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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 後期 政治史의 顯在的 意義|新東亞

朝鮮 後期 政治史의 顯在的 意義

老論士官과 日帝 植民史觀 벗어나 大韓民國 精神世界 새로 構築해야

  • 入力 2011-09-21 15: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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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長에 따르면 韓國의 歷史와 韓國人의 精神世界가 歪曲된 始發點은 仁祖反正이다. 朝鮮 王은 中國 皇帝의 臣下라는 論理. 日帝에 依해 나라가 亡할 때까지 朝鮮의 政治를 주물렀던 老論의 世界觀이었다. 그것이 日帝 植民史觀으로 이어지면서 歷史가 歪曲되고 大韓民國의 主體性이 抹殺됐다. 이덕일 所長의 講演은 8月23日 午後 7時 서울역사박물관에서 進行됐다. <편집자>
    조선 후기 정치사의 현재적 의의
    오늘 드릴 말씀은 朝鮮 後期 政治史의 顯在的 意義입니다. 朝鮮 後期社에서 仁祖反正(仁祖反正)은 重要한 事件입니다. 仁祖反正은 只今 우리에게도 影響을 미치고 있는 事件입니다. 우리에게 只今 큰 影響을 미치는 事件들로는 仁祖反正이 있고 그 다음에 日帝强占期가 있고, 6·25戰爭이 있다고 꼽을 수 있겠죠.

    仁祖反正이 뭡니까? 臣下들이 光海君을 내쫓은 겁니다. 그런데 이 臣下들이 모두 儒學者예요. 儒學의 基本을 두 字로 表現하면 孝(孝)와 衝(忠)입니다. 忠孝가 아니라 孝가 먼저고 다음이 衝입니다. 그래서 孝子 집안에 忠臣 난다고 말하는 겁니다. 집에서 孝道하는 姿勢로 公職에 服務하라는 겁니다. 父母에게 不孝하는 사람이 나라에는 충성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겠죠. 孝와 忠을 목숨처럼 여겨야 할 儒學者들이 國王을 내쫓으려고 하다보니까 名分이 있어야 되잖아요.

    그 名分이 뭐냐? 우리의 賃金은 明나라 皇帝라는 것입니다. 朝鮮 王은 臣下인 諸侯에 지나지 않는다. 朝鮮 國王과 우리 士大夫는 같은 階級이라는 얘기입니다. 仁祖反正이 外交政策을 名分으로 삼은 것은 모두 여기에 基盤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중원의 霸權이 明나라에서 淸나라로 넘어가는데 朝鮮에서 그 事態를 主導하지 못할 바에는 이긴 쪽과 外交關係를 맺으면 됩니다. 明과 靑 두 나라를 硏究해보면 재미있는 게 아주 많아요. 明나라는 代代로 無能한 皇帝가 繼續 卽位합니다. 그래서 宦官(宦官)政治가 得勢하지요.

    光海君의 中立外交에 反旗

    反面 人口가 한족의 100分의 1도 안되는 滿洲族의 淸나라는 統治技術에 關한 限 대단한 노하우를 갖고 있습니다. 朴趾源의 ‘熱河日記’에서 말하는 裂罅(熱河)는 只今 허베이(河北)省 北쪽의 청더(承德)이라는 곳인데 여기에 淸나라 皇帝들이 避暑 山莊을 지어놓고 每年 갔습니다. 裂罅에 가서 사냥을 하는데 사냥이라는 게 軍事訓鍊입니다.



    淸나라는 暫時라도 放心하면 무너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後繼者를 選出할 때도 太子를 미리 決定하지 않습니다. 太子密建法입니다. 紫禁城의 皇帝 執務室에 ‘光明正大(光明正大)’라는 글句가 쓰인 額子가 있는데 그 額子 뒤에 自己가 죽으면 皇帝가 될 사람의 이름을 써놓습니다. 그리고 內部에도 하나 있어서 皇帝가 世上 떠난 다음에 두 個를 맞춰봐서 卽位하는 겁니다. 여러 皇子에게 다 機會가 있는 겁니다. 長男이라고 無條件 次期 皇帝가 되는 게 아니라 모든 皇子에게 機會가 있는 겁니다. 그런 姿勢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仁祖反正은 政權에서 疏外된 栗谷 李珥의 弟子들인 庶人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겁니다. 名分이 숭明半晴(崇明反淸)입니다. 그러다보니까 光海君의 中立 外交政策을 확 바꿔서 後金(靑)을 敵對視했습니다. 그러자 淸나라에서 丁卯胡亂과 丙子胡亂을 일으킵니다. 丁卯胡亂, 丙子胡亂 다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던 戰爭이에요. 仁祖反正을 일으킨 支配層이 招來한 겁니다. 後金 立場에서는 山海關을 건너서 중원에 들어가기 前에 朝鮮 問題를 整理해야 합니다. 그냥 들어갔다가 朝鮮이 치고 올라오면 戰線이 두 個가 되지 않습니까? 이걸 防止하기 위해서 朝鮮을 먼저 攻擊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民族과 滿洲族(女眞族)은 元來 같은 民族이에요. 中國에서 바라볼 때 동이족이라고 불렀던 같은 民族입니다. 우리뿐 아니라 滿洲, 거란, 肅愼 다 같은 民族이에요. 隋나라가 統一하고 나서 侮辱的인 國書를 보내니까 영양왕이 말갈甁社 萬 名을 거느리고 遼河를 건너서 隋나라를 먼저 攻擊합니다. 只今으로 치면 中國을 先制攻擊하는 거예요. 말갈이 後에 이르면 女眞族, 滿洲族이 되는데 이때 영양왕이 말갈甁社 萬 名을 거느리고 갈 때 通譯甁을 데리고 갔겠어요? 안 데리고 갔겠어요? 滿洲語와 우리말은 같은 言語예요. 서로 통하는 겁니다. 옛날 獨立運動家들 이야기로는 滿洲人과 우리 民族은 같은 집에서 生活하면 6個月이나 1年 지나면 意思疏通이 다 된다고 그랬어요. 基本的으로 같은 言語들입니다. 그런데 朝鮮 後期의 儒學者들이 滿洲族을 오랑캐로 보게 되죠.

    말로만 北伐

    우리를 單一民族이라고 하는데 여러분이 알고 있는 槪念과는 全혀 다른 構造입니다. 우리 民族은 元來 동이족이에요. 그런데 單一民族論이 뭐냐 하면 朝鮮 後期 儒學者들이 말갈, 거란, 肅愼을 全部 다 오랑캐로 내몰고 우리는 中國人이라고 主張한 겁니다. 그래서 ‘小中華(小中華)’ ‘우리는 작은 中國人이다’라는 것이 單一民族론이에요. 그 始初가 仁祖反正을 일으킨 사람들이 만든 槪念입니다. 仁祖反正이라는 쿠데타로 光海君을 내쫓고 나니까 丁卯·丙子胡亂이 일어나고 변변한 싸움 한 番 못해보고 降伏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朝鮮 後期의 二重性이 始作되는데, 以上으로는 亡한 明나라를 섬기지만 現實的으로는 每年 淸나라에 朝貢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北伐(北伐)을 소리 높여서 主唱합니다. 問題는 實際 北伐할 마음이 있느냐는 겁니다. 孝宗 賃金이 實際로 北伐을 하려고 하니까 이들이 反對하고 나오는 겁니다. 末路는 北伐을 主唱하면서 實際로 北伐하려면 발목 잡는 겁니다. 北伐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國防費를 늘려야죠. 그런데 이들은 國防費를 줄이고 福祉豫算을 늘려야 된다고 主張합니다. 입으로는 北伐을 이야기하면서 實際로는 北伐과는 거꾸로 가는 거죠.

    제가 아까 仁祖反正을 主導한 사람들은 朝鮮 임금은 自身들과 같은 士大夫로 본다고 그랬죠. 士大夫 中의 第一士大夫로 보는 겁니다. 여기서 바로 禮訟論爭이 나왔습니다. 禮訟論爭이 簡單한 論理가 아닙니다. 孝宗, 卽 國王이 世上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自意對比 조氏가 喪服을 3年 입어야 하느냐, 1年 입어야 하느냐의 問題를 가지고 論爭이 發生하지요. 父母가 먼저 世上 떠나면 子息은 3年服을 입습니다. 子息이 먼저 世上을 떠나면 장남일 境遇에는 父母가 3年服을 입고, 次男 以下가 世上을 떠났을 때는 1年服을 입습니다.

    조선 후기 정치사의 현재적 의의

    光海君은 明나라와 淸나라 사이에서 中立外交 政策을 펴다 쿠데타로 廢位됐다. 寫眞은 광해군 墓.

    孝宗이 世上 떠났을 때 宋時烈, 宋浚吉 等 庶人은 1年服을 입어야 한다고 主張했습니다. 제가 最近에 ‘백호 尹鑴와 沈默의 帝國’을 펴냈습니다. 只今은 尹鑴를 잘 모르지만 當代엔 宋時烈에 뒤지지 않는 뛰어난 學者로 評價받았습니다. 이때 尹鑴의 舍廊房에 여러 선비가 모여 있는데 宋時烈이 사람을 보내가지고 ‘自身의 見解는 1年’이라면서 尹鑴의 見解를 물어봤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取규 二流라는 선비가 “그 사람 ‘喪禮備要’를 다시 봐야 할 사람이네”라고 말합니다. 1年服은 史家의 禮法이지 어찌 王家에 그 禮法을 쓰겠느냐는 것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大統領이 世上 떠났는데 家族葬 치르라는 이야기입니다.

    男인 重用 直後 죽은 顯宗

    尹鑴는 3年服을 主張하고 宋時烈은 1年服을 主張하다가 結局 1年福이 勝利합니다. 그래서 百號 尹鑴와 淸南(淸南)은 先王의 葬禮를 1年服으로 치른 政權에 參與를 拒否합니다. 1年服說은 朝鮮 王家의 正統性을 否認하는 理論이라는 뜻입니다. 이때 玄宗이 1年服說이 先王을 둘째아들 待遇하는 거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經國大典’에는 長男과 次男 區分 없이 다 1年服을 입는다고 對答합니다. 그런데 15年 後에 孝宗의 夫人 仁宣王后 張氏가 世上 떠났는데 똑같은 問題가 發生합니다. 맏며느리가 世上을 먼저 떠났을 때는 媤父母가 1年服을 입고 둘째며느리 以下가 世上 떠났을 때는 9個月服을 입습니다. ‘經國大典’에 이 境遇에는 1年服과 9個月服으로 區分지어 놨습니다.

    禮曹에서 처음에 1年服으로 올렸다가 男便 上司(喪事) 때와 같으니까 9個月服으로 고쳐 올렸습니다. 그러자 大邱 儒生 都愼徵이 大邱에서부터 걸어와서 “둘째며느리라는 뜻 아닙니까?”라고 上疏를 올리죠. 그러자 현종이 大臣들을 불러다 묻습니다. 大臣들이 “9個月福이 맞다”고 答하자 “너희들이 國母로 모셨던 분을 둘째며느리 待遇했다는 거냐?”라고 묻습니다. 다시 議定하라고 하니까 時間을 달라고 합니다. 玄宗은 오늘 中으로 決定하라고 합니다. 왜 時間을 달라고 하냐면 忠淸道 회덕에 있는 宋時烈에게 사람을 보내서 宋時烈이 指示하는 대로 따르려고 하는 겁니다. 朝鮮 王들이 이런 政治構造를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오늘 中으로 決定하라고 한 것입니다.

    다시 와서 “9個月福이 맞다”고 하니까 현종이 “‘經國大典’대로 하면 1年福이 맞느냐, 9個月福이 맞느냐?”라고 묻습니다. ‘經國大典’대로 하면 1年福이 맞다고 對答할 수밖에 없습니다. 庶人들이 自己矛盾에 빠진 겁니다. 현종이 “卿들이 先王의 恩惠를 그렇게 두텁게 입고도 先王에게 이토록 薄하게 하면서 누구에게 그토록 厚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냐?”라고 火를 내면서 西人을 몰아내고 南人을 重用합니다.

    그런데 그 渦中에 현종이 갑자기 世上을 떠납니다. 제가 ‘朝鮮王 毒殺事件’이라는 冊을 썼는데, 單純히 興味 爲主의 冊이 아닙니다. 仁祖反正 以後 허수아비에 不過한 朝鮮 賃金이 仁祖反正을 主導한 西人, 庶人의 主流인 老論(老論)과 어떤 事案을 두고 衝突을 向해서 달려가다가 衝突 直前에 王이 때마침 죽어주는 것으로 整理되는 패턴이 거듭되는 겁니다. 孝宗이 世上 떠나기 한 달 前에 宋時烈과 獨對해서 “卿에게 政權 다 줄 테니까 代身 北伐을 推進하라”고 提案합니다. 北伐 안 할 거면 政權 내놓고 다 나가라는 뜻입니다.

    “天下의 理致를 어찌 走者만 아느냐”

    宋時烈을 北伐論者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當時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宋時烈이 鄭太和를 찾아와서 北伐 이야기를 하니까 鄭太和는 “나는 驚異 北伐의 旗幟를 높이 들고 올라가는 걸 보는 게 꿈이지만 몸이 弱해서 같이 못하겠다”고 拒絶합니다. 宋時烈이 失望해서 간 다음에 정태화 아들이 “무슨 北伐 이야기냐”고 물으니 鄭太和는 “萬若 내 입에서 北伐을 贊成한다는 한마디만 나오면 내게 뒤집어씌울 생각으로 왔기 때문에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式으로 내가 病을 핑계대고 빠진 거다”라고 答합니다.

    그래서 宋時烈이 進退兩難에 빠져 있는데 한 달 後에 孝宗이 急逝합니다. 腫氣가 났는데 신가귀라는 御衣가 침으로 腫氣를 찢다가 穴落, 卽 血管을 터뜨려서 世上을 떠난 겁니다. 신가귀를 調査해봤더니 手顫症, 손 떨리는 症勢가 있는 語義입니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죠. 그래서 孝宗이 나이 마흔에 갑자기 世上 떠났습니다. 그리고 2次 禮訟論爭 渦中에 현종이 政權을 南人에 넘기다가 서른넷의 나이로 또 急逝합니다. 그래서 淸나라 康熙帝가 불쌍하다고 祭祀를 두 番 지내줍니다. 그런데 玄宗이 世上 떠나기 1年 前에 淸나라에서 삼번의 亂이 일어납니다. 吳三桂, 尙可喜, 경정충이란 한족 出身 藩王들이 軍士를 일으키는 겁니다. 그래서 揚子江 以南이 쑥대밭이 됩니다. 그러자 百號 尹鑴가 上疏를 올려서 北伐을 主張합니다.

    尹鑴는 宋時烈과 한때 親하게 지내다가 갈라서게 됩니다. 尹鑴가 ‘中庸’의 章과 節을 區分하는데 走者가 區分한 것과 다르게 합니다. 그랬더니 宋時烈이 “네가 敢히 走者가 한 것과 달리할 수 있느냐?”라고 하니까 尹鑴가 “天下의 理致를 어찌 朱子 혼자 알고 나는 모른단 말이냐? 萬若 朱子가 다시 살아나면 내가 틀렸다고 하겠지만 自社(子思)가 다시 태어나면 내가 맞다고 할 것이다”라고 答합니다. 自社가 바로 ‘中庸’의 著者입니다.

    이 말이 대단한 말이에요. 天下의 理致를 어찌 朱子 혼자 알고 나는 모른단 말이냐? 思想의 相對性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는 單純히 宋時烈과 尹鑴 두 사람의 싸움이 아니라 當時 朝鮮의 未來 進路를 둘러싼 重要한 論爭이 됩니다. 宋時烈이 走者를 절대화하려 했다면 尹鑴는 走者를 相對化하려 합니다. 宋時烈은 走者를 絶對化하는 것으로, 朝鮮의 흔들리는 身分秩序를 兩班 士大夫 中心으로 再編하려 합니다. 反面 尹鑴는 走者를 相對化하는 것으로 兩班 士大夫의 旣得權을 緩和 乃至 解體하려고 합니다. 兩者는 바로 이런 世界觀을 가지고 衝突한 것입니다.

    “號牌보고 싸우라 하지”

    그리고 尹鑴는 眞正한 北伐論者죠. 尹鑴는 中國 南方이 쑥대밭 됐을 때 鴨綠江을 건너면 勝利할 수 있다고 主張합니다. 이때 朝鮮의 精銳軍, 孝宗이 기른 精銳 砲兵, 組總帥가 鴨綠江을 건너면 狀況은 뒤바뀝니다. 尹鑴가 北伐을 主唱할 때 西人 政權의 最高 實力者였던 宋時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只今껏 國史 敎科書는 宋時烈을 北伐論者로 가르쳐왔죠. 老論 後裔 學者들이 歷史를 敍述했기 때문에 나온 現象입니다.

    尹鑴는 北伐하려면 나라가 富强해야 하는데, 나라가 富强해지려면 百姓들이 잘살아야 한다고 主張합니다. 百姓들이 잘살려면 兩班 士大夫의 特權이 撤廢 乃至는 緩和되어야 한다고 主張합니다. 그래서 尹鑴는 號牌法을 紙牌法으로 바꾸자고 主張합니다. 號牌는 身分에 따라 才質이 다릅니다. 普通 2品 以上은 象牙로 만든 걸 차고, 兩班들은 뿔로 만든 걸 차고, 一般 常民이나 奴婢는 나무로 된 걸 車니다.

    그래서 尹鑴가 只今 같은 종이身分證人 紙牌法으로 바꾸자고 主張한 겁니다. 그러면서 丁卯胡亂 때 안주성을 例로 듭니다. 後金軍이 안주성을 包圍하자 感謝 윤훤이 兵士들에게 나가서 싸우라고 하니까 兵士들이 號牌를 끌러서 쌓아놓고 “號牌보고 나가서 싸우라고 하지 왜 우리보고 나가서 싸우라고 하느냐” 하고 反撥합니다. 壬辰倭亂 때 西厓 柳成龍이 免賤法(免賤法)을 實施했어요. 免賤法이 뭐냐면 賤人(賤人)이나 常民도 功을 세우면 兩班이 될 수 있는 身分上昇의 機會를 준 겁니다. 그러다가 戰爭 끝나니까 柳成龍을 失脚시키고 다 없던 걸로 만들었어요. 歷史는 差別을 撤廢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發展합니다. 그런데 戰爭 끝나니까 다시 過去로 돌아갔어요. 그러다 丁卯胡亂 일어나 싸우라고 하니까 兵士들이 號牌 끌러놓고 “이 號牌보고 나가서 싸우라고 하지 왜 우리보고 싸우라고 그러느냐?”라고 反撥하지요.

    아주 重要한 事例입니다. 그래서 안주성이 霎時間에 무너집니다. 壬辰倭亂 때 免賤法을 實施하니까 義兵이 일어난 겁니다. 丁卯·丙子胡亂 때는 義兵도 안 일어납니다. 壬辰倭亂 때 免賤法 實施해놓고 終戰 後 廢棄하니까 다시 義兵이 일어나지 않는 거예요. 身分制를 撤廢하라는 要求입니다. 그래서 尹鑴가 號牌法을 紙牌法으로 바꾸자고 主張한 것입니다.

    尹鑴는 兩班 士大夫들도 軍布를 내자고 主張합니다. 朝鮮의 兩班 士大夫는 兵役義務가 없어요. 只今 우리나라 高位公職者들의 兵役 免除 比率이 높은 것이 다 이 잘못된 遺産을 이어받은 겁니다. 兵役을 賤하게 여기는 그 뿌리가 바로 朝鮮 後期에 있어요. 1年에 두 疋씩 軍布를 내게 돼 있는데 農土가 많은 富者인 兩班 士大夫는 合法的으로 免除되었습니다. 가난한 常놈들만 내는 거예요. 軍事費가 자꾸 늘어나니까 이미 世上 떠난 부친 것도 씌우고, 갓난아이 것도 씌워서 한 사람이 3名 몫을 내야 됩니다. 그러니까 못 견뎌서 逃亡가면 家族에게 代身 씌우는 族徵(族徵)李 盛行합니다. 한 家族이 모두 逃亡가면 이웃에게 씌우는 隣徵(隣徵)李 盛行합니다. 그래서 한 마을이 텅 비는 境遇가 許多합니다.

    北伐論者 尹鑴, 死藥 받다

    解決策은 뭡니까? 兩班 士大夫도 軍布를 내면 되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戶布制(戶布制)죠. 그런데 朝廷에 올라오면 番番이 否決됩니다. 朝廷에는 兩班 士大夫들뿐이지 상민의 理解를 代辯하는 벼슬아치는 없지 않습니까? 이때 肅宗 初에 南人이 政權을 잡으면서 調整에 들어간 尹鑴가 戶布制 實施를 主張합니다. 兩班, 常놈 할 것 없이 모두 軍布를 매겨야 한다고 主張하지요. 상민은 元來 納付해왔으니까 結局 兩班 士大夫도 軍布를 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兩班 士大夫들이 激烈하게 反對하지요. 이런 渦中에 中國에서 삼번의 亂이 失敗로 끝나면서 肅宗이 政權을 갈아치웁니다. 國際情勢가 影響을 끼쳤습니다. 삼번의 亂이 失敗로 끝나니까 北伐을 主唱한 男인 政權을 갈아치운 겁니다. 淸나라가 或是 自身에게 責任을 追窮할 境遇에 對備한 겁니다. 庶人들은 이때다 하고 尹鑴를 死刑시키려고 하는데 死刑시킬 罪目이 없어요. 尹鑴가 3年服說을 主張할 때 1年服說을 主張한 사람들은 賃金을 賃金 待接 안 한 것으로 處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朝鮮 王室을 높여야 한다면서 3年服을 主張한 사람을 죽일 罪目이 없습니다.

    尹鑴는 죽여야 할 對象입니다. 北伐을 主張하고 兩班 士大夫의 旣得權을 解體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經國大典’ ‘大明律’을 다 뒤져도 該當 罪名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閔鼎重이 “殿下께서 決斷하시면 됩니다”라고 말합니다. 賃金을 殺人者로 誘導하는 말입니다. 死刑시킬 罪가 없지만 殿下께서 決斷해서 죽이면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百號 尹鑴는 死刑당합니다. 野史에서는 尹鑴가 死藥을 마시면서 “나라에서 儒學者를 쓰기 싫으면 안 쓰면 그만이지 죽일 必要가 있느냐?”라고 말했다고 傳합니다. 그 後 朝鮮은 朱子學 以外의 學問은 이야기를 못 하는 沈默의 帝國이 됩니다.

    조선 후기 정치사의 현재적 의의

    老論의 巨頭 송시열.

    朝鮮 後期에 外注內洋(外朱內陽)이라는 말이 있어요, 겉으로는 朱子學者인데 속으로는 陽明學者라는 뜻입니다. 工夫해보니까 陽明學이 맞지만 陽明學者라고 是認했다가는 甚할 境遇 尹鑴처럼 死刑當할 수 있으니까 겉으로는 朱子學者人 척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河谷 정제두(鄭齊斗)가 工夫하다보니까 陽明學이 맞습니다. 그러다가 病에 걸리자 遺書 비슷하게 박세채에게 便紙를 써서 陽明學이 맞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죽지 않고 살아나자 내놓고 양명학자로 自處합니다. 外樣內洋(外陽內陽)李 된 거죠. 그리고 江華島로 들어가 그 작은 섬에 스스로 유배당해 學問의 自由를 누립니다. 白虎 尹鑴가 死刑당하지 않고 走者를 상대화했으면 朝鮮 後期 社會가 相當히 달라졌을 겁니다. 思想의 自由는 社會의 多樣化, 多元化를 이끌어냅니다.

    老論과 衝突하다 죽은 임금들

    只今 우리나라 學界는 朝鮮 後期와 別般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나라 學生들의 美國 아이비리그 脫落率이 44%라는 硏究가 있습니다. 그 理由가 뭐냐? 아이비리그에서는 “네 생각은 뭐냐?”라고 물어요. 그런데 우리나라 學生들은 先生님들의 생각을 외우는 데만 익숙합니다. “走者(朱子)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만 줄기차게 외우는 겁니다. 한마디로 ‘自信‘李 빠져 있는 거예요. 自己 視角으로 事物을 바라보는 方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같은 시스템인 國內에서는 견뎌도 아이비리그에서는 견디지 못하는 겁니다.

    엊그제 新聞 보니까 修能 滿點者 中에 數學도 외웠다는 이야기가 버젓이 실려 있습니다. 數學도 외워서 滿點 맞을 수 있는 곳이 韓國입니다. 이게 우리나라 敎育現實이에요. 노벨賞은 다 自己 視角, 自己 思考로 事物을 바라본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거지 남의 생각, 남의 視角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尹鑴가 “天下의 理致를 어찌 朱子 혼자 알고 나는 모른단 말이냐?”라고 맞섰다가 死刑당한 事件이 그래서 只今까지 影響을 미치는 겁니다. 現在 우리 社會에서 생각이 다른 것을 ‘틀리다’고 表現하지요. 이게 다 言語暴力이에요. 다르게 생각하는 게 當然한 겁니다. 여기에 똑같은 옷 입은 분 한 분도 안 계시죠? 이만큼 世上은 다양합니다. 人間이 그런 存在인데 하나의 틀 속에 억지로 집어넣었던 것입니다.

    朝鮮 後期 儒學의 主流가 禮學(禮學), 卽 例論(禮論)으로 갑니다. 金長生, 金集, 宋時烈 等이 모두 禮學의 代價입니다. 왜 禮學이 學問의 主流가 되느냐? 壬辰倭亂, 丙子胡亂 兩란 以後 朝鮮社會의 身分制가 흔들립니다. 壬辰倭亂으로 士大夫 支配體制는 이미 끝났습니다. 또한 免賤제로 身分 解放도 可能하다는 事實을 確認했습니다. 兩란 後 다시 舊 支配體制로 回歸瑕疵 常民들이 抵抗합니다. 힘이 弱한 사람은 도망가고 剛한 사람은 山이나 바다로 들어가서 떼盜賊이 된다는 記錄이 많습니다. 白虎 尹鑴는 身分制를 解體 乃至는 緩和하는 것으로 朝鮮社會를 再編해야 한다고 主張한 反面 宋時烈 等은 身分制를 繼續 强化해서 兩班 士大夫의 特權을 維持하는 쪽으로 社會를 끌고 가야 한다고 主張합니다. 여기에서 禮論이 나오는 겁니다.

    哲學에 體制나 政治를 바라보는 視角이나 經濟를 바라보는 視角이 담겨 있지 않으면 哲學이 아니라 知的 遊戱, 말장난에 不過 합니다. 哲學엔 반드시 現實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熾烈한 現實問題가 담겨있어야 합니다. 尹鑴가 死刑당한 後 走者는 임금도 敢히 넘을 수 있는 神聖한 存在로 한層 올라섭니다. 朝鮮 賃金이 走者를 絶對化하는 思想을 가진 西人이라는 政派, 그 西人의 核心인 老論과 어떤 事案을 두고 衝突을 向해서 달려가다가 衝突 直前에 朝鮮 王이 急逝하는 것으로 整理되는 패턴이 反復됩니다. 소현世子가 그렇게 죽었고, 孝宗, 顯宗, 警鐘이 그렇게 죽었습니다. 思悼世子가 老論에 맞섰다가 뒤주 속에 갇혀 죽습니다. 貞操도 죽은 後 毒殺說에 휘말리고, 順調가 아들 驍名世子를 내세워서 老論과 맞섰다가 3年 만에 또 急逝합니다.

    淸나라에 賂物 로비

    朝鮮 後期에 結局 擇軍(擇君)의 時代로 접어들게 됩니다. 賃金을 選擇하는 時代, 王朝 國家에서 擇軍이라는 말 自體가 易心(逆心)입니다. 只今은 大統領이 밤中에 누굴 만나는지 全혀 모르죠? 朝鮮時代 때는 國王과 臣下의 獨對(獨對)가 嚴格하게 禁止돼 있었어요. 반드시 承旨와 史觀이 陪席하게 돼 있습니다. 只今 이 制度를 復元해야 합니다. 그래야 政治工作이 根源的으로 不可能하게 됩니다. 肅宗 43年, 肅宗과 老論 領袖 李頥命이 獨對하는데, 그해가 丁酉年이라서 精油獨對라고 합니다. 精油獨對 後 갑자기 死刑당한 張禧嬪의 아들, 世子(景宗)에게 代理淸淨을 시키라는 命이 내려집니다.

    警鐘은 張禧嬪의 아들이라는 理由로 태어날 때부터 南人이라는 黨籍이 찍혔습니다. 숙빈 崔氏가 연잉군(英祖)을 낳으니까 老論은 연잉군을 國王으로 擇軍했습니다. 그 一環이 世子의 代理淸淨입니다. 少論 쪽에서는 代理淸淨을 시켜가지고 꼬투리 잡아서 내쫓으려는 속셈이라면서 거세게 反撥합니다. 少論 領袖 尹趾完이 구순이 다 된 老軀에 시골에서 臥病 中에 있다가 棺을 짊어지고 올라와서 上疏합니다. 이때 上疏文 中에 “殿下께서는 어찌 相臣(相臣:政丞)을 使臣(私臣:個人의 臣下) 부리듯이 하며 李頥命은 한 나라의 上申이 되어가지고 어찌 임금의 使臣(私臣)인 것처럼 處身하느냐”라고 肅宗과 李頥命을 모두 꾸짖습니다. 대단한 意氣죠. 이런 게 바로 선비精神입니다. 只今으로 치면 어떻게 됩니까? 나는 大統領 個人의 長官이 아니라 大韓民國의 長官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長官으로 있어야 하는데 大韓民國 現實이 어디 그렇습니까?

    小論에서 이처럼 激烈하게 反撥하니까 世子를 갈아치우려 하다가 못 갈아치웁니다. 그러다 警鐘이 끝내 卽位하니까 老論에서 淸나라에 이 事實을 報告하러 가면서 老論 領袖 李頥命이 銀貨 數萬 兩을 淸나라 朝廷에 바칩니다. 淸나라 使臣이 나오면 연잉군을 좀 만나달라는 로비입니다. 겉으로는 끝까지 淸나라를 認定하지 않는 것이 老論 黨論인데 實際로는 賂物까지 가지고 가서 로비합니다. 使臣이 나오면 王을 만나면 되는 겁니다. 美國 大統領이 나오면 韓國 大統領 만나면 되지 大統領의 野心 많은 異腹同生을 왜 만납니까? 國王 後보니까 미리 面接 봐달라는 이야기입니다.

    實際로 그 스토리대로 돼가지고 警鐘은 4年 만에 서른일곱 살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世上을 떠나고 연잉군이 卽位합니다. 英祖가 卽位하니까 警鐘이 독살당했다는 이야기가 播多했습니다. 英祖가 卽位 初에 陵幸을 가는데, 利川해라는 軍事가 漁家를 가로막고 辱을 합니다. 영조는 利川해를 死刑시키면서 그가 한 말은 記錄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實錄에는 ‘불인지言(不忍之言)’, 차마 참을 수 없는 말이었다고 나오는데 모두 景宗 毒殺說에 對한 이야기입니다. 利川해라는 軍事가 “李 先王을 毒殺한 逆賊”이라고 英祖에게 辱을 한 겁니다.

    誇大包裝된 英祖

    영조는 우리 歷史에서 誇大包裝된 임금입니다. 老論과 손잡고 思悼世子를 죽였기 때문에 老論 後裔 學者들이 實際보다 높이 評價한 것입니다. 國語敎科書에 思悼世子 關聯해서는 혜경궁 洪氏가 쓴 ‘閑中錄’만 실려 있었습니다. 閑中錄 이야기는 뭡니까? 思悼世子는 精神病者高 英祖 또한 精神病者에 가까운 性格 異常者인데 이 두 父子가 衝突해서 뒤注意 悲劇이 發生했다는 이야기입니다. 核心은 우리 親庭은 이 事件에 責任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前에 서울大學校 國文科의 한 敎授가 제가 쓴 ‘思悼世子의 告白’은 다 틀렸다면서 ‘閑中錄이 100% 다 맞다’고 主張했습니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學問 現實입니다.

    혜경궁 洪氏는 老論 黨論에 따라서 男便 죽이는 데 加擔했습니다. 그런데 老論에서 世孫度 쫓아내야겠다고 하니까 여기에는 反對합니다. 세손이 쫓겨나면 죽는 겁니다. 英祖도 내 子息은 죽였지만 孫子는 못 죽이겠다고 反對합니다. 世尊(正祖)은 父親이 悲慘하게 죽는 것을 봤기 때문에 自己의 色깔을 全혀 드러내지 않습니다. 本能的인 生存술이죠. 영조는 思悼世子를 죽이고 나서 罪人의 아들이 王이 될 수 없으니까 世孫을 이미 죽은 驍將世子의 戶籍에 入籍시킵니다.

    그런데 思悼世子가 이것을 正確하게 豫見합니다. “나는 廢하고 世孫을 驍將世子의 兩者 삼으면 어떨꼬”라고 말합니다. 또한 혜경궁 洪氏에게 “그 뜻들이 무서워”라고 말하죠. 思悼世子는 다 아는 겁니다. 自己 夫人이 적진, 老論에 加擔해서 自己를 죽이는 데 一助한다는 걸 다 아는 거예요. 思悼世子가 뒤주에 갇히던 때는 陰曆 尹5月이니 陽曆으로 치면 한여름입니다. 이때 世子는 혜경궁 洪氏에게 내가 精神病者 行世하려고 하니까 世孫의 가죽 털帽子人 揮項을 갖다달라고 말합니다. 한여름에 가죽 털帽子를 빌려달라는 世子에 對한 혜경궁 洪氏의 答辯이 “世孫 거는 작으니까 當身 걸 쓰고 가세요”라는 겁니다. 그러자 世子가 “나는 오늘 나가서 죽겠기에 자네는 世孫하고 오래 살겠기에 안 빌려주려는 그 속셈을 알겠네”라고 말하지요. 혜경궁 洪氏가 世孫을 保護했던 것이 正祖가 卽位할 수 있는 重要한 바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正祖는 卽位 一聲으로 “寡人은 思悼世子의 아들이다”라고 宣布합니다. 正祖는 思悼世子의 아들이라는 自己 正體性은 分明히 밝혔지만, 13年 前 過去로 돌아가는 過去回歸의 政治는 하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正祖가 成功한 임금이 될 수 있었던 첫 番째 要因입니다. 過去는 過去, 歷史에 맡기는 겁니다. 現在의 權力이 아무리 剛해도 흘러간 過去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現在의 權力으로 할 수 있는 것은 現實政治를 잘함으로써 더욱 나은 未來를 選擇할 수 있는 것이지요. 歷史學은 過去學이 아니라 未來學입니다. 어떤 選擇을 하느냐에 따라서 未來가 달라지는 겁니다. 現在의 權力을 가지고 過去 歷史를 뒤바꾸려고 한 모든 政權, 모든 國王은 다 失敗했습니다.

    閑中錄의 誤謬

    英祖가 失敗한 가장 큰 理由가 先王 毒殺說을 없애기 위해 過去의 政治에 邁進했기 때문입니다. 그 渦中에 思悼世子度 죽인 겁니다. 未來를 選擇한 正祖는 自己 父親을 죽인 老論과도 손잡고 “함께 未來로 가자”고 이야기합니다. 正祖 10年, 老論에서 貞操를 壓迫하기 위해서 異腹同生인 은언군을 死刑시키라고 主唱하다가 그 渦中에 구선복이라는 人物에게 불똥이 튑니다. 그래서 老論으로 軍權을 잡고 있는 구선복이 死刑당하는데 正祖가 “저놈이 나의 怨讐인데 내가 저놈과 10年 동안 每日같이 아침저녁으로 얼굴 맞대면서 政治를 했으니 내가 어찌 花甁이 생기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구선복은 思悼世子를 죽이는 데 加擔했던 人物이죠. 한 나라의 國王, 한 나라의 大統領은 이 程度의 眞情性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正祖는, 무엇을 가지고 未來를 志向했다고 말할 수 있느냐, 代理淸淨하는 世子를 뒤주 속에 가둬 죽이는 이런 政治體制로는 未來로 갈 수 없다고 생각해서 老論一黨 獨裁體制를 李家煥이나 丁若鏞 兄弟 같은 男인 系列 人物들을 끌어들이는 것으로 多黨制로 바꿉니다. 그리고 朱子學 唯一思想 體制를 바꾸어 陽明學과 西學이라고 불렸던 天主學까지 容認하는 것으로 思想의 多元化를 꾀합니다. 그리고 身分制 緩和를 試圖합니다.

    在位 1年에 書類許通節目, 庶子도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게 하는 法을 만들고 在位 3年에 李德懋, 朴齊家, 柳得恭, 署理數 이 네 名의 庶子를 奎章閣 檢書官으로 特採합니다. 이들은 四檢書라는 普通名詞로 불리면서 朝鮮의 知識地圖를 확 바꿔버립니다. 이들 庶子 知識人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 重商主義(重商主義) 實學입니다. 老論이라는 黨派는 끝까지 淸나라를 認定하지 않습니다. 淸나라의 發展된 文物을 認定하자는 重商主義, 北學派는 老論과는 다른 庶子 知識人의 視角으로 事物을 바라봤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間 國史 敎科書는 重商主義 實學을 老論에서 主唱한 것처럼 써놨었습니다. 거짓말이죠. 그러다가 얼마 前 敎科書 바꿀 때 老論이라는 部分을 슬그머니 빼버리면서 重農主義 實學, 卽 經世致用 學派는 南人들이었다는 事實까지 빼버렸습니다. 아까 國語敎科書에 ‘閑中錄’만 실었었다고 말했지요. ‘閑中錄’과 反對되는 內容은 많습니다. ‘英祖實錄’에도 있고 正祖가 編纂한 ‘어제장헌대王指紋’도 있고 여러 野사도 있습니다. 敎科書에 閑中錄을 실으려면 다른 視角의 飼料도 싣고 난 後 學生들에게 어떤 게 맞는지 한番 調査해보라고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아이비리그式 工夫法이죠. 反面 우리나라는 “閑中錄만 믿어야 돼”라고 가르칩니다.

    ‘閑中錄’李 100% 맞다고 主張하는 서울대학교 國文科 敎授는 그 根據로 “陳述이 具體的”이라고 말합니다. 殺人者도 具體的으로 嫌疑를 否認하면 無罪라는 이야기예요. 이것이 우리나라 學問 水準입니다. ‘閑中錄’만 배운 學生들에게 아이비리그에서 “思悼世子가 果然 精神病 때문에 죽었을까?” “다른 可能性은 없을까?”라고 물어보니까 答辯을 못하는 겁니다. 思考의 多樣性, 한 事件을 다양한 側面에서 바라보는 訓鍊을 못 받았기 때문에 탈락하는 거예요.

    正祖 毒殺說의 意味

    조선 후기 정치사의 현재적 의의

    事後 毒殺說에 휘말렸던 正祖.

    正祖는 庶子도 登用해 身分制를 緩和하는 것으로 未來를 志向합니다. 그러다가 正祖가 結局은 毒殺說에 휘말리면서 世上을 떠나게 되죠. 얼마 前에 正祖가 심환지와 주고받은 御札이 나왔죠. 그러니까 正祖御札을 硏究했다는 學者들이 느닷없이 正祖 毒殺說을 否認하는 決定的 資料라고 主張했지요. 제가 어떤 放送 인터뷰에서 “아내가 殺害당하면 제1 容疑者가 누가 되는지 아느냐? 男便이 아니냐” 그랬더니 進行者가 “男便이 保險에 들어놨을 때 그렇다”고 答해요. 그래서 제가 “심환지가 正祖가 世上 떠난 當日로 領議政으로 昇進했다. 그게 保險金 탄 거 아니냐?”라고 答했습니다.

    正祖御札이 나왔으면 基本的인 硏究 姿勢는 어떠해야 하느냐? 正祖實錄이나 承政院日記 같은 旣存 飼料와 그 內容이 配置되는지 아닌지를 檢討해야 합니다. 그러면 正祖御札은 旣存飼料를 뒤집는 史料가 아니라 그 背景을 說明해주는 補助史料라는 事實을 알 수 있습니다. 實錄에 심환지가 右議政을 辭退했다는 內容이 나와 있는데, 正祖御札이 그 背景을 說明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서로 便紙를 주고받았으니까 毒殺했을 理가 없다는 單純無識한 이야기를 記者들 앞에서 해서 約 이틀 동안 그게 通用됐어요.

    심환지가 正祖 毒殺 嫌疑를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正祖가 世上 떠난 後에 심환지가 正祖의 政治路線을 조금이라도 繼承하려고 努力하다가 귀양을 간다든지 파직당한다든지 하는 政治的 不利益을 當한다면 正祖 毒殺說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심환지는 正祖가 世上을 떠나던 1800年과 그 다음해인 1801年, 이때가 바로 茶山의 兄 丁若鍾은 死刑당하고 丁若銓은 丁若鏞과 귀양 가는 等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는 辛酉迫害가 發生한 해입니다. 正祖 때 成長했던 南人은 大部分 죽거나 귀양 가죠. ‘純祖實錄’은 이 모든 獄事를 심환지가 主管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쓰고 있습니다. 또 ‘純祖實錄’에는 先王(正祖)李 線香(仙鄕:저승)으로 떠나던 當日로 先王을 背信했다고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21世紀 白晝대낮에 學者라는 사람들이 ‘正朝와 심환지는 서로 便紙를 주고받았으니까 毒殺했을 理 없다’고 主張하는, 심환지에 對한 實錄 記錄입니다. 21世紀의 學者들이 ‘正祖毒殺說’을 自身들에게 아픈 理論 構造, 아픈 프레임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저는 그 構造가 問題라는 겁니다. 正祖 죽음은 200餘 年 前에 있었던 事件으로 그 眞實을 밝히려면 事件을 客觀化, 對象化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社會에는 正祖가 老論에 依해서 독살당했다는, ‘이 老論에 依해서’란 文句를 너무 아프게 생각하는 學者가 많아요. 우리나라는 아직까지도 200年 前, 300年 前의 프레임에 갇혀 있는 겁니다.

    이완용 祕書 李人稙의 賣國行爲

    正祖 事後 勢道政治가 恣行되죠. 勢道政治가 뭐냐? 老論의 10餘 個 집안이 모든 國政을 壟斷하는 겁니다. 江華도령, 卽 哲宗의 兄인 回評軍을 老論에서 죽였어요. 죽인 사람의 동생을 王으로 推戴한다는 것은 곧 王은 아무 存在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런 狀態에서 高宗 時代를 맞이하죠. 只今으로부터 101年 前인 1910年 8月 이인직이라는 人物이 統監府 外事局長 고마쓰를 밤中에 몰래 찾아갑니다. 李人稙이 李完用의 祕書입니다. 李人稙을 보내 “나라를 넘기면 우리에게 어떻게 해줄 것이냐?”라고 묻는 겁니다. 고마쓰가 “貴族令을 만들어서 繼續 貴族으로 待遇하고 莫大한 恩賜金으로 나라 팔아먹은 代價를 支拂할 거다”라고 말하니까 李人稙이 좋아서 갑니다.

    李完用이 데라우치 痛感하고 協商하면서 “高宗의 地位는 어떻게 할 거냐?”라고 물어요. 데라우치가 “王으로 封할 거다”라고 하니까 李完用이 “對共(大公)으로 하면 어떻겠느냐?”라고 提案합니다. 對共은 王과 工作 사이의 中間 階級으로서 王이 아닙니다. 이게 아까 말씀드린 老論, 仁祖反正의 쿠데타 名分, 朝鮮 王은 王이 아니라는 속내가 그대로 드러난 겁니다. 李完用이 老論 黨首예요.

    나라가 亡했을 때 日本에서 76名에 達하는 朝鮮人에게 勳章과 爵位를 주죠. 이 76名을 調査하면 두 部類가 나옵니다. 하나는 王族입니다. 大院君의 조카가 있고 順從의 丈人도 있어요. 다른 하나는 黨인(黨人)들입니다. 64名 程度의 黨籍을 알 수 있는데 南人은 없고 北人은 2名이고 小論이 6名이고 나머지 56名이 다 老論입니다. 李人稙이 고마쓰를 찾아가서 “우리는 中國을 섬겨왔는데 이제 日本으로 바꾸는 것뿐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게 正確히 老論 黨論입니다.

    그런데 國語敎科書에서 李人稙을 뭐라고 가르쳐 왔습니까? ‘穴의 누’를 쓴 先覺者로 가르쳐왔지 않습니까? 이 狀態에서 大韓民國이 未來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穴의 漏’ 內容이 뭔지 아세요? 淸日戰爭 때 淸나라 軍士가 朝鮮 處女를 劫奪하려는 것을 日本軍이 求해준다는 內容이에요.

    訓民正音의 變質

    우리 言語는 지난 100年 사이에 많이 歪曲되었습니다. 한글날이면 한글이 世界에서 가장 優秀한 表音文字라고 자랑하죠. 그런데 이 優秀하다는 表音文字가 L과 R을 區分 못하고, P와 F, 또 B와 V도 區分 못하죠. 世宗 賃金이 訓民正音을 만들 때는 모든 소리를 다 적을 수 있게 했습니다. ‘訓民正音 解例本’에 다 나와 있어요. 이 原則에 따르면 R과 L을 區分할 수 있게 돼 있어요. 兵書(竝書) 原則이 있습니다. 初聲(初聲)을 두 個, 세 個 써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 原則에 따르면 L은 그냥 ‘ㄹ’ 로 쓰고 R은 ‘ㅇㄹ’로 쓰든지 ‘ㄹㄹ’로 쓰면 된다는 것입니다. 또 燕西(連書) 原則이 있어요. 脣輕音을 적는 方法입니다. P와 F, B와 V 모두 입술소리죠. 하나는 ㅂ으로 적고 다른 하나는 ㅂ아래에 ㅇ을 써서 脣輕音을 만들면 區分할 수 있다는 겁니다. 제가 만든 것이 아니라 세종대왕이 만든 겁니다.

    그런데 1912年에 日本 사람들이 諺文綴字表記法이라는 걸 만들어요. 只今 한글맞춤法統一案이라는 것은 諺文綴字表記法을 한글로 옮겨놓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頭音法則을 한番 생각해보세요. 全世界에서 特定音을 發音 못하게 國家權力으로 强制하는 나라는 大韓民國밖에 없어요. 앞에 ㄹ이 발음되면 ㄹ을 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걸 强制로 못하게 함으로써 우리 言語를 절름발이로 만든 겁니다. 다 日帝時代의 잘못된 流産입니다. 세종대왕의 訓民正音 創製 原則으로 돌아가면 모든 發音을 다 區分해서 적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放學 때 敎師들 교육시켜서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면 英語 때문에 그렇게 亂離 치지 않아도 다 잘할 수 있게 돼 있어요. 世宗大王이 訓民正音을 그렇게 만들어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자고 하면 反對하는 國語 學者가 많습니다.

    江華島로 들어갔던 陽明學者들은 大部分 小論 系列입니다. 이들이 나라 亡하니까 滿洲로 亡命해요. 滿洲에 가보면 횡도천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는데 거기에 李建昌의 동생인 이건승, 홍승원, 鄭齊斗의 6代孫 정원하 같은 陽明學者들이 亡命해서 獨立運動 합니다. 그런데 民族文化百科事典에서 홍승헌, 정원하를 찾아보면 世上 떠난 해가 물음標로 돼 있어요. 이러니까 大韓民國에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없는 거예요. 나라 팔아먹는 데 加擔한 쪽은 繼續 豪奢를 누리는데 獨立運動에 加擔했던 분들은 生死조차 모릅니다. 最小限 名譽라도 높여줘야 되는데 이게 안 돼 있는 겁니다. 以上을 選擇해서 自己 몸을 던졌으면 그 名譽를 後代人들이 기려줘야 하는데 우리 現實은 그렇지 않습니다.

    서울에서는 友黨 李會榮 6兄弟 一家가 全 財産을 팔아서 滿洲로 亡命해 新興武官學校를 세웁니다. 그리고 또 忠淸道 鎭川에 있는 陽明學者들과 慶尙道 安東에 있는 男인 系列의 白蝦 김대락, 석주 이상룡 같은 人物이 滿洲로 亡命해서 橫道천에 모였다가 追加哥라는 마을로 移住해 耕學社라는 民團自治組織을 만듭니다. 저는 이 耕學社가 바로 大韓民國 建國의 뿌리요, 大韓民國 政府의 뿌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耕學社와 新興武官學校

    100年 前인 1911年 陰曆 4月頃에 一團의 兩班 士大夫들이 滿洲의 追加哥라는 마을 뒷山, 臺高山이라는 곳에 모여서 露天群衆大會를 엽니다. 露天群衆大會라는 民主的 集會를 하고 그 結果로 民團自治組織인 耕學社를 만들고 耕學社에서 新興武官學校를 만들어 決定的인 時期에 獨立戰爭을 일으켜서 日本을 構築하고 나라를 되찾겠다는 꿈을 꾸는 겁니다. 나중에 많은 獨立軍 指揮官이 이 新興武官學校에서 나옵니다. 나라가 亡했을 때 나라 팔아먹은 쪽에서 莫大한 恩賜金을 받고 喜喜樂樂하고 있을 때 自己 모든 걸 던져서 滿洲로 亡命하고 追加가에 모여서 耕學社를 만들고 新興武官學校를 만들었던 이 地點에서 大韓民國 建國의 뿌리를 찾아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大韓民國이라는 나라가 全世界 어느 나라 못지않게 자랑스러운 나라가 되는 겁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大韓民國이 어디로 가야 하느냐의 答이 나와 있습니다. 歷史 속에서 길을 찾아야 합니다.

    只今 우리 社會가 物質的으로는 풍요롭지만 社會 不滿指數는 가난할 때보다 훨씬 높지 않습니까? 그 物質에 걸맞은 精神을 못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一齊植民史觀과 老論史觀을 批判하는 理由가 있습니다. 老論史觀은 中國人의 視角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것이고 日帝 植民史觀은 日本人의 視角으로 우리를 보는 거예요. 이제는 우리의 視角으로 事物을 바라봐야 합니다. 世界 10大 交易國이라는 덩치에 걸맞은 精神世界를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야 이 大韓民國이 未來로 나갈 수 있습니다.

    安東에서 亡命한 석주 이상룡 先生이 ‘鉏史錄’이라는 亡命日記를 남기는데 그 記錄을 보면 日帝가 나중에 朝鮮總督府 傘下에 ‘朝鮮史編修會’를 만들어서 우리 歷史를 歪曲하리라는 事實을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써놓습니다. 日帝 植民史觀은 아직까지 漢四郡은 平壤 中心, 漢江 以北에 있었다고 主張합니다. 이것이 바로 東北工程의 主要 論理입니다. 中國 東北工程의 核心이 漢四郡은 漢江 以北에 있었다는 겁니다. 이게 古朝鮮史 같지만 大韓民國師이자 現代 領土 問題입니다.

    朝鮮總督府는 1945年 8月15日에 解體됐지만 朝鮮史編修會는 解體되지 않았습니다. 只今까지 그 歷史가 그대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漢四郡이 設置되었을 當時에 쓰였던 司馬遷의 ‘詐欺’나 ‘漢書(漢書)’ ‘後漢書(後漢書)’ 같은 冊은 漢四郡의 位置를 ‘再搖動(在遼東)’, 卽 ‘搖動에 있다’고 써 놨습니다. 搖動이 滿洲죠. 모든 中國 歷史書는 다 搖動에 있다고 써 놨는데, 100年 前에 日帝 植民史學者들이 漢江 以北에 있다고 새롭게 主張한 것을 只今까지 이 나라에서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只今 이 나라의 精神界가 荒廢한 겁니다.

    日本 高官만 죽이고 運轉手는 살릴 方法이 없겠느냐

    이제는 새로운 歷史觀, 言語觀으로 大韓民國의 그랜드 디자인을 다시 짤 때가 됐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나라가 亡했을 때 自己의 모든 걸 다 털어가지고 大韓民國 建國의 씨앗이 된 분들을 精神的 支柱로 삼아야 합니다. 舊派 백정기라는 분이 있습니다. 傷害 육삼정에 日本軍 高位 將星들과 中國의 腐敗官僚들이 모인다는 消息을 듣고 爆彈을 던지려고 하는데 日本 高官만 죽이고 運轉手는 죽이지 않을방법이 없겠느냐고 苦悶합니다. 아무나 無差別로 殺傷하는 알 카에다와는 精神的, 道德的 次元이 다른 겁니다. 韓國 獨立運動이 이렇게 대단히 높은 道德的 思考 속에서 나온 겁니다. 우리나라가 제 길을 잡으려면 이 獨立運動家들이 갖고 있던 마음, 나라 亡할 때 北風寒雪 몰아치는 滿洲로 亡命해 처음 始作했던 마음, 日本과는 秋毫의 흔들림 없이 싸우면서도 關聯 없는 사람은 한 사람에게도 害를 끼치지 않으려던 마음으로 大韓民國의 精神世界를 다시 세워야 하는 겁니다.

    조선 후기 정치사의 현재적 의의
    이덕일

    1961年 出生

    崇實大 史學科 卒業, 同 大學院 碩·博士

    現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長

    著書: ‘宋時烈과 그들의 나라’ ‘思悼世子의 告白’ ‘金宗瑞와 朝鮮의 눈물’ ‘朝鮮王 毒殺事件’ ‘朝鮮王을 말하다’ ‘尹鑴와 沈默의 帝國’


    엄형순 先生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友黨 李會榮 先生의 아들 이규창과 함께 逮捕되었는데, 어린 규창에게 “너는 좋은 世上 만나면 나가서 어머니께 孝道하고 살아라”면서 모든 일을 혼자 했다고 陳述하고 死刑 宣告 받습니다. 法廷에서 마지막 陳述 때 “내가 비록 人間解放과 祖國의 光復을 위해서 한 行爲지만 어쨌든 그 渦中에 犧牲된 人物들에게도 未安한 感情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死刑당합니다. 바로 이런 精神世界를 가지고 우리 後世를 가르치고 우리 公務員이 이런 姿勢를 가진다면 大韓民國이라는 배가 未來의 先進國으로 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朝鮮 後期 政治史에서 많은 問題點이 있지만, 그런 問題點 속에서 이런 貴한 씨앗들, 卽 나라 亡했을 때 모든 것을 바치고 滿洲로 亡命하는 선비精神이 있었고, 그런 精神이 現在 大韓民國의 精神으로 되살아날 때 大韓民國의 未來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긴 時間 感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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