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J는 三星에 對해 한 番도 좋은 말 안했다”|신동아

“DJ는 三星에 對해 한 番도 좋은 말 안했다”

‘問題的 人間’ 최규선 유아이에너지 代表

  • 한상진 記者 │ greenfish@donga.com

    入力 2013-07-17 14:50:00

  • 글字크기 설정 닫기
    • 世界的 人脈, DJ의 寵愛, 그리고 ‘게이트’…“모두 내 不察”
    • “謙遜하소, 나도 손바닥에 ‘謙遜’이라 쓰고 다녔네”(1997년 DJ)
    • “李健熙 會長, 親書 써주며 外資誘致 付託”
    • “사우디 王子는 三星 投資 願했지만 DJ는 待遇만 챙겨”
    • “DJ, 박주선 靑瓦臺 祕書官 통해 海外逃避 勸誘”
    • 유아이에너지, 史上 첫 上場廢止 無效 判決 이끌어
    “DJ는 삼성에 대해 한 번도 좋은 말 안했다”
    2012年 9月, 유아이에너지(以下 유아이)가 上場廢止(上廢)됐다. 市價 總額 600億 원假量의 株式이 하루아침에 休紙 조각이 되었다. 1500名이 넘는 株主가 고스란히 被害를 떠안았다. 유아이는 卽刻 上場廢止無效請求 訴訟을 提起했다.

    上場社의 生死與奪權을 쥔 金融監督院 傘下 證券先物委員會(證先委)가 유아이 上廢를 決定한 理由는 ‘完全資本蠶食’이었다. 600億 원 橫領 疑惑도 提起됐다. 證先委는 유아이와 최규선(53) 代表를 檢察에 告發했다.

    그러나 올해 初부터 證先委와 檢察은 잇달아 體面을 구겼다. 法院은 崔 代表에 對한 檢察의 拘束令狀을 두 番이나 棄却했다. 6月 서울南部地方法院은 유아이가 한국거래소를 相對로 낸 上廢無效訴訟에서 유아이의 손을 들어줬다. 上廢 決定이 法院에서 뒤집힌 첫 事例다. 유아이와 崔 代表는 最近 少額株主 173名이 낸 損害賠償 訴訟에서도 勝訴했다. 法院은 “上廢와 그로 인해 發生한 被害의 責任이 유아이와 崔 代表에게 있다고 보기 힘들다”고 判決 理由를 說明했다. 韓國去來所가 抗訴를 提起했지만 判決을 뒤집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유아이 崔 代表는 2002年 世上을 떠들썩하게 한 ‘최규선 게이트’의 張本人이다. 그 事件으로 金大中 前 大統領의 3男 홍걸 氏가 拘束됐다. 只今은 資源 開發에 힘을 쏟는 事業家이지만, 그는 如前히 ‘問題的 人間’의 이미지를 벗지 못하고 있다. ‘게이트’ 이미지가 늘 그의 곁을 맴돈다.

    7月 12日 서울의 한 호텔에서 崔 代表를 만나 4時間 넘게 對話를 나눴다. 最近 나온 法院 判決에 對한 얘기를 듣자고 만든 자리였지만, 話題는 자연스럽게 過去 이야기로 돌아갔다. 그는 對話 途中 여러 番 “그때는 正말 철이 없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란 金大中 前 大統領이 當選돼 在任한 1997~2002年이다. 그는 “大韓民國이 나를 集團 이지메하고 있다. 이젠 모든 걸 克服하고 싶다”고 말했다.



    金監院을 이기다

    ▼ 上廢無效決定이 나왔죠. 被害 規模가 컸는데.

    “史上 初有의 일입니다. 被害 規模는 上廢 時點으로 보면 500億 원 程度, 株價 暴落 以前으로 치면 3000億 원假量 됩니다. 去來所든 證先委든 누군가는 責任을 져야죠.”

    ▼ 再上場을 推進하나요.

    “當然하죠.”

    ▼ 이番 事件의 爭點이 뭡니까.

    “유아이는 2007年 쿠르드 政府와 移動式 發電設備(PPS) 納品 契約을 맺고 事業을 始作했어요. 그런데 證先委는 2007~2009年 유아이가 이미 쿠르드 政府에서 先受金을 받고도 이를 2011年까지 會計에 反映하지 않았다고 主張한 겁니다. 또 쿠르드 政府와 病院 工事 契約을 한 뒤 先受金을 유아이가 아닌 제 個人會社를 통해 받아 橫領했다는 거죠. 先受金은 부채로 잡히기 때문에 이를 會計에 反映하면 유아이는 完全資本蠶食 狀態가 된다, 그런 論理입니다.”

    ▼ 유아이와 崔 代表의 立場은.

    “PPS의 境遇 유아이가 代金을 받은 건 2007~2009年이 아니라 지난해 8月입니다. 제가 檢察 調査를 받게 된 뒤 쿠르드 政府가 이 事實을 確認해주면서 240億 원이 넘는 代金을 보내왔어요. 病院 工事는 契約만 하고 始作도 하지 않은 것이어서 돈을 받을 게 없었고요. 證先委나 檢察이 病院 工事 先受金이라고 主張하는 돈은 제가 個人的으로 갖고 있던 鑛業權을 解止하면서 받은 補償金입니다. 유아이는 쿠르드 政府로부터 이런 事實을 確認하는 書類를 받아 檢察과 證先委에 提出했고요.”

    崔 代表가 公開한 여러 件의 쿠르드 政府 資料는 그의 主張을 뒷받침한다. 쿠르드 政府 總理와 崔 代表가 맺은 契約書에는 이런 內容이 있다.

    “유아이는 2007年 2月 쿠르드 政府와 51MW 發電所 施設契約을 締結했으며 (…) 工事代金 遲延 等으로 (쿠르드 政府는) 유아이에 많은 損失을 招來케 했다. 現在는 設置가 完了되어 發電機의 試驗運轉과 一部 土木工事만이 남아 있다. (…) 쿠르드 政府는 유아이에미火 2154萬6000달러를 支拂하기로 合意한다. 合意書 締結일로부터 5日 以內에 유아이에 支拂될 것이다.”(2012년 8月 6日, 發電所 精算 合意書)

    華麗한 人脈

    “DJ는 삼성에 대해 한 번도 좋은 말 안했다”

    1997年 12月 김대중 大統領 當選者가 조지 소로스에게 보낸 祕密 書翰(왼쪽). 오른쪽은 三星 이건희 會長이 최규선 氏를 통해 사우디의 알 왈리드 王子에게 보낸 親書.

    上廢를 決定할 當時 證先委가 崔 代表의 橫領을 確信한 건 쿠르드 政府의 豫算 關聯 書類 때문이다. 外交部를 통해 當時 金監院이 確保한 書類에는 쿠르드 政府가 實際로 先受金을 유아이에 支給한 걸로 돼 있다. 그러나 裁判 過程에서 이 文書는 無用之物이 됐다. 쿠르드 政府 電力部 局長이 “우리 政府가 만든 資料는 不完全하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 지난해 8月 發電設備 代金이 들어온 뒤에도 論難은 繼續됐죠.

    “맞습니다. 證先委는 ‘돈이 들어올 理가 없다’며 樂觀했죠. 이미 받았다고 믿고 있었으니까. 檢察도 돈이 들어오는지 두고 보자면서 搜査를 미뤘어요. 그런데 正말 돈이 들어온 겁니다. 그러자 金監院은 부랴부랴 檢察에 ‘아무래도 이 돈은 崔 代表의 海外 祕資金 같으니 調査해달라’고 합니다. 그러다 슬그머니 이 部分에 對한 疑惑을 撤回했어요. 自己들 主張이 틀렸다고 認定한 겁니다.”

    ▼ 그럼 最終的으로 上廢가 決定된 理由는 뭔가요.

    “病院 工事 問題였어요. 그런데 法院은 그것도 認定하지 않았죠. 쿠르드 政府에서 ‘病院 事業은 아직 始作하지도 않은 狀態라 先受金을 줄 理由가 없었다’고 公文을 보냈거든요. 證先委가 主張한 先受金과 實際 契約書上의 先受金이 맞지도 않았어요.”

    崔 代表의 ‘글로벌 人脈’은 公公然한 事實이다. 2009年 死亡한 팝의 皇帝 마이클 잭슨, 世界的인 投資가 조지 소로스, 中東의 워런버핏으로 불리는 알 왈리드 사우디 王子, 토니 블레어 前 英國 總理 等이 主要 人脈으로 擧論된다. 人脈이 너무 華麗한 나머지 오히려 이것이 그에 對한 信賴를 떨어뜨리는 要因으로 作用하기도 한다. 崔 代表는 “스승인 스칼라피노 버클리대 敎授와 마이클 잭슨의 도움으로 全 世界 有力 人士들과 交遊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現在 유아이 홈페이지에는 토니 레이크 前 美國 白堊館 國家安保補佐官, 폴 렉소 前 美國 上院議員, 제프리 존스 前 駐韓 美國商工會議所 所長 等이 顧問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2010年 3月 英國의 한 言論媒體는 토니 블레어 前 總理가 유아이에서 數十萬 파운드의 諮問料를 받았다고 報道해 話題가 됐다. 이들 顧問團은 유아이가 이라크 事業을 推進하는 데 큰 도움을 주는 것으로 傳해진다.

    崔 代表는 1997年 初 野黨 大統領 候補였던 金大中 前 大統領의 補佐役으로 政界에 進出했다. 華麗한 人脈과 推進力으로 注目을 받았다. 김대중 政府 誕生의 日等功臣 中 하나라는 評價가 나오기도 했다. 崔 代表는 인터뷰에서 金大中 前 大統領을 ‘어르신’ ‘先生님’ ‘大統領님’ 等으로 表現했으나 便宜上 ‘DJ’로 呼稱을 統一한다.

    “DJ가 저를 寵愛하셨죠. 다들 ‘자네처럼 짧은 時間에 先生님(DJ) 魂을 빼버린 사람은 없었네’라고 했죠.”

    得寵思辱

    ▼ DJ의 補佐役으로 어떤 일을 했습니까.

    “가장 먼저 한 일이 넬슨 만델라 남아공 大統領의 딸 진지 만델라 招請이었어요. 진지 만델라는 만델라가 40年間 찼던 時計를 가져왔고, DJ는 亡命生活 동안 들고 다닌 가방을 膳物했어요. 이때부터 ‘金大中=韓國의 만델라’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졌죠. 氣가 막힌 캠페인이었어요. 그러나 제가 本格的으로 活動한 것은 1997年 大選 直前 外換危機가 터진 뒤부터였어요. 조지 소로스의 投資를 周旋했고, 알 왈리드 사우디 王子의 投資도 이끌어내면서 DJ의 信任을 받았죠. 大宇, 현대가 德을 많이 봤죠(웃음).”

    當時 그는 DJ의 外換危機 脫出 시나리오의 相當 部分을 擔當했다. DJ 政府 初期 大統領 經濟顧問을 맡아 外資誘致를 陣頭指揮한 유종근 前 全北知事는 2007年 한 言論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조지 소로스, 알 왈리드 사우디 王子 等의 投資는 최규선 氏가 나서서 이뤄진 것이다. 崔 氏가 이들에게 便紙도 쓰고 會談도 周旋했다.”

    ▼ 그런데 막상 DJ가 大統領에 當選된 以後엔 빛을 못 봤죠. 靑瓦臺에도 못 들어갔고.

    “左衝右突하다 (DJ의) 信任도 잃고 役割도 잃었죠. DJ가 제게 恒常 하시던 말씀이 ‘자네는 두 가지만 고치면 반드시 대성을 해. 신중함과 謙遜함이여’였어요. ‘나도 젊었을 때는 손바닥에다가 謙遜이라고 써놓고 다녔네’라고 하시면서. 그때는 그 말이 어떤 뜻인지 잘 몰랐어요.”

    崔 代表는 DJ의 語套를 흉내 내며 狀況을 재미있게 說明했다. 湖南 出身이라 그런지 말套와 抑揚이 恰似했다. 그가 다시 ‘聲帶模寫’를 始作했다.

    “DJ가 그럽디다. ‘나도 누가 말하면 中間에 잘라버렸어요. 그거 틀렸습니다, 그래버리고. 근데 그게 아니에요. 남의 말을 잘 들어야 됩니다. 마이클 잭슨 訪韓도 자네가 다 했고, 소로스 投資도 자네가 다 했다고 하면, 그럼 나는 뭐가 되는가, 이 사람아’ 그런 말도 하셨어요. ‘得寵私慾(得寵思辱)’이란 말씀도 하신 記憶이 납니다.”

    ▼ 무슨 뜻인가요.

    “寵愛를 받으면 辱 얻어먹을 準備도 해라.”

    ▼ 마이클 잭슨이나 조지 소로스를 韓國에 데려온다고 했을 때 周邊 反應은 어땠어요.

    “미친놈이라 그랬죠. 마이클 잭슨이 뭐 하러 오겠느냐고. 라스베이거스에서 짝퉁 하나 求해 올 거라고.”

    ▼ 그런데 實際로 왔잖아요.

    “DJ의 얼굴 寫眞이 스포츠新聞 1面에까지 깔렸죠. 한마디로 亂離가 나부렀지.”

    ▼ 牽制하고 猜忌하는 사람이 많았겠네요.

    “大統領 當選 뒤 쓰던 安家가 있었어요, 삼청동에. 거기를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몇 안 됩니다. 저는 無時로 드나들었죠. 그래서 저를 눈엣가시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當選者 時節 하루는 김옥두 議員이 저를 찾아요. ‘安家로 빨리 오라’고. DJ가 저를 찾는다는 거예요. 鄭東泳, 朴智元, 김옥두, 金한길 같은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자리에 앉으니까 DJ가 제게 물어요. ‘어이, 소로스는 서울證券 引受하러 언제 들어오는가?’ 그래서 저는 別생각 없이 ‘當選者님, 그분은 1年 前부터 日程을 定해놓고 움직입니다. 現在 調整 中이니 기다리십시오’라고 말씀드렸죠.”

    “이 주먹만한 것이…”

    ▼ DJ 앞에서 할 말을 다 했네요.

    “얘기가 끝나니까 김옥두 議員이 저를 불러요, 安家에 딸린 작은 房으로. 들어가자마자 갑자기 주먹을 들더니 ‘이걸 콱~ 이 주먹만한 것이…아주 죽여불랑게’ 그러시는 거예요.”

    ▼ 왜요?

    “고분고분하지 않다는 거죠. ‘우리 때는 想像도 못 할 일이다’라면서 火를 내시더라고요.”

    ▼ 맞지는 않았어요?

    “한길이 兄이 말렸어요. 金 議員에게 저를 가리키면서 ‘(DJ의) 養아들, 養아들’이라고 했죠, 참으라는 뜻으로. 그렇게 밉보여서 그런지 게이트가 터졌을 때 아무도 저를 도와주지 않더라고요.”

    ▼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아이고~, 絶對 그렇게 行動 안 하죠. 第一 後悔되는 건 亦是 言論에도 報道된 것처럼 外資誘致 한다면서 삼성그룹 이건희 會長 專用機를 타고 다닌 일이에요. 只今 생각하면 웃음도 안 나올 일이죠.”

    ▼ 大選 直後의 일인가요.

    “그렇죠. 李健熙 會長을 會長님의 自宅인 승지원에서 서너 番 뵈었죠. 李鶴洙, 지승림 같은 분들과 만났어요.”

    승지원은 이 會長이 主要 人士를 面談할 때 쓰는 迎賓館이다.

    ▼ DJ가 그 일을 報告받은 뒤 崔 代表의 靑瓦臺 入城이 挫折됐다는 말도 있던데.

    “事實일 겁니다. 大統領職引受위 때인 1998年 1月 제가 DJ에게 불려가 작살이 났어요. 그런 다음 1次 靑瓦臺 人選에서 빠졌죠. 當時 DJ 政府의 最大 話頭가 財閥改革이었는데, 財閥의 專用機를 타고 다녔으니 혼날 만도 했죠. 게다가 DJ는 三星을 좋아하지 않았어요.”

    ▼ 무슨 얘긴가요.

    “DJ는 單 한 番도 三星에 對해 좋은 말을 한 적이 없어요. 1997年 12月 韓國을 訪問했던 알 왈리드 사우디 王子가 正말 投資하고 싶어 했던 企業은 삼성전자였는데, DJ는 報告를 받고 ‘大宇나 챙겨주게’ 그랬어요. ‘金宇中 會長이 곧 全經聯 會長이 될 거다’라면서. 意中을 읽었기 때문에 저는 알 왈리드 王子와 三星 間에 미팅도 잡아주지 않았어요.”

    ▼ 그런데 같은 時期에 崔 代表는 이 會長 專用機를 타고 다니며 三星의 外資誘致를 度왔잖아요.

    “그렇죠. 그러니까 제가 생각이 짧았던 거죠. 結局 알 왈리드 王子가 삼성전자와 삼성자동차에 2億 달러 以上을 投資하기로 決定했는데도 DJ 政府가 反對해서 成事되지 않았어요. 李 會長은 사우디 알 왈리드 王子에게 보내는 親書까지 써주시면서 外資誘致에 功을 들였는데.”

    李健熙 會長의 親書

    “DJ는 삼성에 대해 한 번도 좋은 말 안했다”

    韓服을 입은 世界的인 팝 歌手 마이클 잭슨과 최규선 氏. 崔 氏가 안고 있는 것은 마이클 잭슨이 生前에 키우던 愛玩 침팬지 버블스.

    崔 代表는 이 會長이 써줬다는 親書를 ‘신동아’에 公開했다. 崔 代表는 “李 會長님 署名이 아주 獨特하다. 普通 ‘LEE’를 쓰면 L은 大門자고 E는 小文字인데, 그분은 다 大文字로 쓴다”고 말했다. 親書에는 이런 內容이 담겨 있다.

    ‘韓國 未來에 對한 王子님의 自信感과 그에 따른 投資 決定은 大韓民國 經濟의 回復을 促進시킬 뿐 아니라 다른 外國 投資者들의 追加 投資 決定을 誘導하리라 믿습니다. (…) 王子님의 모든 努力이 結實을 맺고 萬福이 깃들기를 起源 드리며 이런 제 뜻을 받아주기시 바랍니다.’(1998년 3月 19日 三星 會長 李健熙)

    ▼ 李 會長 專用機는 몇 番이나 탔습니까.

    “引受위 때도 탔고, 以後에도 탔고…. 사우디에도 가고 브루나이며 다른 데도 가고. 大統領께 박살이 난 다음에도 탔으니까. DJ한테 혼날 때도 저는 ‘操心하겠습니다. 그런데 當選者님, 저는 저대로 할 일이 또 있습니다’ 그랬어요.”

    ▼ 靑瓦臺에 들어가면 어떤 일을 하기로 되어 있었나요.

    “國政狀況室을 맡기로 했었죠. DJ가 제게 ‘어느 한 部署에 얽매이지 말고 일을 하라’고 여러 番 말씀하셨어요.”

    ▼ DJ 政府 5年間 어떻게 지냈나요.

    “돈도 벌고 政治人으로 成功도 하고 싶었어요. 美國에서는 그런 사람을 많이 봤거든요. 그래서 企業에 外資를 誘致해주고 各種 컨설팅을 하면서 지냈죠. 돈도 많이 벌었어요. 권노갑 顧問의 特報를 맡기도 했고요.”

    ▼ 政權 初 企業들로부터 받은 外資誘致 커미션, 컨설팅비는 얼마나 됩니까.

    “한 70億 원 程度? ‘게이트’로 拘束된 以後 問題가 된 部分에 對해 稅金을 다 냈는데도 30億~40億 원이 남았어요. 1996年 마이클 잭슨 公演을 성사시키면서 번 돈을 합쳐서 只今의 事業을 始作한 겁니다.”

    ▼ 1997年 大選을 전후해 主로 어떤 企業人을 만났습니까.

    “李健熙, 金宇中, 李鶴洙, 崔泰源, 최원석, 이웅렬, 벤처協會長을 맡고 있던 메디슨 이민화 會長 等이었어요. 그때는 大企業 會長들이 저를 만나려고 줄을 섰으니까. 다 外資誘致 때문이었죠. 李明博 政府 때 잘나갔다는 박영준度 當時 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걸요?(웃음)”

    ▼ 企業들에 實際로 도움을 많이 줬나요.

    “成事가 된 것도 있고, 안 된 것도 있고. 아…정몽헌 會長도 여러 番 만났죠. 鄭 會長님이 金剛山에 카지노 만드는 問題를 相議하셨어요. 그래서 현대그룹 任員들과 같이 라스베이거스에 갔죠. 벨라지오호텔 所有者 스티브 윈과의 자리를 만들어줬어요. 事業이 成事되진 않았지만.”

    ▼ 커미션은 어떻게 받나요.

    “借名 通帳을 받는 境遇도 있고…, 方法은 많아요. 成功한 境遇에만 받죠. 그리고 그때는 사람들을 만나서 어디다 옷만 걸어두면 돈封套가 꽂혀 있었어요. 勿論 그런 푼돈은 안 받았지만.”

    ▼ 當時 大宇와 서울證券 引受 過程에서 相當한 돈을 받은 걸로 알려졌는데.

    “大宇에서 한 10億, 소로스가 서울證券을 引受하도록 도운 뒤에는 좀 많이 받았죠.”

    “借名 通帳 받기도…”

    ▼ 그런데 게이트 當時 檢察 搜査에서는 大宇나 서울證券에서 받은 돈은 問題가 안 됐죠?

    “體育服표, 車病院 關聯된 것만 處罰 받았죠. 當時엔 外資를 幼稚한 사람에 對해서는 좀 寬大한 雰圍氣가 있었어요. 그래서 檢察에서도 다른 件은 問題 삼지 않았죠.”

    ▼ 그렇게 돈을 받는 게 問題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나요.

    “國家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오히려 적게 받는다고 생각했어요. 正常的인 컨설팅 費用이니까.”

    ▼ 왜 돈을 벌려고 한 겁니까.

    “DJ를 보면서 돈이 있어야 政治를 할 수 있다는 걸 알았죠. 돈을 번 다음 故鄕(全南 羅州)에서 出馬하려고 했어요.”

    ▼ 5年 내내 DJ 政府 人士들과 葛藤이 甚했던 걸로 압니다.

    “DJ 長男인 金弘壹 議員이 저를 미워했죠. 제가 洪걸이를 망친다고 생각하셨어요. 제가 當時 산업은행에서 投資를 받아 알 왈리드 王子, 洪걸이와 함께 벤처投資社를 만들려고 했거든요. 一旦 제가 먼저 會社를 만들고 DJ 政權이 끝나면 홍걸이가 合流하는 式으로. DJ도 許諾한 일이었어요. 그런데 金弘壹 議員이 그런 저를 너무 안 좋게 보셨어요. 나중에 들어보니, DJ가 김정일을 만나고 돌아오는 날 城南空港에서 DJ를 기다리면서도 같이 있던 권노갑 顧問에게 ‘최규선이 이대로 두면 안 됩니다’라고 했다는 거예요.”

    ▼ 政權 次元의 警告도 많이 받았겠네요.

    “朴趾源 首席, 전윤철 祕書室長, 최재승 議員 等이 시그널을 보냈죠. 國精院은 저의 一擧手一投足을 盜聽했고요. 하루는 崔 議員이 저를 불러서 ‘너 요즘 루이13歲 마시고 다닌다며? 女子 演藝人 데리고 놀고…’ 그러더라고요. 제가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했더니 ‘너, 그러다 죽는다’ 하시더라고요. ‘그동안 먹은 거 다른 사람들한테 다 나눠주라면서.”

    國精院이 崔 代表를 盜聽했다는 事實은 2002年 터진 國精院 盜聽 事件에서 確認된 바 있다.

    ▼ 한마디로 ‘나대지 마라’ 그런 거네요.

    “그런데 警告를 받고도 달라진 건 없었어요. 오히려 崔 議員께는 ‘兄님은 能力이 없으니까 그렇게 사는 것이고, 저는 제 能力으로 먹고삽니다’ 그랬으니까. ‘이 政權이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이래라저래라 하느냐’며 대들었죠. 그때 그분들이 절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겠어요? 오죽하면 DJ가 돌아가시기 前에 그런 말을 하셨대요. ‘규墡膩는 지 발로 矯導所에 간 놈이다’라고. 引受위 때도 可觀이었어요. 個人 運轉士 데리고 다니고, 車에 非常燈 달고 다니고…신호 안 지키려고요(웃음).”

    ▼ DJ와 關係가 어땠나요.

    “1998年 9月頃까지는 괜찮은 便이었어요. 그해 3月 알 왈리드 王子가 韓國에 왔을 때도 靑瓦臺 官邸에서 大統領을 뵙고 그랬으니까. 그런데 9月에 제가 사직동팀에서 調査를 받은 뒤부터 疏遠해졌죠. 사직동팀 調査가 끝난 直後 DJ가 當時 박주선 法務祕書官을 通해 ‘海外에 6個月 程度 나가 있으라’는 메시지를 傳했어요. 조용해지면 다시 들어오라고.”

    ▼ 떠났나요.

    “그때 조용히 떠났어야 했는데, 美國에 가도 할 일이 없다는 생각에 日本에 머물던 권노갑 顧問을 찾아갔죠. 그리고 그 분 特報가 됐고요.”

    ▼ ‘최규선 게이트’가 始作되자마자 記者會見을 自請해서 홍걸 氏에게 돈 준 事實을 自白했죠.

    “그렇게 하면 靑瓦臺가 저를 保護해줄 줄 알았어요. 그 程度로 불면 아차! 하고 저를 챙길 줄 알았죠. 저 나름대로 計算을 한 겁니다.”

    ▼ 홍걸 氏에게 돈을 주고 가깝게 지낸 건 政治的으로 再起하기 위해서?

    “그렇죠. 一種의 保險이죠. 大統領 아들이니까. 이희호 女史의 親아들이니까. 影響力이 있다고 判斷한 거죠. 그런데 나중에 보니 全혀 아니던데(웃음)…. 하지만 나중에는 홍걸 氏와 人間的으로 正말 親한 사이가 됐어요.”

    ▼ ‘게이트’ 以後 홍걸 氏와 만난 적이 있나요.

    “2006年쯤 連絡이 와서 만났어요. 껴안고 그러는데 가슴이 뭉클하더라고요. 홍걸 氏가 앞으로의 삶에 對해 苦悶을 많이 할 때였어요. 제게 유아이 中東支社에 보내달라고 하더군요. 마침 두바이에 저희 支社가 있어서 생각해보자고 그랬어요. 父母님은 自己가 說得하겠다고 했고.”

    ▼ 어떻게 됐나요.

    “當時 제가 新件 前 國精院長을 멘토로 삼고 있었는데, 그분이 그러지 말라고 했어요. ‘너희 둘을 위해서도 좋지 않다’고. 입방아에 오르기 딱 좋다고. 그래서 없었던 일이 됐죠.”

    한나라당으로 前職?

    2001年 여름, 崔 代表는 갑자기 한나라당 사람이 되어 나타난다. 2002年 地方選擧에서 서울市長 出馬를 準備하던 홍사덕 議員 캠프에 合流한 것. 當時 홍 議員의 캠프가 있던 事務室이 現在 유아이 江南 本寺다.

    “DJ는 삼성에 대해 한 번도 좋은 말 안했다”

    1997年 5月 20日 金大中 前 大統領의 自宅을 訪問한 넬슨 만델라 當時 남아프리카공화국 大統領의 딸 진지 만델라 夫婦. 當時 이들은 최규선 氏의 招請으로 韓國을 訪問했다.

    ▼ 왜 갑자기 한나라당과 손을 잡았나요.

    “그前에 잊지 못할 일이 있었어요. 2001年 1月인가, 눈이 아주 많이 오던 날이었어요. 權 顧問이 大統領을 뵙고 와서 제게 電話를 했어요. 평창동 집으로 오라고. 그래서 갔더니 홍걸 氏도 와 있어요. 그날 權 顧問이 제게 ‘규善이, 이제 자네는 우리와 끝이네’ 그러는 거예요. 홍걸 氏에게도 ‘洪걸이度 잘 들어라. 이제 父母님 괴롭히지 말고 규선이와의 關係를 끝내라’고. 홍걸 氏가 ‘아저씨, 저희가 뭘 끝냅니까’ 하며 따지니까, 權 顧問이 버럭 火를 내면서 ‘더 以上 國政에 負擔 주지 마라’고 하시는 거예요. 제게는 國會議員 公薦을 줄 생각이 없으니 한나라黨 가서 公薦을 받든지 無所屬으로 나가든지 알아서 하라면서. 저와의 問題 때문에 홍걸 氏가 이희호 女史와 여러 次例 다퉜어요.”

    ▼ 겉으로는 別問題가 없었던 것 같은데.

    “正確한 事情은 모르겠는데, 아마도 金弘壹 議員이 亂離법석을 떤 것 같아요. 그즈음 김은성 國精院 次長도 저를 양재동 敎育文化會館 自己 事務室로 불러서 ‘崔 博士님께서 推進하시는 事業, 우리가 無條件 막을 테니 그렇게 아세요’라고 했고요. 그런데도 저는 ‘이 政權이 설마 나에게 뭘 어떻게 하겠냐’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 일이 있고 난 다음부터 한나라당을 기웃거린 겁니다. 5, 6月부터 홍사덕, 尹汝雋을 만나러 다녔죠.”

    ▼ 그 後로는 동교동 사람들과 接觸한 적이 없나요.

    “홍걸 氏 外에는 만난 사람이 거의 없어요.”

    ▼ 그런데 2008年 公企業 搜査 當時 崔 代表에게서 뒷돈을 받은 嫌疑로 金相賢·정대철 前 議員이 檢察 調査를 받았고, 김상현 前 議員은 拘束까지 됐잖아요.

    “率直히 그 事件은 正말 抑鬱합니다. 鄭 前 議員은 無嫌疑가 나왔죠. 제가 鄭 前 議員에게 뭔가 代價를 바라고 3000萬 원을 줬다는 건데, 事實이 아닙니다. 그 돈은 鄭 前 議員의 母親인 이태영 博士 記念事業會에 寄附한 거예요. 領收證 處理도 다 했고, 그리고 정대철 前 議員은 게이트로 拘束됐을 때 拘置所에서 만난 ‘빵動機’입니다(웃음).”

    ▼ 김상현 前 議員은요?

    “檢察은 제가 金 前 議員에게 건넨 1億6000萬 원이 石油公社의 이라크 바지안 鑛區 컨소시엄에 參與케 해달라는 請託으로 건넨 것이라고 主張했어요. 法院도 그렇게 判斷했고. 全혀 事實이 아닙니다. 金 前 議員이 제게 ‘아들 事業에 投資를 해달라’고 要請하신 거예요. 그래서 드린 겁니다. 純粹하게 그분의 人間味에 反해서. 그리고 그 當時 金 前 議員은 그런 付託을 處理할 能力도 없는 處地였어요.”

    ▼ 石油公社 컨소시엄에 參與케 해달라는 請託을 한 적이 없나요.

    “그 事業은 제가 請託할 理由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쿠르드 政府는 제가 參與하는 條件으로 契約을 했어요. 그런 事實은 石油公社 會議錄에도 잘 나와 있습니다.”

    石油公社 會議錄에는 다음과 같은 內容이 있다.

    ‘유아이의 參與 與否는 石油公社의 意思와는 關係없이 쿠르드 政府가 定한 問題입니다. ‘유아이하고 같이 하면 하고, 안 그러면 마라’라는 程度의 水準에 이르는 어떤 强壓이라고 할 수 있는 狀況입니다.”(2007년 11月 7日)

    ▼ 政治하겠다는 꿈은 完全히 접었나요.

    “2002年 게이트를 겪은 뒤론 完全히 抛棄했습니다. 그리고 市場에서 名譽回復을 하겠다는 決心을 했죠. 政治를 抛棄한 뒤로 海外 네트워크는 더 탄탄해졌습니다.”

    “政治 꿈 접었다”

    ▼ 그런데 유아이는 2007年 以後 줄곧 赤字입니다.

    “資源開發事業은 短期的인 成果를 바라고 할 수 없어요. 바지안 鑛區에만 그동안 160億 원 以上의 探査費用이 들어갔어요. 그동안 損失額을 다 합치면 700億 원쯤 되는데, 저는 이것도 投資라고 생각해요. 나는 그동안 유아이이엔씨 같은 個人 會社를 통해 海外에서 돈을 벌어 유아이에 投資해왔어요. 2005年頃부터 제가 只今까지 海外에서 벌어들인 外貨는 1500億 원 程度 됩니다. 그中 相當額이 유아이에 投資됐죠. 제가 유아이의 將來에 確信을 갖지 못한다면 投資했겠어요?”

    인터뷰가 끝날 무렵 崔 代表는 다음과 같은 얘기를 꼭 써달라고 當付했다.

    “게이트를 겪은 뒤 내 人生은 完全히 망가졌어요. 그러나 成功한 사람의 過去는 悲慘할수록 더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반드시 ‘게이트 최규선’을 克服해내겠습니다. 社會에 寄與할 수 있는 企業人이 되기 위해 努力할 겁니다.”



    인터뷰

    댓글 0
    닫기

    매거진東亞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推薦記事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