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韓民國 時局淨化運動本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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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民國 時局淨化運動本部 (時局湞化運動本部)는 大韓民國 의 政府 直屬 特殊 情報機關, 特別 行政機關이다. 1961年 3月 2日 大韓民國 總理 場面 (張勉)李 特別 情報機關 設置 建議에 따라 設置한 機關이다. 1961年 5月 20日 中央情報部 의 設置로 廢止되었다.

1961年 봄부터 場面 總理는 十餘 次例나 쿠데타 企圖 情報를 보고 받거나 入手했다. [1] 그래서 겨우 1961年 3月 이 되어서야 時局 淨化 運動 本部라는 直屬 情報 機關이 設置 되었지만 별다른 役割은 못했다. [1] 略稱은 時局정화단 (時局湞化團)이다.

沿革 [ 編輯 ]

  • 1961年 3月 2日 - 國務總理 直屬 特需情報機關 時局정화단을 新設(初代 本部長 이귀영).
  • 1961年 5月 20日 - 時國定化本部를 廢止하고 中央情報部를 新設.

創設 背景 [ 編輯 ]

1960年 以後 民主黨 黨과 政府에서는 特別 情報機關의 設置의 必要性을 國務總理 場面 에게 여러番 建議하였고, 場面은 李承晩 의 特務隊長 김창룡 의 存在를 指摘하며 表現의 自由 保障을 理由로 拒絶하였다. 그러나 윤치영 李承晩 側近 勢力의 쿠데타 企圖, 이범석 族靑 系列, 朴正熙 等 軍部 系列의 쿠데타 企圖 情報가 擴散되면서 場面 總理는 特務情報機關의 設置를 決心, 1961年 3月 2日 時國定化運動本部를 發足한다.

時國定化運動本部는 外部에 徹底하게 祕密로 붙여졌지만 그 存在는 徐徐히 알려지기 始作했다. 時局정화단의 存在가 本格的으로 알려진 것은 1990年代 以後 學者들의 硏究에 依해서였다.

活動 [ 編輯 ]

1960年부터 各界 各層에서 쿠데타 情報가 들어왔고, 革新 勢力 或은 學生運動系의 데모 祈禱도 여러 次例 入手되었다. 時局정화단은 이들의 內亂 計劃에 對한 情報 入手와 解體, 情勢 報告, 美國 日本 을 비롯한 海外 同情과 北韓 , 日本 , 中華人民共和國 , 中華民國 等 隣接 國家의 움직임에 對한 實時間 對應 및 報告 等의 活動을 하였다. 職員은 別途로 採用하였지만 徹底하게 祕密에 붙여졌으며, 그밖에 國內外의 여러 活動, 職員, 職位, 職責, 給與 等에 對한 것은 對內外的으로 祕密에 부쳐졌다.

1961年 3月 이 되어서야 時局 淨化 運動 本部 라는 政府 直屬 情報機關이 設置 되었지만 별다른 役割은 못했다. 1961年 봄부터 張 總理는 10餘 次例나 쿠데타 情報를 報告받거나 入手했다. [2] 그러나 單 한次例도 진지 하게 對應策을 마련한 적이 없다. 政權 次元의 非常 對策을 세우지 도 않았고 容疑者 들에 對한 徹底한 調査 도 없었다. [2]

歷代 本部·副本部長 [ 編輯 ]

本部長 [ 編輯 ]

共和國 臺數 이름 任期 出身地 出身學校 備考
第 2 共和國 招待 이귀영 (李貴永) 1961年 3月 2日 ~ 1963年 5月 18日 總警&서울市 市警局長&國務總理 祕書官&總理室 情報特別補佐官

論難 [ 編輯 ]

學生 데모 買收 論難 [ 編輯 ]

時國定化運動本部에서 1961年 4月 19日 로 計劃된 學生들의 데모를 買收했다는 疑惑이 있다. [3] 朴正熙 等을 비롯한 軍人들은 4月 19日 4·19 依據 1周年 記念式 때 一部 學生들이 政府에 對한 데모를 準備할 때, 이를 鎭壓한다는 名分으로 쿠데타를 祈禱하였다.

4月 19日 學生들이 데모하지 않고 조용히 넘어가자 朴正熙 等은 唐慌한다. 軍部 쿠데타 모임인 革命 要員들은 4·19 1周年 되는 날로 巨事日을 定했지만 所聞에 依하면 時局 淨化 運動 本部에서 學生들 을 돈으로 買收하여 데모를 못하도록 막았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3] 朴正熙 의 計劃대로라면 그날 學生들의 大大的인 示威가 發生해야 했고, 群衆 暴動에 자연스럽게 軍部가 浸透해야 擧事에 成功할 수 있었다. [3] 4·19 1周年은 아무 일이 없었고, 쿠데타를 祈禱하려던 軍部는 一時的인 恐慌狀態에 빠졌다. 時局정화단에서 學生運動圈들을 돈으로 買收했다는 疑惑, 金額과 內譯 等은 公開되지 않았다.

職員의 獵官 運動 論難 [ 編輯 ]

時局정화단 職員이 1961年 當時 朴正熙 의 使嗾를 받은 김형욱 에게 買收되어 論難이 되기도 했다. 김형욱 에 依하면 詩國定化運動本部의 實力者인 朴某에게 賂物을 주었다고 證言하였다. 朴正熙의 指示 로 나는 陸軍 情報學校 校長 이었던 한웅진 陸軍 防諜部隊(CIC) 大將으로 任命하고 革命 計劃 遂行 에 따르는 前 情報를 主管시키려고 試圖했으나 失敗하기도 했다 [4] 한다.

김형욱 에 依하면 '없는 돈을 만들어 쑤셔넣어 주면서까지 한웅진의 獵官 運動을 벌였으나 그後 問題 의 朴이 時局 淨化 運動 본 브歲 서 밀려나 혓탕 을 치고 만 것이다 [5] '라고 하였다. 當時 民主黨 內閣 의 總理直屬 情報機關 格이던 詩國定化運動本部의 實力者 朴이라는 사람을 만나, 없는 돈을 만들어 쑤셔 넣어 주면서까지 한웅진의 獵官運動을 벌였으나 그 後 問題의 朴이 時國定化 運動本部에서 밀려나 허탕을 치고 만 것이었다. [4] 賂物을 받고 쿠데타 企圖를 위한 김형욱 의 獵官運動을 봐준 代價로 이 職員은 他 機關으로 轉出되고 말았다.

기타 [ 編輯 ]

時局정화단의 樹立은 쿠데타에 對한 場面 의 對應 意志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뒤늦은 對應이라는 評價도 있다. 自由黨 때 存續되어 오던 많은 情報機關 이 민주당 政府 에 依해 整理 廢止되었고, 그나마 남은 機關 조차 제대로 機能 을 發揮 하지 못했으며, 搜査 分野 警察이 大部分 解職되어 機能이 弱化 된데다가 情報를 入手해도 제대로 보고 하지도 않았다. [6] 1961年 3月 總理 直屬 情報 機關으로 時局 淨化 運動 本部를 設置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으며, 政治的 介入主義者 들은 政府의 暴動 鎭壓 計劃에 便乘하여 쿠데타를 企圖할 程度로 緻密해져 가고 있었다. [6]

各州 [ 編輯 ]

  1. 정윤재, 《政治 리더십과 韓國 民主主義》(나남출판, 2003) 274페이지
  2. 정윤재, 심지연 外, 《張勉?윤보선?朴正熙:1960年代初 主要 政治 指導者 硏究》 (백산서당, 2001) 83페이지
  3. 김교식, 《다큐멘터리 朴正熙 2》 (平民史, 1990) 114페이지
  4. 김형욱, 《權力課陰謀: 前 KCIA 部長 김형욱의 手記》(뉴코리아타임스사, 1982) 23페이지
  5. 김형욱, 박사월, 《김형욱 證言:革命과 偶像 第1部》 (獨立新聞社, 1982) 34페이지
  6. 한용원, 《韓國의 軍部政治》 (대왕사, 1993) 208페이지

같이 보기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