나 아들이 너무 疲困해 이야기를 듣지 못하고 잠부터 재웠다. 다음날인 설날, 동생 근혁氏(고려대 在學中)의 親舊들이 들이닥쳤다. 근혁氏는 數日 前 어머니에게 설날 아침 親舊를 데려와 놀겠다는 얘기를 미리 했다.

    둘째 아들 손님을 보내고 난 後 安氏는 비로소 큰아들로부터 再脫北 經緯를 듣게 되었다. 安氏는 큰아들이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은 曺國도 사랑합니다’라는 김정일의 親筆 指示 德分에 살아났다는 것을 알고 驚愕했다. 安氏는 김정일에 對해서는 齒를 떠는 사람이었으므로 親筆指示가 알려지면 2000年 6月 南北頂上會談이 있은 後 韓國에서 일어났던 김정일 신드롬이 再演될 수 있겠다고 憂慮했다.

    김정일 신드롬이 생기는 것을 放置할 수 없다고 생각한 安氏는 큰아들에게 “김정일의 指示로 國家保衛部 監獄에서 釋放됐다고 말하지 말라. 國家保衛部 監獄을 脫獄했다고 하라”고 申申當付했다. 20個月만에 돌아온 柳氏는 많이 變해 있었다. 家族의 所重함을 느낀 듯 그는 怏宿처럼 싸워온 동생을 붙잡고 “처음 脫北이 너무 쉽게 이뤄져 모든 일이 쉬울 것으로 생각했다. 地獄에 갔다온 氣分이다. 이제는 우리 잘 지내자”라고 말했다. 어머니에 對해서도 “시키는대로 하겠다”고 對答했다.

    이날 安氏는 아들의 生還을 도와준 이는 ‘朝鮮日報’의 金記者라고 생각하고 金記者에게 電話를 걸어 아들이 돌아왔음을 알려 주었다. 다음날 아침 金記者가 달려와 柳氏를 取材했다. 柳氏는 金記者에게 “말 못할 部分이 있다”며 政治犯 敎化所에서 나온 過程을 얼버무렸다. 이때 다른 言論社의 A記者가 ‘냄새’를 맡고 電話를 걸어왔다. 아들 救命과 關聯해 A記者에게도 많은 身世를 졌던 安氏는 아들이 돌아왔다는 것을 認定하고 A記者의 房門을 許可했다.

    그러자 金記者가 보다 조용한 곳에서 取材하기 위해 柳氏를 데리고 나갔다. 安氏 집에 到着한 A記者는 柳氏가 나간 것을 알자 크게 火를 내고 卽刻 柳氏가 돌아온 것을 報道했다. 이 報道가 나가자 다른 言論들이 ‘朝鮮日報’에 抗議해, 2月13日 午後 柳氏는 코리아나 호텔에서 記者會見을 갖게 되었다. 이 會見에서도 柳氏는 “平壤 國家保衛部 監獄에서 脫出했다. 電氣가 흐르는 高壓線은 옷을 걸쳐놓고 넘었다”고 말했다. 이에 對해 記者들이 “具體的으로 說明해 달라”고 要求했으나 柳氏는 正確하게 說明하지 못했다. 그러나 마감 時間이 臨迫한탓에 大部分 言論은 柳氏의 主張을 그대로 報道했다.

    2月14日 柳氏의 主張을 疑心한 몇몇 言論들이 1985年 17個月間 평양시 龍坪區域 마담洞에 있는 國家保衛部 監獄에 收監됐다 脫北한 안혁(34·現在 映畫事業)氏에게 國家保衛部 監獄을 脫獄할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安氏는 “웃기는 소리다. 保衛部 監獄은 監視가 너무 徹底해 담牆 近處로는 갈 수도 없다”고 對答했다. 이러한 對答을 根據로 다시 追窮하자 유태준氏는 또 다시 橫說竪說하기 始作했다. 柳氏의 說明이 異常하다는 所聞이 播多하게 퍼진 2月14日 午後, 統一部의 某 局長과 國精院이 거의 同時에 “柳氏는 平壤의 國家保衛部 監獄에서 脫出하지 않았다”고 公式 發表했다. 이 瞬間 柳氏는 빠삐용에서 바로 李穗根으로 轉落해 버렸다.

    이때부터 柳氏를 再調査해야 한다는 輿論이 일어났다. 柳氏가 大聲公使 組織 等 國家機密을 밝혔는데 왜 搜査機關은 調査하지 않았느냐는 等의 問題가 提起되면서 柳氏의 對共容疑點이 擧論되기 始作했다. 이렇게 된 狀況에 對해 安氏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우리 政府가 北韓한테 절절 매는 것이 正말 꼴보기 싫었다. 그런데 며느리를 데리고 오겠다며 北韓에 갔던 아들이 김정일의 親筆 指示 때문에 살아났다고 밝히면 또 한番 韓國 言論은 김정일이 ‘桶 큰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記事를 쏟아낼 것이 뻔했다. 1年 남짓 韓國 生活을 하면서 나는 北韓이 어떤 곳인지, 金正日은 어떤 者인지도 모른 채, 마구잡이로 記事를 쏟아내는 韓國 言論에 相當히 失望했다. 그래서 큰아들에게 國家保衛部 監獄을 脫獄했다고 말하라고 시켰는데 이것이 아들을 죽일 놈으로 만드는 罪가 되고 말았다. 地獄에서 脫出해 이제 겨우 精神을 차린 아들을 내가 죽일 놈으로 만든 것이다. 이런 狀況을 만든 張本人은 바로 나이니 늙은 이 에미를 죽여라.”

    유태준氏가 ‘빠삐용’에서 ‘李穗根’으로까지 無慈悲하게 轉落하게 된 一次的인 責任은 韓國 法을 어기고 北韓에 간 柳氏와 아들에게 거짓말을 하라고 시킨 어머니 安氏에게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安氏 帽子는 韓國보다는 北韓式 思考 方式에 더 익숙한 ‘이방인’이다. 따라서 安氏 帽子에게 責任을 묻기에 앞서 韓國 社會는 北韓 出身 同胞에게 어떤 配慮를 했는가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柳氏가 아내를 데려오려고 北韓에 간 것은 無謀한 行動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그는 어엿한 ‘大韓民國 國民’이다. 大韓民國 國民이 北韓에서 收監돼 拷問을 받을 때 우리 政府는 무엇을 했는가. 市民連帶를 비롯한 人權團體와 言論이 劉氏 救命運動을 벌일 때 政府는 南北頂上會談 以後의 宥和局面을 維持하는데 執着해 柳氏의 苦痛을 外面한 것은 아닌가. 그러한 柳氏가 어렵게 中國으로 再脫北했다면 國精院과 外交部는 柳氏를 求하기 위한 最小限의 努力을 보여줬어야 한다. 여기에 言論은 過當競爭을 벌임으로써 또 한番 柳氏의 人權을 無視하는 失手를 저질렀다. 柳氏가 거짓말을 했다고 해서 그를 犯人視(犯人視) 하고 하루 아침에 李穗根으로 전락시킨 것이 좋은 事例다. 이러한 言論의 ‘오버’에 國精院과 統一部는 柳氏의 거짓말을 公式 確認해줌으써 장단을 맞춰 주었다.

    살려고 逃亡쳐왔는데 政府와 言論으로부터 迫切하게 구박당한 柳氏는 “할 말이 없다. 나는 非難을 받아 싸다”고 말했지만 앞으로 韓半島에서는 柳氏가 일으킨 것과 類似한 事件들이 雨後竹筍처럼 생겨날 것이다. 唯一하게 柳氏의 自活을 도와주고 있는 市民連帶의 關係者들은 “政府와 言論은 柳氏 事件을 해프닝으로 넘기지 말고 비슷한 事件이 일어났을 때 제대로 對處할 수 있는 분명한 原則을 세우는 契機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忠告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東亞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推薦記事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