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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恒緖는 熱心히 하는 사람이지 뛰어난 사람은 아닙니다”|신동아

“朴恒緖는 熱心히 하는 사람이지 뛰어난 사람은 아닙니다”

‘쌀딩크’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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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세준 記者

    sejoonkr@donga.com

    入力 2023-03-28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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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高校 留級해 가며 키운 蹴球의 꿈

    • 2002年 4强 神話, 코치로 一助했지만…

    • 釜山 아시안게임 거치며 協會와 葛藤

    • 리그 10位圈 全南, 4位로 올려놓았으나

    • 迂餘曲折 끝에 베트남 代表팀 監督 맡아

    • 歷代級 成績으로 勳章만 3個, 베트남 國民 英雄

    • 韓國·베트남外 다른 곳 監督 挑戰

    베트남 '蹴球 英雄' 朴恒緖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



    박항서 전 베트남 국가대표팀 감독. [지호영 기자]

    朴恒緖 前 베트남 國家代表팀 監督. [지호영 記者]

    “나는 熱心히 하는 사람이지, 뛰어난 사람은 아닙니다.”

    朴恒緖 前 베트남 蹴球 國家代表팀 監督의 말이다. 謙讓의 말과 달리 그는 베트남에서 놀라운 成果를 냈다. 朴 前 監督이 指揮棒을 쥐기 前, 베트남 代表팀 成跡은 慘澹했다. 베트남의 피파(FIFA) 랭킹은 140位圈. 東南아시아의 蹴球 盟主 자리도 내준 지 오래였다. 東南아시아 蹴球 選手權 大會(AFF 스즈키컵)에서도 2008年 以後 줄곧 3位에 머물렀다. 東南아시아 11個國의 올림픽인 ‘東南아시아 競技大會’에서는 1959年 以後 蹴球 金메달을 따지 못했다.

    朴 監督 就任 以後 아시아 蹴球 舞臺에서 베트남의 位相은 달라졌다. 就任 1年 만에 열린 2018年 東南아시아 蹴球 選手權 大會(AFF 스즈키컵)에서 優勝. 이듬해인 2019年에는 東南아시아 競技大會에서 金메달을 獲得하며 東南亞 蹴球 最强國의 자리에 올랐다. 피파 랭킹도 가파르게 올랐다. 現在 베트남의 피파 랭킹은 94位. 베트남 歷史上 두 番째로 높은 順位다. 2022年 카타르 월드컵 豫選에서는 18競技 6勝 3無 9敗로 勝點 21點을 記錄했다. 豫選 通過에는 失敗했지만, 歷代 베트남이 參加한 월드컵 豫選 中 가장 높은 勝點이다.

    幼少年 國家代表, 리그 베스트 일레븐에도 올라

    베트남에서 朴 前 監督은 國民 英雄이다. 2017年부터 2022年까지 3年間 베트남에서만 3番 勳章을 받았다. 外國人으로서는 最初다. 韓國에서는 그를 ‘쌀딩크’라 부른다. 베트남 特産品인 쌀에 韓國 4强 神話를 이룩한 히딩크 監督을 더해 만든 別名이다. 3月 2日 朴 監督을 서울 마포구 상암동 채널A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朴 前 監督은 蹴球를 늦게 始作했다. 通常 蹴球選手들은 늦어도 中學校 時節에 蹴球를 始作한다. 朴 前 監督은 高等學校 入學 後 6個月이 지난 뒤 蹴球部에 들어갔다.

    “제가 시골 出身입니다. 慶南 山淸郡 생초면이라는 곳이 故鄕인데, 여기서는 洞네 蹴球가 다였죠. 中學校 卒業 後에는 서울로 留學을 떠났습니다. 제가 4男 1女 中 막내인데 兄님, 누님들이 全部 서울에서 學校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저도 當然히 서울로 留學을 가 工夫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배재고등학교 入學試驗을 봤는데 落榜했어요. 그래서 2次 志望 學校였던 경신고에 갔습니다.”

    工巧롭게도 경신고는 蹴球 名門校였다. 當時에도 차범근 前 國家代表팀 監督을 輩出한 것으로 有名했다. 朴 監督은 거기서 다시 蹴球選手의 꿈을 키웠다.

    “授業時間에도 蹴球部가 運動場에서 訓鍊하는 모습을 보면 到底히 工夫에 集中할 수 없더라고요. 저도 蹴球가 하고 싶었습니다. 當時 妹兄이 이경이 경신고 監督님과 잘 아는 사이였습니다. 妹兄의 도움으로 高等學校 1學年 2學期에 축구부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只今이라면 생각도 못 할 일이죠,”

    迂餘曲折 끝에 축구부에 들어갔지만 그는 6個月間 幽靈 選手 生活을 했다.

    “高等學校 蹴球選手로 뛰려면 每年 初 대한축구협회 選手 登錄 節次를 거쳐야 했습니다. 저는 6個月이 지나서 축구부에 들어왔으니 登錄 期限을 놓쳤죠. 結局 高等學校를 1年 더 다녀야 했습니다.”

    박항서는 럭키금성 황소(현 서울FC)에 창단 멤버로 입단했다. [동아DB]

    朴恒緖는 럭키錦城 황소(現 서울FC)에 創團 멤버로 入團했다. [東亞DB]

    留級이 藥이 된 것일까. 1976年 高等學校 3學年이자 스무 살이던 해, 朴 前 監督은 全國 靑龍旗 蹴球大會에서 決勝골을 넣어 팀을 優勝으로 이끌었다. 以後 漢陽大 2學年이던 1978年에는 아시아 靑少年 蹴球選手權大會(現 U-20 아시안컵) 靑少年 代表팀 主張을 맡았다. 大學 卒業 後에는 實業팀인 第一銀行 蹴球團에 入團했고, 陸軍 蹴球團(現 金泉 常務 프로蹴球團)에서 軍 服務를 마쳤다. 除隊 後 그는 럭키금성 황소(現 서울FC)에 創團 멤버로 入團했다. 1985年에는 팀 優勝과 韓國 프로리그 베스트 일레븐에 選定되는 榮譽를 안았다.

    選手로서 乘勝長驅했지만 朴 前 監督은 1988年 시즌을 끝으로 7年間의 選手 生活을 마무리 지었다. 自身의 選手 時節에 對해 그는 다음과 같이 評했다.

    “저는 그렇게 才能 있는 選手가 아니었습니다. 키도 작고 運動 實力도 썩 좋은 便은 아니었습니다. 다른 選手보다 조금 더 뛰고, 最大限 熱心히 했습니다만 겨우 제 役割을 다하는 水準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時節에는 30代가 넘으면 隱退가 當然한 順序이기도 했습니다. 빨리 指導者를 始作해야겠다는 생각도 있었죠.”

    蹴球協會와 葛藤 커지며 代表팀 司令塔 물러나

    朴 前 監督은 選手 時節 唯一하게 아쉬웠던 點으로 “國家代表팀 選手로 월드컵에 나가보지 못한 것”을 꼽았다. 그는 “蹴球選手라면 全部 國家代表 選手가 돼 월드컵에서 成果를 내겠다는 꿈을 꾼다”며 “選手 時節 이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코치로 월드컵 本選 舞臺를 밟았다”고 말했다. 朴 前 監督은 1994年 美國 월드컵 國家代表팀 트레이너를 맡았다. 4强 神話를 쓴 2002年 韓日 월드컵에서는 代表팀 首席 코치를 맡았다.

    거스 히딩크 당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과 박항서 국가대표팀 코치가 2002년 6월 20일 월드컵 국가대표팀 훈련 중 선수들에게 공을 차주고 있다. [동아DB]

    거스 히딩크 當時 蹴球 國家代表팀 監督과 朴恒緖 國家代表팀 코치가 2002年 6月 20日 월드컵 國家代表팀 訓鍊 中 選手들에게 공을 車主高 있다. [東亞DB]

    월드컵이 끝난 直後에는 2002 釜山 아시안게임 U-23 國家代表팀 監督을 맡았다. 이 過程에서 雜音이 나왔다. 2002年 9月 7日 南北統一蹴球競技가 問題였다. 히딩크 前 監督은 같은 해 6月 30日 以後 代表팀을 떠났지만, 蹴球協會는 그를 보내지 못했다. 競技를 이틀 앞둔 2002年 9月 5日 蹴球協會는 “南北統一蹴球競技에서 히딩크 前 監督을 韓國 벤치에 앉히겠다”고 밝혔다.

    “히딩크 監督이 南北 和合 等 다양한 意味에서 벤치에 앉는 것에 對해 不滿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蹴球協會 側에서 저에게 正確한 메시지를 傳達하지 못했습니다. 제게는 ‘왜 히딩크 監督이 벤치에 앉아야 하느냐’며 問題가 있다는 式으로 이야기했죠. 저는 히딩크 監督님이 앉지 않으시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히딩크 監督님 着席 問題에 對해 들은 바 없다’고 말했더니 제가 不滿을 表示한 것이 되더군요.”

    朴 前 監督과 蹴球協會는 年俸 問題로도 葛藤을 빚었다. 蹴球協會 側에서 年俸 契約書를 쓰지 않으려던 게 禍根이었다.

    “蹴球協會 高位 關係者가 불러서 協會 事務室에 갔더니 제 給與를 구두로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契約書를 써달라 要請했습니다. 關係者 분이 크게 火를 내시더군요. 口頭로만 契約을 하려던 것 같았습니다. 迂餘曲折 끝에 契約書를 쓰기로 했습니다. 年俸이 생각보다 적었습니다. 國家代表팀 코치 時節 年俸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職級이 달라졌는데 給與는 그대로라니 理解할 수 없었습니다. 아시안게임 京畿 日子는 急迫해 契約을 미룰 수도 없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제가 協會 側에 아시안게임은 無報酬로 치를 테니 以後 2004年 아테네 월드컵 準備를 하며 契約 條件을 調整하자고 말했습니다.”

    當時 蹴球協會가 提示한 年俸은 1億8000萬 원. 蹴球界 한 關係者는 “當時 國家代表 監督 基準으로도 낮은 年俸”이라며 “K-리그 프로팀 監督 年俸보다도 조금 낮은 水準”이라고 말했다.

    朴 前 監督은 아시안게임 直後 代表팀을 떠나야 했다. 蹴球協會와 葛藤을 빚은 게 問題였다. 2002年 9月 9日 朴 前 監督은 記者會見을 열어 “아시안게임이 끝날 때까지 無報酬로 監督職을 맡기로 했다”고 밝혔다. 記者會見 當時 그가 들고 나간 메모帳이 論難을 일으켰다.

    2010年 勝負造作 提報 있었지만…

    2011년 7월 11일 대한축구협회 관계자들이 승부조작 예방 대책 및 제도 개선안을 발표했다. 이 사건으로 K리그 등록선수 648명 가운데 10%에 달하는 50여 명이 검찰에 기소됐다. [동아DB]

    2011年 7月 11日 대한축구협회 關係者들이 勝負造作 豫防 對策 및 制度 改善案을 發表했다. 이 事件으로 K리그 登錄先手 648名 가운데 10%에 達하는 50餘 名이 檢察에 起訴됐다. [東亞DB]

    “蹴球만 해와서 여러 사람 앞에서 말을 하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或是 失手할까 싶어 記者會見 前에 제가 할 말을 메모帳에 적어뒀습니다. 메모를 보며 이야기를 했는데, 이 메모를 두고 蹴球協會에서는 ‘聲明書’라고 하더군요. 그때 깨달았습니다. 아시안게임 結果와 無關하게 제가 代表팀을 오래 맡지 못할 것이라는 事實을요.”

    聲明書 發表 事件으로 朴 前 監督은 蹴球協會로부터 ‘嚴重 警告’ 懲戒를 받게 됐고, 아시안게임을 마친 뒤인 2002年 10月 18日 成績 不振을 理由로 朴 前 監督을 更迭했다.

    2002年 釜山 아시안게임 準決勝戰에서 韓國은 이란에 勝負차기 끝에 敗北했다. 以後 3, 4位戰에서 泰國을 꺾으며 銅메달을 따냈다. 朴 前 監督은 “이천수, 이영표, 박지성 等 좋은 選手가 많았는데도 아쉬운 成跡을 거뒀다”며 “只今에 와서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가 슬기롭지 못했다. 協會와 圓滿한 關係를 維持했다면 조금은 다른 結果가 나오지 않았을까”라고 말했다.

    蹴球協會와 빚은 葛藤으로 蹴球界에서 미운털이 박혀서일까. 朴 前 監督은 2003年 浦項 스틸러스 코치로 일하게 된다. 國家代表팀 監督이 프로팀 코치를 맡는 일은 매우 異例的이었다. 當時 浦項 스틸러스의 監督은 최순호 水原 FC 團長. 朴 前 監督의 選手 時節 後輩였다.

    2006年에는 慶南 FC 初代 監督을 맡았다. 첫 시즌은 14個 球團 中 12位에 머물렀으나, 이듬해 4位까지 成跡이 뛰어올랐다. 좋은 成跡을 記錄했으나, 球團 프런트와의 葛藤으로 朴 前 監督은 다시 監督職을 잃었다.

    2008年에는 全南 드래곤즈 司令塔을 맡았다. 全南 드래곤즈의 2007年 시즌 成跡은 10位. 朴 前 監督은 就任 첫해 全南 드래곤즈는 리그 順位는 9位에 머물렀으나, 追加 大會인 三星 하우젠컵에서 準優勝했다. 2009年 시즌에는 리그 4位에 올랐다. 하지만 2010年 다시 10位圈으로 成績이 급전직하했다. 朴 前 監督은 이에 責任을 지고 물러났다.

    갑작스러운 成績 不振은 朴 前 監督의 失策이 아니었다. 一部 選手들이 브로커의 要請을 받고 勝負造作에 加擔했던 것.

    “다 지나서 하는 이야기지만, 2010年 當時 勝負造作 關聯 提報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正確한 날짜는 記憶이 나질 않는데 便紙 한 通을 받았습니다. 封套에 제 이름이 적혀 있어 제게 온 便紙라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보낸 사람 이름이 없었습니다. 單純 팬레터라고 생각하고 열었는데 內容은 衝擊的이었습니다. 全南 드래곤즈 選手 一部가 勝負造作을 하고 있다는 提報였습니다. 勝負造作이 일어난 競技는 勿論 加擔한 選手의 이름까지 仔細히 적혀 있었습니다. 便紙에는 球團이 該當 內容을 仔細히 調査하지 않는다면, 言論에 提報하겠다는 內容도 있었습니다. 장난 便紙인가 싶어 便紙를 덮으려는데 追伸으로 提報者의 身分과 連絡處가 적혀 있었습니다.”

    朴 前 監督은 便紙를 읽자마자 提報者에게 電話를 걸었다. 提報者가 確實한 證據를 가지고 있다면 特段의 措置를 取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提報者도 心證은 있으나 物證이 없는 狀態였다. 結局 朴 前 監督과 球團主와 相議 끝에 選手 全員 面談에 着手했다. 選手들은 嫌疑를 否認했다. 選手들에게 勝負造作에 加擔했다면 責任을 지겠다는 內容의 覺書를 받는 線에서 調査를 끝냈다.

    하지만 이듬해 檢察 調査 結果 一部 選手들이 朴 前 監督을 속였다는 事實이 드러났다. 朴 前 監督은 “처음에는 背信感이 들었지만, 只今 다시 생각해 보면 브로커의 甘言利說에 속아 選手 經歷을 망친 이들도 被害者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就任 100日 만에 歷代級 成果

    2018 AFC U-23 축구 선수권 대회 결승전에서 베트남 국가대표팀은 폭설 속에서 분투했으나 패배, 준우승에 그쳤다. [AFC]

    2018 AFC U-23 蹴球 選手權 大會 決勝戰에서 베트남 國家代表팀은 暴雪 속에서 奮鬪했으나 敗北, 準優勝에 그쳤다. [AFC]

    以後 朴 前 監督은 尙州 常務(2012~2015)을 거쳐, 2017年에는 세미프로 球團인 昌原 FC의 監督職을 맡았다.

    “國內에서 프로팀 監督을 맡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中國 프로팀 監督 자리를 알아보기 始作했지만, 契約이 成事될 듯하면서도 잘되지 않았습니다. 去就를 苦悶하던 中 아내가 베트남, 泰國 等 東南아시아 國家代表팀 監督에 挑戰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勸誘했습니다. 多幸히 베트남에서 連絡이 왔습니다.”

    只今이야 朴 前 監督이 베트남의 國民 英雄이지만, 緣故도 없는 나라에 代表팀 監督으로 간다는 것은 쉬운 決定이 아니었다. 歷代 外國人 監督 中 베트남 代表팀을 8個月 以上 맡은 사람이 없다는 點도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現役 蹴球 監督으로 남으려면 代案이 없다는 생각에 朴 前 監督은 베트남行을 決定했다.

    2017年 9月 朴 前 監督은 베트남 國家代表팀과 23歲 以下(U-23) 代表팀 監督을 함께 맡았다. 就任 直後 朴 前 監督은 베트남 代表팀 訓鍊 體系化에 나섰다. 가장 먼저 體力訓鍊에 손을 댔다. 베트남 選手들의 弱點 中 하나인 빠른 體力 低下를 克服하기 위해서였다. 以後에는 選手들의 戰術 理解도를 높이는 訓鍊에 突入했다.

    就任 100日 만에 成果가 났다. 베트남 代表팀은 2018年 1月 中國에서 열린 AFC U-23 蹴球 選手權 大會에서 準優勝했다. 이 大會에서 韓國은 4位에 그쳤다. 優勝에는 失敗했으나, 베트남 蹴球 歷史上 AFC 主管 大會 決勝 進出은 처음이었다. 決勝戰도 ‘졌지만 잘 싸웠다’는 말이 아깝지 않았다. 決勝戰은 베트남 代表팀에 不利했다. 베트남에선 구경도 하기 힘든 눈이 쏟아졌다. 惡天候에도 베트남 代表팀은 相對인 우즈베키스탄을 延長戰까지 몰아붙였다.

    같은 해 8月 열린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는 4位에 올랐다. 1975年 베트남 統一 以來 蹴球 代表팀 아시안게임 4强 進出은 처음이었다. 2018年 11月 AFF 스즈키컵에서는 單 한 番의 敗北도 없이 優勝을 차지했다. 以後 2年餘間 朴 前 監督은 좋은 成果를 내며 베트남을 東南亞 蹴球 强國으로 키워냈다. 2019年까지였던 朴 前 監督의 任期도 延長을 거듭했다. 朴 前 監督은 올해 1月까지 베트남 代表팀을 맡았다.

    朴 前 監督은 앞으로도 베트남 蹴球가 더 빠르게 發展할 것으로 豫測했다.

    “베트남 蹴球는 다른 나라와 다른 魅力이 있습니다. 選手들이 體格이 작은 代身 華麗한 個人技를 자랑합니다. 패스도 짧고 簡潔합니다. 베트남 國民들은 베트남 蹴球를 두고 ‘아름다운 蹴球’라고 합니다. 그만큼 蹴球에 對한 愛情도 큽니다. 베트남 經濟가 發展하며 蹴球에 對한 投資도 늘고 있습니다. 發展 可能性은 充分합니다.”

    “第3國 代表팀 맡을 醫師 있어”

    朴 前 監督은 1957年生. 올해 나이 66歲다. 高齡임에도 그는 如前히 現役이다. 베트남 代表팀 契約 滿了 後 朴 前 監督의 去就를 두고 蹴球界에서는 所聞이 茂盛했다. 그가 蹴球協會에서 要職을 맡는다는 이야기부터 다시 韓國 프로팀 監督을 맡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朴 前 監督이 蹴球協會 技術委員長職을 두고 남긴 말은 所聞에 불을 붙였다. 2月 14日 言論 인터뷰에서 朴 前 監督은 “蹴球協會 技術委員長은 韓國人이 맡아야 한다는 것이 제 所信”이라고 말했다. 蹴球協會가 獨逸 出身의 마이클 뮐러 技術委員長을 迎入한 일을 꼬집은 셈이다.

    朴 前 監督의 發言을 두고 批判의 목소리도 있었다. 베트남에서 外國人 監督으로 乘勝長驅한 그가 할 말은 아니라는 指摘이었다. 朴 前 監督은 이 論難에 對해 操心스레 입을 열었다. “저도 蹴球人으로서 제 意見을 披瀝한 것뿐입니다. 제 말이 반드시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外國人이 技術委員長을 맡게 되면 確實히 憂慮되는 部分이 있습니다. 技術委員長은 代表팀 監督을 選任하는 要職입니다. 이 자리에 外國人이 앉게 되면, 韓國人 蹴球 指導者는 監督職에 考慮조차 되지 않을 可能性이 큽니다. 아무리 國內 活動을 오래 한 분이더라도 外國人 技術委員長이 韓國人만큼 國內 指導者의 力量을 잘 알기는 어렵습니다.”

    國內 活動說에 對해서는 “全部 所聞일 뿐”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는 韓國 活動을 하지 않으려는 理由에 對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韓國에는 나보다 훌륭한 後輩, 同僚 監督이 많습니다. 特別히 제가 韓國에서 할 일도 없고, 5年이나 韓國을 떠나 있어 現場感도 떨어집니다. 蹴球協會나 프로蹴球聯盟에 들어갈 생각도 없습니다. 저는 體力이 許諾하는 한 監督으로 남고 싶습니다. 앞으로 2~3年은 더 現場 監督으로 뛸 수 있습니다.”

    베트남 代表팀이나 프로팀 復歸 可能性에 對해서는 “베트남에서 이미 能力을 充分히 發揮했다”며 “韓國과 베트남이 아닌 第3國 代表팀에서 監督 提議가 온다면 眞摯하게 苦悶해 볼 計劃”이라고 말했다.



    박세준 기자

    박세준 記者

    1989年 서울 出生. 2016年부터 東亞日報 出版局에 入社. 4年 間 週刊東亞팀에서 世代 葛藤, 젠더 葛藤, 勞動, 環境, IT, 스타트업, 블록체인 等 多樣한 分野를 取材했습니다. 2020年 7月부터는 新東亞팀 記者로 일하고 있습니다. 90年代 生은 아니지만, 그들에 가장 가까운 80年代 生으로 靑年 問題에 깊은 關心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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