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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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涯 및 殺害 [ 編輯 ]

김달하는 平北 義州 出身 日帝 密偵이다. 김달하는 外衙門(統理衙門) 注射 出身으로 1906年 官署地方 出身들을 中心으로 서울에서 서우(西友)學會가 組織되자 參與했다. 愛國啓蒙運動 團體인 西北學會 總務를 지냈는데, 安昌浩, 李甲, 박은식, 李東輝 等이 主導한 西北學會는 旣存의 서우學會와 漢北興學會를 統合해 創設했다. 會員은 西北 사람으로 國權 回復을 願하는 2300~2500名이 參與했다. [1]

大韓帝國이 滅亡하자 中國으로 건너가 1913年 朝鮮總督府 密偵이 돼 北京에서 日帝 앞잡이 노릇을 했다. 그는 初期 中華民國 總理를 지내기도 한 北洋軍閥의 巨頭 段祺瑞의 祕書로 있으면서 또 다른 高級 密偵 鄭雲復(初代 西北學會 會長)과 連繫해 10餘年間 暗約하면서 많은 靑年들에게 被害를 입히고 있었다. 그는 滿洲와 中國에 日帝 密偵으로 活動하면서 獨立運動家와 獨立團體에 接近하여 情報를 캐내어 日帝에 알려주거나 密告하고, 이들을 懷柔하는 反民族 行爲를 했다. 김달하는 北京에서 獨立運動家들에게 接近하여 수많은 情報를 빼돌려 同志와 民族을 팔아먹고 革命運動을 破壞하던 人物이다. 심산 金昌淑과 友黨 李會榮 等에 接近하려다 密偵임이 드러났다. 1925年 3月30日 박용만의 歸順工作을 試圖한 嫌疑로 獨立運動 團體인 다물단과 義烈團 團員들에 依해 處斷됐다.

김달하의 殺害에는 義烈團의 이종희와 이기환, 다물단의 최주영과 이규준이 함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달하가 處斷된 直後 동아일보는 “密偵, 畢竟 被殺”(1925年 4月4日)이라는 題目으로 이 事件을 報道했다.일제 致賀 抗日獨立運動家들에게 密偵의 存在는 公開的인 彈壓과 討伐 못지않은 實質的 威脅이었다. 極限 環境에서 同志조차 믿지 못하고 서로 疑心하게 만든다는 點에서 日帝 高等警察보다 더 惡辣했다. 抗日 獨立活動家들에겐 더 큰 憎惡와 輕蔑의 對象이었다. 김달하는 北京에서 獨立活動家들에게 接近하여 수많은 情報를 빼돌려 同志와 民族을 팔아먹고 革命運動을 破壞했던 人物이다. 그러다가 義烈團 團員들에 依해 悲慘하게 處斷된 것으로 歷史는 記錄하고 있다.

다물단(團長 황익수)은 親日派와 密偵 等을 處斷하거나 獨立軍資金 募金活動을 하는 等 義烈鬪爭 團體로 신채호·유자명이 關與한 無政府主義 性向의 組織이었다. 다물단 이라는 組織 名稱에는 勇敢·前進·快斷 等의 意味와 ‘빼앗긴 것을 되찾는다’는 意味가 담겨 있는데, 1931年 逮捕된 다물단 團員 이우민의 一齊 新聞記錄에 따르면 “입을 다물고 實行한다”는 意味도 담겨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

最近 KBS에서 "學界의 硏究와 討論이 좀 더 必要한 部分"이지만 "學界의 討論과는 別個로 '大衆的 觀點'에서 分明한 事實"李 存在하며 "歷史學界의 眞摯한 討論과 國家報勳處의 綿密한 徐薰 審査도 當然히 必要하겠지만 그와 別途로 言論의 問題 提起"라고 밝힌 放送 [3] 에 依해 放送된 內容에 依하면 김규흥 이 日帝에 보낸 便紙에서 活動費가 3萬엔으로 김규흥보다 많았음이 드러났다. KBS는 2019年 8月 20日 放送된 '시사기획 窓' 臨時政府樹立 100周年 特輯密偵 2部作 中 '密偵 2部 - 臨時政府를 破壞하라'에서 김규흥의 資料를 公開했다. 그 便紙에서는 된 '김달하'도 여러 次例 登場한다.

"김달하와 함께 各地의 獨立運動家들을 北京에 모아서 朝鮮으로 돌아가려는 計策을 갖고 있습니다. 活動費로 김달하에게는 3萬 엔, 저에게도 2萬 엔을 주시길 바랍니다."

密偵 김달하 와의 緊密한 關係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런 活動이 所聞났는지, 自身이 疑心받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함께 傳한다.

"上海에 있는 團員들로 인해 때때로 强迫 當하고 있습니다. 이런 祕密活動이 드러나 難處한 狀況입니다. 그래서 暫時 다른 곳으로 避身합니다."

김규흥의 親筆 便紙로, 韓國에 公開되는 건 처음이다. 1919年 上海 臨時政府가 樹立되자 日帝는 獨立運動家를 密偵으로 包攝해 臨時政府를 안에서부터 무너뜨리려고 했다. 우쓰노미야 다로 朝鮮軍 司令官이 中心 人物이었다. 김규흥과 朝鮮軍司令官 우쓰노미야의 이 같은 不適切한 만남은, 우쓰노미야가 남긴 日記를 통해 世上에 알려졌고 그동안 學界에서도 이를 根據로 김규흥의 親日 論難이 있었다. [4]

家族 및 東歐學院 [ 編輯 ]

김달하 後孫은 現在 서울에서 동구여중과 東區마케팅고 等을 運營하는 東區學院 乙 所有하고 있다.

金活蘭의 언니 愛蘭과 喪妻한 김달하가 結婚했다. 當時 김달하는 두 番의 傷處를 하고 5名의 아들이 있었다. 김달하의 아내가 金活蘭 의 언니 김애란이고, 김달하와 김애란의 사위가 조석봉이다. 조석봉과 金活蘭은 조카사위와 妻姨母의 關係다. 조석봉과 夫人 김정옥(김달하와 김애란의 딸)의 아들이 조웅이고, 며느리가 최길자이다. 東區마케팅고 招待 設立者 中 한 사람이 金活蘭인데 以後 그는 理事長도 歷任했다. 金活蘭의 號가 優越(又月)인데, 이 號를 지어준 김달하는 그의 兄父(金活蘭 언니의 男便)이다. 東區學院의 또 다른 設立者이자 初代 校長인 조석鳳이 이들의 사위이고, 現 조웅 理事長이 조석봉의 아들이니 조웅은 김달하의 外孫子이다.

동구여중과 東區마케팅고 等을 運營하는 東區學院은 우리나라의 典型的인 私學法人이다. 東區마케팅고는 서울特別市 성북구 성북동에 있는 私立 專門系 女子高等學校다. 東區學院을 통해 私立學校를 보면 우리나라 私學의 現實이 보이고, 아울러 敎育部의 意見 提出이 얼마나 無責任했는지 알 수 있다. 東區學院은 1942年 朝鮮總督府로부터 設立認可를 받았다. 東區學院의 設立을 主導한 사람은 조석봉과 金活蘭이다.

조석鳳이 36年(1942~1978), 아들 조웅이 27年(1978~2005), 2臺가 63年 동안 東區마케팅고 校長을 歷任했다. 조석봉의 夫人 김정옥은 12年(1969~1981), 조웅의 否認 최길자는 8年(1994~2002) 동안 동구여중 校長을 歷任했다. 최길자는 現在 東區學院의 理事長이다. 最初 東區學院의 學校 建物과 敷地는 1941年에 미감리敎會 朝鮮宣敎部 維持財團으로부터 無償使用을 承諾받은 것이다. 解放 後 1950年 財團法人의 設立認可 當時에도 이들의 財政 出捐金 寄與度는 微微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성북동 一帶 38,000坪의 校誌는 敵産을 拂下받은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私學族閥을 이루고 代를 이어가며 國家 稅金으로 學校를 運營하며 온갖 專橫을 저질러 온 것이다.

總督府는 太平洋戰爭 勃發 直後 朝鮮徵兵令 施行을 앞둔 1942年에 學校 設立을 認可했다. 그해 代表的인 親日雜誌 ‘趙匡’은 當時의 5個 女學校 校長들을 모아 ‘徵兵令과 女子敎育’이라는 座談會를 열었다. 조석봉을 비롯한 校長들은 徵兵制 實施에 맞춰 ‘軍國(君國)의 어머니’ 같은 冊을 女學生들에게 積極的으로 읽히고, 軍人의 아내와 어머니로 女性을 敎育할 方法을 摸索해야 한다며 意氣投合했다.

金活蘭은 1941年 臨戰保國團 決戰否認大會에서 ‘女性의 武裝’, 1942年 싱가포르 攻略 大講演會에서는 ‘臺동아건설과 우리 準備’라는 主題로 講演했다. 그리고 여러 雜誌에 ‘徵兵制와 半島女性의 覺悟’, ‘뒷일은 우리가’, ‘男子에 지지 않게 皇國 女性으로서 使命을 完遂’ 等의 글을 發表하며 朝鮮 民衆들에게 日帝의 侵略 戰爭에 積極 參與할 것을 活潑하게 慫慂하였다. [5] [6]

各州 [ 編輯 ]

  1. “大韓帝國의 愛國啓蒙運動 터전…解放 以後 元祖 大學路” . 한겨레. 2018.10.25.  
  2. “[3·1 運動 100周年 年中企劃-獨立運動家 列傳 <삶과 넋> ⑦] 敎師 出身의 다물단 團員 최주영” . 每日勞動뉴스. 2019.04.01. 2020年 8月 7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9年 8月 24日에 確認함 .  
  3. 이재석 이세중 강민아, 2020, 密偵, 우리 안의 敵, 知識너머, 198~199쪽. 이들은 KBS 取材陣 當事者들이다.
  4. ““臨時政府를 破壞하라”…집요한 密偵 工作” . KBS. 2019.08.19.  
  5. “[권종현의 敎育希望] 私學法人이 懲戒權을 濫用해도 어쩔 수 없다는 敎育部?” . 民衆의소리. 2019年 7月 24日. 2019年 8月 24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9年 8月 24日에 確認함 .  
  6. “3代째 族閥體制 學校에 드리운 '親日' 그림자” . 오마이뉴스. 2014.08.25.