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 슈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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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하인리히 슈나이스 ( 獨逸語 : Paul Heinrich Schneiss , 1933年 3月 15日 ~ 2022年 2月 11日 )는 獨逸人 牧師이다. 1933年, 中國 湖南省 창사시 에서 宣敎師인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났다. 獨逸 하이델베르크 大學 에서 神學을 工夫하였고, 1958年 日本으로 派遣되는 等 東아시아 宣敎師로 活動했다. 1970年부터는 獨逸의 進步的 宣敎團體人 東아시아宣敎會(DOAM) 所屬이 되어 東아시아 關聯 活動을 繼續하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韓國에도 드나들며 하이델베르크 大學의 恩師인 한 敎授가 紹介해준 그의 親舊인 韓國人 牧師 안병무 等과 交流하며 親分을 쌓게 된다. 수유리의 크리스천 아카데미 에서 안병무 , 서남동 , 강원용 等과 어울리며 韓國敎會史, 韓國의 民主化 運動 現況을 接한다.

1972年 維新獨裁 의 始作, 1973年의 金大中 拉致 等을 거치며 韓國의 親舊들 걱정에 거듭 韓國을 訪問했고, 이무렵부터 入國禁止된 海外 滯留 人士들과 國內 民主化運動 人士들 사이의 메신저 役割을 하기도 했다. 特히 1975年부터 日本의 時事月刊誌 < 사카이 >에 'TK生'이라는 筆名으로 連載된 ' 南韓으로부터의 便紙 '의 祕密 原著者인 지명관 敎授(當時 日本 滯留)에게 새 資料를 傳達하며 執筆을 돕는 役割을 맡았다. '南韓으로부터의 便紙'는 그렇게 1988年까지 15年 동안 連載되는 동안 原著者가 徹底히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1]

南韓 當局은 슈나이스 牧師의 이런 메신저 役割을 눈치채고 김대중 氏의 大法院 裁判( 明洞 3·1 民主 救國宣言 事件 裁判) 直後인 1978年 12月 홍콩으로 强制出國시킨 뒤 入國禁止(페르소나 논 그라타)시킨다. 그 後 그의 아내인 起擾코 女史가 메신저 役割을 自請했고, 아들, 딸까지 나서서 1984年까지 約 200回의 서울 訪問이 이뤄졌으며, 그때마다 消息들이 오갔다.

1980年 5月 光州에서 일어난 5.18民主化運動 當時에는 서울에 있던 夫人 起擾코 사쿠라이 女史가 直接 目擊한 軍部隊 移動 消息을 日本에서 들은 後, 當時 獨逸國營放送 東京特派員이던 위르겐 힌츠페터 를 光州로 派遣해 전두환 軍事獨裁政權의 蠻行을 생생하게 報道하여 世界의 良心을 깨우는 데 一助하였다. 이에 對한 功勞를 認定받아 2011年 五月어머니像(五月어머니會 主觀)을 受賞하기에 이른다.

2012年 7~8月에는 濟州 강정마을 과 光州를 訪問하고 " 世界知識人 江汀平和宣言 "에도 參與하였다. [2]

2022年 2月 11日, 獨逸에서 別世하였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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