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주 루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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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루오
身上情報
出生
死亡
職業 學藝士 , 畫家 , 그래픽 藝術家 , 揷畵가 , 陶藝家 , 데생畫가
스승 귀스타브 모로
思潮 表現主義 , 象徵主義
受賞 레지옹 도뇌르 슈발리에
Officer of the Legion of Honour
코網되르 드 라 레지옹 도뇌르
Knight Commander of the Order of St. Gregory the Great
主要 作品
影響

조르주 루오 ( 프랑스語 : Georges-Henri Rouault , 1871年 5月 27日 1958年 2月 13日 )는 프랑스 畫家 , 版畫家 이다.

生涯 [ 編輯 ]

조르주 루오는 14歲 때에 글라스 그림을 그리는 攻防(工房)에 見習工으로 들어갔다. 거기에서 中世 스테인드글라스의 復元 手法을 배웠으나 畫家를 志望하여 4年 後에 美術學校에 入學, 抛브의 스승인 모로 의 知友를 얻는 바가 되었다. 처음에는 모로의 畫風을 따랐으나, 스스로 獨自的인 世界를 開拓해 나갔다.

作品 世界 [ 編輯 ]

모로는 藝術의 스승 以上으로 精神的인 先輩이며 때로는 同志나 親舊로서 마음의 支柱가 되었다. 이것은 모로의 事後(死後)(1898)에 많은 弟子 가운데서 뽑혀 루오가 ' 모로 美術館 '의 館長이 되어 스승의 遺作을 管理하는 地位에 오랜 期間 머물렀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모로는 루오가 成長한 베르빌의 住民들에 對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들은 本質的으로 어둡고 寡默한 宗敎藝術의 愛好者이다.' 이러한 指摘은 루오의 將來를 멀리 豫見하고 있었다. 모로의 事後 루오의 視野에는 抛랭 로트렉 都彌에 가 뚜렷하게 浮刻되었고, 모두가 社會 批判의 傾向이 濃厚한 畫家들이었다. 또한 가톨릭의 文筆家 위스망스 레온 블르와 와의 校友는 루오의 宗敎的인 人生觀에 決定的인 契機가 되었다.

가난하고 虐待받는 者들에 對한 共感, 富者나 權力者를 向한 憤怒는 루오에 있어서의 깊은 宗敎的인 感情에서 由來한다. "假令 倡夫를 그리는 境遇 루오는 이 罪많은 女人이 풍기는 戰慄할 香氣에 取하는 것이 아니고 그女의 罪에 울고 그女와 더불어 괴로와하는 것이다(美術史家 드리發)." 世代的인 觀點에서 본다면 루오는 포비슴의 渦中에 있지만 밝게 삶을 謳歌하는 그들과는 大戟(對極)의 位置에 있었다. 루오의 信仰과 그에 立脚한 藝術觀은 單刀直入的(單刀直入的)이다.

그는 "나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도,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도 믿지 않는다. 내가 믿는 것은 다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 卽 느낄 수 있는 것뿐이다." 그는 이처럼 非合理的 世界에서의 啓示(啓示)를 어둔 밤 속에서는 빛나는 별을 認定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藝術的 探究는 完成에 到達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完成해 낼 수 없는 것의 極(極)을 다하기 위하여 行해진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참다운 藝術은 熱烈한 告白을 吐露할 수 있는 까닭에 價値를 갖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暗夜(暗夜)의 絶叫이며 自己도 모르게 새어나오는 울음소리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靈魂의 極點에 서서 루오는 斷言하기를 '救世主로서 나는 十字架의 그리스도를 믿는다'라고 했다. 이 동안의 消息을 如實히 말해 주는 것으로 版畫集 <微細레레>(1948년 發表)가 있다. 1913年 루오는 火傷(畵商) 볼라르에게 認定을 받아 아틀리에를 제공받음과 同時에 일정한 金額으로 全作品을 引受받게 되었다. 1917年에는 亦是 볼라르와의 契約으로 한때 油彩畫를 中止하고 版畫에만 專念하였으나, 이것이 一般 사람에게 公開된 것은 第2次 世界大戰 以後의 일이었다. 이런 것에서도 그가 時流(時流)에서 멀어져 가는 한 要因이 되기도 하였다.

더욱이 그는 容易하게 完成을 認定하지 않는 畫家이어서, 獨特한 에나멜을 漆한 것과 같은 重厚한 마티에르와 濃密(濃密)韓 色彩로 덮인 作品으로 完成이 될 때까지는 相當히 긴 歲月이 所要되었다. 1948年 볼라르의 遺産 속에 들어가 있던 約 3百點 以上의 作品을 裁判에 依하여 되돌려받았을 때에도, 벌써 이것들을 마음대로 加筆 修正할 餘力이 없다고 하여 아낌없이 태워버렸던 것이다. 版畫 때문에 中斷된 油彩畫의 製作을 다시 始作한 때는 1929年이며, 이 때부터 그의 名聲은 높아졌으나 以後 87歲의 生涯를 마칠 때까지 루오는 現代 畫壇에 超然한 성화상(聖畵像)의 畫家이기도 하였다.

그는 검고 굵은 線을 즐겨 썼는데, 그것이 色彩와 어울려서 宗敎的인 깊이를 느끼게 한다. 그의 그림 素材는 거의 모두가 法官·娼女·어릿광대·基督敎人 等의 人物과 都市의 뒷골목 風景으로 限定되어 있다. 作品으로 <郊外의 크리스트> <裁判> <붉은 코의 어릿광대> <베로니카> 等이 있고, 版畫에서도 뛰어난 作品을 많이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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