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성 (建築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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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성
金大城
新羅 重視
在任 745年∼750年
이름
大聲(大城)
別號 대정(大正), 김대정(金大正)
身上情報
出生日 700年
出生地 新羅
死亡日 774年
死亡地 未詳
國籍 新羅
性別 男性
王朝 新羅
家門 金氏
父親 김문량 (推定)
母親 慶弔(慶祖)

김대성 (金大城, 700年 ~ 775年 1月 8日 (陰曆 774年 12月 2日 [1] ))은 新羅 경덕왕 時代의 宰相·建築家·彫刻家이다.

生涯 [ 編輯 ]

金大城은 新羅의 都邑地인 徐羅伐 (現在의 大韓民國 慶尙北道 慶州市 )에서 新羅 時代에 重視(中侍)를 歷任한 宰相인 김문량(金文亮, 生年 未詳 ~ 711年)의 아들로 태어났다. 745年부터 749年까지 伊飡 (伊飡)의 重試(中侍)를 지냈다. 751年부터 774年까지 父母의 長壽와 國家의 安寧을 위하여 佛國寺 (佛國寺)·石佛寺(石佛寺, 現在의 石窟庵 (石窟庵))·章搜査(長壽寺) 等을 創建했다고 한다. 一然 의 《 三國遺事 》에서는 金大城에 關한 說話가 傳한다.

金大城과 關聯된 說話 [ 編輯 ]

金大城은 慶州 모량리(牟梁里)에 살고 있던 가난한 女人인 慶弔(慶祖)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머리가 크고 城처럼 넓다고 해서 이름을 '대성'(大城)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慶弔는 집안이 가난해서 아들을 키울 수가 없었기 때문에 金大城은 腹案(福安)이라는 富者가 살고 있던 집에서 품팔이를 했고 腹案으로부터 밭을 주면서 살았다고 한다.

佛敎徒였던 金大城은 興輪寺 (興輪寺)의 점개(漸開) 스님으로부터 "布施(布施)를 좋아하면 恒常 天神(天神)의 保護를 받게 되고 하나를 布施하면 萬 倍의 利益을 얻어서 安樂하고 長壽하게 되리라."라는 말씀을 듣게 된다. 어느날 점개 스님이 腹案이 살고 있던 집에 施主를 받으러 왔는데 腹案은 점개 스님에게 베 50疋을 부처님에게 바치겠다는 말씀을 傳達했다. 이에 점개 스님은 腹案이 큰 福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傳達했고 金大城은 품팔이를 通해 腹案으로부터 받았던 밭을 부처님에게 바치게 된다.

金大城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죽고 말았지만 하늘에서 "모량리의 대성이가 只今 너의 집에 還生하리라."라는 소리가 내려오면서 金文亮의 집에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金文亮의 아내가 아들을 낳았는데 아들의 왼손에는 '대성'(大城)이라는 글字가 새겨진 金빛 쇠붙이를 쥐고 있었다. 이에 金文亮은 아들의 이름을 '대성'(大城)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어느 날 金大城은 吐含山 에서 곰을 사냥한 다음에 山 밑에 位置한 마을에서 잠을 자고 있었는데 꿈 속에서 鬼神으로 變한 곰이 金大城에게 "金大城이 곰을 죽였으니 곰도 金大城을 잡아먹으리라."라는 怨望 섞인 소리를 傳達하게 된다. 이에 놀란 金大城은 곰에게 容恕를 빌었고 곰은 金大城에게 自身을 위한 査察을 지어줄 것을 付託했다고 한다. 잠에서 깨어난 金大城은 사냥을 멈추고 佛敎의 가르침을 따르기로 決心했고 곰을 사냥했던 자리에 장수사를 세웠다고 한다. 金大城은 現世의 父母를 위해 佛國寺를 建立했고 傳貰의 父母를 위해 石佛寺를 建立했다고 한다.

各州 [ 編輯 ]

  1. 《三國遺事》 卷5, 〈肴膳〉, 大聲孝二世父母 新聞代

外部 링크 [ 編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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