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폰 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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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폰 리스트

프란츠 폰 리스트 ( 獨逸語 : Franz von Liszt , 1851年 3月 2日 ~ 1919年 6月 21日 )은 獨逸 의 刑法學者이다. 헝가리 의 有名 作曲家 프란츠 리스트 와는 四寸 關係이다.

生涯 [ 編輯 ]

에서 태어나 빈 大學校 에서 法學을 專攻했다. 빈 大學校 時節에는 루돌프 폰 예링 의 影響을 깊이 받았으며, 1875年 그라츠 大學校 에서 〈僞證罪론〉( 獨逸語 : Meineid und falsches Zeugnis )으로 敎授 資格을 取得한 뒤 예링의 推薦으로 1879年 기센 大學校 敎授가 되었다.

1882年 마르부르크 大學校 로 옮긴 리스트는 그의 刑法思想의 根幹을 이룬 〈刑法에 있어서 目的史上〉( 獨逸語 : Der Zweckgedanken im Strafrecht )을 發表한다. 그는 刑罰의 目的은 法益의 保護이며, 法益의 ‘保護는 法益의 侵害를 手段으로 하는 것에 依해 正當化되며 이러한 刑罰은 目的의 達成을 위해 가장 적으면서도 有效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에, “正當한, 卽 올바른 刑罰은 必要한 刑罰”이고, “必要한 刑罰만이 올바른 것”’이라고 說破했다.

1889年 에는 벨기에 브뤼셀 大學校 의 敎授 아돌프 프린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大學校 의 敎授 半 하멜 과 協力하여 國際刑事學協會 를 設立하였다. 以後 國際刑事學協會는 여러 나라에 支部를 設置하고, 第1次 世界大戰 以前에는 會員이 1,500餘 名을 헤아렸지만 以後 第1次 世界大戰 으로 規模가 縮小되어 獨逸 및 오스트리아의 府會(部會)가 設置되었다가 나중에 獨逸刑法協會 가 設立되면서 解消되었다.

1889年 에는 할레 大學校 로 옮겼는데, 刑法 以外에 國際法 講義도 始作하였다. 이 時期에 學問的 硏究를 가장 活潑하게 펼친 리스트는, 1898年 에 펼친 講演에서 發表한 〈社會病理的 現象으로서의 犯罪〉( 獨逸語 : Das Verbrechen als Sozialpathologische Erscheinung )를 通해 ‘犯罪는 社會의 必然的인 現象이지만, 犯罪가 急激하게 增加한다면 이는 하나의 病理的 性格을 가지게 된다’고 主張했다. 이러한 犯罪의 原因으로는 經濟的 狀況, 勞動者의 處地의 惡化 等으로 ‘犯罪의 社會的 原因이 個人的 原因보다 매우 重要한 意義를 가진다’고 指摘했다. 그러나 當時에 急激하게 擴散되던 社會主義 와 關聯해서는, “現存 社會生活을 變革하는 것에 依하여 犯罪를 完全하게 世上에서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유토피아의 世界에 屬한다”고 指摘하고, “勞動階級의 모든 處地를 向上시키기 위하여 冷靜한, 그러나 目的意識的인 社會政策”이 “最善과 함께 가장 有效한 刑事政策”이라고 主張했다. 當時에는 比較的 急進的이었던 이러한 생각은 當時 舊派의 强한 反撥을 부르기도 했다.

1899年 베를린 大學校 로 옮긴 리스트는 就任 講演 〈刑法學의 任務와 方法〉( 獨逸語 : Die Aufgaben und Methode der Strafrechtswissenschaft )에서 新派 刑法學의 意味와 根據를 분명하게 하고, 刑法學이 因果科學的 硏究로서의 犯罪學科 刑罰學 및 刑事政策學 硏究를 必要로 하는 理由를 論證하였다. 以後 리스트는 刑法과 國際法, 法哲學 等을 講義하였다.

1917年 에 66歲가 된 리스트는 敎授職을 떠나 刑事學 硏究所의 維持에 힘을 쏟고, 藏書를 寄贈한 뒤 第하임 에 隱居했다. 以後 1919年 에 重病으로 世上을 떠났다.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