水原 華城行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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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原 華城行宮
(水原 華城行宮)
대한민국의 기 大韓民國 私的
八達山에서 찍은 화성행궁
種目 私的 第478號
( 2007年 6月 8日 指定)
面積 37,268m 2
時代 朝鮮時代
管理 京畿道 수원시
參考 遺跡建造物 / 政治國防/ 宮闕·官衙/ 宮闕
住所 京畿道 水原市 八達區 남창동 6-2
連結 水原觀光-화성행궁
情報 文化財廳 國家文化遺産포털 情報
화성행궁地
(華城行宮址)
京畿道 記念物 (解止)
種目 記念物 第49號
( 1972年 7月 3日 指定)
( 2007年 6月 8日 解止)

水原 華城行宮 (水原 華城行宮)은 正祖 가 陵園에 參拜할 때 머물던 臨時 處所로서, 平素에는 府使(府使) 또는 有數(留守)가 執務하던 곳으로 活用되던 行宮 이다. 1789年 (正祖 13年) 水原 新邑治 建設 後 八達山 東쪽 기슭에 建立되었다. 正祖는 1789年 10月, 아버지 思悼世子 의 무덤인 顯隆園 을 옮긴 以後 1800年(正祖 24年) 1月까지 12年 間 13次例에 걸쳐 火星에 行次했고, 이때마다 行宮에 머물렀다. [1]

復元 [ 編輯 ]

576칸[間]으로 正宮(正宮) 形態를 이루며 國內 行宮 中 가장 큰 規模를 자랑했지만 大韓帝國 時期에 京畿道 觀察府, 水原 郡廳, 慈惠醫院, 學校 等이 자리하면서 用途 變更이 있었고, 1910年 8月 日帝强占期 以後에는 落南軒을 除外한 大部分 施設이 日帝의 民族文化와 歷史 抹殺 政策 및 病院과 學校 建物 增改築 等으로 破壞되었다. 1980年代 末 뜻있는 地域 市民들이 復元推進委員會를 構成하여 꾸준하고 積極的인 復元運動을 펼친 結果, 華城築城 200周年인 1996年 復元工事가 始作되어 마침내 482칸으로 1段階 復元이 完了되어 2003年 10月 一般에게 公開되었다. [2] 以後 客舍 人 禹花冠과 別株, 장춘각을 비롯한 나머지 94칸에 對한 2段階 復元까지 마치면서 2024年 4月 24日, 復元이 完了되었다.

現在 [ 編輯 ]

京畿道 記念物 65號로 指定되어 있다가, 2007年 6月 8日, 史跡으로 昇格 指定되었다. [3] 每週 火曜日부터 日曜日까지 아침 11時부터 30分 동안 武藝24期 保存會 가 武藝 示範을 보인다.

救助 [1] [ 編輯 ]

단원 김홍도가 그린 화성행궁도
檀園 金弘道 가 그린 화성행궁度. 위에 옛한글 로 '화셩횡궁'이라 적혀 있다. 1795年. 奎章閣 所長.

화성행궁은 八達山 頂上의 西將臺 아래의 山기슭을 中心으로 傾斜地가 펼쳐지고, 市街地가 始作되는 곳의 平地에 位置해 있다. 構造는 앞쪽으로 긴 長方形 構造이다.

正門인 신풍루 兩쪽으로 남軍營과 北軍營이 있으며 신풍루로 들어서면 왼쪽으로는 書吏廳과 裨將廳, 오른쪽으로는 執事廳이 位置해있다. 書吏廳과 裨將廳, 執事廳을 左右로 지나 마당을 가로지르면 좌익문이 있고, 이를 通過하면 中央文이 나온다. 이 中央門을 지나면 華城行宮의 正殿인 奉壽堂이 나타난다. 화성행궁과 따로이 떨어져 있는 花翎戰 正祖 의 位牌를 모시고 있다.

신풍루 [ 編輯 ]

신풍루 正面. 오른쪽 아래 懸板에 적힌 것은 '華城行宮(화성행궁)'이다.

신풍루(新?樓)는 華城行宮의 正門으로, 1790年 (正祖 14年)에 樓門 6칸을 세우고 진남루(鎭南樓)라 하였다. 1795年 正祖는 신풍루로 고치라고 命하여 조윤형으로 하여금 다시 扁額을 쓰게 하였다. '新風'이란 이름은 일찍이 漢 高祖 가 '風 땅은 새로운, 또다른 故鄕'이라고 한 故事에서 由來한 것으로, 正祖에게 있어 華城은 故鄕과 같은 고장이라는 意味로 扁額을 걸게 한 것이다. 1795年에 正祖가 行次했을 때 신풍루 앞에서 正祖가 親히 華城府 의 百姓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고 굶주린 百姓에게는 粥을 끓여 먹이는 賑恤 行事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가운데 門은 魚道(御道)로, 賃金만 지나갈 수 있다.

좌익문 [ 編輯 ]

좌익문

좌익문(左翊門)은 內三門(內三門)을 바로 앞에서 도와 行宮을 지키는 中三門(中三門)으로 1790年 3칸 規模로 完工하였다. 行宮의 本錢인 奉壽堂(奉壽堂)에 이르는 두番째 聞으로 중양문(中陽門) 앞에 있다. 門의 이름인‘좌익(左翊)’은 '곁에서 돕는다'는 뜻이며, 扁額은 正祖의 名으로 정동준(鄭東浚)李 썼다. 南쪽 行脚의 끝은 외정리所와 連結된다.

중양문 [ 編輯 ]

중양문

중양문(中陽門)은 宮闕 建築의 三門 設置 形式에 따라 行宮의 正殿인 奉壽堂을 바로 앞에서 가로막아 굳게 지키는 役割을 하는 內三門(內三門)이다. 1790年 (正祖 14)에 完成되었고, 가운데의 正門과 左右의 夾門이 있고 左右로 行脚을 두어 出入을 統制하였다. 1795年 奉壽堂 眞贊禮 때 奉壽堂 앞으로는 正朝와 혜경궁을 비롯한 王室의 宗親과 大臣들이 자리하였고, 中央門 밖으로 大門을 활짝 열어 承旨와 四館, 各神이 班列을 이루었던 바 있다.

奉壽堂 [ 編輯 ]

奉壽堂

奉壽堂(奉壽堂)은 華城行宮의 正殿이자 華城留守附議 東軒 建物로 장남헌(壯南軒)이라고도 한다.

正祖는 1795年 혜경궁 洪氏 의 回甲宴 '眞贊禮'를 이 建物에서 擧行하였다. 이때 正祖는 혜경궁의 長壽를 祈願하며 '萬年(萬年)의 수(壽)를 받들어 빈다'는 뜻인 奉壽堂이라는 堂號를 지어 조윤형으로 하여금 懸板을 쓰게 하였다. 또 혜경궁 回甲宴을 마치고 9年 뒤 1804年에 혜경궁의 70수연(壽宴) 進饌을 奉壽堂에서 갖겠으니 使用할 物件을 잘 保管하도록 指示하기도 하였다. 進饌禮는 朝鮮 最大의 宮中 行商로 當時 커다란 話題거리였으며, 王室의 宗親과 臣下들 外에도 많은 사람들이 參與하였다.

이 建物은 1789年(正祖 13) 8月 19日 商量하고 9月 25日 完工되었다. 日帝强占期 에 病院 建物을 新築하면서 破壞된 奉壽堂은 1997年 에 復元되었다.

有餘澤 [ 編輯 ]

有餘澤

有餘澤(維與宅)은 平素에 華城留守가 起居하다가 正祖가 行次時에 머물며 臣下들을 接見하는 建物이다. 복내당 東쪽 行脚과 외정리소 사이에 있다. 유여택이라는 이름은 『詩經』 中에서 周나라 天命을 받아 나라를 크게 하고 집을 주었다는 데서 따온 것으로, 正祖의 立場에서는 火星 留守를 임명하여 내려보내는 곳이라는 意味가 된다.

元來 有여택은 1790年 (正祖 14年)에 建立되어 隱約헌(隱若軒)이라 하였다가 1796年에 增築하면서 有餘澤으로 이름을 바꿔 달았다. 建物은 動向으로 왼쪽에 功臣루(供宸樓) 1칸을 덧붙여 休息 空間을 마련하였다.

1795年 行次 市에 正祖는 유여택에서 各種 行事에 對한 報告를 받고 下校를 내렸다.

警龍館 [ 編輯 ]

警龍館

警龍館(景龍館)은 장락당의 바깥門으로도 使用했던 附屬建物이다. '警龍'이란 帝王을 象徵하는 큰 龍을 뜻하는 것으로, 唐 太宗 이 居處한 宮闕 이름에서 따 왔다. 正祖는 唐 太宗의 宮闕 이름을 借用한 이 建物에서 休息을 取하며 朝鮮의 太平聖歲를 具現하고자 하였다.

1794年 (正祖 18)에 2層 構造로 만들었다. 建物의 2層은 모두 마루를 깔아 樓마루를 만들고 1層은 널門 3칸을 만들어 地絡門(至樂門)이라 이름붙였다.

장락당 [ 編輯 ]

장락당

장락당(長樂堂)은 혜경궁의 寢殿이다. 장락당은 傳한 의 都邑인 長安城 의 宮殿이자 한나라 太後 의 居處였던 '長樂宮'에서 이름을 따 온 것으로, 正祖가 혜경궁의 萬壽無疆을 祈願하며 扁額을 直接 써서 걸었다. 實際로 1795年 (正祖 19) 乙卯遠行 時에 혜경궁은 여기 머물렀는데, 정민시가 지은 上樑文에서는 '빛나는 宮闕이 처음 이루어지는 때를 當하여 多幸히 태우께서 먼저 납시는 것을 보았네'라고 하였다.

1794年 (正祖 18) 火星 西域 中에 完成되었으며, 奉壽堂 南쪽에, 動向으로 세워졌다. 奉壽堂의 西南쪽 지붕과 겹쳐 있다.

복내당 [ 編輯 ]

복내당

복내당(福內堂)은 行宮의 內堂으로 正祖가 行次時에 머물던 곳이며 장락당 南쪽에 位置해 있다. 左右 建物 두 채로 이루어져 있다. 上樑文은 1796年(正祖 20) 11月 민종현이 지었다. 복내당의 이름은 '福은 안에서 생겨나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1790年(正祖 14)에 水原府 新邑治소의 內衙(內衙)로 建立하였고, 1794年(正祖 18)에 세웠다.

落南軒 [ 編輯 ]

落南軒

落南軒(洛南軒)은 日帝 强占期에 화성행궁이 撤去될 當時 毁損당하지 않고 그대로 남은 唯一한 建築物이다. 落南軒이라는 이름은 後漢 光武帝 洛陽 으로 都邑을 옮기고 宮闕 이름을 '南宮(南宮)'이라 한 것에서 따온 것이다. 1795年(正祖 19) 乙卯遠行 때 各種 行事가 이곳 落南軒에서 치러졌다. 正祖는 혜경궁 洪氏의 回甲宴을 記念하여 軍士들의 會食과 養老宴을 여기서 하였고, 特別 過去 試驗을 치러 文科 5名과 武科 56名을 選拔하였는데, 及第者에게 合格證을 내려 주는 行事까지 여기서 하였다.

1794年(正祖 18)에 完工되었다.

노래當 [ 編輯 ]

노래當

노래當(老來堂)은 正祖가 王位에서 물러나 老後生活을 꿈꾸며 지었다는 建物로, 落南軒과 득중정에서 열리는 여러 行事 途中 休息을 取하는 데 使用하였다. 華城 行宮의 政黨人 奉壽堂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나오는데, 곱은 ㄱ字形으로 配置한 初翼工(初翼公) 樣式 八作지붕集이다. 1794年 行宮을 增築할 때 5輛 7칸 規模로 새로 지었으며, 扁額은 채제공(蔡濟恭)李 썼으나 傳하지 않는다. 北쪽으로 落南軒과 이어져 있고, 南쪽으로는 득중정과 通한다.

노래(老來)란 말은 '늙는 것은 運命에 맡기고 便安히 살면 그곳이 故鄕이다'라는 唐나라 詩人 白居易(白居易)의 詩에서 따온 것이다.

득중정 [ 編輯 ]

득중정

득중정(得中亭)은 활을 쏘기 위해 세운 亭子이다. 正祖는 行次 市에 每番 활쏘기를 하였는데, 1790年(正祖 14)에 새로 만들어진 이 亭子에서 활을 네 발 쏘아 네 발 모두 맞히고는 이를 記念하여 '득중정'이라고 하였다. 득중정은 "활을 쏘아 맞으면 諸侯가 될 수 있고, 맞지 않으면 諸侯가 될 수 없다(射中 則得爲諸侯 射不中 則不得爲諸侯)"라고 한 句節에서 '得'字와 '中'字를 따서 붙인 것이다. 扁額은 正祖가 直接 써서 걸었고, 上樑文은 洪良浩가 짓고 썼다.

執事廳 [ 編輯 ]

執事廳

執事는 主人을 모시고 그 살림을 맡아하는 사람들로서, 行宮의 執事廳(執事廳)은 宮闕의 掖庭署(掖庭署, 國王이 쓰는 붓과 먹, 벼루 等을 保管하며 大闕안의 열쇠를 간수하고 여러 가지 設備, 備品을 管理하는 官廳)와 같이 雜多한 事務를 보던 執事들이 使用하던 建物이다. 신풍루를 지나자마자 오른쪽에 있다. 좌익문 밖 東北 담 안에 있는데 1789年(正祖 13)에 세웠다. 華城行宮의 大部分의 建物과 마찬가지로 日帝 强占期 때 完全히 破壞되었다가 2002年 7月에 建物 두 채로 復元되었다. 執事廳 앞에는 行宮이 세워지기 前부터 있었던 樹齡 600年이 넘은 느티나무가 있다.

北軍營 [ 編輯 ]

北軍營

北軍營(北軍營)은 壯勇營 外營의 騎馬兵이었던 親軍衛(親軍衛)가 座, 優劣로 各 100名씩 입直宿爲하는 建物이다. 신풍루를 마주보는 쪽에서 右側에 있다. 1798年(正祖 22) 壯勇外營 軍營의 一代 改編에 따라 座, 優劣은 罷하고 1, 2, 3番의 入番 順序를 定하여 每年 各 100名씩 量 軍營에 나누어 配置하였다.

1789年(正祖 13)에 처음 지었고, 1794年(正祖 18) 左右에 翼亮을 增築하여 모두 62칸이나 되는 規模를 갖추었다.

남軍營 [ 編輯 ]

남軍營

남軍營(南軍營)은 北軍營과 같이 壯勇外營 親軍衛 200名이 살면서 지키는 建物이다. 남軍營은 신풍루를 마주보는 쪽에서 보면 左側에 位置하고 있다.

이 建物은 1789年(正祖 13年)에 처음 지어졌고, 1794年에 增築되었다.

書吏廳 [ 編輯 ]

書吏廳

書吏廳(書吏廳)은 署理들이 使用하는 建物이다. 서리란, 文書의 記錄 및 受領, 發給을 擔當하는 衙前이다. 裨將廳 앞에 位置해 있으며 南向이다. 예전의 金盜聽(禁盜廳)建物을 이청으로 쓰게 하고, 그 建物을 增築해서 使用하였다. 1795年 乙卯遠行 때는 水剌間으로 使用하기도 하였다.

裨將廳 [ 編輯 ]

裨將廳

悲壯은 觀察使나 節度使等 地方官이 데리고 다니던 幕僚로, 朝鮮 後期에는 防禦使를 겸한 守令까지 모두 비장을 거느리는 것을 관례화하여 民情 廉探을 시키기도 하였다. 裨將廳(婢將廳)은 火星 留守部의 裨將들이 使用하던 建物로 외정리度 앞에 있는 南向 建物이다.

元來는 1789年(正祖 13)에 세웠는데 1796年(正祖 20)에 書吏廳 建物을 修理하고 裨將廳으로 變更하여 使用하였다.

迷路限定 [ 編輯 ]

迷路限定

迷路限定(未老閒亭)은 行宮 後援(後苑)에 만든 亭子이다. 後援 西쪽 담안에 있었는데 迷路限定이라는 말은 '將來 늙어서 閑暇하게 쉴 亭子'라는 뜻이다. 노래黨과 함께 甲子年(1804)에 世子에게 讓位(讓位)하고 火星으로 가리라던 正祖의 뜻이 담긴 이름이다.

1790年(正祖 14)에 세워졌는데 1칸 6殼頂으로 '육면情(六面停)'이라고도 한다.

內包社 [ 編輯 ]

內包社

內包社(內鋪舍)는 行宮의 뒷담 안 왼쪽 기슭의 迷路限定의 北쪽 50報(59.4m)쯤 距離에 位置하였다. 높이는 7隻 5寸(2.32m)이다. 다만 溫突 1칸만을 놓았으며, 앞으로 半칸을 물려서 甓돌을 깔았다.

1796年(正祖 20) 9月 9日에 竣工되었다.

외정리소 [ 編輯 ]

외정리소

외정리소(外整理所)는 張差 1795年에 있을 乙卯遠行에서 치를 各種 行事를 準備하기 위하여 1794年 12月에 設置한 臨時 機關이었다. 華城 聖域이 끝난 後 외정리소라 명명하고 歷代 임금이 行次할 때 行事를 準備하는 官廳이 되었다. 처음의 整理소는 壯勇營 內營에 있었는데 1796年에 行宮이 完成되면서 有餘澤 앞에 외정리所를 세우고 '외정리衙門(外整理衙門)'이란 扁額을 달았다. 외정리社는 戶曹判書 가 兼任하는 것이 常禮였으나 火星에서는 火星 有數가 兼職하였다.

花翎戰 [ 編輯 ]

花翎戰
花翎戰 韻閑却
花翎戰 雲漢閣에 걸린 正祖의 御眞. 戎服(軍服)을 입고 있다. 原本은 韓國戰爭 때 釜山으로 옮기던 途中 紛失되었고, 現在 걸려 있는 것은 2005年에 새로 그린 想像圖이다.

史跡 第115號인 花翎戰(華寧殿)은 1801年(純祖 元年) 正祖大王의 뜻을 받들어 화성행궁 옆에 세운 建物로 正祖의 肖像畫를 모셔놓은 榮轉(影殿)이다. 榮典은 普通 祭祀를 지내기 위해 神位를 모신 祠堂과는 區別되는 建物로, 先王의 肖像畫를 모셔놓고 살아있을 때와 같이 追慕하던 곳이다. 火星에서 ‘火’字와 『詩經』의 ‘돌아가 父母에게 問安하리라[歸寧父母]’라는 句節에서 ‘嶺’字를 따서 이름 붙였다. 花翎戰은 正祖大王의 뜻을 받들어 儉素하면서도 品格 있게 만든 朝鮮時代의 代表的 榮轉이다.

寓話館 [ 編輯 ]

寓話館(于華館)은 화성행궁 장남헌 北쪽에 있었던 客舍 建物이다. 客舍는 王을 象徵하는 全敗를 奉安하는 空間으로, 地方官이 定期的으로 儀禮를 擧行하는 場所인 同時에 該當 地域을 訪問하는 官員의 宿所로 使用되었다. 大韓帝國 時期에 水原公立普通學校가 客舍 자리에 位置하였다. 이 學校의 後身인 신풍초등학교가 2013年에 光敎 新都市로 移轉하였으며, 2013年 現在 復元 工事가 進行中이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화성행궁 : 水原觀光 (HOME) → 水原華城 → 화성행궁” . 2018年 11月 8日에 確認함 .  
  2. “화성행궁 : 水原觀光 (HOME) > 水原華城 > 화성행궁” . 2019年 10月 29日에 確認함 .  
  3. “文化財廳考試制2007-36號(國家指定文化財[私的]指定)” . 大韓民國 官報. 2007年 7月 8日 . 2019年 10月 29日에 確認함 .  

參考 資料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