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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錫悅에게도 熱狂과 幻滅… 朴正熙·DJ 잇는 리더십이 없다|신동아

尹錫悅에게도 熱狂과 幻滅… 朴正熙·DJ 잇는 리더십이 없다

[김호기의 古典으로 읽는 21世紀] ‘君主論’과 ‘職業으로서의 政治’로 읽는 韓國 政治

  • 김호기 연세대 社會學科 敎授

    入力 2023-07-27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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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키아벨리가 提言한 君主의 統治術

    • 政治란 說得과 欺瞞의 二重 過程

    • 르네상스의 磁場 안에 놓인 事由

    • 베버의 ‘學問的 遺言狀’ 같은 位相

    • ‘惡魔的 手段’과 ‘千私的 大義’

    • 責任倫理에 對한 날카로운 洞察

    • 베버가 겨냥한 ‘規範的 마키아벨리즘’

    • 熱狂의 時間 매우 짧은 尹 政府 1年

    ※ 國內 代表的 社會學者인 김호기 延世大 敎授가 이番 號부터 ‘김호기의 古典으로 읽는 21世紀’를 連載한다. 古典은 ‘죽은, 不變의 텍스트’가 아닌 ‘살아 있는, 變化하는 텍스트’다. 金 敎授가 21世紀 韓國에 발을 딛고 人文社會科學의 古典을 다시 읽을 豫定이다.

    박정희, 김대중, 문재인 전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동아DB]

    朴正熙, 金大中, 文在寅 前 大統領과 尹錫悅 大統領.(왼쪽 위부터 時計方向) [東亞DB]

    널리 읽히는 模範的인 冊들을 古典(古典)이라 한다. 時代의 拘束을 超越한 傑作들이다. 例를 들어 西洋의 境遇 호메로스, 베르길리우스, 단테, 셰익스피어, 괴테,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그리고 울프의 作品들은 古典이다. 우리의 境遇 新羅 鄕歌와 高麗 歌謠, 鄭澈의 歌詞와 尹善道의 時調, 朴趾源과 理獄의 散文이 古典으로 꼽힌다.

    文學 作品만 古典은 아니다. 西洋의 境遇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 칸트와 헤겔, 니체와 프로이트의 著作은 思想의 古典이다. 第2次 世界大戰 以後에는 해나 아렌트의 ‘人間의 條件’, 존 롤스의 ‘正義論’, 미셸 푸코의 ‘監視와 處罰’, 위르겐 하버마스의 ‘意思疏通行爲 理論’도 思想의 古典 班列에 올라 있다.

    어느 나라든 大學에 들어오면 敎養 講義를 듣는다. 敎養 敎育의 한 軸을 이루는 것이 바로 ‘古典 읽기’다. 西歐 大學의 境遇 古代 플라톤의 哲學부터 20世紀 버지니아 울프의 페미니즘까지 古典을 읽게 한다. 이들의 著作은 人間이란 어떤 存在이고 社會란 어떤 方式으로 生産·再生産되는지에 關해 時代的 拘束을 超越한 問題를 다루고 있다. 이러한 問題를 배우고 깨우치는 것은 大學 敎養 敎育의 目標 가운데 하나다.

    古典의 目錄이 짧은 時間에 定해지는 것은 아니다. 처음부터 古典인 著作은 없다. 冊을 통해 나타난 人間과 社會에 對한 思惟 및 省察은 時間이 흐르면서 評價가 달라진다. 歷史가 拘束하는 風化를 견뎌내어 持續的인 感動과 說得을 안겨주는 作品과 著作이 비로소 古典의 班列에 올라선다.



    더하여, 旣成의 古典이 永遠한 古典일 수 없다. 歷史란 人間과 社會가 서로 影響을 주고받아 만들어가는, 끝없는 變化가 進行되는 螺旋形의 過程이다. 이 過程에서 旣成의 古典에 對한 評價 亦是 끝없이 變化할 수밖에 없다. 어떤 冊은 철 지난 古典으로, 어떤 冊은 새로운 古典으로 再評價된다.

    이 企劃은 人文社會科學의 古典을 다시 읽고 그것이 21世紀 韓國 社會에 주는 含意를 探究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21世紀 우리 社會가 마주한 問題는 20世紀의 問題와 사뭇 다르다. 低出生과 高齡化, 人工知能(AI) 時代 일자리 創出, 革新經濟와 福祉國家의 共存, 階級·젠더 不平等 緩和, 그리고 氣候 危機 對應 等은 우리 社會를 새로운 試驗臺 위에 세워두고 있다.

    내가 古典과 21世紀 韓國 社會를 連結하려고 한 것은 歷史의 複合的, 螺旋形的 特徵을 注目하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 社會의 過去·現在·未來는 地球的 普遍性과 韓國的 特殊性을 가진다. 다시 말해 우리 現代史는 地球的 普遍性과 韓國的 特殊性이 複合的으로 結合해 螺旋形으로 發展해 온 것이다. 이 地球的 普遍性과 韓國的 特殊性을 讀解하고 分析하고 展望하는 데 古典은 如前히 意味 있는 텍스트이자 有用한 준거다.

    人間과 社會는 본디 變化하는 것이자 變化하지 않는 것 아닌가. “萬物은 흐르기에 人間은 두 番 다시 같은 물에 들어갈 수 없다”고 喝破한 이가 哲學者 헤라클레이토스라면, “人間은 永遠하고 사랑도 그렇다”고 노래한 이는 詩人 金洙暎이다.

    들어가는 말이 길어졌다. 앞서 말했듯 眞正한 古典은 歷史가 拘束하는 風化를 견뎌내는, 죽은 텍스트가 아닌 살아 있는 텍스트다. 그 첫 番째 텍스트로 나는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1469~1527)의 ‘君主論(Il Principe)’과 막스 베버(Max Weber·1864~1920)의 ‘職業으로서의 政治(Politik als Beruf)’를 골라봤다.

    한국에서 출간된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Il Principe, 까치, 2015)’ 막스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정치(Politik als Beruf, 나남, 2019)’. [각 출판사]

    韓國에서 出刊된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君主論(Il Principe, 까치, 2015)’ 막스 베버의 ‘職業으로서의 政治(Politik als Beruf, 羅南, 2019)’. [各 出版社]

    마키아벨리의 날카롭고 깊은 洞察

    政治 또는 政治家를 指稱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마키아벨리즘’ 또는 ‘마키아벨리스트’다. ‘마키아벨리的’이라는 表現은 靈惡하고 陰凶하며 不道德한 政治家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이미지를 想像하게 한 冊이 이탈리아 政治思想家 마키아벨리가 著述한 ‘君主論’이다.

    ‘君主論’은 君主의 統治術을 다룬다. 이 冊은 旣存의 美德과는 相反되는 統治術을 提言해 有名해졌다. 詐欺, 欺瞞, 抑壓, 暴力의 非道德的 行爲가 統治者에게 許諾된다. ‘君主論’을 통해 ‘마키아벨리’라는 이름은 政治 乃至 政治家의 非道德性을 일컫는 一般名詞라는 이미지를 表象하게 됐다.

    그런데 疑問이 提起된다. ‘君主論’李 非道德的 政治家의 讚歌에 不過하다면, 왜 오늘날에도 古典으로 읽히는 걸까. 對答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君主論’은 士氣와 欺瞞의 政治, 抑壓的 君主政, 國家의 暴力에 對한 禮讚이 아니라 政治와 政治家에 對한 날카롭고 깊이 있는 洞察을 안겨주고 있기 때문이다.

    ‘君主論’은 當時 流行하던 ‘君主의 거울’ 장르의 하나였다. 그 時節 政治 指導者들을 위한 指針書인 ‘君主의 거울’ 장르가 큰 注目을 받았다. 맨 앞에 놓인 ‘憲政史: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로렌초 데 메디치 殿下께 올리는 글’에서 볼 수 있듯, ‘君主論’은 當時 피렌체의 새로운 統治者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獻呈하는 諫言서였다.

    ‘君主論’은 네 部分으로 나뉜다. 1部는 다양한 歷史的 事例를 바탕으로 여러 君主國의 모습을 記述하고, 2部는 軍隊의 必要性에 對해 論議한다. 이어 3部는 君主의 統治術을 다룬다. 여기서 統治術은 仁慈함보다 殘忍함을, 사랑보다 두려움을 志向하고, 約束보다 欺瞞을 正當化한다. 마지막 4部는 이탈리아의 解放을 위한 呼訴를 담고 있다.

    ‘君主論’이 놓인 背景을 보면, 이 著作이 發表된 1513年 西歐에서는 르네상스가 일어나고 있었다. 14~16世紀에 걸친 르네상스는 宗敎 中心의 中世에서 人間 中心의 近代로 넘어가는 過渡期 性格을 지닌 時代였다. ‘君主論’ 안에는 이 르네상스의 精神, 卽 中世의 秩序로부터 脫皮하려는 人文主義가 스며들어 있다.

    ‘君主論’의 가장 重要한 寄與는 政治를 倫理 및 宗敎와 分離된 領域으로 독립시켰다는 데 있다. 近代 以前까지 政治는 倫理의 下位 範疇로 看做되거나 宗敎와 結付돼 理解됐다. 政治가 古代 哲學者들에게 ‘靈魂의 完成’ 或은 眞理의 實現 手段이었다면, 中世 神學者들에게는 基督敎的 價値의 世俗的 實現을 위한 手段으로 여겨졌다. 政治는 그 自體의 領域을 갖지 못했고, 政治 領域에서 適用되는 倫理는 倫理學 乃至 神學이라는 外的 判斷 基準에 根據해 있었다.

    ‘君主論’은 이런 傳統的 思惟와 正反對인 새로운 觀點을 보여준다. 政治에 對한 一見 ‘불경한’ 마키아벨리의 視角은 政治에 對한 새로운 認識의 地平을 열어놓았다. 세 가지 面에서 特히 그러했다.

    첫째, 倫理 및 宗敎로부터 政治의 分離는 政治에 對한 實證主義的 接近을 可能케 했다. 마키아벨리는 傳統的 倫理와 宗敎的 美德이 政治 現象을 評價하는 잣대로 쓰여서는 안 된다고 主張했다. 政治는 現實 그대로의 모습을 客觀的으로 ‘觀察’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核心 論理였다.

    둘째, 道德的 선 或은 宗敎的 眞理를 代身해 마키아벨리가 政治 行爲의 새로운 公的 基準 및 倫理로 삼은 것은 ‘國家 理性’이었다. 國家 理性은 國家의 利益이 그 무엇에도 優先함을 意味한다. 國家의 安寧과 國民의 幸福을 위해서라면 惡德으로 置簿되는 일도 許容될 수 있다는 마키아벨리의 思惟는 近代 政治的 現實主義의 出發點을 이뤘다.

    셋째, ‘君主論’은 政治의 本來的 特性에 對한 날카로운 洞察을 提供했다. 마키아벨리는 政治指導者의 資質로 ‘獅子의 勇猛’과 함께 ‘여우의 智慧’가 必要하다고 力說했다. 여우의 智慧의 다른 이름이 곧 欺瞞이다. 마키아벨리에게 政治란 說得과 欺瞞의 二重 過程이다.

    ‘君主論’에서 注目할 見解 中 하나는 ‘포트투나(fortuna)’와 ‘비르투(virtu)’의 比較다. 마키아벨리는 中世의 受動的 人間觀에 反旗를 들었다. 受動的 人間이란 運命의 女神 포르투나에 屈服하는 存在다. 마키아벨리는 運命을 克服할 可能性을 비르투에서 찾았다. 비르투란 運命이라는 講義 汎濫을 막기 위한 ‘堤防’에 比喩됐다. 그것은 君主의 非凡한 力量 또는 自由意志라는 意味를 가진다.

    포르투나와 비르투의 關係는 르네상스의 人文主義를 상기시킨다. 人文主義는 스스로의 問題를 解決하는 새로운 人間像을 發見하고, 人間의 思考能力과 開城·價値를 重視하며, 人間의 主體性과 自律性을 통해 人類 社會가 發展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처럼 마키아벨리의 思惟는 人文主義로서 르네상스의 磁場 안에 놓여 있었다.

    要컨대 ‘君主論’으로부터 近代 政治學이 出發했다고 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는 政治를 倫理와 道德으로부터 分離하고, 政治의 現實主義를 浮刻하며, 나아가 르네상스의 人文主義를 志向했다. 近代와 現代 社會가 갖는 特徵 가운데 하나는 政治의 獨立性이다. 政治란 무엇보다 共同體의 最終 意思決定 領域이다. 이러한 政治란 果然 무엇이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對해 마키아벨리는 先驅的 洞察을 膳賜하고 있다.

    政治 現象에 對한 베버의 讀解

    “우리는 그에 匹敵할 程度의 사람을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다.” 獨逸 社會學者 베버의 墓碑銘이다. 베버가 갖는 知的 生命力의 源泉은 政治·經濟에서 宗敎·文化까지 現代社會 全般에 對한 넓고 깊은 洞察에 있다. 베버 事後 베버에 맞설 수 있는, 博識함과 深奧함을 모두 갖춘 社會思想家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베버는 1917年 11月 뮌헨대학의 進步的 學生團體인 ‘自由學生聯合’ 招請으로 ‘職業으로서의 學問’을 講演했다. 1919年 1月 다시 招請받았는데, 이때 맡은 講演이 ‘職業으로서의 政治’였다. 이 講演에서 베버는 그동안 探究해온 政治 現象의 社會學을 바탕으로 政治란 무엇이고, 政治家의 德目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선보였다. 社會學者 전성우는 ‘職業으로서의 政治’가 ‘職業으로서의 學問’과 함께 베버의 ‘學問的 遺言狀’ 같은 位相을 가진다고 評價한 바 있다.

    ‘職業으로서의 政治’는 講演인 만큼 簡略한 著作이다. 簡略하다고 해서 이 冊에 담긴 政治的 思惟가 決코 가벼운 것은 아니다. 베버가 現代 社會學의 基礎를 놓은 만큼 政治 現象에 對한 베버의 讀解는 21世紀 現在에도 如前히 注目할 만하다. 그 아이디어는 네 가지로 整理해 볼 수 있다.

    첫째, 베버는 政治를 ‘天職’으로 附與받은 政治家에 對해 ‘惡魔的 手段’을 갖고 ‘千私的 大義’를 實現하는 사람이라고 定義했다. 여기서 惡魔的 手段이란 隱喩는 强制力을 爲始해 目標 達成을 위해 活用하는 다양한 方式을 包括한다. 天使와 惡魔의 對備는 政治가 갖는 獨立性과 特殊性을 適切히 象徵한다.

    둘째, 이러한 政治家에게 要求되는 두 가지 倫理로 베버는 ‘信念倫理’와 ‘責任倫理’를 提示했다. 信念倫理가 善과 惡의 區別에서 道德的 線을 選擇하고 行動하는 態度를 말한다면, 責任倫理는 政治的 決定의 結果에 對해 無制限的 責任을 지는 態度를 의미한다.

    베버에 따르면, 바람직한 政治家는 信念倫理와 責任倫理를 모두 갖추어야 한다. 政治가 ‘結果’로써 自身의 存在 理由를 證明해야 한다는 點을 考慮할 때, 責任倫理에 對한 베버의 洞察은 날카로운 것이었다.

    셋째, 이렇게 二重的 倫理가 要求되는 政治家에게 必要한 資質을 베버는 ‘熱情·責任感·均衡感覺’에서 찾았다. 베버에게 政治家의 役割은 自身을 支持하는 國民의 價値와 利益을 代表하는 데 있다.

    이 政治的 代表性에 獻身하려는 態度가 熱情이라면, 그 代表性에 責任을 다하려는 態度가 責任感이다. 그리고 이러한 熱情과 責任感 사이에서 要請되는 게 均衡感覺이다. 均衡感覺은 事物과 사람에게 距離를 둘 수 있는 態度이자 주어진 現實을 受容할 수 있는 能力이다.

    넷째, 베버가 熱情·責任感·均衡感覺을 特別히 强調한 까닭은 政治가 國家의 運營을 떠맡는다는 點에 있었다. 어느 나라든 國家의 運營은 國民의 運命에 決定的 影響을 미친다. 따라서 國政을 擔當하는 일에는 무엇보다 現實的 成果가 重要하다.

    베버에게 政治의 致命的인 두 가지 罪惡은 ‘客觀性의 缺如’와 ‘無責任性’에 있다. 客觀的 條件을 無視한 채 主觀的 判斷에만 依存하고 結果를 考慮하지 않은 채 無責任하게 國家政策을 推進할 境遇 그 政策이 國民 多數에게 不幸을 안겨준다는 點을 생각할 때, 政治 失敗에 對한 베버의 洞察은 至極히 現實主義的이다.

    ‘職業으로서의 政治’에서 베버는 獨特한 民主主義論을 提示한다. 베버에게 民主主義란 市民의 直接投票로 代表를 選出하는 ‘國民投票制적 原理’에 基盤하며 카리스마的 리더가 政治를 이끄는 ‘指導者 民主主義’다. 政治學者 최장집이 指摘하듯, 베버의 民主主義論은 近代 代議民主主義論과는 다른, 生疏한 것이다. 베버가 이러한 民主主義論을 提示한 데에는 當時 資本主義와 民主主義의 後發 國家였던 獨逸의 歷史的 特殊性이 反映돼 있다.

    ‘職業으로서의 政治’에서 注目할 것의 하나는 베버가 말하는 ‘職業’의 意味다. 獨逸語 ‘職業(Beruf)’은 本來 ‘召命’ 또는 ‘天職’이라는 意味를 가진다. 召命이란 하나님이 이 地上에서 내게 附與한 일이다. 다시 말해 ‘職業으로서의 政治’는 곧 ‘疏明으로서의 政治’라는 意味를 담고 있다. 그래서 우리말 飜譯本에는 두 題目이 모두 쓰인 바 있다.

    要컨대, ‘職業으로서의 政治’에서 드러난 베버의 政治觀은 두 가지로 要約된다. 먼저 베버는 政治的 現實主義를 擁護한다. 千私的 大義를 實現하기 위해 惡魔的 手段을 活用하는 이가 政治家라는 베버의 認識은 이러한 現實主義를 생생히 證據한다. 마키아벨리로부터 받은 影響을 떠올리게 한다.

    이어 베버는 政治的 民主主義를 支持한다. 民主主義는 資本主義와 함께 近代社會를 支撐하는 養畜이다. 그런데 베버는 카리스마的 리더십을 强調함으로써 政治的 엘리트主義 性向을 드러낸다. 政黨 活動에서 抽象的 綱領보다 리더에 對한 獻身이 더 重要하다는 베버의 主張은 이러한 엘리트主義를 證據한다. 엘리트가 主導하는 代議民主主義가 近代 民主主義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베버의 見解는 앞서 말한 政治的 現實主義와 正確하게 짝을 이룬다.

    政治家의 責任倫理

    16世紀 初와 20世紀 初에 發表된 ‘君主論’과 ‘職業으로서의 政治’는 共通點과 差異點을 보여준다. 差異點에서 注目할 것은 마키아벨리와 베버의 政治理念이다. 理念 側面에서 마키아벨리는 共和主義者였다. 共和主義는 個人의 自由와 平等, 共同體의 維持와 發展을 同時에 具現하려는 政治 理念이다. ‘君主論’李 傳하려는 바는 이 目標를 實現하기 위해 道德的으로 正當하지 않은 手段을 使用할 수도 있는 것이 政治家의 美德이라는 메시지였다.

    베버는 民主主義者였다. 베버는 獨逸의 第2帝國 時代를 살았지만 英國과 프랑스에서 자리 잡기 始作한 近代 民主主義를 充分히 熟知하고 있었다. 民主主義는 共同體의 最終 意思決定權, 卽 主權이 國民에게 있다는 理想을 具現하려는 政治 理念이었다. 獨逸이 制定을 넘어서 民主政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베버는 ‘카리스마的 支配’를 含意하는 指導者 民主主義가 必要하다고 力說했다.

    共通點에서 注目할 것은 ‘君主論’과 ‘職業으로서의 政治’가 모두 政治的 現實主義와 政治家의 리더십을 浮刻한다는 點이다. 이러한 共通點은 두 사람이 살아온 當代 이탈리아와 獨逸의 혼란스러운 歷史的 狀況에 起因한다. 政治的 混亂을 넘어 社會의 秩序를 일궈내기 위해서는 强力한 政治指導者가 要求되고, 더하여 指導者의 統治 技術과 態度가 重視된다.

    베버의 觀點에서 마키아벨리의 思想을 보면, ‘君主論’의 政治指導者論은 어느 時代든 必要한 ‘責任倫理를 지닌 指導者’의 原始的 모습에 가깝다. 政治가 結果로써 自身의 存在를 證明해야 하는 領域이라면, 그 結果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狀況에 따라 非道德的 手段을 講究할 수도 있다.

    責任倫理의 觀點에서 마키아벨리와 베버 사이에는 勿論 距離가 存在한다. 마키아벨리는 責任倫理를 排他的으로 强調한 反面, 베버는 責任倫理는 勿論 信念倫理까지 모두 要求한다. 21世紀 現在의 觀點에서 마키아벨리가 反民主的 統治術을 擁護했다는 點은 否認하기 어렵고, 마키아벨리의 統治論이 現代 民主主義와 兩立하기 어려운 것 또한 事實이다.

    그러나 同時에 考慮할 것은 마키아벨리가 不道德한 것을 崇尙하지는 않았다는 點이다. 不道德한 일이라도 結果를 위해서는 正當化될 수 있다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核心 論理다. ‘君主論’에서 君主의 統治는 史跡으로 權力의 獲得과 維持, 公的으로는 人民의 安全과 繁榮을 위해 現實과 妥協하는 二重的 過程으로 특징지어진다.

    4世紀 後의 베버가 겨냥한 것은 ‘規範的 마키아벨리즘’이라 할 수 있다. 倫理와 宗敎로부터 政治를 독립시켜 國民을 위한 政策을 追求하는 政治的 現實主義를 承認하되, 그 現實主義를 近代 民主主義의 原理 안에서 作動시키려 한 것이 베버의 政治社會學이다.

    “世上이, 自己 自身이 提供하려는 것에 비해 自己 눈에는 너무나 어리석고 卑劣하게 보일지라도 이에 挫折하지 않을 自身이 있는 사람, 그리고 그 어떤 狀況에 對해서도 ‘그럼에도 不拘하고!’라고 말할 能力이 있는 사람, 이런 사람만이 政治에 對한 ‘召命’을 가지고 있습니다.”

    ‘職業으로서의 政治’의 마지막 句節이다. 20世紀 初 베버가 그리워한 熱情·責任感·均衡感覺을 지닌 政治家는 21世紀 初 現在에도 如前히, 아니 더욱 그리운 存在다.

    疏通 度外視한 尹 政府의 統治 스타일

    ‘대통령 직선제 개헌’ 직후인 1987년 대선 당시 각 후보자들의 선거 포스터. [동아DB]

    ‘大統領 直選制 改憲’ 直後인 1987年 大選 當時 各 候補者들의 選擧 포스터. [東亞DB]

    이쯤에서 ‘君主論’과 ‘職業으로서의 政治’가 韓國 政治에 던지는 含意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내 視線에 들어오는 것은 政治的 現實主義 觀點에서 본 1987年 以後 民主化 時代에 對한 評價다. 지난 36年의 民主化 時代에는 빛과 그늘이 存在한다. 節次的 民主主義가 뿌리내린 것이 成果라면, 經濟·社會的 不平等이 强化된 것은 그 限界라 할 수 있다.

    民主化 時代의 韓國 政治를 나는 2015年 한 칼럼에서 ‘熱狂과 幻滅의 사이클’이라고 規定한 바 있다. 熱狂과 幻滅의 사이클이란 執權 初盤 새 政府에 가진 期待가 빠른 速度로 失望으로 바뀌는 것을 말한다. 이는 國政 運營 支持率에서 잘 나타난다. 政府에 따라 差異가 있지만 大體的으로 執權 初盤의 높은 支持率은 1~2年 안에 30~40%臺 支持率로 下落하고, 以後 낮은 支持率로 남은 期間을 견뎌낸다.

    이 짧은 熱狂과 긴 幻滅의 사이클은 保守 性向 政府와 進步 性向 政府에 모두 宿命과도 같은 條件이었다. 文在寅 政府의 境遇 執權 後半期 支持率이 40%를 넘었지만 政權交替의 熱望이 그보다 컸고, 民主化 時代가 열린 以後 처음으로 執權 5年 만에 다른 理念 性向의 政府로 權力交替가 이뤄졌다.

    熱狂과 幻滅의 사이클이 나타나는 1次 原因은 國政 運營 能力에 있다. 새 政府가 出帆하면 選擧 過程에서 提示된 時代精神에 對한 期待와 熱望이 높았지만, 어느 政府건 정작 執權 以後에는 이러한 時代精神을 具現할 力量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 具體的으로 노무현 政府는 ‘낡은 政治 淸算’을, 李明博 政府는 ‘先進一流國家’를, 朴槿惠 政府는 ‘經濟民主化와 福祉國家’를, 文在寅 政府는 ‘새로운 大韓民國’을 내걸었음에도 不拘하고 이 時代精神을 實現하는 政府의 行政 및 政治 力量이 不足했다.

    마키아벨리와 베버의 政治的 現實主義에서 볼 수 있듯, 政治는 國家의 安寧과 國民의 幸福이라는 結果로써 自身의 存在를 立證해야 한다. 그런데 낡은 政治를 淸算하기 위해 登場한 열린우리당은 노무현 政府가 마감하기 前에 사라졌고, 先進一流國歌는 土建 政策인 4大江 事業으로 代替됐고, 經濟民主化와 福祉國家는 正體가 模糊한 創造經濟로 遁甲했다. 그리고 文在寅 政府는 새로운 大韓民國을 위한 包容的 國家를 일궈냈다기보다 積弊淸算에 注力함으로써 政治의 兩極化를 强化시켰다.

    윤석열 대통령이 5월 23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尹錫悅 大統領이 5月 23日 서울 龍山 大統領室 廳舍에서 열린 國務會議에 參席해 發言하고 있다. [大統領室寫眞記者團]

    尹錫悅 政府 亦是 熱狂과 幻滅의 사이클을 비껴가지 못하고 있다. 지난 1年餘 時間을 지켜볼 때 尹錫悅 政府는 熱狂의 時間이 매우 짧은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는 여러 要因이 있다. 우리 社會에서 政治 兩極化가 그만큼 構造化된 點에도 注目할 수 있고, 疏通을 度外視한 尹錫悅 政府의 統治 스타일도 影響을 미쳤을 것이다.

    이 地點에서 마키아벨리와 베버가 强調한 政治指導者의 力量을 喚起해볼 必要가 있다. 마키아벨리는 獅子의 勇猛과 여우의 智慧를, 베버는 熱情·責任感·均衡感覺을 强調한다. 21世紀的 버전으로 말하면, 그것은 行政 力量과 政治 力量이다. 行政 力量이 政策을 섬세하게 立案하고 效果的으로 執行하는 能力이라면, 政治 力量은 該當 事案에 따른 社會葛藤을 緩和하고 社會的 合意를 이끌어내는 能力이다.

    새로운 리더십을 向하여

    돌아보면, 우리 現代史에서도 政治家의 役割은 대단히 重要했다. 後發 産業化와 後發 民主化 國家였던 만큼 産業化와 民主化를 빠르게 追擊하기 위한 1次 條件의 하나는 强力한 政治的 리더십이었다.

    우리 社會를 代表해 온 리더십으로 어떤 이들은 朴正熙의 리더십을, 다른 이들은 김대중의 리더십을 떠올릴 것이다. 두 大統領의 리더십에도 그늘이 存在했지만, 朴正熙 리더십은 빠른 經濟成長의 成果를 일궈냈고, 金大中 리더십은 社會民主化와 福祉國家의 기틀을 마련했다.

    21世紀가 始作한 지 20餘 年이 지난 現在, 새로운 政治 리더십은 韓國 政治의 重要한 課題 中 하나다. 코로나19 팬데믹 大處에서 볼 수 있듯, 政治 리더십의 重要性은 오히려 더욱 커지고 있다. 問題의 核心은 朴正熙와 김대중의 리더십을 잇는 새로운 리더십이 눈에 잘 띄지 않는다는 데 있다.

    國民 多數가 所望하는 바는 有能하면서도 섬세한 政治 리더십이다. 소망스러운 리더십은 國民에 앞서 새로운 비전을 提示하고 推進하되 國民이 傳하는 목소리에 늘 귀 기울여야 한다. 革新經濟 構築과 不平等 緩和를 積極的으로 推進하고, 變化하는 國際 情勢에 能動的으로 對處하며, 眞正한 先進國으로 자리 잡기 爲해 國民의 폴로어十(followership)과 生産的으로 結合해야 한다. 國家의 安寧과 國民의 幸福을 꿈꾸고 實現할 수 있게 하는 새로운 리더십을 期待하고 기다리는 이, 決코 나만은 아닐 것이다.


    김호기
    ● 1960年 京畿 洋酒 出生
    ● 연세대 社會學科 卒業, 獨逸 빌레펠트臺 社會學 博士
    ● 美國 스탠퍼드대 亞太硏究센터 코렛 펠로
    ● 現 연세대 社會學科 敎授
    ● 著書 : ‘現代 資本主義와 韓國社會’ ‘韓國의 現代性과 社會變動’ ‘韓國 市民社會의 省察’ ‘South Korea's Democracy in Crisis’(신기욱과 共編) 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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