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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說, 어떤 舞踊(無用)의 世界|新東亞

小說, 어떤 舞踊(無用)의 世界

  • 함정임│小說家·동아대 文藝創作科 敎授 etrelajiham@empal.com

    入力 2012-12-26 17: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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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어떤 무용(無用)의 세계

    어떤 作爲의 世界<br>정영문 지음, 文學과知性社, 294쪽, 1萬1000원

    벌써 10年 前이다. 펜으로 정영문의 作家 肖像을 그린 적이 있다. 題目을 얹고 그림을 그리기 始作했던가, 아니면 다 그리고 題目을 얹었던가. 記憶이 確實하지 않다. 어쨌든 그때 公式的으로 發表된 그 作家 肖像의 題目은 ‘이것은 정영문이 아니다’이다. ‘깃털의 現象學’이란 副題를 곁들였는데, 뭔가 그럴듯한 加筆이 必要했던 模樣이다. 肖像畫의 첫 劃은 이렇게 出發한다.

    101) 超現實主義 畫家 마그리트 式으로 表現하자면, 아니 後期構造主義者 푸코 式으로 註釋을 달자면, 이것은 정영문의 肖像(肖像)李 아니다. 나는 다만 느리게 空中을 游泳하는 어느 날개 큰 새의 깃털을 눈으로 따라갈 뿐이다. 100) 깃털로 보아 그는 前生에 始祖새[始祖鳥]였거나 厚生에 알바트로스(信天翁)와 連結되지 않을까. 鳥類 最古(最古)이나 化石動物이고 이가 있으며 날개에 발톱이 달린 始祖鳥보다는 그는 어쩌면 보들레르의 哀調(愛鳥) 信天翁에 가까울지 모른다. … 98) 가벼움으로, 或은 어렴풋함으로 存在感이 몹시 不安定해도 나는 이 글을 마칠 때까지 깃털의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고 努力할 것이다. 피카소처럼 ‘새’를 極單純하게 스케치하려면, 프레베르처럼 ‘새의 肖像畫를 그리기 위해서’는 얼마나 오랜 視線을 對象을 向해 維持해야 하는가. - ‘이것은 정영문이 아니다-깃털의 現象學’(‘문학동네’ 2002年 봄號) 中에서

    ‘이것은 정영문이 아니다’라고 旗발처럼 내건 이 題目은 事實 超現實主義 畫家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파이프’에서 題目을 借用한 것이다. 그림에는 파이프가 큼직하게 그려져 있다. 그런데 파이프 아래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 n‘est pas une pipe).’ 分明 눈에 보이는 것은 파이프 ‘形象(이미지)’이나, 눈으로 읽는 것은 파이프가 아니라는 ‘텍스트(文字)’다. 이 그림을 놓고 後期構造主義 哲學者인 미셸 푸코는 長文의 哲學的 分析을 했는데, 解釋의 要旨는 ‘이미지의 反逆’, 文學用語로는 矛盾(Ironie) 語法이다. 곧 慣習的으로 보고 읽는 行爲에 對한 衝擊과 背反을 통해 새로운 意味, 새로운 解釋을 誘導하고, 創出하는 것. 정영문은 누구, 아니 무엇인가? 그가 누구인지 알아내는 方法은 徹底히 그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을 前提로 할 때 可能하다. 그래서 動員된 것이 始祖새이며 알바트로스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도무지 없으며 기껏해야 깃털 水準, 그것도 언뜻 보였다 사라지는 蜃氣樓 같은 水準, 곧 現象일 뿐이라는 것. 정영문이라는 作家에 對한 肖像은 그대로 그가 지어낸 텍스트(文字行爲)로 移行된다.

    敍事의 흐름 뒤엎는 矛盾 語法

    이 글에는 샌프란시스코에 關한 이야기도 있지만 이 都市에 關한 이야기는 아니다. 나는 이 都市에 머물면서 되도록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經驗하려 하지 않았는데 特別히 보고 듣고 느끼고 經驗하고 싶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글은 그냥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듣고 느껴지는 대로 느끼고 어쩔 수 없이 經驗되는 대로 經驗한 것들에 對한 이야기이다. 아니, 그보다는 보이는 대로 보지 않고 들리는 대로 듣지 않고 느껴지는 대로 느끼지 않고 經驗한 대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들에 對한 이야기이다. - 정영문,‘어떤 作爲의 世界’ 中에서



    한 篇의 小說을 創作하는 것은 한 채의 집을 짓는 것과 類似하다. 矛盾 語法이란 이런 집짓기에서 한 單語 한 單語 連結해 文章을 만들고, 한 文章 한 文章 築造해가다가, 문득 只今까지 進行된 過程(길)을 全面 否認하거나 싹둑 잘라버림으로써 無效로 돌리는 敍事法이다. 이러한 矛盾 語法을 小說에 끌어들인 作家는 프란츠 카프카다. 정영문이 한 段落, 또는 한 場面 끝에 이르러 每番 敍事의 흐름을 뒤엎는 顚覆의 方式이라면, 카프카는 한 文章 안에 配置된 語彙의 次元에서 作動하는 것으로 把握된다. 이러한 特徵으로 인해 카프카의 文章은 매끄러운 飜譯이 不可能한 것으로 定評이 나 있다. 아무리 有能한 獨逸語 飜譯者라도 카프카의 紋章만은 읽어내기 쉽지 않은 語塞한 文章으로 옮겨놓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 脈絡에서 飜譯者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카프카의 文章을 제대로 옮기는 것이야말로 가장 읽기 곤란한 狀態라고 吐露하기도 한다.

    “너는 이제 더 以上 무엇을 알고 싶은가?”라고 門지기가 묻는다. “네 欲望은 채워질 줄 모르는구나.”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法을 切實히 바랍니다” 하고 그 男子는 말한다. “지난 數年 동안 나 以外에는 아무도 立場을 許諾해줄 것을 要求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그런가요?” 門지기는 그 시골 사람이 이미 臨終에 다가와 있다는 것을 알고, 稀微해져가는 그의 聽覺에 들리도록 하기 위해서 소리쳤다. “이곳에서는 너 以外에는 아무도 立場을 許諾받을 수 없어. 왜냐하면 이 入口는 但只 너만을 위해서 定해진 곳이기 때문이야. 나는 이제 가서 그 門을 닫아야겠네.” - 프란츠 카프카 지음, 이주동 옮김, 솔출판사, ‘法 앞에서’(‘카프카 短篇全集 變身’ 수록) 中에서

    小說의 根幹은 스토리다. 스토리는 進行되면서 文脈을 形成하고, 그 文脈에 따라 讀者는 內容을 把握한다. 그런데 ‘法 앞에서’를 비롯한 카프카의 小說들은 스토리를 따라 읽되, 마치 祕密을 內藏한 暗號文처럼 文脈은 쉽게 看破되지 않는다. 프라하의 獨逸系 유대人 出身이라는 카프카의 特殊한 正體性이 그의 言語(少數 民族의 言語), 곧 語彙의 裏面에 스며들어 있기에 語彙들의 合成인 텍스트의 表面을 이루는 스토리만으로 그 속뜻을 꿰뚫어보는 것이 쉽지 않다. 꿰뚫기는커녕 作品 속으로 들어가는 方法(入口)조차 찾아내지 못해서 戰戰兢兢한다.

    수많은 里좀(뿌리줄기), 또는 굴(窟)을 거느린 小說로 浮刻되기도 한다(들뢰즈·가타리 지음, ‘카프카-少數 民族의 言語’ 中에서).

    카프카의 作品 속으로 들어가는데 애를 먹는 만큼 빠져나오는 데도 마찬가지다. 어디서 始作됐는지, 또 어디에서 끝날지 알 수 없는 꿈속에 느닷없이 끌려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과 恰似하다.

    정영문의 小說은 카프카의 그것처럼 巨大한 꿈의 破片들로 이루어진 形局이다. 어떤 小說을 써도 結局은 꿈이라는 帝國으로 歸屬될 뿐이다. 때로 꿈은 性(城)으로 代替되거나, 굴(窟) 또는 里좀으로 代替 可能하다. 入口를 찾지만 結局 찾지 못하는 꿈(惡夢)李 카프카 小說의 本質에 該當된다면, 정영문의 꿈은 카프카的이지만 里좀이나 굴, 城을 向한 强迫이 除去돼 있고, 代身 ‘至極히 些少하고 舞踊’韓 말놀이가 敍事의 動力을 形成하고 있다.

    중얼거리기와 어긋나기

    언젠가부터 나는 내가 꼬리뼈를 세게 부딪친 後 異常한 사람이 되었기에 異常한 사람으로 살 수밖에 없는 運命이라고 생각했다. 實際로 나는 일곱 살 무렵 가을에 집 마당에서 감을 따러 감나무에 꽤 높이 올라갔다가 떨어져 暫時 精神을 잃은 後, 精神이 든 뒤에도 한참 동안 꼼짝할 수 없었고, 그래서 감나무 아래 누워 꼬리뼈 周圍가 몹시 고통스러운 狀態에서, 내가 따려고 올라갔지만 따지 못한 감들을 올려다보며, 이 世上에는 내가 딸 수 없는 것들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지만, 이 世上은 감을 따다 죽을 수도 있는 世上이라는 생각을 하며, 어떤 異常한 생각들에 사로잡혔고, 그 생각들이 재미있게 여겨졌고, 그런 생각들을 앞으로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 後로 자연스럽지 않은 생각과 感情들에 자연스럽게 이끌리게 되며 異常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아니, 事實, 그것이 事實인지는 알 수 없고, 事實이 아닐 可能性이 더 크지만, 나는 그렇게 믿게 되었고, 그것은 내가 異常해진 始發點이 되었다. - 정영문,‘어떤 作爲의 世界’ 中에서

    정영문의 ‘어떤 作爲의 世界’는 그동안 持續해온 카프카的 꿈(惡夢)과 矛盾 語法을 基底로 ‘至毒히 些少하고 無用하며 虛荒된 考察로서의 글쓰기’를 標榜한다. 위의 引用에서 보듯 그의 小說은 讀者가 읽어나가면서 나름대로 參與(상상)하고 合成(창조)하는 意味를 전복시키고 切斷한다. 神奇한 것은 그러한 全鰒과 切斷이 一回性이 아닌, 無限大로 增殖되고, 뻗어나간다는 것이다. 이런 方式이 可能한 것은 정영문의 生來的인 氣質과 그것과 連繫된 創作法에 起因한다. 곧, 중얼거리기와 어긋나기. 作品으로 例를 들면, 王의 끝없는 獨白으로 이루어진 長篇 ‘중얼거리다’(2002, 이마고), 倦怠와 無關心의 絶頂인 ‘하품’(1999, 作家精神), 無限大로 접힌 꿈들의 끝없는 循環인 ‘꿈’(2003, 민음사)이 있다. 外形上으로 作家이자 飜譯家인 한 사내의 샌프란시스코 滯留記, 또는 漂流記人 ‘어떤 作爲의 世界’는 窮極的으로 그가 一貫되게 探究해온 無意味와 舞踊(無用)에 對한 顯在的 總和다. 여기에서 爵位(作爲)란 꾸며낸 心理의 築造, 小說이다. 結局 ‘어떤 作爲의 世界’란 ‘어떤 小說의 世界’인 셈이다.

    이야기가 또 옆으로 새는데, 그것은 이 小說이 어디로 나아가도 좋기 때문이고, 이것은 또한 이 小說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내가 願하는 것은 하나의 이야기에서 또 다른 이야기가 派生하고 離脫해 그것들이 뒤섞이며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는 小說이다. - 정영문,‘어떤 作爲의 世界’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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